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 정선례
설 지나고 언 땅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해마다 이맘때면 하는 일이 있다. 관리기로 골을 내고 두둑을 높이 올려 감자를 심는다. 이불처럼 멀칭으로 보온해 줬더니 봄비와 햇살에 새싹이 터서 올림픽 금메달 딴 역기 선수인 듯이 비닐을 힘껏 들어 올렸다. 비닐을 터서 감자 싹을 위로 내고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북을 돋아줬다. 요즘 감자알이 굵어지는지 싹이 하루가 다르게 무성하다. 감자밭에서 고랑의 풀을 매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린다. 흙 묻을까 봐 비닐봉지에 싸서 가방에 넣어 어깨에 메었더니 꺼내느라 한참이 걸린다.
ㅇㅇ엄마 쪽파랑 열무 뽑아 가소” 이웃집 아짐에게 온 전화다. 텃밭에서 가꾸는 채소는 대량 재배가 아니어서 자급자족하고 남는 양은 주변에 나눈다. 이렇듯 밭은 보물창고나 마찬가지다. 생선과 고기만 살 정도로 밭에는 곡식과 채소, 과일이 계절에 따라 수확해서 식재료가 풍부하다.
농촌에서는 혼자서는 살기 어렵다. 이웃과 품앗이하며 서로 도와야 일도 쉽고 제때 끝낼 수 있다. 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모판에 볍씨 파종할 때부터 여러 손이 필요하다. 기계에 빈 상자를 넣기 시작하면 볍씨가 뿌려진 흙에 볍씨가 흘러나와 덮어진다.쉴 새 없이 밀려나오는 모판을 날라다 반듯하게 한 줄 쌓고, 비닐로 덮는 걸 반복한다. 말이 쉽지, 숙련된 농부 대여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야 해낼 수 있다. 그렇게 사나흘 후 볍씨가 하얗게 싹이 트면 마당이나 하우스에 모판을 널고 날마다 물을 준다. 논으로 옮겨 물을 대 줘야 모가 튼튼하게 잘 큰다.
봄, 가을 논일뿐만이 아니라 들판에서 곤포 사일리지 일명 공룡알을 실어 나를 때도 그렇다. 한겨울 눈 속에서도 푸르게 자란 사료용 풀과 청보리, 가을의 볕짚까지. 하얀 곤포로 감아 놓은 축산용 사일리지로, 아이들이 마시멜로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봄에는 논에서 실어 내야 물을 잡을 수 있다. 논갈이를 해서 얼른 벼를 심어야 가을에 풀과 보리, 귀리 따위를 이모작할 수 있다. 하늘이 절반은 짓는다는 농사는 특히 심거나 수확할 때는 날씨가 매우 중요하다.
농번기에만 이웃이 소중할까? 몇 년 전 남편은 일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퇴비장 옆 큰 나무가 가지를 무성히 뻗어 와서, 다가오는 태풍에 퇴비장 지붕을 덮칠 거 같았다. 기계톱으로 나무를 정리하다가 굵은 나무둥치가 넘어지며 발목을 그만 덮쳐 버렸다. 커다란 통나무가 발목을 누르고 있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었다. 쓰러진 채로 100미터 떨어진 집으로 전화했지만, 텔레비전 소리에 평상에 둔 휴대폰 벨소리도, 고함도 들리지 않았다. 발목이 바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마을 형님과 통화가 되어 곧장 달려와서 남편을 구해 냈다. 시골에서는 피를 나눈 친척이 아니어도 선후배는 형님 동생으로 지내서 호칭이 시숙님, 제수씨 형수님으로 통한다.
어려운 일에 이웃이 필요하다면, 즐거울 때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농사가 마무리되고 늦가을 바람이 차가워지면 겨우내 먹을 김장을 한다. 이웃 사람 없는 김장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쌓아 놓은 배추를 절이고, 옮기고, 양념하고, 꼼꼼하게 속을 넣고 통에 담고, 뒷설거지까지 마친다. 나는 바쁜 중에도 가마솥에 팔뚝만 한 통삼겹살을 생강 대파 된장 넣고 삶았다. 갓 담근 김치 올리고 막걸리까지 따라 낸다. 혼자 사는 분들의 지하수 모터가 고장 나서 물이 안 나오면 이웃이 부속을 사와 고쳐 주고 이것저것 필요한 게 있으면 서로 빌려 준다. 고장 잘 나는 농기계 손보는 방법을 소개하고, 억세게 살아나는 잡초 잡는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한다. 면사무소에 신청 할 보조금 정보도 나누며 농한기를 보낸다.
요즘 농촌 경제는 적자다. 새 정부가 집권하고부터 사료값은 해마다 오르는데 소값은 바닥을 치고 있다. 소값이 평균치는 나와줘야 농촌에서는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는데 걱정이다. 대통령과 농림수산부는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이나 하고 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우리 정부는 농촌 현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 왜냐면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어서다. 농촌은 생활여건이 부족하다. 교통도 불편하고 도시에 비해 대형마트 접근성이 낮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가 어렵다. 그밖에 편의시설이 턱없이 부족해서 젊은이들이 농촌거주를 기피하는 이유다. 농촌이 살아남도록 정부에서 좋은 정책을 많이 내놨으면 좋겠다. 지역 소멸은 결국 먼 훗날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다. 농촌을 살리려는 정부의 의지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농한기인 겨울을 제외하고는 눈만 뜨면 쪼그리고 앉아 풀을 매야 하는것도 힘들다. 또한 집 주변을 말끔하게 유지하려면 오며 가며 맨손으로라도 보이는 대로 풀을 뽑아야 한다. 손톱 밑이 늘 까매서 외출할 때면 매니큐어를 임시방편으로 바르고 나가기도 한다. 농번기가 돌아오면 “농사도 다른 일처럼 열두 달로 나눠서 할 수 있으면 덜 바쁠 텐데”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 농촌에서는 밭이 많으면 여자들 고생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노동이 아닌 즐거움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웃이다. 일의 능률도 오르고 적기에 심거나 가꾸고 수확을 할 수 있어서 품앗이를 한다. 언제라도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 주는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차 한 잔은 소소한 행복이다. 멀리서 사는 친척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농번기에 더욱 소중하다. 부족한 것을 서로 채우고 나누며 살아가는 이곳이 천국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