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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고사 국보 보물 문화재 인디아나존스들 36회~39회 [한국 고고학 70년 발굴 현장 회고]
36.함안 말이산고분 - 신문배달 소년, 아라가야 왕국의 1500년 잠을 깨우다
아파트 공사장서 ‘요상한’ 물건 발견… 신고 받은 발굴팀 ‘말 갑옷’ 확신
열흘간 이쑤시개로 흙 긁어내자 2.3m 원형 그대로 모습 드러내
강국 틈바구니서 고유 문화 지킨 아라가야의 실체 생생하게 보여줘
3일 경남 함안군 말이산 고분군에서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발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아라가야 최고 지배층의 무덤 봉분들이 능선을 따라 늘어서 있다.
야트막한 구릉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봉긋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봉분들이 지평선까지 죽 이어져 있다. 그 뒤로 펑퍼짐한 능선에 자리 잡은 성산산성(城山山城)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1400여 년 전 아라가야를 점령한 신라군의 위세가 멀리서도 느껴진다.
3일 찾은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고령 대가야와 더불어 위세를 떨친 아라가야의 왕릉답게 5∼10m 높이의 고총들이 장관을 이뤘다. 신라, 왜(倭)로 가는 길목에 있던 아라가야는 주변 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고유 문화를 지키며 수백 년 동안 생존했다. 1992∼1996년 말이산 고분을 발굴한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은 “함안군 주민들 덕분에 아라가야 고분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신문배달 소년이 살린 가야 무덤
1992년 6월 발굴된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마갑총(위 사진). 실선으로 표시된 건 말 갑옷으로, 아래는 보존 처리를 마친 뒤 모습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박 선생, 이리 빨리 좀 와주이소.”
1992년 6월 6일 오전. 함안 성산산성을 한창 발굴 중이던 박종익 당시 학예연구사(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일간지 지국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배달소년이 인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요상한’ 물건을 주워 왔다는 것이다. “암만 봐도 문화재 같다”는 사학과 출신 지국장의 말에 박종익은 꽃삽을 내려놓고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주워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넣은 쇳조각을 본 순간 그는 ‘말 갑옷(馬甲·마갑)’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조영제 경상대 교수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을 발굴할 당시 비슷하게 생긴 말 갑옷 조각을 본 적이 있었다. 소년이 발견한 조각은 황갈색 녹이 두껍게 낀 상태였고, 말에 두른 갑옷답게 길이는 10cm가 넘었다.
갑옷 조각은 굴착기로 배수로를 판 구덩이에서 발견됐는데 다른 조각들도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박종익은 즉시 도청에 전화해 공사를 중단시킨 뒤 성산산성 발굴현장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갑옷 수습 임무를 맡은 이주헌이 현장에 급파됐다.
1주일에 걸쳐 흙을 조심스레 제거하자 길이 8.9m, 너비 2.8m의 거대한 덧널무덤(목곽묘)과 함께 말 갑옷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을 모두 노출시키는 데 열흘이 더 걸렸다. 1500년이 흘러 부식이 심한 갑옷 표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무사히 들어내기 위해 6명이 달라붙어 오직 이쑤시개로 흙을 긁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길이 2.3m, 너비 48cm의 말 갑옷은 한 세트가 시신 좌우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굴착기 삽날로 일부가 훼손된 걸 제외하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견돼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앞서 부산 복천동과 경남 합천군에서 말 갑옷이 출토됐지만 완형이 아닌 조각들이라 전체 윤곽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당시 암 투병 중이던 고고학 대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 유물을 본 뒤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였다. 5세기 중엽 아라가야 때 조성된 이 무덤은 출토 유물의 이름을 따서 ‘마갑총(馬甲塚)’으로 명명됐다. 말 갑옷은 7년의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고구려·백제와 교류 흔적
말이산 고분에서 출토된 아라가야의 ‘화염(불꽃)무늬 투창 굽다리접시’.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고고학계는 말이산 고분이 아라가야와 주변국의 문물 교류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마갑총 출토 말 갑옷은 고구려 쌍영총이나 동수묘 벽화에 묘사된 기마병의 말 갑옷과 매우 흡사한 형태다. 이에 따라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할 때 가야로 유입된 고구려 갑옷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마갑총 조성 시점을 430년 이후로 보면 쇠를 다루는 데 능했던 가야인들이 고구려 갑옷의 영향을 받아 자체 생산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말이산 고분의 묘제가 시대에 따라 널무덤(목관묘)과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으로 다양하게 변화된 것도 주변국 영향이 컸다. 이 중 6세기 전반에 나타난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무덤양식을 들여온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강성해진 신라의 서진(西進)에 위협을 느낀 아라가야는 백제, 대가야와 연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주헌은 “마갑총에서 나온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도 백제 중앙과 아라가야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고 말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7.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 이성산성 주인, 백제냐 신라냐… 미스터리 풀어줄 목간 한 점
백제 왕도인 풍납-몽촌토성과 인접… 목간 발굴 전 백제 성곽설에 무게
이성산성 저수지에서 나온 목간… 해서체 달필로 쓴 무진년 간지
남한성 지명-도사 관직 적혀있어… 축성시기와 주체 알 수 있는 증거
지난달 25일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 동문 터에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이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안쪽에 놓인 사각형의 커다란 돌 2개는 기둥을 고정시키는 문지공석으로 신라 때 만들어졌다. 하남
“기술은 시간을 절대 추월할 수 없어요. 기술이란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겁니다.”
‘구루(Guru)’의 말은 짧고 단정적이지만 그 속에 힘이 있다. 단순한 교과서 지식이 아니라 수십 년 세월 자신이 경험한 산지식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경기 하남시 이성산성(二聖山城) 동문(東門) 터. 멀리 한강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구릉 가장자리로 6m 너비의 바닥과 벽면을 감싼 석축이 보였다.
동행한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56)이 안쪽 바닥 면에 솟아있는 두 개의 문지공석(門址孔石·기둥이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돌)을 조용히 가리켰다. 사각형의 큼지막한 돌에 원형의 구멍이 이중으로 파여 있다.
1500년 전 이 돌에 고정된 커다란 나무문을 신라 병사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켰을 것이다. 그는 “이런 모양의 돌구멍은 전형적인 신라 석성에서나 볼 수 있다”며 “산성 쌓기는 건축과 토목 기술이 융합된 당대의 원천기술로 축성 방식을 들여다보면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1990년 7월 이성산성 내 1차 저수지에서 출토된 목간. ‘무진년’ 간지와 함께 신라 관직명인 ‘도사’가 적혀 있다. 한양대박물관 제공
○ 신라 관직명 적힌 목간(木簡) 출토
1990년 7월 초순 이성산성 1차 저수지 발굴 현장. 장마로 습한 현장은 자욱한 안개까지 깔려 시종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3개월 동안 이어진 강행군으로 지친 연구원과 인부들은 말없이 땅만 팠다. 당시 50대 후반의 베테랑 작업반장(발굴 현장의 인력을 감독하는 사람) 임철웅이 깊은 침묵을 깼다. 지표로부터 2m 깊이에서 한자가 적힌 나무 쪼가리(목간)를 발견한 것이다.
소리를 듣고 뛰어온 당시 한양대박물관 책임조사원 심광주가 숨죽인 채 목간 글씨를 하나씩 확인했다. 해서체 달필로 쓴 간지(干支·연대)와 관직명이 뚜렷하게 보였다. 심광주의 회고. “3년 내내 학수고대하던 명문 자료를 처음 출토한 순간이었습니다. 산성 축성 시기와 주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증거를 얻은 겁니다.”
목간에는 무진년(戊辰年) 간지와 남한성(南漢城) 지명, 도사(道使) 관직이 한꺼번에 적혀 있었다. 저수지에서 고구려나 백제 유물은 없었고 신라 것만 나온 걸 감안하면 무진년은 신라가 한강 일대에 진출한 이후인 608, 668, 728, 788년 중 하나라는 게 그의 견해다. 특히 도사는 신라 관직명으로 6, 7세기 자료에 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고려하면 608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 진흥왕이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은 지 5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삼국통일로 나가는 길목에 있던 신라는 아마도 남한강을 지척에 둔 이성산성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목간의 출토 위치도 매우 중요했다. 1차 저수지는 지층상 성벽을 처음 쌓을 때 함께 조성된 사실이 확인됐는데, 목간은 저수지 바닥에서 불과 1m 높이에서 발견됐다. 이는 목간이 가리키는 연대가 이성산성이 축조된 시기와 근접해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근거였다.
○ “삼국 중 누가 쌓았나” 논란
발굴 전 학계는 이성산성을 백제 성곽으로 봤다. 지금도 학계 일각에선 백제로 보는 시각이 여전하다. 백제 왕도인 풍납토성, 몽촌토성이 이성산성에서 불과 5km 거리에 있는 데다 근처 미사리에서 백제 마을 유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다산 정약용도 이곳을 백제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했다. 2000년에는 고구려 관직명 ‘욕살(褥薩)’이 적힌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과 고구려 자가 출토돼 고구려가 이성산성을 처음 쌓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강을 둘러싼 삼국의 경합을 재현하듯, 이성산성을 처음 축조한 주체를 둘러싸고 학계가 셋으로 갈린 셈이다.
그러나 유물과 유적이 가리키는 결론은 명확하다는 게 심광주의 견해다. 토성(土城) 중심의 백제 산성과 달리 전형적인 석성(石城)이고, 수직으로 쌓아올린 성벽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삼각형 단면의 석축을 성벽 하단에 덧대 쌓는 보축(補築)이 발견된 것도 이성산성이 신라 산성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30년을 발굴했는데도 백제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요. 신념처럼 믿는 것과 명확한 고고학 증거가 서로 다를 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성산성 발굴은 성곽을 볼 때 위치나 역사적인 배경보다 기술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제게 줬습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8. 청주 신봉동 유적 - 둥근고리칼-쇠갑옷… 재갈… 백제 전사들의 魂을 만나다
조사된 300여기 무덤들 중 무기-마구 묻힌 비율 20% 달해… 지금의 현충원 군인묘역에 해당
신라-가야-일본계 토기도 출토, 문화교류 흔적 오롯이 남아있어
1990년대 충북 청주시 신봉동 유적 발굴 당시 각종 토기가 출토된 토광묘들. 이곳에서는 재갈(작은 사진), 발걸이 등 백제 마구가 당시로선 최초로 발견됐다. 국립청주박물관 제공
《지난달 31일 충북 오송역에서 차로 30분. 청주 북서쪽 외곽에 이르자 야트막한 봉분들이 이어진 능선이 보였다. 동네 뒷산 같은 아늑한 분위기랄까. 왕릉급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본 시리즈 20회) 같은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다. 국내 최초로 백제 재갈과 발걸이가 출토돼 고고학계로부터 크게 주목받은 ‘청주 신봉동 유적
지난달 31일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가 청주백제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손잡이잔(파수배)’ 출토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학계는 이 잔이 곡식 양을 측정하는데 쓰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청주=안철민 기자
동행한 차용걸 충북대 명예교수(67)가 한마디 거든다. “여기엔 백제 장수도 있지만 지름이 1m도 안 되는 조그마한 무덤에 묻힌 서민들도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왕릉 부장품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백제 전사들의 생생한 흔적이 담긴 현장이죠.”
○ 삼국시대 격전지 전사들의 무덤
1992년 7월 중순 무더운 여름날. 충북대 박물관 발굴팀은 도굴로 인해 처참한 몰골을 드러낸 무덤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매의 눈으로 지표를 샅샅이 훑던 조사원들의 시야에 살짝 드러난 고분 일부가 들어왔다. 상당한 크기의 목곽 무덤이었다. 이미 도굴 갱이 뚫려 있어 큰 기대를 접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벌 통을 제거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20∼30cm를 파들어 갔을까. 길쭉한 모양의 금속 물체가 윤곽을 드러냈다. 당시 박물관 학예부장이던 차용걸이 손잡이 부분의 까만 녹을 긁어내자 순간 하얀 빛이 번쩍했다. 고대 지배층이 애용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의 ‘은장식’이 분명했다. 붉은색 점토층에 칼이 단단히 박혀 있는 바람에 발굴팀은 대도를 흙과 함께 통째로 파냈다.
흥미로운 것은 칼의 끝이 ㄱ자로 휘어 있었다는 점이다. 차용걸의 회고. “이런 형태의 칼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 끝이 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부장 당시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이 있어요. 청동기시대에도 주술적 의미에서 동기를 일부러 부러뜨려 묻은 게 많은데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요.”
신봉동 유적이 독특한 건 조사된 300여 기의 무덤 가운데 무기나 마구(馬具)가 묻힌 비율이 거의 20%에 육박한다는 점이다. 쇠 갑옷과 투구, 둥근고리큰칼, 손칼, 화살촉, 창, 발걸이, 재갈 등 총 1300여 점의 철기 유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곳을 “백제 전사들의 공동묘지”라고 부른다. 요즘으로 치면 현충원 군인묘역과 비슷할까. 학계는 전사들이 4, 5세기 한반도 중부지역을 둘러싼 삼국의 치열한 전투에서 희생된 걸로 추정한다. 이곳은 한강 유역에 왕성을 둔 백제가 남쪽의 신라를 공략하기 위한 길목이자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 마한과 백제가 빚은 문화
답사를 마치고 고분군 바로 아래 들어선 청주백제유물전시관을 찾았다. 청주 출신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야인 시절 홍보 동영상에 나와 선보이는 ‘손잡이잔(파수배·把手杯)’이 단연 눈길을 끈다. 한쪽에만 손잡이가 달려 머그 컵처럼 생긴 이 잔은 4, 5세기 백제 중앙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봉동 고분에서는 여러 개가 발견돼 백제에 복속되기 전 마한 토착 지배층의 문화로 해석된다. 반면 다리가 세 개 달린 그릇인 삼족기(三足器)나 돌방무덤(석실분) 등은 한성백제의 영향이다. 차용걸은 “3, 4세기 조성된 인근 청주 송절동이나 봉명동 고분은 백제의 지배를 받기 전 마한 토착세력의 문화를 반영하는 반면에 신봉동 고분은 백제화가 진척된 모습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
일본계 토기인 스에키와 가야, 신라 토기들이 신봉동에서 발견된 것도 의미가 작지 않다. “백제가 가야를 거쳐 일본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청주지역이 가교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사들의 무덤에도 국제 문화교류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는 거지요.”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일보
39. <39·끝> 무령왕릉의 교훈 -“무령왕릉” 한마디에 법석
… 주위 독촉에 이틀만에 서둘러 발굴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 무령왕릉을 열기 직전 아치 모양의 입구 앞에서 발굴단 관계자들이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벽돌을 쌓아올려 입구를 막은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22일 무령왕릉 앞에서 발굴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 지건길 이사장 제공·공주=김경제 기자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에서 다시는 되풀이돼선 안 될 역사적 과오였다.”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4·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자서전 ‘고고학과 박물관 그리고 나’(학연문화사)에서 무령왕릉 발굴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그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한 당사자다. 고고학자가 자신의 발굴 성과를 비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 그만큼 무령왕릉 발굴이 한국 고고 역사학 연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22일 오랜만에 무령왕릉을 다시 찾은 노학자는 스마트폰으로 곳곳을 촬영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자신의 청춘 한 자락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벌써 46년이 흘렀소. 압도적인 광경에 모두들 넋이 나갔지….”
○ 희대의 발견과 폭우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사현장. 장마철 무덤에 물이 차는 걸 막기 위해 배수로를 놓는 작업 도중 6호분과 비슷한 재질의 벽돌이 드러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유구가 새로 발견됐다는 보고에 김원룡 당시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구성돼 이틀 뒤 현장으로 출동했다. 조사원은 이호관 문화재연구실(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과 손병헌 조유전 지건길 학예연구사였다.
무령왕릉의 내부 전경
7일 오후 시작된 발굴로 아치 모양의 무덤 입구가 드러나자 발굴단은 전인미답의 백제 왕릉이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그때까지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백제 왕릉은 전무했다. 그런데 저녁에 쏟아진 폭우로 인해 발굴은 일시 중단됐다. 자칫 물이 고분 안으로 흘러넘칠 뻔했지만 발굴 구덩이에 배수로를 뚫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해 무덤길에 놓인 ‘진묘수’. 문화재청 제공
○ 무덤 주인이 드러나다
어둠 속에서 뿔 달린 ‘그로테스크한 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다음 날 오후 4시경 발굴단은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벽돌 몇 장을 빼내고 왕릉의 속살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취재진과 주민들조차 숨을 죽였다.
무덤을 연 직후 촬영한 진묘수와 지석
손전등으로 무덤길(연도)을 비추던 지건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입술이 붉게 물든 돌짐승, 진묘수(鎭墓獸·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였다. 이어 그 앞으로 동전 꾸러미가 놓인 돌판 2개가 보였다. 지건길의 회고. “무덤 벽이며 천장에서 나무뿌리가 삐져나와 길게 늘어져 있었어요. 마치 ‘유령의 집’ 같습디다. 으스스했지.”
무령왕 이름이 새겨진 지석
막음벽돌을 무릎 높이까지 들어낸 뒤 김원룡과 김영배(당시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2개의 돌판이 죽은 이의 이름과 생몰연도를 기록한 지석(誌石)임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백제사에 조예가 깊은 김영배는 지석에 새겨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문구를 보자마자 “이는 무령왕”이라고 외쳤다. 숱한 고대 왕릉 가운데 처음으로 무덤 주인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왕이 무덤으로 쓸 땅을 지신(地神)에게 사들인다는 내용도 담겼다. 지석 위에 동전(오수전)이 놓인 이유였다.
무령왕의 금제 관 장식(첫번째 사진)과 금 귀고리
○ 광란의 도가니
“이 무덤은 백제 제25대 무령왕 부부가 묻힌 왕릉이며,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습니다.”
30분 뒤 왕릉 밖으로 나온 김원룡의 말 한마디에 발굴단과 취재진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기자들의 성화에 발굴단은 아직 실측도 끝나지 않은 무덤 촬영을 허용했다. 유구와 유물 규모로 볼 때 최소 수개월의 발굴이 필요했지만, 발굴단은 다음 날(9일) 오전 9시까지 철야 발굴을 강행했다.
명문이 새겨진 무령왕비의 은팔찌.
이에 따라 지석과 진묘수, 관재(棺材) 등 주요 유물들이 대략적인 실측과 촬영만 거친 뒤 무명천에 둘둘 말려 서둘러 옮겨졌다. 구슬과 장신구 등 바닥에 흩어진 자잘한 유물들은 실측도 없이 삽으로 퍼 담았다. 왜 이리 급했을까. “엄청난 광경에 발굴단장부터 경황이 없던 데다 주민들과 기자들 독촉에 마음이 더 급해진 거지요.”
비록 발굴은 졸속이었지만 무령왕릉에서 쏟아져 나온 유물 4600여 점의 가치는 대단히 컸다. 이 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수준 높은 백제 공예기술이 세상에 드러났다. 특히 무령왕의 생몰연대가 분명한 만큼 출토 유물은 지금도 백제 고고학 연구에 핵심 기준이 되고 있다.
일본학계에선 ‘무령왕릉계 유물’이라는 학술용어가 생겼을 정도. 중국 양나라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으로 지어지고, 관재 성분이 일본산 금송으로 밝혀지는 등 백제의 활발한 대외 교류도 알 수 있게 됐다.
지난해 2월부터 연재된 본 시리즈를 마치며 노학자에게 제언을 부탁했다. “무령왕릉에서의 잘못을 통해 발굴은 절대 서두르면 안 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었습니다. 긴급하게 이뤄지는 구제 발굴을 최소화하고, 공공기관이 발굴을 주도하는 ‘발굴 공영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입니다.”
[출처] 김상운 동아일보기자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 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