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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velopment of Centralized Control 중앙 집권적 통제의 발전 While the historical sources are not numerous, the evidence indicates that the first stage of centralization came with a change of view, actually a distortion, of the role of the bodies of elders or “presbyters” (the Greek term for “elder” being presbyteros). In place of being viewed simply as elder brothers serving among brothers, as in a family, the claim came to be made that these elders occupied a special relationship with God and Christ, distinct from and superior to that of the rest of their fellow Christians. In describing the original state of affairs in the Christian congregation, Schaff’s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page 124, makes this acknowledgment: 그 증거로서, 역사적 자료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중앙집권화의 첫 번째 단계가 장로 곧 "프레스바이테르"(프레스바이테로스는 "장로"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의 역할에 대한 관점의 변화, 사실상 장로의 역할이 왜곡되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단순히 가족처럼 형제간끼리 섬기는 나이든 형제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장로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우월하고,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샤프는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에서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기독교 교회사> 124면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
The New Testament knows no spiritual aristocracy or nobility, but calls all believers ‘saints,’ though many fell far short of their vocation. Nor does it recognize a special priesthood in distinction from the people, as mediating between God and the laity. It knows only one high-priest, Jesus Christ, and clearly teaches the universal priesthood, as well as universal kingship, of believers. 신약성서는 신앙 안의 사람들을 귀족이나 고귀한 신분으로 구별하지 않으며, 비록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이 비천하다 하더라도, 모든 신자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또한 백성과 구별되는 특별한 사제직이 하나님과 평신도를 중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신약성서는 신자들 위에 오직 한명의 대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우주적 왕권과 더불어 제사직을 소유하고 계신 것으로 분명히 가르친다. |
Each Christian had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 Christ as High Priest, without any other human intervening or being needed to serve as mediator. For each Christian was himself part of a “royal (kingly) priesthood.”22 각 그리스도인은 다른 인간이 개입하거나 중재자 역할을 할 필요 없이,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 각 그리스도인 자신이 '왕 같은(왕겸) 제사직'의 일부였기 때문이다.22 Christian elders had Scriptural authority, true. It was, however, authority to serve, not to subordinate others; to assist, counsel, even reprove, but never to dominate or dictate to. Where error arose, the way to deal with it was by refutation, by truthful argumentation, by persuasion, never by coercion or intimidation—the tyranny of authority.23 “For you have only one Master and you are all brothers.”24 That principle given by the Master himself must be kept ever in mind when reading any statement found in the Christian Scriptures. At Hebrews chapter thirteen, verse 17, for example, the exhortation is given: 그리스도인 장로들에게는 성서의 권위가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돕고, 상담하고, 심지어 책망도 하지만 결코 지배하거나 명령하지 않는 권위이다. 잘못이 일어날 때 성원을 다루는 방식은 논증, 진실한 주장, 설득에 의한 것이며, 결코 강요나 협박ㅡ권위의 횡포ㅡ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23 "여러분에게는 오직 한 명의 주인만이 계시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이기 때문이다."24 주인이 친히 내린 그 모든 원칙은 그리스도인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3장 17절에서는 다음과 같은 권고가 있다: |
Be obedient to those who are taking the lead among you and be submissive [defer to them, NEB], for they are keeping watch over your souls as those who will render an account; that they may do this with joy and not with sighing, for this would be damaging to you.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존경하라, NEB]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은 너희에게 해가 되느니라. |
Does this imply a virtual automatic submission to direction from persons taking the lead? No, for Christ’s injunction was not simply against being called “leaders,” but against anyone’s assuming to exercise the position or office of leader, assuming to exercise that kind of authoritarian control.25 Of the Greek word (peithomai) from which comes the rendering “be obedient,” the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Abridged Edition) page 818 says: 이것은 인도하는 사람의 지시에 사실상 자동 복종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은 단순히 "인도자"라는 명칭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지위나 직분이 형제 평등을 깨는 것일 때 반대하는 것이다.25 "순종하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피토마이) 단어에 대해, <신약신학사전>(요약판) 818면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This word has such senses as ‘to trust,’ ‘to be convinced,’ ‘to believe,’ ‘to follow,’ and even ‘to obey.’ 이 단어는 '신뢰하다', '설득되다', '믿다', '따라가다', 나아가 '순종하다'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Note that the rendering “to obey” is only one of several possible translations and here is listed last. The inspired writer of Hebrews has, in fact, already qualified matters by making plain that what “those taking the lead” were to be speaking was, not their own views or interpretations or injunctions, but “the word of God.” (Hebrews 13:7) As the well-known Bible scholar Albert Barnes observes, the term “those taking the lead” (or, in many translations “leaders”) actually carries the sense of “guides,” or teachers who serve as guides and shepherds.26 As long as the guidance given harmonized with the teaching of Christ, and as long as the shepherding manifested his spirit, a positive response would be the right and good course, for it would be submission to his teaching. Even in matters not specifically dealt with in Scripture, the Christian would cooperate freely in so far as compliance was not contrary to his or her conscience. But there is nothing indicating an automatic, subservient, even unquestioning submission, as to a superior authority with the right to command obedience, with the threat of expulsion hanging over any who fail to comply. "순종하다" 라는 번역이 몇 가지 가능한 번역 중 하나일 뿐이며 여기에서 맨 마지막에 나열된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영감 받은 필자는, '인도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견해나 해석이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미 자격을 갖추었다. (히 13:7) 널리 알려진 성경학자 알버트 반즈가 살펴 보았듯이, '인도하는 자들'이라는 용어는 ( 많은 역본에서 "지도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실제로 안내와 양치는 역할로 봉사하는 안내자들 또는 선생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26 주어진 안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한, 그리고 목자가 그의 영을 나타내는 한,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르고 좋은 행로일 것이다. 그것은 그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은 문제에서 조차도 그리스도인은 그에 순응하는 것이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자유롭게 협력할 것이다. 그러나 복종할 것을 명령할 권리를 가진 우월한 권위에 대해서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추방될 것이라는 위협으로 기계적이고 굴종적이며 심지어 조금도 의문의 여지 없이 복종해야 한다는 지적은 결코 없다. As has been seen, the basic sense of the Greek term used (peithomai) itself implies that the Christian’s compliance would come as a result of first having ‘trusted,’ having been ‘convinced,’ and having ‘believed’ what proceeded from such Christian brothers and on that basis he or she would respond positively. As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they had drawn together in a voluntary association of believers, and it is a free and willing response that is urged here, on the basis of kind consideration—because it will make the shepherding efforts of such men more joyful, and because to do otherwise would bring no advantage to themselves, the ones served. It is not rendered as an obligation which some organizational “authority” had the right to exact of them.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어 용어(피토마이)의 기본적인 의미 자체는 그러한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로부터 진행된 것과 그들이 적극적으로 응답한 근거로써 먼저 '신뢰하였고', '설득되어졌고', '믿어 온' 결과로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로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신자들의 교제로 함께 연합하여 왔으며, 그것은 친절한 배려에 근거하여 촉구된 자유롭고 자발적인 반응이다ㅡ왜냐하면 그것은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양을 돌보는 노력을 더 즐겁게 해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직의 "권위"가 그들에게 강요할 권리가 있는 어떤 의무적인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A Growing Emphasis on Human Authority 인간 권위가 점차 강조되다 Even as the apostle had foretold, some elders gradually lost sight of the principle stated by the Master governing all Christian relationships.27 Instead of giving full emphasis to the unique authority of God and Christ, the evidence is that they now began to emphasize more and more their own authority (constantly reminding the congregations, of course, that this authority was derived from God and Christ). 사도들이 예언한 바와 같이, 몇몇 장로들은 모든 그리스도인 관계를 지배하는 주인에 의해 언급된 원칙이 점차적으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27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독특한 권위를 전적으로 강조하는 대신, (이 권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어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상기시킴으로써) 이제 그들 자신의 권위를 점점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Why were they successful in doing so? For the simple reason that many persons, perhaps most, prefer to let others bear the responsibility that is rightly their own. They even take a certain pride in having over them men of power. That is true today and it was true then. Thus, to persons in Corinth who boasted in men who presented themselves as some sort of “super-apostles,” Paul wrote: 왜 그들은 그렇게 하는데 성공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들이 져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그들 위에 권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도 그것은 사실이고 그때도 사실이었다. 바울은 자신들을 더 나은 사도로 칭하여 자랑하는 고린도의 어떤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다: |
If a man tyrannizes over you, exploits you, gets you in his clutches, puts on airs, and hits you in the face, you put up with it. And we, you say, have been weak! I admit the reproach.28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삼아도 그만, 잡아먹어도 그만, 착취해도 그만, 깔보아도 그만, 뺨을 쳐도 그만, 여러분은 그저 참아주기만 하니 말입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너무 약해서 그런 짓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28 |
With regard to these words, one Bible commentator says:
이 단어들에 관하여 한 성서 주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The idea is, doubtless, that the false teachers set up a lordship over their consciences; destroyed their freedom of opinion; and made them subservient to their will. They really took away their Christian freedom as much as if they had been slaves. . . . the false teachers really treated them with as little respect as if they smote them on the face. In what way this was done is unknown; but probably it was by their domineering manners, and the little respect which they showed for the opinions and feelings of the Corinthian Christians.29 그 뜻은 틀림없이 거짓 스승들이 사람들의 양심 위에 권능을 확립하여, 그들의 생각의 자유를 막고, 자신들의 뜻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노예를 부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자유를 빼앗았다. 거짓 선생들은 그들의 얼굴을 때리는 것처럼 인격을 거의 존중하지 않고 대했다.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지배적인 태도로 나타났으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의견과 감정에 거의 존경을 나타내지 않았을 것이다.29 |
The apostle John gives an example of the way this attitude of self importance had already surfaced in his lifetime. He writes of a certain Diotrephes, describing him as one “who loves to be first” and who expelled from the congregation those who did not conform to his position.30 Generally, however, the process seems to have begun with a quite subtle elevation of human authority. In the writing of Ignatius of Antioch (who lived from approximately 30 A.D. to 107 A.D., dying as a martyr), we begin to find exhortations like these: 사도 요한은 이러한 자기중시의 태도가 이미 그의 생애 동안 어떻게 나타났는지 예를 들어준다. 그는 어떤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에 대해 글을 쓰면서, 그를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자신의 지위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회중으로부터 추방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30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과정은 인간의 권위를 꽤 미묘하게 상승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A.D. 30- A.D. 107, 순교자로 사망)의 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고를 발견하게 된다: |
And be ye subject to the presbyters [elders], as to the apostles of Jesus Christ. Your presbyters [preside] in the place of the assembly of the apostles. [Be] subject to the presbytery [body of elders] as to the law of Jesus Christ.31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같이, 원로의 사람들[장로들]에게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의 원로는 사도들의 모임을 대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에 관하여는, 원로[장로회]에게 복종하시오.31 |
This, in effect, robed the elders with authority equivalent to that of the apostles and equated subjection to them with subjection to Christ’s law. But the fact is that they were not apostles, they had not been chosen as such by God’s Son, hence they did not have apostolic authority and it would be a mistake to view them in that light. Such admonitions actually were subtle extensions of certain exhortations found in Scripture, they had a plausible sound to them, but they carried serious implications. Viewing matters from the standpoint he set out, Ignatius argued that anyone doing anything without the approval of the overseer and the body of elders and deacons “is not pure in conscience.”32 이것은 사실상 사도들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장로들을 강탈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법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사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뽑은 것과 같이 선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도적 권위가 없었고, 그런 시각으로 그들을 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들의 훈계는 성서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권고를 미묘하게 확장한 것이었고, 그럴듯한 소리를 냈지만, 위험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가 제시한 관점에서 문제를 보고 감독자나 장로들 또는 집사들의 회에 승인을 얻지 않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은 "양심이 순수하지 않다"고 주장했다.32 Teachings such as these mark the early beginnings of a clergylaity distinction. They also mark the equally subtle invasion of personal conscience by human religious authority. The men urging ever greater submission to such authority did not, as others had previously done, endeavor to establish legalistic control through advocating the imposition of circumcision and adherence to the Mosaic law. But though their methods differed, the final result was an equally dangerous erosion of the Christian freedom of people as individuals.33 이와 같은 가르침은 성직자-평신도 구별의 초기 시작을 나타낸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종교적 권위에 의하여 개인의 양심에 대해서도 똑같이 미묘한 침해를 나타내었다. 그러한 권위에 대해 더 큰 복종을 촉구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했던 것처럼, 할례의 부과와 모세 율법의 준수를 옹호함으로써, 법적인 통제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비록 그들이 방법은 달리 했지만, 최종 결과는 그리스도인들로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똑같이 위험한 짓이었다.33 A Monarchical Arrangement 1인 독주 체제 A further step in this process of developing a visible centralized authority was the elevation of one member of the body of elders to a superior position, a status of greater authority than his fellow elders. The evidence (which was also presented in the Watch Tower publication Aid to Bible Understanding) is that originally the terms “overseer” (episkopos) and “elder” (presbyteros) were interchangeable, one describing function, the other the mature quality of the person. It may, of course, have been the customary practice for one of the elders to act as a sort of chairman at their gatherings and discussions. In time, however, it was decided to have one man among the elders hold preeminently the position of “overseer,” so that eventually the term came to apply solely to this individual, not to all elders. Why was this done? 가시적인 중앙집권적 권위를 발전시키는 이 과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은 장로회의 성원 한명이 그의 동료 장로들보다 더 큰 권위의 지위로 상승된 것이었다. (워치타워 출판물인<성서 이해 보조서>)에 제시된 증거는 원래 "감독자"(에피스코포스)와 "장로"(프레비테로)이라는 용어가 상호 호환되었고, 하나는 기능을 설명하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성숙한 자질을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장로들 중 한 사람이 그들의 모임과 토론에서 일종의 의장 역할을 하는 것이 관례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 탁월하게 '감독자'라는 자리를 차지하기로 결정되어, 결국 이 용어는 모든 장로가 아닌 이 한명의 개인에게만 적용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The concentration of greater authority in a single individual was evidently viewed as a “practical” step, one that could be justified by circumstances as a means to a proper end. Jerome, who made the first translation of the Bible into Latin by about 404 A.D., confirms this. First acknowledging that originally elders and overseers were the same, he then says: 한 개인에게 더 큰 권위를 집중하는 것이 "실용적" 으로 생각되었고, 상황에 의해 적절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 기원 404년 경에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제로움이 이를 확인시켜준다. 그는 처음에 장로들과 감독들이 똑같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 . . gradually all the responsibility was deferred to a single person, that the thickets of heresies might be rooted out.34 . . . 이단들의 덤불이 뿌리 뽑힐 수 있도록, 차츰 모든 책임은 한 사람에게 미루어졌다.34 |
The introduction of false teachings, as perhaps also the waves of persecution being experienced, caused the elders to feel it practical to concentrate more authority in the hands of a single person, who now became THE overseer, the sole overseer among the elders. Since the term “bishop” is derived from the Greek word for “overseer” (episkopos), this marked the start of the office of bishop. It is true that there were different erroneous viewpoints and teachings surfacing in the congregations of Christians. Had those rendering shepherding service relied on Scriptural truth, including the teachings of Christ and his apostles, as the spiritual weapon for combating these, they would have demonstrated faith in the power of truth to ‘overturn reasonings and every lofty thing raised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s the apostle Paul expresses it. Instead, men now turned to a fleshly weapon, resorting to an elevation of human authority as the means to maintain Christian unity and, supposedly, doctrinal purity.35 잘못된 가르침의 도입은 아마도 박해의 물결을 경험했기 때문에, 장로들로 하여금 장로들 사이에서 감독자가 된 한 사람의 손에 더 많은 권위를 집중시키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느끼게 했다. "주교"라는 용어는 "감독자"(에피스코포스)라는 그리스어로 된 단어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주교직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모임에서 서로 다른 그릇된 견해와 가르침이 표면화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양떼를 돌보는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포함한 성경의 진리에 의지했다면, 그들은 사도 바울이 표현한 대로 '이성과 모든 숭고한 것들을 하나님의 지식에 반해서 뒤집는' 진리의 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대신, 사람들은 이제 육적 무기로 눈을 돌렸고, 그리스도인 연합과 교리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마도 인간 권위의 격상에 의지했다.35 In this regard, Ignatius had urged overseers, “Have a regard to preserve unity, than which nothing is better.”36 The appeal unfortunately took the focus away from love and truth as the means to unity, directing it rather to submission to religious leaders. Thus we find Ignatius’ writings advancing the view that unity with God was dependent upon ‘harmonious cooperation with the Overseer.’37 As one eminent scholar observes, the office of bishop (overseer) now came to constitute “a visible centre of unity in the congregation.”38 이와 관련해 이그나티우스는 "연합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훌륭하다는 점을 감독자들이 명심해야 할 사실이라고 촉구했다.36 그러한 호소는 불행히도 단결의 수단으로 사랑과 진리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종교 지도자들을 굴복시키는 데 오히려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과의 연합이 '감독자와의 조화로운 협력'에 달려 있다는 견해를 발전시킨 이그나티우스의 글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37 한 저명한 학자가 관찰한 바와 같이, 주교(감독자)는 이제 '교회의 가시적인 연합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38 All of which reminds one of the human reasoning that led Israel, faced with internal problems and external attacks, to seek a king as a visible head around whom to rally and to whom to look for direction. God, though granting them Saul as king, characterized their action as a rejection of His own invisible rulership, as an act owing, not to faith, but to a lack of faith. He warned them of the burden this would mean for them, the limitations it would place on their freedom. But they persisted in their desire for visible rulership over them.39 The same lack of faith continues to cause persons to this day to desire and look for some “visible center of unity,” rather than by faith focusing on the invisible headship of Christ Jesus. 이 모든 것은 내부 문제와 외부의 공격에 직면한 이스라엘이 누가 집결하고 누가 방향을 찾아야 할 가시적인 우두머리로서 왕을 세우도록 이끌었던 인간의 추리를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지만, 그들의 행위를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통치권에 대한 거부, 믿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부족에 대한 행위라고 규정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이것이 그들에게 의미할 부담과 그들의 자유에 미칠 수 있는 한계를 경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위에 가시적인 통치권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고집했다.39 똑같은 믿음의 부족이 오늘날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보이지 않는 머리에 초점을 맞춘 믿음보다는 '보이는 연합의 중심'을 원하여 찾게 한다. |
22 1 Peter 2:5, 9; 5:3; Revelation 1:6; 5:10; 20:6.
22 벧전 2:5, 9; 5:3; 계 1:6; 5:10; 20:6.
23 Matthew 20:25-28; 23:10, 11; 2 Corinthians 1:24; Titus 1:9-13; 1 Peter 5:1-5.
23 마 20:25-28; 23:10, 11; 고후 1:24; 딛 1:9-13; 벧전 5:1-5.
24 Matthew 23:8, NIV.
24 마 23:8, NIV.
25 Matthew 23:10, NW, TEV.
25 마 23:10, NW, TEV.
26 Barnes’ Notes (Hebrew to Jude), pages 317, 322.
26 반즈의 주석 (히-유), 317, 322면.
27 Acts 20:28-30.
27 행 20:28-30.
28 2 Corinthians 11:20, 21, NEB.
28 고후 11:20, 21, 공동
29 Barnes’ Notes (1 Corinthians to Galatians), page 232, 233.
29 반즈의 주석 (고전-갈), 232, 233.
30 요한3서 9, 10.
31 Ignatius’ “Epistle to the Trallians,” chapter II; “Epistle to the Magnesians,”
chapter VI; the same epistle, chapter II.
31 이그나티우스의 "트랄리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2장; "마그네시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6장; 같은 편지, 제2장.
32 Ignatius, “Epistle to the Trallians,” chapter VII.
32 이그나티우스, "트랄리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7장
33 Respected nineteenth-century church historian Augustus Neander in his work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pages 194 to 201, points out the way in which the Christian church, in many respects, did revert to Old Testament positions. In place of a universal priesthood of all believers, a separate priesthood gradually appeared, distinct from the main body of Christians, and acting in a mediatorial way for it in its relation to God. Tertullian (c. 145-220 A.D.) even referred to the congregational overseer or “bishop” as the “chief priest,” as he also refers to those not among the overseers, elders or deacons, as “laymen.” (“On Baptism,” Chapter XVII.) On the effects of this, Neander comments: “This title presupposes that men had begun already to compare the presbyters [elders] with the priests; the deacons, or the spiritual class generally, with the Levites. . . . When the idea of the universal Christian priesthood retired to the background, that of the priestly consecration which all Christians should make of their entire life, went along with it. . . . Christ had raised the entire earthly life to the dignity of a spiritual life. . . . the new notions respecting the dignity of the clerus [meaning, the selected or appointed ones], led men to believe that what had hitherto been regarded as the free gift of the Spirit to all or to individual Christians, must be confined to a particular office in the service of the church. . . . Now, the free working of the Spirit was to be confined to a formal, mechanical process.” D Chap 3 5
33 19세기 존경받는 교회 역사가 아우구스투스 니엔더는 그의 저술인 <기독교와 교회사>194- 201면에서 기독교 교회가 많은 점에서 구약성경의 위치로 되돌아간 방식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인 제사장직을 대신하여 기독교인들의 본체와 구별되는 분리된 사제단이 차츰 등장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를 위한 중재 방식으로 행동했다. 테르툴리안(기원전 145-220년경)은 심지어 회중의 감독자나 "주교"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또한 감독자들 중 장로나 부제가 아닌 사람들을 "평신도"("침례에 대하여", 제17 장)로 지칭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니엔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칭호는 사람들이 이미 원로들 [장로들]을 제사장들과 비교하기 시작했음을 전제로 한다. 부제나 일반적으로 영적 반열을 레위 사람들에 비교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기독교 성직자에 대한 개념이 모든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삶이 제사장직을 제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생각으로 물러갔을 때 . . . 그리스도는 지상의 삶 전체를 영적인 생명의 존엄성으로 고양시켰다. . . . 클레루스[선택이나 임명된 자들을 의미]의 존엄성에 대한 새로운 관념으로 모두 또는 개인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영의 선물로 간주된 것을 교회의 봉사를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직분에 한정시켜야 했다. . . 이제,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과정으로 국한되었다.' D 3 5장
34 Jerome, as quoted in Lightfoot’s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Philippians, pages 229, 230.
34 제롬은 빌립보서에 대한 라이트풋의 주석,229, 230면에서에서 인용함.
35 2 Corinthians 10:4, 5.
35 고후 10:4, 5.
36 Ignatius’ “Epistle to Polycarp,” chapter I; his words were clearly echoed by Hayden C. Covington in the Scotland trial discussed in Chapter 2 of this book, for this Watch Tower representative there stated that it was the organization’s purpose to have “unity at all costs,” even if this meant an “enforced acceptance” of its teachings.
36 이그나티우스의 "폴리캅에 보내는 서한", 제1장; 이 책의 제2장에서 논의된 스코틀랜드 재판에서 워치 타워의 대표자는 비록 이것이 그 가르침에 대한 "강제적 수용"을 의미하더라도, "어떤 비용을 치르서라도 연합"하는 것이 그 조직의 목적이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헤이든 C.코빙턴에 의해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
37 Ignatius’ “Epistle to the Ephesians” chapter VI; “Epistle to the Trallians,” chapter II. In his “Epistle to the Philadelphians,” chapter III, he writes: “For as many as are of God and Christ are also with the bishop [overseer].”
37 이그나티우스의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6장, "트랄리아인에게 보내는 편지" 제2장. 제3장 "필라델피아인에게 보내는 [그의]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만큼 주교(감독자)에게도 함께 하신다."
38 Lightfoot’s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Philippians, pages 234, 235.
38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라이트풋의 주석 234, 235면이다.
39 1 Samuel 8:4-20.
39 삼상 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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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권위의 중앙집권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장로라는 명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장로라는 직분이 임명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성서에서 장로라는 직분을 임명하는 직접적인 구절이 없다 다만 한 군데 나오지만 거기서 장로를 임명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장로인 사람을 추천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성서에서는 다만 감독(주교)의 자격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 여태껏 모든 주석이나 워치타워 해설에서 감독과 장로가 같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다만, 이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먼저 한 회중에는 1명 이상의 장로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회중이 1인 독주체제가 아니라 협의에 의해 관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1인 독주체제가 실용적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당하면서 경험상으로 얻어진 결과라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이 1인이든 여러명이든 기본적으로 그러한 직분이 통제나 권위를 누리는 지위가 아니라 회중에게 봉사하는 위치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쨋든 이렇게 해서 1인 독주 체제가 회중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이제는 전체 그리스도인을 하나의 신조로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견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여러가지 신조나 가르침을 통합하는 대표적인 공의회가 니케아 공의회(삼위일체 신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의 힘은 중앙집권화 되기 시작했고 교회라는 이름이 두가지 뜻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원래의 의미 "사람(신자)들의 모임"이고 또 하나는 "교회의 이름으로"라는 말 속에 포함된 교회의 소수 지도자들을 지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