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명구 위정자의 마음가짐
평소 일이 없을 때에도 늘 백성들에 대해 간절한 정성을 품어야 하니,
부모가 자식에 대해 병이 있으나 없으나 늘 걱정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惟於平居無事。而至誠惻怛。無一日不在乎民
유어평거무사 이지성측달 무일일부재호민
若父母之於子。無疾而憂之。不間於其疾時。
약부모지어자 무질이우지 불간어기질시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농암집(農巖集)』 권24 「인민당기(仁民堂記)」
해설
조선시대 대학자였던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선생은 현종 5년(1664)에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지냈는데,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숙종 22년(1696)에 이번에는 아들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가 또 인천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지촌은 홀로 계신 모친을 모시고 부임하면서 크게 탄식하여 말했습니다.
“이곳은 우리 선친께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곳으로, 그 은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내가 만일 잘 다스리지 못해 이곳 부로(父老)들에게 질책을 받는다면 어떻게 사당에서 선친을 뵐 수 있겠으며,
어떻게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고을 이름에 ‘어질 인(仁)’ 자가 있으니,
내가 더욱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此吾先君子之桐鄕也, 其寄惠尙未亡. 余苟不能於政, 而得罪於其父老, 尙何以見於先廟, 亦何以安吾母.
且是邑也, 以仁爲名, 余尤不可以不勉.]”
얼마 뒤 팔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줄줄이 죽어 나갔는데, 지촌은 수령으로서 성심을 다해 구휼하여
고을에서 유랑하거나 굶어 죽는 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기뻐하였고 소문이 퍼져 서울에까지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촌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정무를 보는 동헌(東軒)의 이름을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의
‘인민당(仁民堂)’으로 짓고, 매형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습니다.
농암은, 왕명을 받아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 기근과 같은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맹자(孟子)가 문왕(文王)에 대해 “백성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이 하였다.[視民如傷]”는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애지중지하는 자식이 다쳤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위정자가 백성들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되려면 수령이 평소 일이 없을 때에도 늘 백성들에 대해 간절한 정성을 품어야 하니,
부모가 자식에 대해 병이 있으나 없으나 늘 걱정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작은 성취에 도취되지 말고, 문왕 같은 성인을 목표로 삼고 더욱 노력하라는 농암의 간곡한 뜻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지촌이 떠나더라도 앞으로 이 지역에 수령으로 와서 이 동헌에 앉아 정무를 볼 뒷날의 수령들 역시
이 기문을 읽고서 이러한 뜻을 가슴에 새기고 백성들을 보살필 것을 당부하는 농암의 심원하면서도 세심한 마음까지 읽힙니다.
역사는 문화유산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유적지에 가서 만나는 건물이나 누정(樓亭)의
현판과 기문에는 이렇듯 다양한 사연이 들어 있으며, 그 속에는 선조들의 깊은 애민(愛民)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이 대부분 건축 양식과 같은 형태적인 데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건물 이름 하나를 지으면서도 그곳에 살 사람들이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까지 생각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글쓴이이규옥(李圭玉)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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