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투 당시의 나폴레옹
흔히 나폴레옹의 전역을 분석하면서 역사가 및 나폴레옹 본인도 높이 평가하는 전투로 초기 이탈리아 전역, 울름 전투, 아우스터러츠 전투 등을 꼽는다. 대개의 경우 일부러 진영에 약점을 보여줘서 적을 유인하고 적이 공세를 가하는 동안에 기습을 통해 섬멸한 아우스터러츠 전투를 그 중에서도 최고로 꼽으며, 나폴레옹 본인부터가 너무 이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어 후반에는 어려운 기동전 대신에 정면 돌격을 선호하게 되어 그의 몰락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는 나폴레옹
나폴레옹이 유럽 전체의 운명을 걸고 벌인 러시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유럽 열강들은 6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나폴레옹을 몰아붙였고 '나폴레옹 본대는 상대하지 않는 대신 부하 원수들을 섬멸한다'는 트라이브르크 전략을 채택하여 나폴레옹의 본대가 여기저기 기동하는 동안에 부하 원수들의 부대를 하나씩 섬멸하고 마침내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20만 본대도 파괴하였다. 나폴레옹은 사상자 4만명, 포로 2만명의 타격을 입고 프랑스 본국으로 철퇴해야 했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막아내는 프랑스군
1814년 2월, 나폴레옹은 50만명에 달하는 연합군을 상대로 겨우 12만명의 프랑스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때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전략적인 열세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세 방향에서 분리되서 진격하고 있고, 자신에게 내선의 이점 (포위된 상태에서는 포위한 적보다 짧은 거리를 행군해도 적의 공격에 대처할 수 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군의 신속한 기동력으로 연합군을 각개 격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은 연합군 중에 네덜란드 전역에서 느릿느릿 진격하는 베르나도트 군 6만명 대신에 자신의 전면에 있는 블뤼허 원수가 지휘하는 7만명과 슈바르첸베르크 원수가 지휘하는 13만명의 오스트리아군을 7만명의 병력으로 상대하기로 하였다. 이 중에 슈바르첸베르크의 군은 프랑스군과 3일 행군 거리에서 느릿느릿 움직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블뤼허 원수의 군단을 섬멸하기로 전략을 구상했다.
6일 전투 당시 병력 배치도
1814년 2월 9일, 나폴레옹은 프랑스 세잔느에 도착하였고 그의 휘하 마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6군단이 샹포베르로 진격하였으나 프로이센군의 저항으로 저지되었다. 이때 마르몽 원수는 블뤼허 원수에게 2개 군단이 증원되었으며, "공격 기회를 상실했으니 후퇴해서 방어전을 펼쳐야 됩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마르몽 원수
나폴레옹은 크게 화를 내면서 기존 명령대로 그대로 진격하도록 하였고, 허를 찔린 블뤼허 군의 60킬로에 걸쳐 분산된 병력을 허겁지겁 집결시켜야 했다. 때문에 샹포베르에는 러시아 올수피에프 장군이 지휘하는 3,700 명 밖에 없었고, 1814년 2월 10일, 나폴레옹은 마르몽의 6군단을 정면에 투입하고 네에의 1 예비군단, 모르티에의 2 예비군단을 투입하여 총 1만 5천명으로 샹포베르를 에워쌓고 진격하였다.. 여기에 대포 120문으로 포격하자 러시아군은 5시간 동안 버티다가 2,4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항복하였다. 대포 9문이 노획되었고 1,3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600명이었다. 이것이 6일 전투의 첫번째 전투인 샹포베르 전투다.
샹포베르 전투 당시 전역 지도. 파란색이 프랑스군
샹포베르 점령은 나폴레옹 군이 3방면으로 분리된 블뤼허군 중앙에 위치함을 의미했다. 나폴레옹은 샹포베르 서쪽에 있는 프로이센 샤헨 군단과 요르크 군단을 다음 목표로 정했다. 프랑스로 더 깊숙히 진격해 있고, 현재 진격 방향의 배후에 프랑스군이 위치하고 있어 신속히 기동하면 적의 뒤를 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공격이 성공하면 프로이센군보다 더 서쪽에 있는 맥도날드 원수가 지휘하는 11군단으로 협공을 가할 수도 있었다.
몽미렐 전투 당시 이동하는 나폴레옹
그래서 나폴레옹은 샹포베르 전투가 끝난 2월 10일 저녁에 근위대와 6군단 휘하 1개 사단을 몽미랄로 진격시키고, 동시에 맥도날드는 그대로 위치를 고수하여 프로이센군을 붙잡아 두도록 하였다. 나폴레옹 본인은 다음날인 2월 11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프랑스군 본대와 함께 몽미랄로 진격했다. 여기에 더해서 블뤼허 군에게 포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6군단 주력을 상포베르 동쪽인 에토쥬로 이동시키고 필요하면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몽미렐 전투 전의 전역도
나폴레옹이 몽미랄을 다음 전투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였다. 프로이센군 샤헨 군단은 라 페르트 소스 쥬아르에 위치하였고 요르크 군단은 샤토 티에트리에 위치하였는데 이들이 샹포베르 전투 결과를 알고 블뤼허 본대와 합류하려면 동쪽인 몽미랄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블뤼허 원수는 나폴레옹의 예상대로 위 두군단을 몽미랄로 강행군할 것을 명령했다.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 원수
그러나 나폴레옹이 먼저 보낸 선발대는 이미 몽미랄에 도착하여 전투에 유리한 거점을 점령하였고, 급하게 달려온 샤헨 군단은 1814년 2월 11일 새벽 5시에 몽미랄 외곽에 도착했으나 프랑스군이 먼저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샤헨 군단은 포격을 가하면서 요르크 군단이 빨리 도착하기를 기다렸지만, 나폴레옹이 먼저 도착하였고 2월 11일 오후 2시에 모르티어의 2 예비군단이 도착하였다. 이때 나폴레옹이 동원한 병력은 1만명 (증원 병력까지 합치면 2만명), 샤헨과 요르크 군단을 합치면 1만 8천명이었다.
1813년도의 프로이센 퓨질리어 경보병.
나폴레옹은 연합군 중에 프로이센군을 특히 꺼렸다.
나폴레옹은 샤헨 군단의 좌익에 주력을 투입하여 이 방향으로 진격 중인 요르크 군단과의 연결을 차단하고, 고립된 샤헨 군단에 나머지 병력을 밀어 붙여서 섬멸하기로 전략을 구상했다. 이 전략을 성공시키기 위해 프랑스군 좌익 부대를 철수시켰다. 샤헨 군단이 프랑스군 진지의 약점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우익에 병력을 집중시키도록 유인한 것이다. 동시에 프랑스군 우익에 네이 원수의 1 예비군단, 중앙에 근위대를 배치하여 요르크 군단이 전방에 도착하면 대치하도록 예비대도 확보하였다.
제국 근위대를 사열하는 나폴레옹
프로이센 샤헨 군단은 나폴레옹의 구상 그대로 움직였다. 프랑스군 좌익 부대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병력을 모아서 공격해 들어가서 쿠르몽을 점령하였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군 우익의 네이 원수는 샤헨 군단의 좌익을 공격하여 오트 에핀느를 점령하였고 양쪽 모두 한손을 상대 어깨에 걸친 상태였다.
몽미렐 전투 전역도.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의 전략에 의해 프랑스군 좌익으로 깊숙히 들어온다.
몽미랄에서 이 전황을 보고 있던 나폴레옹은 샤헨 군단의 중앙이 취약할 것을 간파하고 대기하고 있던 예비대를 동원하여 정면 돌격을 명령했다. 근위대를 동원한 프랑스군의 회심의 일격은 샤헨 군단의 전열을 붕괴시켰고 샤토 피에리 방면으로 도주하도록 만들었다. 요르크 군단이 뒤늦게 도착하여 전장에 합류하려고 해도 이미 중요 거점인 오트 에핀느가 점령되어 합류할 수 없었고, 샤헨 군단이 패주하자 숫적 열세로 대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후퇴하였다.
몽미렐 전투
나폴레옹은 샤헨 군단을 공격하여 적군에 사상자 4천명, 포로 800명의 손실을 입히고 대포 26문을 노획하였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2천명이었다. 이것이 6일 전투의 두번째 전투인 몽미렐 전투다.
몽미렐 전투 이후 전역도
그날 밤을 오트 에핀느에서 보낸 나폴레옹은 1814년 2월 12일, 샹포베르 동쪽 에토쥬 방면에 적의 움직임이 없다는 6군단의 보고를 받고 오전 9시에 샤헨 군단과 요르크 군단을 추격하여 샤토 피에리로 진격했다. 이때 프랑스군 선발대는 네이 원수가 지휘했는데, 프로이센 요르크 군단이 샤토 피에트리 인근 고지에 두개 여단으로 각각 전열을 구축하고 좌익에 기병대가 배치된 것을 확인했다. 당시 선발대에는 근위 기병대가 배치되어 있는데, 먼저 프로이센군 기병대에 두차례 돌격하였고 동시에 보병 부대가 진격하였다.
요크 군단을 따라잡은 프랑스군
근위 기병대는 프로이센 기병대를 밀어붙였고 요르크 군단의 보병은 측면의 보호막이 사라졌다. 프랑스 근위대를 포함한 네이 원수의 공격에 프로이센군은 버티기 힘들었고 샤토 피에리에 있는 마른 강을 건너는 다리로 후퇴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기병대가 이들의 배후를 감쌌고, 이를 본 연합군은 대오가 붕괴된 채 교량으로 패주하였다.
샤토 피에리 전투
나폴레옹은 그대로 병력을 진격시켜서 요르크 군단의 남은 병력 전부를 섬멸하기를 원했지만, 마침 프로이센 포병대가 샤토 피에리 건너편에 배열된 상태였다. 이 포병대가 프랑스군을 견제하여 요르크 군단의 전멸을 막았다. 그러나 요르크 군단의 손실은 3천명이 넘었고 14문의 대포를 노획당한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500명이었다. 이 전투가 6일 전투의 세번째인 샤토 피에리 전투다.
나폴레옹은 1814년 2월 13일 아침에 슈바르첸베르크 원수가 노쟝을 공격하고 몽트르로 진격 중이라는 2군단장 빅토르의 보고를 받는다. 예상 외로 슈바르첸베르크 원수가 강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이참에 블뤼허 원수의 부대를 완전히 섬멸한 뒤에 슈바르첸베르크를 상대하기로 결정한다. 모르티에 원수의 제2 예비군단을 요르크와 샤헨 군단 잔병들에 대한 견제 부대로 남겨놓은 나폴레옹은 2월 14일 새벽 3시에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블뤼허 원수의 남은 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몽미랄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프랑스 근위 기병대
블뤼허 원수의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이 후위 부대로 남겨놓은 마르몽의 6군단을 서쪽으로 밀어붙이면서 보샹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블뤼허 군이 진격하기에 앞서 보샹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프랑스 6군단을 추격하느라 여념이 없던 블뤼허 군을 일거에 공격하였다.
프로이센군은 보샹 근처에서 후퇴하던 6군단이 다시 뒤로 돌아서 공격하는 것에 놀랐지만 보샹 마을을 중심으로 대열을 유지하면서 프랑스군의 공격에 버티려고 하였다. 마르몽 원수의 공격은 처음에는 프로이센 방어에 저지되었지만 측면을 공격한 그루쉬의 기병대와 네이 원수가 지휘하는 근위대에 힘입어 프로이센군을 보샹에서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보샹 전투
블뤼허 원수는 계속해서 버텨보려 했지만 프랑스군 후방에 '비바 랑펠로 (황제 만세)' 라는 함성 소리를 듣고 나폴레옹 본대가 전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나폴레옹 후위대를 상대할 생각이었던 블뤼허 원수는 병력을 동쪽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그루쉬의 기병대가 이미 프로이센군 후방으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막았고, 프랑스군은 근위대를 포함한 전병력이 프로이센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폴레옹 본인도 청년 근위대와 같이 전방에 진출하여 프랑스군의 공격을 독려하였다.
그루쉬
나폴레옹의 마지막 원수였으며, 기병전의 전문가였다.
당시 기병대를 지휘한 그루쉬 장군은 비록 워털루 전투로 인해 대중에게 무능한 장군으로 낙인찍혔지만 기병전의 전문가였다. 프로이센군의 퇴로를 감싸면서 적의 고립된 치텐 여단을 나머지 본대와 차단하였고, 치텐 여단은 그루쉬 기병대의 맹공에 방진이 무너지면서 2천명의 포로가 발생한다. 프로이센 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추격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랑스 흉갑 기병대
블뤼허 원수는 샹포베르, 에토주를 지나 점점 동쪽으로 후퇴하였다. 프랑스군의 추격은 지독하였고 블뤼허 원수는 애초에 에토쥬에서 병력을 추스려서 방어전을 펼치려고 했으나 그럴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러자 블뤼허 원수는 에토쥬 인근 숲속에서 직접 전방에 나타나서 포로가 될 위험을 무릎 쓰고 부대를 고취시켜서 프랑스군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포로가 되기 직전에 빠져나온 블뤼허 원수는 예비대로 남겨놓은 러시아군과 합류하여 한시름 들렸고, 그날 밤이 되도록 프랑스군의 추격에 시달리면서 병력을 밤새도록 샤롱으로 후퇴시켜야 했다.
보샹 전투 후의 양군 배치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지독할 정도의 기병 추격전을 통해 2만의 블뤼허 군에 1만명의 손실을 가하고 15문의 대포와 10기의 군기를 노획한다. 프랑스군의 손실은 불과 600명이었다. 이 전투가 6일 전투의 마지막인 보샹 전투이다.
보샹에 있는 전승 기념비
나폴레옹은 1814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약 6일 (보샹 전투의 다음날 야간 추격까지 포함해서)의 기간 동안 자신의 병력 3만명을 동원하여 블뤼허가 지휘한 연합군 12만명 중에 17,750명을 격파하였다. 이 기간에 입은 프랑스군의 손실은 3,400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우세한 적의 병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서 신속한 기동으로 분산된 적군을 각각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 6일 전투는 역사학자에 따라서는 '나폴레옹 최고의 걸작'이라 불린다. 나폴레옹은 27세의 나이에 이탈리아 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에 멘투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3방향으로 에워쌓자 하루 동안 말 5필을 바꿔타면서 필사적으로 명령을 분산된 각 부대에 전달하고 병력을 배치하여 적군을 하나씩 격파한 적이 있었다. 6일 전투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지 10년 뒤에도 그때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위 승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적의 배치를 간파하는 통찰력과 요지를 파악하고 장악하는 신속한 결단력, 그리고 우세한 적의 한복판에 들어설 수 있는 용기였다.
나폴레옹
잠시 초심을 잃었지만 과거의 감각을 되찾은 그는 불행히도 이 전역을 프랑스 최종적인 승리로 바꾸지는 못하였다.
출처 ; http://www.lesbatailles.com/page22/page28/page28.html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Vauchamps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C3%A2teau-Thierry_(1814)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ampaubert
나폴레옹 전쟁 - 근대 유럽의 탄생 : 그레고리 프리몬, 반즈 토드 피셔 저
나폴레옹 대전략 : 안용현 저
첫댓글 황제 폐하를 위해! 비바 랑펠로!!!
비교하자면 흥남철수작전(솔직히 비교가 안되긴 하지만)과 같은 퇴각전에서의 승리였군요......
햐~ 아무리 중국보다 작은 곳이라지만, 저걸 일주일내에 ...ㅎㄷㄷㄷㄷㄷㄷㄷ
사실 나폴레옹 정도면 먼치킨급이라는 느낌이...... ㅎㄷㄷㄷㄷ
저때 연합군과 강화조약을 맺었으면 퇴위를 면했을 텐데, 예상외의 대승에 유리한 조건을 고집하다 강제패위당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