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연인' 마리 테레즈 (Marie Therese Walter) / 사진 〈Bing Image〉
미소가 나를 택할 때
강 순 (1969~)
서랍을 뒤질 때마다 서로 다른 얼굴들이 손에 잡혀 오늘은 다정한 얼굴을 뒤집어쓰기로 해 서랍에 갇힌 얼굴들은 깊은 복도를 지나 서로의 밀실을 백 개쯤 두고 있어 밀실에는 끝없는 잠이 숲속으로 쏟아져 흰 눈처럼 소복이 쌓이는 잠을 밟고 걸어가면 나는 삼백 년 동안 밀린 빚을 갚는 마녀, 검은 얼굴을 감추고 웃다 보면 점점 하얗게 되어 가 온통 하얀 숲이 내 전생일지 모른다는 생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도 된다면 며칠쯤 서랍 속에서 울음으로 양탄자를 만들래 오늘은 어제의 컴컴한 복도를 지나 다정한 얼굴이 나를 붙드네 미소가 나를 택하면 나는 죽은 사람의 머리를 내밀어 미소를 뒤집어쓰지 늑대와 악어들을 문밖에 두고 오늘도 안녕? 오늘의 얼굴을 다시 갖다 놓을 때까지 당신도 안녕? 안녕이라는 새 언어를 배운 지 삼십 일 정도 되어 가
-『경향신문/詩想과 세상』2023.02.27. -
책상 서랍에 ‘자존심’을 넣어두고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문을 나서면서 ‘이제 난 내가 아니다’ 하며 자기 암시를 했다. 자존심을 빼놓고 왔으므로 직장에서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다. 어쩌면 ‘가면’을 쓰고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얼굴 위에 ‘또 다른 나’로 진정한 내 모습을 감춘 채. 시인도 힘든 시기를 겪고 있나 보다. 서랍에 “서로 다른 얼굴들”을 넣어두고 꺼내 쓴다. 시인은 “다정한 얼굴”을 골라 쓰고는 따뜻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행복한, 사랑스러운, 신난, 멍한, 화난… “서랍에 갇힌 얼굴들”은 차마 꺼내보지 못한 사연을 안고 밀실에 잠들어 있다. 모든 사연을 풀어놓으면 “삼백 년”쯤 걸릴지도 모른다. 가까이는 집안, 멀리는 세상이 들썩일 수도 있다. 시인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마녀’를 떠올린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잠과 살아도 산 것이 아닌 현실. 며칠쯤 울고 나서야 “늑대와 악어”가 득실대는 문밖으로 나선다. 출근 한 달쯤, “안녕”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다.
〈김정수 시인〉
Junhong Kuang - 3 Morceaux, Op. 65 I. Fantaisie hongroi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