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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과 그를 돕는 레위인
민 3:1-13
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는 이러하니라
2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
3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제사장을 돕는 레위 사람
5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6 레위 지파는 나아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7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8 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맡아 지키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성막에서 시무할지니
9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10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민 3:1-13 / [아론의 아들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실 당시에 아론과 모세에게는 다음과 같은 아들들이 있었다. 2) 아론에게는 맏아들 나답을 비롯하여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 등 네 아들이 있었다. 3) 이들은 다 기름부음을 받고 제사장에 임명되었다. 4) 그런데 이들 가운데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여호와께 분향제사를 올리다가 시내 광야에서 죽었다.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들의 아버지 아론을 도와 제사장 일을 보았다. 5) [레위인들을 제사장으로 삼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6) `레위 지파 사람들을 불러다가 제사장 아론의 일을 거들어 시중들게 하여라. 7) 그들은 성막에서 일을 보는 자들로서 아론이 할 일과 이스라엘 공동체 사람들이 할 일을 만남의 장막문 앞에서 거드는 직무를 맡는다. 8) 그들로 하여금 성막에 딸려 있는 여러 가지 기구와 부품들을 맡아 잘 관리하며,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에 와서 해야할 일들을 잘 거들도록 하여라. 9)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후손 밑에 두어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제사장 일을 볼 때 거들도록 하여라. 10) 또 너는 아론과 그 후손들이 제사장직을 맡아 일하게 하여라.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맡아보겠다고 나섰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11)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르셨다. 12)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레위인들을 특별히 골라 세워 너희의 맏아들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러니 레위인은 당연히 내 것이다. 13) 내가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 낼 때 처음 난 것은 모조리 죽이지 않았더냐? 그때 내가 이스라엘의 맏배는 사람이건 가축이건 거룩하게 구별하여 죽이지 않고 내것으로 삼았다. 그러니 내가 맏배를 대신하도록 골라 세운 레위인은 모두 내것이다. 나는 여호와이다.'
3-4장에서는 구별되어 이스라엘의 종교 업무를 담당할 레위인의 계수와 규정이 주어집니다. 본문은 제사장 가문의 소개와 구별하신 근거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론의 아들들(1-4) 제사장 가문인 아론의 아들들이 소개됩니다. 아론의 네 아들 모두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네 아들 중에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자식도 없이 죽습니다(4). 네 아들 모두 직분을 받았지만, 직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자세는 달랐던 것입니다. 이들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제사장 직분을 받은 것은 자격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결정으로 되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직분도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레위인의 직무(5-10) 레위 지파는 아론 밑에서 아론의 일을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6). 제사장은 제사장 가문에서 이어졌고, 일반 레위인들은 제사장의 협력자가 되어 제사장 직무를 도왔습니다. 이들은 회막의 모든 비품들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일(8), 이동할 때 이것을 옮기거나 설치하는 일, 일반 백성들이나 외인이 회막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일 등을 담당하였습니다(10).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준비를 돕는 등 회중의 일도 도왔습니다(7). 회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레위인은 이러한 회막을 지키고 보존하며 제사장과 일반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돕는 귀한 직분을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레위인(11-13) 하나님은 레위인을 택한 것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는 처음 태를 열고 나오는 자, 장자를 뜻합니다(12).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들을 영적인 장자로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을 자신의 소유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는 열두 아들 중 장자가 아니라 셋째입니다. 열두 지파 중에 숫자도 가장 적었습니다. 이처럼 레위인들이 특별한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전적인 은혜로 이들을 택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직무를 허락하셨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택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도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맡겨진 직분을 감당한다면 어떤 은혜가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의무는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구별해 부르셨습니다. 거룩한 성도로 부르셨을 때에는 거룩한 겉모양만 지닌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혹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도 죄의 유혹에서 단호하고 분명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 설 교 >
너는 내 것이라
민 3:11-13 / 이강헌 목사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들을 다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온 우주만물을 다 가지고 계시지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주장하시고 그 소유에 손을 댔다 하면 가만 이 놔두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물질의 십분의 일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십분의 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모세시대에 가면 십일조라고 말이 바꿔지게 됩니다. 그것은 세금의 의미가 들어있고 강제성이 들어있습니다. 십분의 일은 자율성입니다. 열중의 하나는 마찬가지이지만, 억지로 강제로 세금 의식으로 내느냐, 아니면 감사함으로 내느냐, 이것이 다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시간의 칠분의 일입니다. 일주일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칠분의 일은 구약에서는 안식일로(시118편, 주의 날), 신약에 보면 거룩한 주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날은 다른 일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날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손을 대면 하나님께서 가만 안 놔두십니다.
세 번째는 만물가운데 예수의 보혈을 기초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도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도 말하고,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도 하면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주장하십니다. 그래서 거기에 손을 댔다 하면은 모두가 가루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에 손대지 않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주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닳은 유일한 존재인 인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예수의 보혈로 값 주고 사신 백성들을 향하여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방향으로 가면 때리기도 하시고, 또 경책하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시다가 정 말을 안 들으면 저 위에로 바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으니 여러분이 소유권을 주장하시지 마십시오. 주님 앞에 나와서 주여! 했으면, 집에 가서 나여! 하지 말고 집에서도 주여!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백성을 누가 건드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척결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해 가시는 과정을 오늘 성경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이 세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택하셨다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선택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선택에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선택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시기와 장소와 방법, 남성과 여성 등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의 여지가 없고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장자
즉 처음 난 자는 다 하나님 것이다 말씀하시면서 첫 번째 아들이 아닌 세 번째 아들 레위를 가리켜서 ‘너는 내 것이다’ 하고 선택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레위인은 자기가 선택 받은 것을 가지고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선택해 주신 분께 감사하며 찬송하며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이 본분이 되는 것입니다. (롬 8:29-30) 신앙생활을 하다가 내게는 왜 이렇게 환란과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 많은가 하면서 혹시 마귀가 와서 여러분들을 요렇게 조렇게 흔들고, 유혹하고, 쓰러뜨리려고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예수님의 보혈로 기록되었으므로 성경을 짜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성경은 십자가의 나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문을 열면 예수님이 걸어나오십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하늘의 높고 높은 보좌와 그 모든 영광을 스스로 비워 놓으시고, 이 땅에 낮고 천한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서 피 한 방울, 땀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기지 않으시고 다 쏟아 버리시고 우리를 억만 죄와 허물에서 건져내시고 구속 곧, 죄사함을 주셨으니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과정 가운데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레위인이 하는 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양의 목을 따고, 소의 목을 자르고 배를 자르는 계속해서 칼을 쓰는 일을 합니다. 칼을 너무 잘 쓰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칼잡이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와, 대속의 은혜와, 성결의 은혜는 이렇게 이루어갑니다. 우리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허물 많고 죄 많은 인생들을 불러주지 아니하시면 갈 곳이 없을 것을 아시고, 세상에서 왕따 당하고 원한 때문에 잡혀 죽을까봐 하나님의 성 전, 하나님의 소유인 하나님의 성막 안에다가 갖다 놓으시고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은 은사와 은혜를 주셔서, 찬양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더 잘하게 만드시고, 춤 잘 추는 사람을 더 잘 추게 만드시고, 하나님은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은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욕망을 선교하는 열정으로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이 지나간 자국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남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남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대속하시고, 선별하셔서 쓰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 멘.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민수기 3:1-3 / 이한규 목사
<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라 >
본문 1절에서 아론의 아들을 언급하면서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라고 표현한 것은 모세도 아론과 함께 레위 지파의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왜 ‘모세와 아론이 낳은 자’라고 하지 않고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라고 했는가? 아론이 모세보다 3살 많고 초대 대제사장으로 레위인 전체를 이끄는 종교 리더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론 자손들은 제사장이 되었지만 모세 자손들은 제사장를 보필하는 일반 레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론과 모세만 비교하면 모세가 절대 권력자지만 제사장 직임은 아론 가문에 맡겨졌기에 아론이 모세보다 앞에 기록되었다. 모세의 후대 명단은 역대상 23장 14-17절에 나오는데 그들은 평범한 레위인으로 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세는 정치권력을 가졌고 아론은 종교권력을 가졌다. 모세는 종교권력은 하나님의 뜻대로 아론의 아들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계승시켰지만 정치권력은 자기 아들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에게 계승시키지 않았다.
모세는 공과 사를 구분해 두 아들을 철저히 교육했을 것이다. “게르솜! 엘리에셀! 너희는 제사장에 임명된 사촌 엘르아살이 제사장 직분을 잘 행하도록 겸손히 섬겨야 한다.” 또한 손자인 스브엘과 르하뱌도 그런 겸손한 섬김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섬기는 리더십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리더는 이끌며 섬겨야지 끌려가며 섬기면 안 된다. 리더는 팔로워를 잘 이끌면서 섬기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라. 거룩한 직분을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도구로 삼으면 안 된다. 그저 자신의 거룩한 직분에 대한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이 미래도 책임져주시고 자녀도 책임져주신다. 하나님 일을 하면서 생활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말라. 물론 열심히 사역하지 않으면 공급이나 후원이 끊길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책임이다. 그러나 열심히 사역하면 하나님이 책임지고 필요한 동역자와 후원자를 붙여주신다.
<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
아무리 위대한 사역자도 혼자 일하면 탈진한다. 엘리야는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탈진했다. 그때 하나님게서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7,000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셨다. 누구에게나 동역자가 필요하다.
필자가 1992년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 목사로 한국에 교회를 처음 개척했을 때 많이 외로웠다. C&MA는 19세기에 무디와 함께 미국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던 심슨(Simpson), 20세기 중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저술가 토저(Tozer),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배출했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교단 설명이 쉽지 않았다. 당시 C&MA가 이단이 아닌 건강한 교단임을 알리는 몸부림은 절실했다.
그나마 C&MA 창시자인 심슨이 지은 찬송가 <어저께나 오늘이나>,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네 병든 손 내밀라고>가 잘 알려진 찬송이었기에 C&MA를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목회가 쉽지 않아 인터넷 말씀 사역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점차 동역자와 후원자가 생기면서 사역의 외로움이 덜어졌고 마침내 2014년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월새기> 사역이 잘 지속되려면 매월 상당한 재정이 필요한데 지금까지 6년 이상 발행된 것이 기적이다.
선교는 예수님의 최후의 지상명령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세상 끝도 온다. 그 소중한 선교 사명을 혼자 감당할 수 없기에 동역자가 필요하다. <월새기> 문서선교 사역은 누군가의 동역과 후원이 없으면 지속시킬 수 없는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필요를 채워주셨다.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면 누군가 도울 마음을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물론 하나님도 지켜보신다. 심은 대로 거둔다.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생활도 책임져주시고 앞날도 책임져주실 것이다.
거룩한 삶을 삽시다
민 3:1-4 / 이삼규 목사
우리 사위 노서방은 복숭아에 알러지가 있습니다. 복숭아를 만지기만 해도 알러지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복숭아를 먹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알러지란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나 세균을 공격해야하는 면역계가 과민해져 보통의 일반 세포들까지 공격하는 과민반응을 말합니다.
우리 거룩하신 하나님도 죄에 대해서 이런 알러지 반응보다 더 큰 혐오감을 가지시고 계십니다. 거룩이란 면역체계와 같습니다. 죄란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든 행실에 거룩이라는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죄라는 바이러스가 서성거리기라도 하면 알러지 반응을 즉각 일으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이 죄를 가까이 하게 되면, 고통스런 알러지 반응을 합니다. 거룩하면 알러지 반응 때문에라도 죄에서 스스로 멀리 떨어지게 됩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보면, 아예 죄가 있는 곳은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서는 요셉과 같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죄악에 가까이 다가가도 알러지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거룩이라는 면역체계가 없기 때문에 알람이 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죄악 때문에 죽고 말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자가 거룩한 것을 만지면 거룩한 불에 의해 소멸되고 맙니다. 부정한 자가 거룩한 것을 만지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아론은 대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 네 명도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레위기 10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레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레 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위인들이 거룩한 직분을 맡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레위인들은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손을 총칭하는 용어로, 레위인은 금송아지 사건을 계기로 회막에서 제사장을 돕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모세의 부름에 응답한 레위인은 자기의 친구와 이웃을 칼로 쳐 죽인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대한 헌신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치셨을 때,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자손의 집에 묻은 피를 보고 넘어감으로 이스라엘의 초태생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초태생을 “내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각 집마다 장자를 회막으로 보내야 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을 계기로 헌신하게 된 레위인은 모든 초태생을 대신해 제사장에게 온전히 맡겨져서 시무하게 된 것입니다. 레위인의 중요한 임무는 두 종류의 경비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을 때에 성소를 경비하는 일, 그리고 진이 이동 중에 있을 때 성막의 기구들을 이동하고 경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전이 세워진 후에는 경비하는 일로 문지기와 찬양하는 찬양대 그리고 제사장을 도와 제사를 준비하는 일들 다양하게 봉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레위인들의 우두머리로 거룩함에 더욱 본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기 9장을 보면 8일 째에 대제사장으로 위임받은 아론이 대제사장으로서 최초로 드린 제사를 여호와께서 받으시고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10장에는 아론의 장자인 나답과 차자인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는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 3: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이것은 비극적인 사건의 회상입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여기에서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레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다가 직면할 수 있는 죽음의 위험성을 암시하기 위한 의도인 것입니다. 죽음에 관한 언급이 3, 4장에 여러 차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특별히 레위지파를 구별해 계수하시고,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대신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구별해 세우셨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말씀(명령)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민 3: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
나답과 아비후가 죽임을 당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 10: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제사를 번제단에서 드렸습니다. 번제단에 내린 불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내린 불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번제단의 불은 절대로 꺼뜨리면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불로 제사도 드리고 분향할 때 향도 태워야 합니다. 다른 불은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레 16:12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의 제사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인간적인 생각을 따랐습니다. 이것을 소위 “편리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불을 피우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꼭 번제단의 불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불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편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번제단의 불이 아닌 일반 불을 사용하여 분향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행위였습니다. 불경건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자신의 생각과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린 이유는 하나님의 중한 말씀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지키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변형한 것입니다. 불을 안 드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사 자체보다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으로서 거룩한 겉모양을 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과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성도로 구별해 부르셨습니다. 세상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전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겉모양만 지닌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죄입니다.
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거룩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레 10:3 /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아비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레 10:2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죽었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특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론은 하루아침에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것도 장자와 차자입니다.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그런데 모세는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무엇을 명합니까?
레 10:6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레 10:7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아론과 남은 아들들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노를 당하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도 미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레 10:8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 10: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레 10:10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레 10:11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나답과 아비후가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음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 후에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야 죽음을 면하리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술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술에 만취해 있으면 분별이 되겠습니까?
한 사제가 자신이 과거에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한밤중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 미사 시간에도 큰 대자로 뻗어 있었을 정도로 중증이었습니다. 최근 알코올 중독에서 치유돼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을 펴낸 가톨릭알코올사목센터 소장 허근 신부입니다.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좋은 친구들을 만났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맑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 때 술을/마시지 않았더라면/하느님을 좀 더 사랑했을 텐데.
최근 <그때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을 낸 허근 신부(50). 성직자인 ‘신부’라는 신분으로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던 그가 치료를 통해 정상인이 된 후 그 시절을 참회하면서 솔직하게 쓴 글들을 시집으로 엮은 것입니다.
“광주에서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을 때 그동안의 나를 뒤돌아보면서 반성을 많이 했죠. 술에 의지하며 살았던 나날들과 신부로서의 참회를 조금씩 글로 남기기로 했죠. 이 시들이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없었기에 현재 자신이 술을 마시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모세의 기적’에 버금가는 기적이라고 허신부는 스스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제도 알콜 중독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어떻겠습니까? 술에 취해 있으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분별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술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민 3:10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외인이 함부로 성소에 들어오면 죽일 것을 명하셨습니다. 외인이란 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제사장 이외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명령을 어긴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성막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어서 죄악으로 더러워진 인간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을 구별해서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입니다.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레위인은 이스라엘 장자를 대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인은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별된 제사장 외에 다른 사람이 가까이하면 죽는다는 것은 순결함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순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백성으로서 작은 악에도 물들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세상에서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고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혹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죄의 유혹에는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순결한 삶이요 거룩한 삶입니다.
안데스 산맥 남부 지역인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선에 가면 거대한 빙산과 만년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웁살라 빙산은 폭이 3㎞, 길이가 60㎞, 높이가 60∼100m에 이르는 거대한 빙산입니다. 떨어져 나온 빙산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떠돌기도 하는데, 그 빙산 틈틈이 푸른 비취빛이 퍼져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빙산에서는 비취옥보다 더 영롱한 빛이 퍼져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거대한 얼음덩어리는 흰빛과 푸른빛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빛깔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빛깔입니까? 무엇보다 성도는 성결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빛을 받아야만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깨끗함이 거룩이요, 거룩이 곧 성결입니다. 거룩한 빛을 받은 자는 언제나 푸른빛 희망을 바라보며 노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류의 희망이 되심을 노래합니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것이라
민수기 3:1-51 / 석기현 목사
고등학교 때에 제 친구 하나가 "자기 애인한테 '넌 내 꺼야.'라고 하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하는 줄 아니?"라고 제게 질문을 해 왔습니다.
제가 "그거야 'You are mine.'이라고 하면 되지 않니?"라고 대답하자 그 친구가 말하기를 "그런 식으로 말하면 여자한테 뺨 맞아. 그런 경우에는 'You belong to me.'라고 해야 되는 거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너는 나의 것'이라고 소유대명사를 써서 말하는 것은 마치 상대방을 무슨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이며, 반면에 '너는 내게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고상하고 점잖은 표현이라는 것이 그 친구의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에 가서 좀 살다보니 미국의 연인들 사이에서는 그 '넌 내 꺼야.'라는 식의 표현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그런 말이 매우 정답게 들릴 수 있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You are mine.'이라고 하든지 'You belong to me.'라고 하든지 간에 하여튼 상대방을 자기의 소유물처럼 여긴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사람 사이에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그 말을 지극히 당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이 딱 한 분 계시는데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수양회 표제 등으로 흔히 쓰이는 이사야 43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것이라"는 저 유명한 선언을 내리고 계시는데, 이 말씀의 영어 번역 역시 'You belong to me.' 정도가 아니라 'You are mine.'인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리켜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에 지나친 큰 실례가 될 수 있지만, 창조주이시며 생명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리켜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입니다.
민수기의 첫 두 장을 통하여 이제 막 가나안으로 본격적인 행군을 시작하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계수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3장에 와서는 조금 특수한 계수를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레위인으로 일 개월 이상 된 남자"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남자로 일 개월 이상 된 자"를 계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따로 계수하는 이유를 가리켜 그들이 다 "내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남자'들을 계수했던 앞의 인구조사와는 달리, 이 3장에서 계수함을 입은 자들은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 곧 성막을 중심으로 섬기는 직분에만 완전히 헌신하도록 구별된 사람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내년에 교회설립 제40주년을 맞이하면서 장로, 집사, 권사 임직을 계획하고 있으며, 지난 주일의 당회에서는 그 후보자 추천을 확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공동의회를 통한 직분자 피택 선거를 한 주일 앞두고 있는 이번 주일에 저와 여러분은 이 '레위인의 계수'를 통하여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구별하여 부르실 때에 과연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순종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교회의 직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레위 지파 가운데 아론 자손이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은 경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사실입니다.
본문 1절로 4절에 "1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아론과 모세의 낳은 자가 이러하니라 2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 3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을 발리우고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4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었고 무자하였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 아비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10절에도 "10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의 형인 아론은 족보를 따지면 레위의 증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성막을 섬기도록 특별히 계수함을 입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오직 이 "아론의 아들들"과 그 후손만이 제사장의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임명을 받을 때 "기름을 발리운" 것은 구약에서 오직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 이 세 직분에만 해당되는 특별한 절차로서 곧 그들이 "거룩히 구별된" 존재임을 상징했습니다.
즉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완전하게 하나님께만 속한 존재,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위해서만 순수하게 사용된 존재로 구별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들을 가리켜 "위임받은" 제사장들이라고 했는데, 이 '위임받다'라는 히브리어의 문자적 의미는 '손에 채움을 받다'입니다.
즉 그들이 제사장으로 임명받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채워 주셨다'는 사실과 동격이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의 전 인생을 '제사장이라는 직분'으로 완전히 빼곡하게 채우셨으니 이제는 결코 되돌릴 수도 없으며 결코 다른 일거리가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고 결코 다른 목적으로 오용될 수도 없는 가운데 오직 '거룩한 책임'만 남아 있을 뿐인 것이 바로 '위임받은' 자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처럼 특수하게 임명을 받았으니만큼 그 책임 수행 여부에 대한 심사도 가장 엄격히 적용되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비록 초대 제사장 멤버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다른 불" 즉 번제단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함부로 사용한 죄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임'을 받은 제사장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와 방법을 따라 자신의 직분을 수행해야 함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은 '불은 다 같은 불인데 무슨 차이가 있을까?'하고 자기네들 편한대로 행하다가 즉각 징벌을 받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고귀한 직분에 대한 자각과 책임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였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통해 직분을 받게 될 때, 비단 목사뿐 아니라 장로나 집사나 권사 역시 그와 똑같은 자각과 책임의식을 반드시 가져야만 합니다.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든지 교회에서 목사를 통해 장로나 집사나 권사로 임명을 받았든지 간에 모든 '거룩한 직분'은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손에 목사의 일을 채워 놓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손에 장로, 집사, 권사를 비롯해서 심방장, 구역장, 주교교사, 찬양대, 주차봉사위원 등의 사명을 빼곡하게 채워 놓으신 분 역시 오직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지금 자기 집안의 급한 일을 시간 내에 마치기 위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판인데 옆집 사람이 무슨 일을 좀 도와달라고 한다고 해서 자기가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떠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목사로서, 장로와 집사로서 반드시 완수해야만 할 일을 손에 꽉 채워 든 상태에서는 일단 그 일부터 마쳐야만 할 뿐인 것입니다.
친구한테 자기가 해 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일감까지 이미 받아왔는데 나중에 가서 그 일감을 되돌려 준다는 것은 차마 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어떤 사명이 일단 내 손에 채워진 후에 나중에 가서 발뺌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채워 주신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부터 먼저 하려는 사람이나 일단 자기 손에 이미 채워진 책임을 다시 하나님께 되돌려 주려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 손에 채워 주신 사명은 우리의 남아 있는 전 생애를 통하여 항상 '최우선'이 되어야 할 뿐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목사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직분의 사명 역시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손에 친히 가득 채워 주신 일인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교회의 직분을 수행하는 동안 그 어떤 경우에도 철저히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레위인이 바로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열두 지파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뽑힘을 받았습니다.
본문 5절부터 9절에 "5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레위 지파로 나아와 제사장 아론 앞에 서서 그에게 시종하게 하라 7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8곧 회막의 모든 기구를 수직하며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위하여 장막에서 시무할지니 9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돌리운 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11절과 12절의 말씀에도 "1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4절 이하에 이어지는 내용은 그 레위인을 종족을 따라 계수한 것이며, 39절에 가서 "39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 명이었더라"고 종합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앞서 이스라엘 전체 인구 조사를 했을 때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만 해당되었었는데, 레위인의 경우에는 "일개월 이상 남자"가 다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은 아예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성막을 섬기는 직분자로 성별되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에 계수된 총 인원은 "이만 이천 명"이지만 실제로 "회막에서 수직하며 시무하는" 일에 종사한 레위인은 유아와 노인을 빼고 나면 팔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전투 병력을 계수할 때와는 달리 이 레위인의 계수에는 갓난아이부터 은퇴한 노인까지 다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그들의 직분이 그야말로 '종신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비록 실제로 성막 일을 하는 기간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모든 레위인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론에게 온전히 돌리운" 자들로 구별되었고 "회막의 직무"라는 사명을 중심으로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특별하게 레위인을 "택하여" 놓으시고 아예 "내 것"이라고 못 박아 두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열두 지파 가운데 유독 레위 지파만 그처럼 철저하게 '당신의 것'으로 구별해 놓으신 것이었습니까?
그 기원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금송아지 사건' 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당시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목도하게 된 모세가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외쳤을 때 바로 "레위 자손이 다 모여" 모세에게 나아왔었습니다.
그리고 그 레위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스라엘 진 끝에서 끝까지 다니면서 우상숭배에 참여했던 자 삼천 명을 죽였었습니다.
그런 직후에 모세는 레위 자손들을 향하여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선포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레위 지파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하게 구별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원했던 자, 온 백성이 미혹당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하나님 편을 떠나지 않았던 자, 그리고 그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우상숭배 퇴치운동에 몸을 바쳐 앞장섰던 자였던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 레위인들을 '내 것'이라고 확실히 점찍어 놓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직분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매사에 그 하나님 편에 서 있어야 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안에 시험이 생길 때에 특히 직분자일수록 더욱 우왕좌왕하거나 편당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기도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가 외부로부터 도전이나 핍박을 당할 때에도 목사와 장로부터가 일사불란하게 하나님 중심의 판단과 언행으로써 약한 성도들 앞에 역할모델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교회를 지켜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시도 거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붙어 있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교회의 직분을 무슨 '딱지'처럼 여기면서 그것이 붙어 있는 동안만 겨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척하다가 그것만 떼고 나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해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슨 그럴듯한 직분이 주어져야만 좀 '하나님의 일꾼'으로 행세할 마음이 생기고 반면에 장로나 장립집사 선거에서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는 시험에 빠지고 마는 교인은 절대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는' 자일 뿐인 것입니다.
젊을 때나 늙었을 때나, 힘이 있을 때나 약해졌을 때나 상관없이, 교회가 형통할 때나 어려울 때나 변함없이 오직 항상 하나님 편에만 서서 섬기는 이 시대의 '레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교회의 직분을 통하여 몸의 헌신과 동시에 물질의 헌금으로써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원칙을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를 통하여 일러 주셨습니다.
40절부터 43절의 말씀에 "40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남자를 일 개월 이상으로 다 계수하여 그 명수를 기록하라 41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42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를 계수하니 43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를 계수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단 레위인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중에서도 '처음 난 자' 즉 장자들은 다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된' 즉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선언하신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당시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들을 죽이시던 그 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규례로서 바로 앞의 본문 13절에서 "13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설명하신 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원래의 원칙을 따지자면 각 가족의 장자들도 다 성막에 나아와서 평생을 풀타임으로 봉사해야만 마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에 '장자 한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봉사의 임무를 '레위인 한 사람'으로 "대속"하게 해 주셨습니다.
즉 레위인이 성소를 섬기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몸소 바쳐야 할 평생의 헌신을 대신하는 셈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져 볼 때 한 가지 차질이 있었는데, 그것을 바로 이어지는 44절 이하 51절에 "4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45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고 또 그들의 가축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취하라 레위인은 내 것이라 나는 여호와니라 46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삼 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47매명에 오 세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니라 48그 더한 자의 속전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줄 것이니라 49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으니 50곧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에게서 받은 돈이 성소의 세겔대로 일천삼백육십오 세겔이라 51이 속전을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장자 한 사람 당 레위인 한 사람씩 되어야 앞에 나왔던 '대속'의 계산이 맞아 떨어질 것인데, 문제는 이스라엘의 전체 장자의 수가 "이만 이천이백칠십삼 명"이었던 것에 반하여 레위인의 전체 숫자는 "이만 이천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46절에 밝혀져 있는 대로 "이백칠십삼 인"이라는 숫자의 차이가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취하는" 원칙을 따른다면 이 '이백칠십삼 인'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의무를 대속할 길이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남는 숫자의 매명 당 "오 세겔" 씩을 취하게 함으로써 그 모자라는 분량만큼을 "속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져야 할 장자가 2만 2천2백7십3명이니 레위인도 똑같은 숫자가 되어야 계산이 맞을 것인데 현실적으로는 2백7십3명의 레위인이 모자라니, 그 대신에 '5세겔 곱하기 273명'에 해당되는 "일천삼백육십오 세겔"의 "속전"을 그 장자들로부터 거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속전은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들에게 주어짐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성소를 위한 일에 쓰이게 되었습니다.
요컨대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자신이 직접 풀타임으로 성막을 위해 헌신할 수 없을 때 그 대신에 물질을 바침으로써 역시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레위인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자가 다 '하나님의 것'으로 선언된 이유는 그들 모두가 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하나님의 손을 통해 구원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의 보혈이라는 지극히 비싼 값을 치르고 사신 우리 모두는 두말할 것 없이 오직 '하나님의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평생토록 헌신해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다 '풀타임의 레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오 세겔'의 속전으로 대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바치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하라'는 멋진 표어를 내걸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평신도라 할지라도 바로 문서전도헌금, 선교헌금, 고려신학교 후원헌금 등의 물질을 바치는 '보내는 전도자'가 됨으로써 풀타임으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나 선교사와 꼭 마찬가지로 자신을 100퍼센트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능력대로 자신의 온 몸을 헌신하고 자신의 가장 귀한 물질로 헌금함으로써 진정 '하나님의 것'으로 영광스럽게 쓰임 받는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까 미국 사회에서는 'You are mine.'(넌 내 꺼야.)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네들도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면 'I am yours.'(난 당신 것이에요.)라는 말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나 미국에서나 세상 어디에서든지 자기의 연인으로부터 그런 고백을 듣게 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렇지 않으시겠습니까?
창조주이신 여호와께서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실 때에 피조물에 불과한 나를 당신의 양자로 삼아 주신 그 하늘 아버지께 '아멘,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응답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그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론의 아들들'과 '레위 자손'과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그처럼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구별하시면서 계수해 주시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역시 '너는 내 것이라'고 만세 전부터 이미 점찍어 주셨습니다.
'너는 내게 속한 자'라고, '너는 내게 완전히 바쳐진 자'라고 저 장망성에 속한 자들과 완전히 성별하셔서 당신의 팔 안으로 끌어당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하면 저와 여러분은 이제 그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내 손 안에 가득 채워 주신 일을 완수하는 '아론의 아들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특별히 위임 받은 직분을 기쁨으로 감당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거나 살짝 빠져 나가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를 당신 편으로 끌어당겨 주셨으니 이제 무슨 일을 당해도 오직 그 하나님 편에만 확실히 서 있는 '지조 있는 레위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교회 가장자리만 맴도는 어정쩡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교회 안에 자기가 서 있을 자리'를 확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몸으로, 때로는 물질로 자기 생명의 최고와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지도록 헌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도 물질도 쓰임 받지 못하는 영적 전신마비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정말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장로, 집사, 권사로 세움을 받는 사람을 바로 이처럼 '내 것'으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소명하고 계십니다.
'위임받은 아론의 아들들', '하나님 편에 선 레위인', '몸과 물질을 함께 드리는 처음 난 자' - 이처럼 자신의 인생 전부가 다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되고 헌신되는 피택 직분자들과 모든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복음의 제사장
민수기 3:1-3(P.196),로마서 15:15-16(P.259) / 이성희 목사
서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의 줄임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은 사람은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분을 함께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이십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특별히 구별된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레위 지파만 제사장이 될 수 있을 만큼 제사장직은 고결한 직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백성들의 희생제물을 제단에서 태워 번제를 드리므로 백성을 대신하여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이 주어진 이후, 즉 율법시대에는 레위지파 가운데서 아론 계열만 이 직을 담당하였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1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죄 사함을 받는 의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영원하고 유일한 참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한번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제사가 없고, 제단이 없고, 제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제사장이 되시고,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물이 되어 죽으신 십자가는 제단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14에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 한 구절에 가장 중요한 단어와 가장 중요한 일이 다 나옵니다. ‘한번’, ‘영원’, 그리고 ‘온전하게’란 말입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한번에, 영원히,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일하게 그리스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예배드리는 성도는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베드로전서 2:9에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의 일입니다. 마가복음 15:13에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고 합니다. 더 이상 성전에 휘장이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만 들어가던 그 지성소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일을 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다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직접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개혁자 루터는 ‘만인 제사장설’이라는 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회복하였습니다. 성직자만 제사장직을 할 수 있다던 로마교회의 설을 성경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영적인 경계선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제사장입니다. 목사도 하나님 앞에서 평신도와 똑 같은 성도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은 모든 성도가 제사장직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행성운동의 법칙’을 만든 천문학자 케플러는 “나는 자연이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표현입니까? 우리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한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복음의 제사장 직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잘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일꾼은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로마서 15:16 상반절에는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복음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제사장입니다. 바울만 복음의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세우신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일꾼은 종을 의미합니다. 일꾼은 주인이 일꾼으로 선택해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일꾼은 주인의 일을 하는 것이므로 일을 잘 했다고 일꾼이 칭찬을 받을 일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일꾼은 주인이 맡겨준 일을 잘하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합니다. 일꾼은 절대로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일꾼’이란 말은 헬라어로 ‘레이투르곤’입니다. ‘레이토스’라는 말은 백성이란 말이고, ‘에르곤’이란 말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일꾼은 이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일꾼은 백성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헬라어의 이 단어는 공직자를 의미하고 공적 관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하나님의 임명장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일꾼이 하는 일은 다양합니다. 누가복음 17:7에는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라고 합니다. 다시 8절에는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일꾼은 밭 갈기를 합니다. 양 치기도 합니다. 주방일인 조리도 합니다. 거기에다가 주인의 식탁을 섬기는 일, 요즘 말로 하면 ‘홀 서빙’까지 다 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주인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을 보세요. 그 일이 얼마나 다양한지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직장 일도 가정 일도 다 그리스도의 일꾼의 역할입니다. 선교사들도 직접 사람을 만나 복음전도를 합니다. 어떤 선교사는 교수로, 어떤 선교사는 의사와 간호사로, 어떤 선교사는 고아원을 경영하고, 어떤 선교사는 유치원을 경영하고, 어떤 선교사는 지역을 위하여 우물파기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복음전하는 일입니다. 어떤 일이든 목적은 한 가지, 복음전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이든 복음의 제사장으로 일해야 합니다. 복음을 빼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이런 것들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제사장 직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범세계적 직무인 것을 말합니다. 사도직은 ‘보편적 직분’으로 어느 교회에서나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그 이상으로 복음전파의 직무와 제사장적 성격의 직무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복음의 제사장으로 봉사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일이 구원의 메신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 죄를 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구원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어느 대지주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유언을 남겼습니다. “금괴를 밭에 묻어 놓았다. 잘 살고 싶으면 그것을 발굴하여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두 아들은 금괴만 발견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매일 온 밭을 열심히 파헤쳤습니다. 꽤 많은 날들이 흘렀지만, 실망스럽게도 금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은 금괴 발굴을 중지하였습니다. 얼마 쯤 지나자 시간과 공을 들여 파놓은 땅이 아까워 곡식을 심기로 하였습니다. 추수기가 되자 곡식들이 황금들을 이루어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일하기 싫어 놀고먹던 두 형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이 황금들판이 금괴이었구나. 아버지의 현명하신 유언이 우리를 훌륭한 일꾼으로 만들어 매년 얻을 수 있는 보화를 주셨구나!” 두 형제는 좋은 일꾼이 된 것을 감사하고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보화를 주시려고 일하게 하셨습니다. 복을 얻게 하시려고 일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부지런하게 하시려고 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까? 믿음의 보화를 주시려고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의 제사장이 되게 하시려고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구원을 받았던 강도에게 있었던 것이라고는 딱 하나, 회개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한 푼의 십일조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 1분의 경건 시간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평생 회당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행을 베풀지 않았을 것입니다. 찬송하며 예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의 회개와 순종이 구원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해거름 녘에 고용되었지만 여전히 하루치의 품삯을 다 받은 일꾼과 같습니다. 그는 은혜로 일꾼이 되고 감사로 갚은 사람입니다.
골로새서 1:25에는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바울도 실컷 율법적인 곁길을 갔고,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되어 복음의 말씀을 이루려고 전심을 다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복음의 제사장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복음전파의 대상은 영적 제물이 됩니다.
로마서 15:16 하반절에는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은 제사 드리기 위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제사장의 제물은 복음전파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제물’을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을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희생 제물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사장이 제물이 없으면 제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를 드린다면 참 제사장이 아닙니다. 복음의 제사장이 제물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도는 하는데 전도의 열매가 하나도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만한 제물이 있어야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영적 제물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와 오네시모입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지만 영적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던 자들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문안하라”고 한 많은 영적 제물이 있었습니다.
성전제사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등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인간의 헌신, 죄 사함을 위해 동물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제물은 양이 아니라 정성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물 드리는 것이 형식화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에서 성전에 낼 돈을 바꾸고, 제사에 드릴 제물을 사고, 흠이 없는 동물은 제물이 될 수 없었지만 이런 동물을 반액으로 사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런 성전제사를 보시고 예수님은 화를 내셨고, 장사꾼들을 다 내 쫓으셨습니다.
출애급기 23:15에는 “빈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성전에 물질을 드리는 것은 마음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마음이 없으면 물질은 절대 못 드립니다. 출애급기 34:20에는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데는 값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는 반드시 제물이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일 예배에 우리가 드리는 봉헌이 제물이지만 또 다른 제물이 있습니다. 영적 제물은 전도대상자이며, 주님께로 인도한 사람입니다. 전도하여 복음을 제시한 결신자 명단도 영적 제물입니다. 전도대상자와 결신자 명단을 잘 챙겨 하나님께 영적 제물이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신학자 반하우스는 현대에 ‘자폐증 크리스천’이 많음을 한탄하였습니다. 자폐증이란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증세를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이해하였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나만 믿으면 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제물이 있어 자폐증 크리스천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낚시를 좋아하는 남자가 낚시를 자주 가지만 고기를 잘 잡지 못 했습니다. 낚시를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는 아내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시장에서 고기를 사 가지고 가곤하였습니다. 한 번은 고기를 사러 시장에 갔는데 가게 주인이 “사모님이 시장 왔다 가시면서 오늘은 다른 고기로 사 가지고 오시래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고기를 잡지 못할 때 시장에서 사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기를 못 잡으면 낚시꾼이 아닙니다. 전도한 사람이 없으면 사람을 낚는 어부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2:33에는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고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나무는 땅만 버리니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4:23에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니”(디다스콘, 케륏손, 데라퓨온)이라고 합니다. 복음전파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며, 바울이 사도된 목적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목적입니다.
앞으로 가장 기독교에 도전적인 과제가 이슬람과의 관계일 것입니다. 무슬림의 삶의 이상은 이슬람국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그들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슬림들은 폭력으로 사람을 얻으려고 하고 나라를 얻으려고 합니다. 무슬림 한 사람을 얻기 위해서 폭력도 불사하는 집요한 노력을 합니다.
사막의 수도사인 카를로 카레토의 ‘사막에서의 편지’에 보면 카레토가 무슬림 소년인 압달라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압달라만은 끊임없이 카레토를 무슬림이 되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아무래도 무슬림이 될 것 같지 않으니까 압달라만이 카레토에게 와서 울었습니다. 회교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교도의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시간이 되면 여행 중에도 기도담요를 꺼내놓고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합니다. 이슬람은 잘못된 것도 많지만 그 열정만은 배워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믿는다는 것은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영적 제물인 열매를 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15세기말 피렌체의 조각가 아고스티노 단토니오는 멋진 조각품을 만들리라고 생각하고 거대한 대리석을 구해 왔습니다. 작업이 시작되자 여러 번의 시도를 해 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대리석을 방치한지 40년 후, 버려진 대리석이 미켈란젤로의 눈에 띠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덩이 속에 숨어 있는 웅장한 예술작품을 다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작품이 역사상 최고의 예술품으로 꼽히는 다비드상입니다. 아무리 죄에 오염되었을지라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숨어 있습니다. 그 순수한 형상을 끄집어 내줘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이며, 영적 열매입니다.
한 번 외쳐 보세요.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제사장은 정성이 필요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영적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고기를 못 잡는 어부가 되지 말고, 사냥 못하는 사냥꾼이 되지 말고 복음전파의 제물을 많이 얻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