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외 1편
이명덕
잘못 쓴 글자 하나 때문에
온 여백을 구겨버린 일 있다
잘못 쓴 글자는 폭력이 된다
백지 위에 글을 쓸 때마다
글자에 무슨 오물이 묻진 않았는지
어떤 미움과 회초리가
들어 있지 않나 살피게 된다
잘못 쓴 글자 하나가
신(神)을 욕보일 수도 있음을
객관을 주관으로
오묘하게 말하지 말 일이다
완벽한 주관은 객관으로 통한다고
설득하려 하지 말 일이다
그리하여 빼곡하게 들어찬
나의 글자들이 아름답게 배열을 이룰
한 편의 시와
잠언들
초록 발전소
도토리 한 알이
첫 쌍떡잎을 피워올립니다
새싹들이 딱딱한 햇살 뚫고
뾰족하게 돋아납니다
봄을 가동하는 초록의 발전소들이
힘차게 돌아갑니다
지구를 더 높이 더 멀리 돌리며
꽃 보라가 되는 제비꽃
전깃불 환해지듯 숲과 들판에 가득 찹니다
사람 머리로 돌리는 발전소엔
힘과 무력과 다그침이 있지만
식물들 발전소엔
순리와 섭리만 있을 뿐
숨결 소리 심장 소리 붙잡고
겨우내 쉬었던 두레박질을 준비합니다
꽃 피우려는 봄
초식동물들 배 불리는 봄
지구에 계절만 한 발전소가 있을까요
하루도 쉬지 않고 돌아
다시 하루를 만드는
우주에 지구만 한 발전소가 있을까요
― 이명덕 시집, 『당신에게 봄』 (문학의전당 / 2024)
이명덕
전남 화순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도다리는 오후에 죽는다』 『그 여자 구름과 자고 있네』 『스펑나무 신전』 『사당동 블루스』 등. 현재 한국시서울 문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