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은 봄을 위해 존재한다.
만들어낸 인연으로 만난 지 겨우 2번.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이름을 알게 된 최인우라는 남자.
'모텔'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고는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내 앞에 서있는 이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하지?
나이 서른에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남자아이에게 모텔을 가자는 제의를 받았다면, 나는 분명 이 남자아이에게
'나는 싸보이는 여자야' 라는 인식을 주었기 때문일까?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단 3번 밖에 보지 못한 내게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걸까?
기가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최인우라는 이 남자의 눈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1분 1초라도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어.
서로 눈싸움을 하다가 먼저 입을 뗀건 그 사람이였다.
"장난이야"
장난이였다며 웃어 보이는 남자.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던 말투였는데..
할 말이 없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마치 구세주라도 등장하듯 승우씨가 볼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인우라는 남자는 나와 승우씨를 번갈아 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의 음흉한 듯한 미소에 승우씨가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누구에요?"
"나중에 설명할게요. 나가죠."
승우씨가 바의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남자.
"이현아! 또 와!"
승우씨가 또다시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아무리봐도 나보다 어려보이는 앳된 얼굴이였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승우씨의 등을 떠밀어 바를 나가고서야 그 둘의 기싸움은 진정되었다. 허나, 이 남자 심기가 불편해보인다.
"아니 뭐, 머리에 피도 안마른 자식이!"
"하하.. 내일은 정상 출근이죠?"
"휴..네"
헤어지면서도 씩씩거리며 차에 오르는 승우씨. 태워다 준다는 그의 호의에도, 나에게 그 남자의 이야기를 물어볼까 걸어간다고 대답했다.
젠장, 아침에 신고 나온 구두는 여전히 미스. 밤이 된 탓인지 더 꽁꽁 얼어붙은 거리는 내 구두와 다리를 울게 만들었다.
아침에 이 살벌한 얼음판을 뒤뚱뒤뚱 걸어 온 내 자신에게 박수를 쳐 주며, 또 다시 집에 가는 길을 뒤뚱뒤뚱 걸어야 했다.
**** "자자, 점심들 맛있게 하자고." 대머리 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는 용도의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중요한 공고조차도 문자로 알려주지 않는 이 사람들과 친해지기란 쉽지 않다. 여자 사원들은 하나같이 새침떠느라 바쁘고, 남자 사원들은 이미 무리 지어 다니기 때문에 사이에 낄 수도 없다. 나는 오늘도 사무실을 오다 산 도시락을 꺼내 든다. 편의점에 도시락을 팔 생각을 한 사람에겐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 친구가 없어 점심을 굶을뻔한 나에게, 맛있는 점심 식사를 매번 제공해주고 있지 않은가! 조용한 사무실에서 '잘 먹겠습니다!' 라고, 속으로 외치며 젓가락을 든 순간. 나의 조용한 점심을 방해하는 남자. "김대리님" 몇분 전, 부장 옆에 찰싹 붙어 점심을 사달라고 졸라대는 이지은의 옆에 끼어 같이 나가던 승우씨였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왕따처럼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 장면을 들켜버리다니. 매일 고요한 식사시간을 즐겼는데, 오늘은 영 꽝이군. "예예" "혼자..드세요?" "아, 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있어서요" 서류는 개뿔. 미친 대머리 부장은 내게 서류따위를 맡길 사람이 아니였다. 서류라도 처리하는 척 하려고 했으나, 책상 주변에는 눈씻고 찾아봐도 있지 않는 서류. 승우씨도 내 손에 들려 있는 젓가락과 책상 주변을 번갈아보더니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고는 내 옆에 앉는다. 아, 오늘 점심 망.했.다 "이 앞 편의점에서 사신거죠?" "네.." "사실 제가 친구가 없어서요! 앞으로 같이 점심식사 하실래요?" 이건 무슨 호의지? 분명 이지은과 함께 나가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건지. 뻘쭘해하는 날 위한 예의라고는 하지만, 어젯밤 친하지 않은 사원과 바에서 칵테일을 주고 받은 것도 오바였었다. 그런데, 이번엔 점심 파트너가 되어달라니. 승우씨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벙진 상태로 도시락을 바라보자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맞아요. 이건 예의가 아니죠" 무슨 말을 하는거야. 싶었는데, 그 말을 던지더니 사무실을 나가버린다.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찌됐든 그가 사라짐으로써 내게 다시 찾아온 평화. 이제 맛있는 식사를 해볼까, 싶었는데. 한 손에 나와 똑같은 도시락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온 듯, 헉헉거리며 나타난 승우씨. 휴,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 이해되는 시점이였다. 예의란 이런걸 말하는거였구나. "짠. 잘 먹겠습니다!" 텅 빈 사무실을 꽉 채우 듯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식전 인사를 하곤 젓가락을 들었다. 그래, 혼자 먹다 체하는 것보다 둘이 먹다 체하는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소란스러운 점심이 되어버린 내 식사시간. 그는 점심을 먹으면서도 쉴 새 없이 말을하기 바빴다. 근무시간에는 볼 수 없었던 그의 새로운 모습이였다. 어제 함께 바에 갔을 때만해도 조용조용한 남자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는 그와 반대로 활발한 성격이였다.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점심 식사를 거의 끝마칠 때 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부장 옆에 붙어 나가던 이지은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와 내 옆에 붙어 함께 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본 이지은. "핸드폰 가지러 간다더니, 여기서 이런거나 먹고 있어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요. 드실래요 지은씨?" "아우, 됐어요. 사무실에서 뭐하는거에요? 음식 냄새나게." 승우씨가 신입사원의 모범답안이라면 이지은은 진상의 모범답안일 것이다. 사무실에서 음식 냄새가 날까 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린 환기를 위해 창문까지 열었는데. 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저런 싸가지 없는 소리라니. 하지만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봤자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테고, 이미 부장을 빽으로 삼고 있는 이지은은 이때가 기회다 싶을 수도 있다. 밉기는 하지만 말없이 도시락을 정리했다. 승우씨도 다 먹지 못한 채 나와 함께 도시락을 정리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들어오고 점심시간이 끝난 뒤, 또다시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일을 시작했다.
**** "김대리, 수고했어~" 대머리 부장이 오랜만에 내게 능글능글한 눈웃음을 친다. 그리곤 나를 제외한 회식을 하러 가는 사람들. 부장의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아양떠느라 바쁜 이지은. 아직 내게 하는 인사가 끝나지 않은 부장을 끌고 가버렸다. 휴,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사회생활에 뛰어든지 벌써 8년. 실력 좋은 신입들이 날 치고 올라오고, 상사에게 잘보이려 애쓰는 사원들은 날 옥죄여 온다. 후엔 이지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날이 올까 두렵기도 하고. 장갑을 놓고 와서 차갑에 얼어버린 손을 호호 불며 걸어가는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2009년의 첫 눈. 아이들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눈에 좋다며 펄쩍펄쩍 뛰어대고,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나온 20대 초반의 아이들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택시에 올랐다. 30살이 되어 맞는 첫 눈. 작년 첫 눈도 재작년 첫 눈도 함께 맞았던 그 남자가 생각나는 때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참 좋을 날. 첫 눈 오는 날. 그 사람도 나처럼 작년과 재작년의 오늘을 기억하고 있을까. 갑자기 내린 눈에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던 내 얼굴 위로 올려진 한 짝의 장갑. 장갑을 내리고 뒤를 돌아서니,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 남자. 최인우. "하이!" "어디서 나타나는거에요, 대체?" "응? 나는 그냥 추워보이길래" "그걸 물어보는게 아니잖아요." "싫으면 말고" 동문서답만 하던 그 남자는 내 손에 쥐어져있던 장갑을 도로 뺏어가버렸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내 앞에서 장갑을 끼어보는 남자. '따뜻하지롱' 이라며 놀리는 어투로 내게 두 손을 흔들어댄다. "그거 알아?" "몰라요" "첫 눈이야" "근데 저기 인우씨" "응?" "왜 자꾸 반말이냐" 그래. 정말 묻고 싶었던 말이였다. 처음 키티 우산을 들고 만났던 날도, 바에 갔을 때도 늘 이 사람은 내게 나이도 묻지 않은 채 모든 얘기를 반말로 하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도 한참이나 어려보이는데, 이제서야 쓴소리 하는 나도 참 웃기다. 늘 존댓말로 일관하던 나의 갑작스러운 반말 때문이였는지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던 남자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럼 너도 말 까" 라는 대단한 배짱을 보여주고 있다. 손에 낀 장갑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다시 장갑을 빼고 내 손에 쥐어주는 이 남자. 4차원과 싸이코의 경계를 왔다갔다 하는 듯 싶다. 어찌됐든, 올해 첫눈이 내리는 날은 이 골치 아픈 녀석과 보내야 할 듯 싶다.
**** "장갑 귀엽지?" "니가 골랐어?" "응." "나 주려고?" "아니" 흰 눈이 내리는게 잘 보이는 창가 쪽에서 단 둘이 벌써 소주 4병을 해치우고 있다. 사실, 이 녀석은 안주만 우걱우걱 집어넣고 나 혼자 소주 3병은 마신 것 같았다. 나도 내심 이 녀석이 내게 쥐어주었던 선물이 맘에 들었던지, 취기가 올라오니 장갑을 만지작 거리고 있다. 아직, 그 사람이 내게 선물해 준 가죽 장갑이 집에 있는데.. 라는 생각도 하면서. 혀가 조금씩 꼬여가는 것을 느낄 때 쯤, 인우가 일어서더니 내 옆 쪽에 풀석 앉는다. 그리고는 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몇살이냐" "슴넷" "직업은?" "바텐더" "군대는?" "갔다왔지" "부모님은?" "취조하냐?" 어느새 창문에 기대어 그녀석에게 취조하듯 묻고 있는 내가 있었다. 녀석은 질겅질겅 오징어 다리를 씹다가 나를 바라본다. 늘 웃기만 하던 녀석이라 몰랐는데, 살짝 미간을 찌푸린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눈이 풀려가는 날 빤히 쳐다보더니 물고 있던 오징어를 한번에 삼켜버리고는 내게 더 바짝 다가오는 인우. "저리가" "서른이라고?" "그래, 서른이다 서른. 머리에 피도 안마른게" "남자랑 몇번 자봤어?" "이게 진짜!" "거 참, 장난에 엄청 민감하네" 인우는 자꾸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려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불안한 듯 한쪽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마치 시험장에 들어선 수험생처럼, 시험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사람 같이. "왜 그래" "나 진짜 딱 한번만 말한다" "뭘" "나랑 연애하자" 쌓인 눈을 치우다가 감기에 걸린 춘몽입니다ㅠㅠ 요새 너무 춥죠? 바닥도 미끌미끌하구.. 요즘 상황을 딱 소설에 넣은것 같아요 ㅋ.ㅋ 다들 저처럼 감기 걸려서 고생하지 마시구 옷 따뜻하게 입으세요! 올 겨울엔 신종플루에 감기까지 걸리는군요 ㅠ.ㅠ 그리고 전편에서 '진흙속의연꽃' 님께서 일장춘몽/춘몽 중 어떤 것이냐! 라고 물어보셨는데 이 부분에 대한 답변은 결말을 보시면 알 듯 싶습니다 ㅠ.ㅠ 벌써 알려드리면 소설의 재미를 떨어트리겠죠?ㅎㅎ 답변이 되셨나요~? 헤헷 업쪽을 원하시면 댓글 앞에 '춘몽'이라고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OPYLIGHTⓒ 2010 Insodot 춘몽
첫댓글 춘몽 으음~두 명의 연하남 사이에서 고민하는 건가요~ㅋㅋㅋ잘 봤습니다 -
春夢♥_♥
춘몽
春夢♥_♥
춘몽
春夢♥_♥
춘몽 승우라는 사람.. 꽤나 귀여운 사람이군요.
春夢♥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