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외 1편
이종섶
말하는 자기와 듣는 우주의 물질 단위는 인칭이다
집이나 공간의 둘레에 인칭대명사가 별이 되고
천 개 이상 모여 은하계라는 소우주를 형성한다
막기 위하여 축조한 건조물을 가리키는 일인칭 소우주는
1천억 개 담을 관측하는 대우주 밖을 모른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밖에서 안을 보호하면서
3인칭 복수의 침입을 막는 문법을 정비하는 것
말하는 자의 안이 보이지 않는 초기 모델은 지구중심설
높지 않은 사람의 공간을 다른 성격으로 구분한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해 천체의 울타리를 만들면서
지구중심설에 비인칭이 제기되었다
자기를 포함한 담을 언제부터 쌓았는지 밝히기 어려워
코페르니쿠스는 정밀한 천문법으로 태양중심설을 가미하였다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
뉴턴이 만유인력의 존칭을 발견하면서
성읍국가시대의 고전 역학에 우주론이 접목되었다
행랑마당과 사랑마당을 구분해 놓은 담은
두 공간 사이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 먼저 나간다 수고해라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 사이에 주거 차이가 발생하면서
말과 언어의 관측 기술이 고도로 발전되었고
존귀한 인류는 하나밖에 없는 태양이 우주에서
수천억 개 은하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는 방향으로 균일하게 분포된 우주는
가장자리도 아랫목도 중심도 없다
신분에 따른 위엄을 자손만대 잇기 위하여
낮은 사람을 상대하는 극성에 군림한다
거대한 공백에서 소용돌이치는 거품을 먹고 산다
담과 같은 구조물로 추정되는 20세기 초의 발견
우주가 시작되었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
따뜻한 북극
인간의 불행이 따뜻해지는 원인
무자비하고 비극적인 운명이
가장 고귀하고 용감한 인간을 기린다
북극의 가장자리는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낙관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나 암살 같은 실제 사건을
무대에서 상연하기보다 등장인물의 입으로 폭로한다
분열이 발생하는 온난화의 기본은 해빙이므로
빙산은 생기지 않거나 생겨도 아주 작다
질서 있는 세계는 운명의 장난
위대하고 고결한 정신이 패배했을까
동물은 가죽을 벗어 먼 바다로 보낸다
식물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기적극이나 신비극으로 속죄한다
강제가 없으면 기온이 하강한다는 비관론자들은
높은 신분과 천한 계급을 혼합해
영혼을 데우는 주범으로 몰아간다
고통에 대한 보답은 패배가 아닌 필연적인 승리
희망 없는 온도를 팽팽하게 당긴다
위대한 싸움은 해빙을 만들지 않아
더 높은 고도로 서식지를 옮긴다
― 이종섶 시집, 『우리는 우리』 (여우난골 / 2024)
이종섶
경남 하동 출생.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2016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시집 『물결무늬 손뼈 화석』 『바람의 구문론』 『수선공 K씨의 구두학 구술』 등. <수주문학상> <시흥문학상> <문경문학상> 등 수상.
첫댓글 명석한 지식을 갖고 시를 쓴다는 생각이 드는 시인입니다. 딱딱한 지식을 시의 운율로 접합한 훌륭한 시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