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1일 오늘의 역사
2022년 한국 축구 통산 11회, 연속 10회 월드컵 본선진출 확정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1일 오후(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라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리아와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조별리그 A조 8차전에서 2-0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최종예선에서 6승 2무 승점 20을 기록, 남은 2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최소 A조 2위를 확보해 카타르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대회부터 2022년 카타르 대회까지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는다. 처음 출전했던 1954년 스위스 대회를 포함하면 통산 11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이다.
첫 번째 월드컵인 1930년 우루과이 대회부터 2018년 러시아 대회까지 월드컵 본선을 한 번이라도 뛰어본 나라는 78개 나라에 불과하다. 210개 FIFA 회원국 중 3분의 1 정도다. 올해 개최국 자격으로 월드컵에 나서는 카타르도 첫 본선 진출이다.
특히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은 한국에 앞서 단 5개 나라만 이룬 대기록이다. 이 5개 나라는 모두 세계 축구를 대표하는 강국이다.
1위는 ‘삼바축구’ 브라질(22회). 2위는 독일(18회), 3위는 이탈리아(14회) 4위는 아르헨티나(13회) 5위는 스페인(12회) 이다
2021년 미얀마 군부 구테다 발생
2020년 11월 미얀마 총선 결과에 대하여 군부는 약 7천여 건의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선거 무효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미얀마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는 공정하게 치뤄졌다’고 군부의 문제제기를 일축하였고, 무효소송 역시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잇따른 부정선거 문제제기의 기각과 집권여당의 군부 영향력 축소 방침에 반발한 군부는 집권여당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마침내 2월 1일에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후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을 일으켰다
2018년 몰디브 대법원 모하메디 나시드 전 대통령 등 야당정치인 9명 사면 석방과 의원직 박탈된 야당 의원 12명 복직 명령
2015년 이슬람국가(IS) 일본 언론인 고토 겐지 참수영상 공개
2015년 해군이 제9잠수함 전단을 소장급 장교가 지휘하는 잠수함사령부로 승격
2012년 MBC 게임이 MBC 뮤직으로 재개국.
2012년 노벨문학상(1996) 받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사망
2012년 이집트 항구도시 포트사이드의 축구경기장에 인파 몰려 74명 사망 1천여명 부상
2012년 세계 복싱 챔피언 코치… 안젤로 던디 별세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슈가레이 레너드, 카르멘 바실리오, 호세 나폴레스 등 15명의 세계 챔피언을 키워낸 안젤로 던디(90)가 1일(현지 시각) 자택에서 별세했다. 지난달 알리의 칠순 생일잔치에 참석한 뒤 혈전에 의한 호흡 곤란 증세로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임종 전에 자택으로 옮겨졌다.
AP통신은 그의 죽음과 함께 복싱의 한 역사가 사라졌다고 애도했다. 그는 알리 데뷔 시절부터 전성기까지 코치를 맡아 세 차례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알리의 은퇴가 임박하면서는 레너드의 트레이너로 변신했다. 1981년 웰터급 통합 타이틀전에서 토머스 헌스에게 열세를 보이자 던디가 코너에서 울부짖은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레너드는 14라운드에서 KO승을 거뒀다. 1994년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도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2011년 미국 텍사스 뉴욕 시카고 등 12개 주 60cm이상 폭설 12명 사망
2011년 ‘한국 미술사학 거목(巨木)’ 황수영 교수 별세
1918년 개성에서 출생한 황교수는 일본 마쓰야마(松山)고등학교를 거쳐 도쿄(東京)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광복 직후 고향으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장으로 일하던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1905~1944) 선생을 사사했다. 이때 함께 배운 고(故)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고(故) 진홍섭 전 문화재위원장과 함께 미술사학계의 ‘개성 3인방’ 으로 해방 후 한국미술사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
고인은 1948~1950년 국립박물관 박물감(지금의 학예직)을 시작으로 동국대 교수 및 동국대박물관장·동국대 총장을 지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위원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많은 제자를 길러내 미술사학계에 ‘동국대 사단’ 을 형성했으며, 한국대학박물관협회장, 한국미술사학회장, 한국범종학회장, 한국문화사학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 한일 문화재반환 협상의 실무 담당으로 활약했고, 1962~1965년의 석굴암 보수공사, 1967년 경주 앞바다 문무대왕 해중릉(海中陵) 확인조사 등을 지휘했다. 서산마애삼존불상, 팔공산 제2석굴암, 울주 반구대 암각화 유적 조사가 대표적 업적이다.
‘한국불상연구’ ‘불교미술’ 등 33권의 저서와 편저 20권, 220여편의 논문이 있다. 석굴암 연구와 복원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은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자랑스러운 박물관인상을 수상했다.
2009년 베이징올림픽 8관왕 펠프스 마리화나 흡연 시인
펠프스는 1일 AP 통신에 보낸 성명을 통해 마리화나를 피웠음을 인정하고 사과의 내용을 전달했다.
펠프스가 올림픽이 끝난 뒤인 작년 11월6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시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 학생들과 함께 한 파티에 참석해 마리화나를 피웠다고 보도했다.
2007년 서예가 김응현씨 별세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80) 선생은 한국 서단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20세기 최고의 서예가로 손꼽힌다. 형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씨와 함께 형제 서예가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중국에서 전해 온 모든 서예의 장점을 뽑아내고,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와 같은 모든 서체들을 연습해 그 정화(精華)를 흡수한 뒤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1956년 결성된 ‘동방연서회’를 중심으로 펼쳐 온 그의 필치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여초는 한국전각학회 회장과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월간 ‘서법예술’을 창간하는 등 서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94년엔 전 10권 분량의 방대한 서예 교본인 ‘동방서범(東方書範)’을 출간했다. 그의 서예 철학은 마음과 손의 조화를 이루면서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2003년 美 컬럼비아호 공중폭발, 승무원 7명 전원 사망
2000년 태고종 송암 대종사 입적
불교 태고종 송암 대종사가 2000년 2월 1일 열반했다. 승랍 67세, 세수 86세였다. 운허 스님을 은사로 봉원사에서 출가한 송암 대종사는 1998년 태고종 승정에 이어 1999년 대종사로 추대됐다.
송암 대종사는 태고종의 최고위직이었으면서, 영산재(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던 모습을 재연한 불교의식)를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대표적인 전통의식으로 되살려낸 인물이다.
1973년 벽응 스님과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50호 보유자로 지정됐고 1987년 `봉원사 영산재`가 `종묘제례악`과 `전주대사습놀이`에 이어 무형문화재 단체지정을 받은 이후 영산재 보존회의 총재를 맡아왔다. 스님은 출가 이후 당시 범패(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의 최고로 꼽혔던 월하 스님을 시봉하면서 어깨 너머로 범패를 배웠다. 영산재에만 그치지 않고 봉원사 강원을 졸업하고 여러 선원에서 6안거(해마다 여름과 겨울에 3개월씩 선방에서 수행함)를 성만하는 등 선교를 두루 섭렵하기도 했다.
영산재 보존회 부설 범음대학 학장도 지냈으며 1994년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4년 한국-오만, 문화협정 체결
1992년 승용차 10부제 실시
1991년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 인종차별법 폐지 발표
1991년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진도 6.8 강진 2백여명 사망
1989년 분단 후 처음으로 북한산 무연탄 2만t 남포에서 인천항에 직수입
1989년 `라디오 코리아` 미 LA에서 개국
1989년 개인-기업의 해외부동산 투자 전면 자유화
1989년 한국-헝가리 국교 수립(공산권 국가 최초)
한국과 헝가리 양국정부가 1989년 2월 1일 대사급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공산권 국가와의 첫 공식 외교관계 수립이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방한중인 호른 줄라 외무담당 비서(차관)는 이날 오전 서울과 부다페스트의 상주대표부를 상주대사관으로 격상시키기로 합의, 양국수교합의 의정서에 서명했다. 이에따라 양국은 이날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상주대사관을 개설, 각각 현판식을 가졌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수교국수는 모두 1백31개국으로 늘어났다. 우리나라의 헝가리 주재 초대 대사에는 한택채 상주대표부 대표가 임명됐으며, 헝가리 역시 에트레 산도르 상주대표부 대표가 초대 대사에 임명됐다. 최 장관은 이날 호른 줄라 비서와 문화협정-외교관 및 관용여권소지자에 대한 사증 면제협정에, 곰보스 졸탄 무역부차관과 무역 및 경제협력 협정에 각각 서명했다. 한편 북한은 헝가리와 맺어왔던 대사급 수교관계를 대리대사급 수준으로 낮춰 한국-헝가리의 수교에 대한 불만스런 심기를 드러냈다.
1989년 세계일보 창간
1982년 서울지법, 윤노파살해사건 고숙종 피고에 무죄선고
윤경화 보살 피살사건의 고숙종 피고인(46)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형사지법 합의 14부는 1982년 2월 1일 오전 10시 고 피고인에 대한 살인사건 선고공판에서 "유죄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검찰은 전월 1월 21일 고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1981년 7월 22일 윤경화 피살사건 발생 이후, 고 피고인은 경찰에 의해 진범으로 구속됐으나 경찰의 고문 여부, 자백의 임의성 등을 놓고 검찰과 변호인측이 팽행히 맞서 세인의 큰 관심을 끌었다
1979년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 귀국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1979년 2월 1일 에어 프랑스 특별기편으로 테헤란 공항에 내렸다. 1964년 팔레비 정권에 의해 이라크로 추방된지 15년만의 귀국이었다.
2월 9일 테헤란 교외에서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군인들이 봉기했으며 이틀 뒤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 해 말 국민투표를 통해 채택된 이란의 새 헌법은 호메이니에게 최고 정치-종교 지도자의 지위를 부여했다.
호메이니는 이란을 알라신과 이슬람 법률이 지배하는 국가로 변모시켰다. 서양음악과 음주가 금지되고 남녀공학이 폐지됐으며 여성들은 얼굴을 베일로 가려야 했다. 호메이니는 또 팔레비 정권의 핵심인사는 물론 자신에게 비판적인 인물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이란 혁명은 팔레비와 호메이니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1979년 1월 6일 팔레비는 이란을 떠나 1980년 7월 이집트서 사망했고, 호메이니는 죽을 때까지 이란의 절대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이슬람 혁명의 수출에 힘씀으로써 인접 아랍국가의 지도자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1977년 현대인의 근원을 일깨워준 ‘뿌리’ 방영
1977년 2월 1일 미국인들은 TV 앞에서 한동안 떠날 줄 몰랐다. ABC가 8일간 연속 방영한 미니시리즈 ‘뿌리(Roots)’ 가 끝나자 그들의 눈에선 눈물이 분출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와 자유를 찾는 감동적인 ‘흑인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뿌리’ 에 대한 향수와 미국 땅에 흘러 들어온 과정을 반추하는 이민자 특유의 감상도 작용했다.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식을 치른 다음 해에 일어난,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뿌리’ 는 흑인 작가 앨릭스 헤일리(1921∼1992)가 자신의 가계를 9년 동안 추적해 완성시킨 소설이었다. 주인공은 서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노예로 잡혀온 쿤타 킨테로, 6대에 걸친 모계측 내력을 담았다. ‘뿌리’ 는 37개국에 번역됐고, 전 세계 수억명이 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텔레비전에서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능가할 정도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작품으로 헤일리는 1977년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일부 흑인들로부터는 비판을 받았다. “흑인들의 ‘과거’ 를 재조명하는데 기여했으나 ‘오늘’ 을 밀도 있게 발언하지 못했다” 는 것이었다. 헤일리가 흑인 인권운동에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뿌리’ 를 본 시청자는 미국 TV사상 최대 숫자였다. 흑인뿐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잃어버린 ‘근원’ 을 일깨운 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1974년 대한민국 한국방송협회 창립.
1974년 브라질 상파울루 빌딩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로 189명 사망, 293명 부상.
1973년 비상각의, 국정감사폐지법 의결
1968년 경부고속도로 기공
1968년 송창식·윤형주 ‘트윈 폴리오’ 결성
송창식은 윤형주에게 트리오 결성을 제안했다. 윤형주는 포크의 기본조차 모르는 송창식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송창식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하고 1967년 10월 초 이익근을 끌어들여 ‘쎄시봉 트리오’를 결성했다. 하지만 이익근의 군 입대로 1968년 1월 트리오가 해체되자 1968년 2월 1일 둘만이 참여한 ‘트윈 폴리오’를 결성했다.
그들의 첫 독집 앨범은 1970년 1월 발매되었다. 번안곡 12곡이 수록된 ‘튄폴리오 리사이틀’이라는 앨범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첫 독집은 은퇴기념앨범이 되고 말았다. 팀은 해체되었지만 트윈 폴리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해체 후에도 노래가 계속 라디오 전파를 탔기 때문에 공식 활동기간은 1년 10개월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주 오랫동안 활동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1963년 장충체육관 개관
1963년 정치정화법 해당자 268명 2차 해제
1963년 부산, 직할시로 승격.
1962년 한국광업제련공사 발족. 울산공업센터계획 발표
1962년 국민은행 개점
1962년 서울특별시, 내각수반 직속으로 승격
1962년 동전투입식 공중전화기 처음 설치. 울릉도 폭설 287.9㎝
1961년 일본 우익청년, 중앙공론사장 살해
1958년 통일아랍공화국 성립
1955년 동아일보에 만화 ‘고바우’ 연재 시작
1955년 2월 1일 동아일보에 고바우 영감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가정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유머만을 연재했지만 점차 독자들의 기호에 맞춰 시사문제에도 관여하면서 시사만화로 발전해갔다.
고바우 영감은 1950년 11월, 대구 지방지였던 만화신보에서 첫선을 보였다. 작가는 1년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를 15회 연재하면서 시사만화가로 데뷔한 18살의 소년 김성환이었다.
시사만화인 고바우가 현실 정치를 풍자 할때는 권력으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1958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경무대 똥통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필화 사건이었다. 가짜 이강석 사건을 빗댄 당시의 고바우 내용으로 김성환은 문초를 당하고 과료를 물었다.
5·16 이후에도 군사정권을 풍자하던 고바우 때문에 김성환은 1963년 봄부터 8개월간 붓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김성환의 가장 큰 시련은 1980년 신군부의 언론계 숙정 33명에 포함돼 폐업을 선언하고 정든 지면을 떠난 것이다.
그 해 9월 11일부터 조선일보에 새롭게 자리잡은 김성환은 1992년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직 할 때까지 조선일보에 고바우를 연재하다가 이후 문화일보로 옮겨 2000년 9월 29일까지 고바우를 이어나갔다. 고바우 영감은 그동안 1만 4,139회 연재되어 일간신문에 연재된 단일 작가의 4컷 시사만화로 세계 최장의 기록을 세웠다.
1953년 일본 NHK, TV 방송 개시
1953년 한국 바둑인 서봉수 출생
1952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창설
1952년 무기명 정기예금 취급 시작
1952년 일본 경찰예비대 중심으로 자위대 창설
1946년 헝가리 인민공화국 성립
1946년 비상국민회의 개최. 맥아더사령부, 이왕직(李王職)을 폐지
1944년 미군, 마샬군도 상륙
1944년 추상미술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 몬드리안 사망
1943년 철도국을 교통국으로 개편(세관, 해사, 항공 등을 관계부문에 이관)
1939년 월간문예지 `문장` 창간
1935년 최초로 종두법 도입한 지석영 선생 사망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두종두법에 의한 종두를 실시한 현대의학의 개척자 지석영 선생이 1935년 2월 1일 사망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지석영은 의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 특히 종두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
20대 들어 `종두귀감`을 읽고 감명을 받은 지석영은 부산에 있던 일본 군의(軍醫)에게 종두법을 배운 뒤 1879년 처가가 있는 충주에서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첫 종두법 실시였다. 지석영은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본격적으로 종두법을 공부, 귀국 후 전주와 공주에 우두국을 설치하는 등 마마퇴치에 진력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99년 관립 대한의학교 초대 교장에 임명된 지석영은 다른 질병 퇴치에도 정열을 쏟았다. 지석영은 문신(文臣)이자 국어학자이기도 했다. 50대 들어서는 주시경과 함께 한글보급에 힘썼으며, 특히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해 한글보급에 큰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1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보리스 옐친 출생
1928년 한국 정치인 조순 출생
1924년 영국 소련 승인
1920년 독일, 나치스강령 발표
1919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문예 동인지 `창조` 창간
1917년 독일군 잠수함이 영국행 중립국 상선 공격 해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개입 초래
1917년 2월 1일. 독일이 150척의 U보트를 동원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변해역에서 무경고무제한 잠수함작전을 재개했다. 1915년 9월부터 독일은 미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작전을 중지했었다. 그러나 영국의 해상봉쇄로 독일국민은 식량난에 시달렸고 전쟁전부터 소비식량의 20%를 수입에 의존해오던 독일에 있어서 해상봉쇄는 타격이 컸다.
1917년 1월 29일 독일은 자국의 기업과 국민이 전쟁에서 받은 손해를 배상하라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연합국에 제시했으나 연합국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고 독일은 이를 핑계삼아 이날 무제한 잠수함작전에 돌입했다.
독일이 자랑하는 U보트는 4월까지 미국 상선 3척을 포함하여 모두 430척의 선박을 격침시키며 선전했지만 짐머맨의 전문 사건을 계기로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전세는 급격하게 연합군 쪽으로 기울었다.
1909년 상해에서 제2회 아편금지회의
1909년 미주 한국인단체, 통합하여 국민회 발족.
1908년 포르투칼 카를로스1세 암살, 2세 즉위
1906년 조선통감부 설치
1906년(고종 43년)부터 1910년(순종 4년) 국권피탈까지 한국을 지배한 일본의 통감부가 1906년 2월 1일 설치됐다. 통감부는 조선총독부의 전신이다.
1905년 11월 체결한 을사조약 규정에 따라 1906년 1월 31일로 일본공사관이 폐쇄되고 이날 임시통감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취임하면서부터 업무가 시작됐다. 이로써 일본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고 이어 내정까지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강제로 맺어 통감이 입법·사법·행정 전반에 걸친 통치권을 전담하도록 하였으며, 한국인 대신 밑에 실권을 장악하게 하는 일본인 차관을 두는 차관정치를 실현했다. 또한 `한국 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를 통해 한국의 사법권을 탈취했으며, 이어 한국군대를 해산했고 한일경찰관을 통합하여 한국 경찰관을 일본 관헌의 지휘감독하에 두었다. 마지막 단계로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을 강행하여 통감부 대신 총독부를 설치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식민화 침략이 완성됐다.
1905년 미국 물리학자 세그레 출생
1902년 청조, 만인(滿人)과 한인(漢人)의 통혼 허락하는 유서와 전족금지령 공포
1901년 만주에 관한 러청밀약성립
1901년 미국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 출생
1883년 고당 조만식 선생 출생
1881년 파나마 운하 기공
1861년 미국 시민전쟁 / "텍사스(Texas)"가 "미국 연방(United States)"으로부터 탈퇴
1851년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 사망
1814년 필리핀 "Mayon 화산" 폭발로 약 1천 2백명 사망.
1801년 미국 낭만파 풍경화가 토마스 콜 출생
1796년 영국의 식민지령 "어퍼 캐나다(Upper Canada/현재 캐나다 온타리오)", 수도를 "Newark(현재 나이아가라)"에서 "York(현재 토론토)"로 이전.
1793년 프랑스가 영국과 네델란드에게 선전포고.
1689년 기사사화
1662년 명나라 정성공, 네덜란드가 38년 동안 지배해 온 대만 점령
북경이 청나라에 의해 함락되고 명나라 숭정제가 자살함으로 명나라는 사실상 종말을 고했으나 청나라에 대항하는 무리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중 한사람인 정성공은 반청 투쟁을 펼치며 중국 본토에서 수차례 청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힘의 열세로 투쟁을 일시 중단했다.
정성공은 지속적인 반청 투쟁을 위해서 대만을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대만은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였으나 1624년 이후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 상태였다. 네덜란드인들의 착취에 대만인들이 가끔 봉기했으나 이들은 그때마다 네덜란드군에 의해 진압됐다. 1625년의 봉기때는 8천여명이 살상되기도 했다.
1661년 4월 정성공은 350척의 군함에 2만5천명의 군사를 싣고 대만으로 향했다. 대만에 상륙한 정성공의 군대와 네덜란드군은 8개월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1662년 2월 1일 네덜란드가 항복함으로 대만은 마침내 38년 만에 다시 중국 영토로 귀속되었다.
정성공이 대만을 중국에 복귀시킨 후 1년이 채 못되어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자 대만은 다시 내분에 쌓였고 마침내 1683년 청군에 항복함으로 청나라에 복속됐다.
1395년 우리나라 처음 목활자로 대명률직해 간행
1327년 10대의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영국의 왕에 오르나 국가는 어머니 "이사벨라(Isabella) 여왕"에 의해 통치되다.
1309년 각염법 제정, 소금판매권 장악
1019년 고려, 강감찬(姜邯贊) 구주(龜州)에서 거란군 격멸(구주대첩)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 3차침입에서 10만 거란군 중 수천 명만 살아남음.
거란 성종은 소배압에게 “네가 너무 적지에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죽이고 싶다”고 책망.
강감찬은 키 작고 곰보였는데, 원래는 아주 잘생겼지만 너무 잘 생기면 큰일을 못한다 하여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곰보가 되었다는 이야기 전해옴.
561년 신라 진흥왕 창령에 척경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