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봄바람, 산을 따라 절집에 머물다. '능가산 개암사(楞伽山 開巖寺)' 전북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714 / 063-583-3871
봄바람에 취해 절집의 뜨락을 걷습니다. 넉넉한 배려를 가진 절집에서 충분히 차분해진 마음이 됩니다. 기어이 찾아가도 좋을 절집, 개암사입니다.
어느덧 봄이 오고 나니 만물이 기지개를 폅니다. 얼어붙어 있던 개울은 애지녘에 녹아 흐르며 비옥한 땅을 만들고, 초목은 제 고운 빛을 자랑하고 싶어 바람에 흔들어 대며 자기 보아달라며 춤을 춥니다.
풀향, 나무향이 고운 길을 따라 바람도 같이 걷는 길, 어느 덧 바람은 여행자를 지나쳐 먼저 앞서 갑니다. 절집을 향하는 오솔길, 가까운 것 같은데도 절집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길은 구부러지고 휘어져 자연스러워 평탄한 길이 그리도 편합니다. 그 길의 끝, 능가산을 병풍으로 삼아 선 절집, 개암사가 자리합니다. 이른 아침의 봄빛에 절간의 마당은 유독 횐 빛으로 치장이 되고, 단아하게 자리한 전각들은 저마다의 향배로 아침햇살을 맞이합니다. 이내, 아까 앞서간 봄바람이 대웅보전 뒤편의 울금바위를 한 바퀴 돌아오더니 봄 인사를 전하고는 휭하니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나갑니다.
부안 능가산 기슭에 자리한 천년고찰, ‘개암사(開巖寺)’. 백제 무왕35년(634년)에 왕사 '묘련(王師 妙蓮)'스님에 의해 창건 되었습니다. 이 후 문무왕16년(676년)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와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우금바위(=울금바위)아래 우금굴에 머물면서 암자를 지어 ‘원효방(元曉房)’이라 하였습니다. 원효방은 조선 후기까지 개암사의 산내암자로서 유지가 되면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에 전해지고, 그 중 ‘명원 이매창(名媛 李梅窓)’의 ‘매창집(梅窓集)’을 1688년에 개암사에서 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개암사 부속암자인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에서 참선 수행하기도 한 곳입니다. 절집을 감고 있는 능가산은 백제 멸망 직 후 묘련의 제자 ‘도침(道琛)’이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펼쳤던 곳으로, 우금바위 아래 우금산성이 자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유서 깊은 땅에 자리한 천년고찰, 개암사를 찾았습니다.
개암사 일주문과 멀리 울금바위가 보입니다.
‘능가산 개암사(楞伽山 開巖寺)’, 절집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능가산의 정상에는 우금바위라 불리는 바위 두 개가 떡 하니 버티고 섭니다. 마한 효왕28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면서 이곳에 도성을 쌓게 하니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 하였습니다. 이 두 바위를 멀리서 바라보면 ‘바위가 문을 열고 있는 형상’으로 절집의 이름도 ‘개암사(開巖寺)’라 하였습니다. 천년고찰은 고려시대에 들면서 ‘내도솔사(內兜率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폐허가 되었다가 송광사16국사 중의 한분인 ‘원감국사(圓鑑國師, 1226~1293)’에 의해 숙종1년(1675년)에 불전과 당우를 재건하면서 ‘황금전(黃金殿)’을 짓고 ‘대승능가경(大乘楞伽經)’을 설법하면서 산의 이름도 ‘능가산(楞伽山)’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절집은 일제에 의해 다소 폐허가 되었던 것을 태종14년(1414년)에 '선탄(禪坦)'스님이 중창하였고, 인조14년(1636년)에 ‘계호대사(戒浩大師)’가 다시 중창하면서 주법당인 황금전을 대웅보전으로 개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절집을 둘러보기 전에 눈에 드는 것이 있습니다. 여행자에게 개암사 하면 생각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울금바위'와 '대웅보전의 귀공포9룡', 그리고 '개암매화'입니다. ‘대웅보전’의 뒤 능가산의 정상에 자리한 두 개의 큰 바위입니다. '울금바위', 또는 '우금바위'로 불리는 바위이지요. 변산반도에서 채석강이 유명하지만 울금바위 역시 많이 알려 있는 곳입니다. 이 울금바위에는 신라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하던 ‘원효방(元曉房)’이라는 이름의 석굴이 있는 곳입니다. 이 석굴안에는 ‘원효샘’이라는 아무리 오래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리 있습니다. 바닥에서 생성 되는 샘물은 딱 한자가지정도의 양만큼 고이고 그 이상은 넘치지 않다고 합니다. ‘물맛이 부드럽고 뒷맛이 달콤한데, 물빛이 뽀얗다.’ 하여 ‘젓샘’이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고즈넉한 개암사 둘러보기는 참 곱습니다. 가까운곳에 위치한 내소사‘가 유명세를 치르는 통에 개암사는 상대적으로 찾는 이가 드문 공간입니다. 그래서 더 넉넉하고, 편안합니다. 개암사는 3단의 축대위에 가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울금바위 아래 본당인 ‘대웅보전’이 자리를 잡고 좌우로는 ‘관음전’과 ‘산신각’이 자리하며, 본당의 앞마당 좌우로 ‘응진전’과 ‘지장전’이 자리를 합니다. 그리고 하단에는 요사와 함께 ‘월성당’, ‘정중당’, ‘종무소’ 등과 함께 ‘종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너른 마당의 한 켠에는 수령 200년의 ‘개암매(開巖梅)’가 겹홍매의 하늘거림을 보이며 고매의 늘씬함을 자랑하고 매해 4월초면 매향을 뿜어냅니다. 고매의 수세 건강한 모습과 매향은 여행자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는 감로향의 역할을 기꺼이 맡아 주고 있습니다. 여행자가 개암사를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한 ‘개암매’입니다.
규모가 크지 않은 절집은 모든 전각들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너른 마당을 간직한 만큼 넉넉한 마음의 여유인 듯합니다. 꽁꽁 싸매고 있는 답답함을 벗어나 한결 여유 있는 걸음으로 만나는 절집의 공간은 오래도록 여행자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촬영하지 않는 전각의 내부 모습을 개암사에서는 기꺼이 담게 됩니다. 단, 모든 내부 촬영에서는 절대 ‘스트로보(=플래쉬)’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고문서, 목조문화재들은 카메라에서 발광되는 빛에 변색, 변질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여행자들, 사진작가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와도 같습니다. ‘사진은 권력이 아닙니다.’ 또한 수행자가 계시다면 잠시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절집의 배려를 권리로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무분별한 사진촬영은 열린 개암사의 배려심을 닫히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지 않기 위함입니다.
개암사 아래 자리한 시원스런 차밭
한참을 고매 앞에서 서성이다가 이내 절집을 둘러봅니다. 여행자의 습관은 늘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버릇이 있지요. 정중당과 응진전, 관음전을 둘러보고 대웅보전으로 향하니 발걸음 그 자리에서 ‘턱!’ 멈추게 만듭니다. 개암사의 매력, ‘개암사 대웅보전(開巖寺 大雄寶殿)’을 만났습니다.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전각으로 독수리가 비상하듯 날개를 펄치고 있는 팔작지붕의 멋스러움과 내부로 들어서면 우아한 나무의 결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격조 높은 공간이 펼쳐집니다. 천장에는 9마리의 용이 대들보를 휘감으며 날아오르고 있으며, 우물천장에는 연화문과 당초문, 범자문으로 꾸며져 조선후기에 세워진 불전장엄의 극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또한 외부와는 달리 단청이 되지 않은 기둥에 시선이 한참을 머물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엄숙한 분위기에 숙연하게 됩니다. 밖으로 나오면 목조건물의 보호를 위하여 새로이 단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장을 받치고 있는 모습 속에 보통은 용 조각이 양편으로 자리하게 되는데, 개암사의 처마에는 한쪽에는 백호가, 한쪽에는 용 조각이 마련 된 것 또한 새롭습니다. 울금바위와 잘 어울리는 공간배치의 대웅보전을 둘러보고 나면 그제 서야 다른 전각들을 둘러보게 됩니다. 산신각으로 지장전으로 향하였다가 이내 처음의 그 자리에 다시 섭니다.
바위가 열린 문의 형상, 절집은 그 모습을 닮아 시원스럽게 열려 있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절집을 둘러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싶을 정도로 여유 있게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의 한가한 시간이어서 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밖의 세상에 나와서인지 풀어 놓은 누렁이 한 마리가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보통의 절집에 머무는 개들은 ‘묵언수행’을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놈은 당췌 가만있지를 않습니다. 사람을 어찌나 잘 따르는지 한참을 여행자의 따라 이리저리 정신없더군요. 혹, 개암사에 가시걸랑 무서워 마세요. 생각보다 무지하니 귀여운 놈입니다.
어느 봄날의 여행, '여백의 미(美)'가 한껏 돋보이는 개암사에서 여유와 휴식, 그리고 조용함과 넉넉한 마음을 만나고 왔습니다.
개암사 전경 수령200년의 고매 '개암매'와 함께 선 절집의 풍경이 넉넉하니 참 좋습니다.
개암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292호)'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규모로 자연석으로 쌓은 2중의 기단위에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굵은 민흘림 기둥을 세?습니다. 추녀의 날개올림이 아주 멋진 전각입니다. 장중함이 돋보인다 하겠습니다.
우물마루 위에 불단을 세웠으며, '목조석가삼존불(木造釋迦三尊佛)'을 봉안하였습니다. 석가여래좌상을 중앙에 두고 좌우협시로 보현보살좌상, 문수보살좌상을 두고 있습니다. 개암사 대웅보전은 우물천장의 장엄이 멋진 공간입니다. 이른바 '귀공포9룡'이라 하여 아홉마리의 용이 석가래와 뒤엉켜 있는 모습입니다.
대웅보전의 내부에는 단청을 칠하지 않은 그대로 민흘림기둥의 멋스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처마에는 용과 백호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개암사 '응진전(應眞殿)'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장방형의 구조입니다.
응진전의 내부에는 목조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16나한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16나한은 1644년에 제작된 불상들입니다.
개암사 '관음전(觀音殿)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입니다.
개암사 '산신각(山神閣)'
대웅보전의 뒤로 보이는 울금바위
개암사 '지장전(地藏殿)' 2000년에 '청림리석불좌상(靑林里石佛坐像)'을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석불좌상을 주존으로 하여 주존을 본떠 만든 작은 지장보살들을 원불로 봉안하고 있습니다.
개암사 '종각(鐘閣)'
개암사 '정중당(淨衆堂)' 정면5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으로 개암사를 찾는 객승들의 요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비교적 단순하게 지어진 건물로 안으로는 툇마루를 두어 쓰임새를 높였습니다.
개암사 전경
하루죙일 무지하니 바쁘게 뛰어 다니는 견공, 사람을 무지하니 따릅니다.
글,사진 박성환 |
출처: 길손의 旅行自由 원문보기 글쓴이: 길손旅客
첫댓글 제가 2010년 9월에 갈때는 대웅보전등 단청을 하지않아 바란대로 있었으나 단청을 했군요 새로운 모습입니다
대웅보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구경잘 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네, 이번에 새롭게 단청을 했습니다.
목조건물의 보호를 위한 조치이니, 고즈넉한 멋이 없다해도 어쩔수 없지요.^^
개암사 절구경 잘했읍니다
감사합니다
네, 잘 보아주시니 저도 감사드립니다.^^
한번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쁨을 핑계로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다시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경도 잘했구요...ㅎㅎ
변산 내소사에 밀려 차는 사람이 드뭅니다.
한적하게 찾기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