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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차례 당 옮긴 이인제는 ‘정치 창녀’ 정운현
이날 양당은 충청권 과학비즈니스벨트 정부투자 규모의 획기적 확대 등 7대 지역정책을 실천하기로 합의했다. 선진당으로서는 군소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누리당은 충청권 기반의 선진당을 품음으로써 대선에서 지지세 확보에 도움을 기대한 것으로 풀이된다. 선거를 앞두고 정당간의 합종연횡, 이합집산은 더러 있어 왔다. 이번 합당으로 새누리당은 선진당의 4석을 추가해 153석의 원내 과반을 차지하게 됐으나 그 외 특별한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26일 오전 여러 방송에 출연한 이 대표는 야권의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단일화에 대해서는 “정권교체를 위한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선진당과 새누리당과의 합당을 두고는 “큰 틀에서 가치와 노선을 공유하는 두 정당이 손잡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라고 평가했다. 두 당의 합당이 박근혜 후보의 대선용이라는 것을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그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이다. 한편, 이날 오전 YTN 라디오에 출연한 이 대표는 자신의 잦은 당적 변경을 지칭하는 ‘피닉제(피닉스+이인제)’라는 별명에 대해 “(‘피닉제’라는) 아주 과분한 별명을 붙여줘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대범하게 응수했다. ‘피닉스’란 ‘불사조’란 뜻이다. 이 말은 마치 그가 숱한 정치 역경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오뚜기 인생’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에게 과연 어울리는 표현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날 양당의 합당으로 이인제 대표는 ‘13번째 당적 이전’(무소속 포함)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는 어제 기자회견장에서 기자들이 ‘당적을 너무 많이 옮겼다’고 지적하자 “지구를 한 바퀴 반 돌다보니 그리됐다.”며 헛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또 오늘 아침 YTN에 출연해서는 “정치를 처음 시작한 어머니의 당으로 합류되어 기쁘다”고 전제하고는 “공자가 모국을 떠나서 열 몇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4년 만에 돌아오셨다는데 제가 15년 만에 돌아와서 헌신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우파정당,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 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 세 군데를 다 섭렵한 것은 사실”이라며 “정치적인 큰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도전하다보니까 그런 (여러 정당을 거치는) 역정을 거치게 된 만큼 어떤 비판이나 비난도 받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잦은 이적(離籍)에 대해 “한국 정치의 후진적인 것을 헤쳐 나가다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변명이다. 그는 전형적인 ‘철새 정치인’이며 그래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당적을 옮긴다고 해서 무조건 ‘철새 정치인’ 소리를 듣는 건 어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정치관을 도외시한 채 이익을 좇아 철새처럼 당적을 옮기는 경우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대표는 ‘철새 정치인’ 소리를 들을만 하다. 정치에 입문한지 24년만에 무려 13차례나 당을 옮겼다면 평균 2년에 한번 꼴로 당을 옮긴 셈이다. 현대 정치에서 정치인에게 ‘지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렇다고쳐도 자신의 주의주장(主義主張)을 마치 헌 고무신짝 버리듯 한다면 그런 정치인을 신뢰하고 지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이 대표는 1948년 충남 논산 출신이다. 서울대 법대 졸업 후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88년 제13대 총선 때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경기 안양갑)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판사 7년차에 법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을 한 셈이다. 이후 그는 정-관계를 넘나들며 탄탄대로를 달렸고 또 승승장구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을 구가하며 한 때 유력한 대선후보로 불리기도 했다. ‘정치인 이인제’의 첫 변신은 정계 입문 2년 뒤인 1990년 1월 소위 ‘3당 합당’(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자간의 합당은 사실상 ‘야합’임)으로 인해 민주자유당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후 92년 민자당 소속으로 14대 총선에서 재선된 그는 이듬해 YS정부 시절 최연소(45세)이자 첫 노동부장관을 거쳐 민선 1기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그 사이에 민자당은 1995년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면서 그 역시 당적이 바뀌었다. 90년 ‘3당 합당’에 이어 두 번 모두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적을 옮긴 셈이 됐다. 그가 자의로 당적을 옮긴 것은 97년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한 뒤 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하면서다. 그해 대선에서는 이회창-김대중‘이인제 등 세 후보가 겨뤘는데 19.2%를 득표한 그가 김대중 후보 당선의 ‘수훈갑’을 세웠다는 우스갯말도 나돌았다. 이듬해 그는 새정치국민회의로 옮기면서 네 번째로 당적을 옮겼다. 그리고 새로 새천년민주당으로 당명이 바뀐 뒤 2002년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결국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자 다시 탈당, 다섯 번째로 이적을 했다. 2002년 당시 ‘이인제 대세론’을 구가하며 한 때 유력한 대선후보로 거론됐던 그가 선거에서 실패하면서 그의 위상은 현저히 약화됐다. 그런 상태에서 그가 찾아간 피난처는 바로 ‘고향’이었다. 그는 김종필이 터를 닦은 충청도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연합(2004년)과 국민중심당(2007년)에 3년여 몸을 의탁했다가 2007년 다시 새천년민주당으로 복귀했다. 그해 세 번째로 대선에 도전한 그는 또다시 실패했고, 2008년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당한 통합민주당에 합류했다. 자의반타의반으로 그는 이때까지 총 아홉 번 당적을 옮겼다. 그런 그가 또다시 당적을 옮긴 것은 2008년 통합민주당 총선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해 고향(충남 논산)에서 지역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됐다. 뒤이어 지난해 그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가 창당한 자유선진당에 입당했고, 올초 자유선진당이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또다시 당적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번에 선진당과 새누리당의 합당으로 그는 무려 ‘13번째 당적 이전’의 신기록을 세우게 됐다. 그의 당적 이전 가운데는 합당이나 당명 변경 외에 경선 패배나 공천 탈락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경우도 있었다. ‘신기록’을 수립했음에도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60년 봄, 조지훈 선생은 잡지 <새벽>에 당대의 명문 ‘지조론(志操論)―변절자(變節者)를 위하여’를 실어 권력의 단꿀과 양지만을 좇아 자신의 신념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지식인의 변절 행각을 질타했다. 선생은 ‘지조론’ 첫 머리에서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고 썼다. 그리고 이어서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다.”고도 했다. 한 때 유력 대선후보 반영에 까지 올라 ‘정치 지도자’로 주목받아온 이인제 선진통일당 대표. 그런 그가 이놈저놈 사내들의 무릎을 넘나드는 창기(娼妓)처럼 이당 저당을 실리를 좇아 기웃거린 것은 창기와 다를 게 무에 있겠는가? 조지훈 선생 역시 ‘지조론’에서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장사꾼과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선생은 글 말미에서 이렇게 적었다. “구복(口腹)과 명리를 위한 변절은 말없이 사라지는 것이 좋다”고. 이 대표는 이제 더 이상 궤변일랑 늘어놓지 말고 어서 종아리를 걷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