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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 2: 3. 보아스의 밭 - 룻 2: 4. 보아스 베들레헴에서 온 자
룻 2: 3. 보아스의 밭 -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
룻은 가서 곡식 베는 자들을 따라 밭에서 이삭을 주웠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
룻기는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았다고 증언한다(4: 13, 17, 21-22). 보아스와의 인연은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우연한 일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일이 작정된 일이며 그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고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경의 한 기본적인 진리이다. 이사야 46: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1]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본 절에서 룻의 현명한 처신을 살펴볼 수 있다.
(1) 베어버린 밭
추수가 끝나고 시간이 경과한 밭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이삭을 모두 주어버린 밭이므로 어떤 수고를 한다고 할지라도 이삭을 줍는 양이 없거나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베어버린 밭은 이삭을 주울 곡식이 없는 밭이다.
(2) 베는 밭
현재 진행형인 베는 밭은 베이지 않은 이삭이나 낟가리에서 흩어진 이삭이 많이 있다. 룻은 이 이삭을 줍고 있었다. 베는 자는 누구인가? 세상 끝도 이와 같을진대 베는 자를 따라가는 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이다.
* 계 14: 14-16 -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 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3) 베기 전의 밭
이 밭에 들어가는 자는 다 도둑이다.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 요 10: 7-15 -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2] 우연히
룻이 베는 자를 따라서 이삭을 주울 때에는 그 밭의 소유주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 보아스의 밭으로 갔을 때도 그녀는 당시 그 밭의 주인에 대해서나 앞으로 일어나게 될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분명코 이것은 룻의 입장에서는 우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는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하신 기회였다(Gillis Gerleman). 따라서 본서의 저자가 본 절에서 이 말을 한 것은 앞으로 발생되는 일이 인간의 계획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즉 성경을 연구하거나 말씀을 듣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깨닫도록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속에서 복음의 핵심을 발견해야 한다.
왜냐하면 롬 1: 16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구약을 통달해도 복음을 모르면 안 된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사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리고 복음적인 삶이 무엇인지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즉 '나는 부족하므로 주님이 나타나셔야 한다.'고 믿는 삶이다. 그래서 그 내용으로 기도하고 의지할 때 나는 사라지고 성령의 삶이 이루어진다.
3]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1) 밭
밭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보아스의 밭은 교회를 상징한다.고전 3: 9에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라고 했다.
여기서 너희는 성도의 공동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가리킨다. 즉 구원을 위해서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예수를 만날 수 있다.
* 마 13: 38 -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 같이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신령한 일을 분별하며 그 밭에 머물러야 한다.
(2) 두 종류의 영
* 고전 2: 10-15 –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엡 2: 2 -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누구에게 속한가?
이 세상은 성령과 공중 권세 잡은 영이 존재한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둘 중 하나에 속하여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성령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지혜로 성령의 가르치심에 순종하게 된다. 공중 권세 잡은 영에 속한 자는 이 세상의 풍습을 좇고 복종한다.
* 엡 4: 25-32 –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스라엘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추수하는 밭에서 떨어지는 이삭을 줍도록 허용하는 것이 큰 미덕이다.
* 신 24: 19 -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룻은 처음 전혀 안면이 없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밭을 찾아갔다. 이삭을 줍도록 간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우연히’ 이른 밭이 바로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었다.
룻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필연이었다. 룻의 배후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우연」이라는 말은 기독인의 사전에서 없어져야 한다. ‘저절로’, ‘어쩌다가’, ‘재수 없어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
과학에서 신봉하는 ‘진화론’은 원숭이가 우연히 사람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필연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지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룻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중 유력한 자인 보아스」를 준비하고 계셨다. 보아스는 룻에게 나타난 구세주였다. 보아스의 혈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룻에게 준비된 보아스는 성도에게 준비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룻 2: 4. 보아스 베들레헴에서 온 자 -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보아스와 그의 일꾼들 간에 상면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 히브리인들이 나누었던 인사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 이웃의 안부를 물을 때, 혹은 사람을 만났을 때나 헤어질 때 '샬롬'이라는 인사말을 나눴다.
* 삼하 8: 10 - 도이가 그의 아들 요람을 보내 다윗 왕에게 문안하고 축복하게 하니 이는 하닷에셀이 도이와 더불어 전쟁이 있던 터에 다윗이 하닷에셀을 쳐서 무찌름이라. 요람이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 그릇을 가지고 온지라.
* 삼하 11: 7 -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 왕하 4: 26 -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 왕하 5: 21 -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 삼상 1: 17 -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평강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된 인사로서, 히브리인들에게는 가장 보편적인 인사법이다. 그리고 인사말과 더불어 서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창 27: 26 -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 출 18: 7 - 모세가 나가서 그의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고 그들이 서로 문안하고 함께 장막에 들어가서
* 삼상 20: 41 -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 존경과 충성을 표시하는 인사로서 땅에 엎드려 절하는 방식과 무릎을 꿇어 절하는 방식도 있다.
* 창 42: 6 -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창 50: 18 -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 이다.
* 삼하 9: 6 -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 삼하 14: 4 -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 왕하 4: 37 -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 대하 20: 18 -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런데 본 절에서는 이러한 관습적인 것과 다르다. 즉 보아스는 자기 일꾼들에게 매우 자상하게 인사했으며, 일꾼들도 그에게 매우 친밀한 말로 화답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아스의 평소 신앙 인격을 잘 증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
1]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보아스가 추수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이곳으로 온 것으로 보아 룻이 이삭을 줍는 곳은 마을로부터 떨어진 들녘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곳은 일꾼들이 나와서 일하는 곳이지 주인이 방문하는 곳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는 성경에서 베들레헴이라는 도시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야 한다. 지역적으로는 작은 곳이지만 다윗의 동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던 곳이다.
* 삼상 16: 1, 11-12 -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언되고, 성취된 곳으로 다른 지역보다 선별된 의미를 지녔다.
* 눅 2: 11-12 –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영광된 자리를 버리고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추수하는 곳으로 내려오듯이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요 모형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탄생으로부터 다른 어떤 사람과 비교하여도 평범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2]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눅 2: 11에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했다. 이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한다. 그것이 곧 중생이다.
요 1: 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다.
또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마 1: 23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구원이 바로 함께하심에서 온다. 이 임마누엘의 원리에 따라 예수 안에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영속하시고, 함께 하심의 원리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고, 승천으로 영광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임마누엘을 체험함으로 성화와 영화를 경험하게 하시고, 그래서 나는 사라지고 내 안에 예수가 나타나는 것 - 이것이 구원이요 신령한 삶이다.
사데 교회에는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으로 흰 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니는 자들이 있었다.
* 계 3: 4 -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들을 '합당한 자인 연고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하기에 합당한 자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다니기에 합당하다는 말씀이다. 왜 예수님 혼자 다니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데리고 다닙니까?
주님은 말씀을 증언하는 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듣는 그들을 살려주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증언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을 증언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3]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베는 자들의 화답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높은 지위나 경제적 부를 소유한 자가 낮은 자에게 복을 빈다. 여기서는 더 풍성한 복을 받아 그가 베푸는 은덕을 넘치게 받고자하는 소망이 깊게 내포되어 있다.
보아스는 신랑 예수님의 예표이고 베는 자들은 그의 종들이다. 여호와께서 함께하셔서 모든 역사로 인하여 예수님의 신부들의 영광의 찬송이 되고, 신랑 되신 예수의 영광이 되기를 기원하는 말씀이다.
보아스 되신 신랑 예수께서 베는 자들에게 복주시고, 베는 자들이 더 많은 말씀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신부의 자리로 이끌어 주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신부들로 인하여 신랑 예수의 영광이 커지기를 원한다는 말씀이다.
베는 자들이 신랑 예수인 보아스를 위해서 복을 줄 수는 결단코 없다. 베는 자로 택하신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는 역사로 인하여 영광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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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건강을 가져오고 행복을 안겨 줍니다.
사랑이 꽃피고 행복이 넘치는 웃음 가득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