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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며 헤진 부산항 한국에 항구들이 많은데 “울며 헤진 부산항” 이라니 하필 왜 부산항인가? 인천항은 울며 헤질 일 없는가? 부산은 특히 현해탄 건너면 닿는 곳이 일본이기도 하다. 한, 일 합방 기류를 타고 뻔질나게 오가는 편리한 뱃길이 관부 연락선(關釜 連絡船) 뱃길이다. 그 관부 연락선은 여러 사연의 사람들이 오가면서 이별 잦은 항구 부산의 별난 애환이기도 했다. 인천 역시 더 슬픈 사연 많은 항구이다. 멀고 먼 하와이 농장 이민 가는 아픈 이별이 있었고 내용 모르고 멕시코로 팔려간 노예, 에니깽 이민도 있었다. 부산은 그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이별 장면이 많았다. 유학생들, 그리고 더 좋은 곳에 살겠다고 간 사람들, 때로 정신대 여성들도, 또 강제징용자들도 타고 떠난 곳, 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으로 일본 쪽에서 조선으로 이주해오는 사람들도 있어 관부 연락선은 늘 분주했다. 그러나 종전이 되고 일본서 귀국하는 동포들의 서둘러 자진 귀국하는 부류와 반대로 조선서 정착해서 생활해온 관계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은 해방된 분위기에서 지난날 억압받던 조선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리며 일보인들 물러가라고 폭력까지 내두르는 지경까지 되었다. 이때 한 부부는 한국인 남편과 일본인 여자로서 결합하여 어린 딸과 함께 단란하게 살다가 동네 주민들의 분노어린 축출에 뼈아픈 이별을 하게 된다. 두 부부는 의논 끝에 그 어린 딸은 아빠가 맡고 엄마는 자기 나라 일본으로 쫓겨간다. 이때 숫한 한국주둔 일본 병사들도 함께 관부 연락선으로 자기 나라로 가게 된다. 환희에 찬 한국의 귀국선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일본으로 향하는 일본인 귀국선이 교차한다. 그때 그 일본인 엄마는 몸부림치며 떠나가고 아버지와 딸은 불며 울며 이별하는데 그 여덟 살 난 어린 딸 아이는 절규한다. ”엄마 어디가?” “엄마 어디가? 엄마 엄마아아아....... 【”ママ! どこ行くの? おかあさん! どこ行くの? “오까상! 오까상! 독꼬니 이꾸노? 독꼬니 이꾸노? 오까사앙 오까사아아앙.......”】 라고 울며불며 발버둥 치며 외쳤다. 엄마도 울부짖으며 달랜다. “울지마! 하나꼬(春子) 짱! 엄마 곧 돌아 올께에에에” 【泣くな花子ちゃん!お母さんすぐ帰るよ 나꾸나 하나꼬 짱! 오까상 스구 가에루요오오오】 긴 오열을 뒤로하고 떠난 연락선의 이별 장면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이 노래는 사랑이란 말 한마디 없는 이별 노래다. 그런 사연을 알고 듣는 이 노래는 그 가사부터 애절하다. 남인수의 노래로 이즈음도 그렇게 슬프게 들린다. 이즘 세대는 그저 무심히 들을지 모르나 아무튼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다가온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는 우리나라도 없었고, 우리 이름도 없었고, 우리 말도 없었고, 우리 성도 없었다. 그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하고 들으면 더더욱 애절하다. 그때 그 딸아이가 소화 14년생이니까 지금 우리 나이로 82세이다.
1절 울며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파도넘어 사라진 항구 이별만은 슬프더라 이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정들인 사람끼리 사람끼리
2절 달빛아래 허허바다 물새만 울고 부산항 간곳없는 수평선 천리 이별만은 무정터라 이별만은 어렵더라 더구나 못 잊을 사람끼리 사람끼리
※ 그 일본도 오가는데, 그 원수 놈의 일본도 오가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반분 되어 오고 가지 못하는구나! 태극기 들고, 촛불 들고.... 언제 철 들려나?
댓글 joy10 역시 검농다운 발상의 멋진 글이네.
답글 이 사실은 실화라 봐도 됩니다. 벅찬 내용이 있어 간단하게 소개한 것이 외다. 해방 후 한일 회담 직후 한일간에 왕래가 시작 될 무렵 하나꼬와 그의 어머니와 상봉케 되고 그 엄마와 하나꼬 아버지도 만나게 되지요. 그때까지 그 아빠 엄마는 독신을 살아왔고 그 딸 하나꼬는 엄마의 모국어 일어 일문학과를 택해 대학 교수가 되었지요. 하나꼬 엄마도 별세하고 해마다 엄마 산소 찾던 하나꼬가 금년 코로나 역병으로 엄마 찾지 못한다는 사연 또한 애절하지요. 이런 사연은 그 하나꼬의 사위가 소생의 주변에 있는 제자라면 고갤 끄떡 일지....... 울며 헤진 부산항은 1940년 노래로 작사가 조명암의 작사로 와세다 출신 이지요. 그가 월북한 탓에 한때 금지곡이기도 했고요. 사연 하도 애절하여 거적여 본 글 입니다. 형의 폭넓은 지식이 때로 즐겁게 다가올 때 정말 즐겁구려. 역시 75년간 우정이 배경이긴 하지만....
※양해 말씀: 잘못 만지다가 원문 및 댓글이 다 날라가 버려 재차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검농 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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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 잘 올렸어요. 해방후 서로 혜어진 가족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많았답니다. 비슷한 이야기 하나 '내가 처음 근무했던 회사는 일본 도시바 한국공장이어서 특히 혜어진 가족이 많았고 입사하니까 어떤단체인지 몰라도 남아있는 일인 가족을 모두 건조로에 넣고 문을 잠그고 건조시켰는데 누군가 신고해서 질식 직전에 미군이 총칼을 들고 들어와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들을 고참들이 해 주었습니다. 부산항의 이별이나 일본의 어느항구의 이별이나 혼혈가족의 이별은 안타깝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