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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일 오늘의 역사
2024년 칠레 산불 발생 최소 260여명 사망 또는 실종
2023년 미국 우주기업 13년 만에 200번째 로켓 발사 성공
스페이스엑스는 미 플로리다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지구 저궤도 인터넷 위성 스타링크 53기를 팰컨9 로켓에 실어 쏘아올렸다.
이로써 스페이스엑스는 2010년 6월 처음으로 팰컨9의 궤도 비행에 성공한 이후 200번째 발사 성공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팰컨9 로켓을 3개 묶은 팰컨헤비 발사까지 포함하면 총 205회에 이른다. 팰컨9이 첫 100회 발사를 완료하는 데는 10년 반이 걸렸지만 다음 100회를 달성하는 데는 2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지난 13년 동안 스페이스엑스가 로켓 발사에 실패한 것은 2015년 화물우주선 드래건 발사 때 궤도 상승 중 폭발한 사건뿐이었다. 이어 2016년 9월엔 발사 전 지상 폭발 사고를 겪는 등 한때 시련의 기간이 있었지만 2017년 1월 발사를 재개한 이후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이날 발사는 스페이스엑스의 올해 8번째 발사였다. 평균 4일에 한 번꼴로 로켓을 쏜 셈이다.
2020년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 2020 영국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과 각본상 받음
2020년 메뚜기 떼 창궐로 식량 부족해진 소말리아 국가비상사태 선포
2012년 한파로 강원 철원 –24.6℃
2009년 서유럽에 폭설 강타
2009년 2월 2일 폭설이 서유럽을 강타했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는 2일까지 폭설과 한파로 최소 5명이 숨졌으며, 런던 외에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벨기에, 스페인 등에서는 항공기와 열차 운행이 잇따라 중단 또는 지연돼 교통대란이 벌어졌다.
이날 런던에는 15㎝ 가량의 폭설이 쏟아져 18년 만에 최고의 적설량을 기록했다. 이 폭설로 히드로 공항에서는 키프로스 항공소속 항공기가 미끄러져 활주로를 벗어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브리티시 항공 측은 이날 하루 모든 단거리 항공편 운항을 취소했으며 영국의 지방 공항들도 줄줄이 폐쇄됐다.
런던의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도 거의 마비됐다.
이날 전국적으로 수천개의 학교도 일시 휴교에 들어갔다.
이탈리아에서도 폭설을 동반한 한파로 로마, 밀라노발 항공기 20여편이 취소됐으며 3명의 동사자가 발생했다.
프랑스에서는 파리의 샤를드골 국제공항이 최소 87편의 항공기 운항을 취소했으며 오를리 공항에서도 항공기 지연운행이 잇따랐다. 파리와 스트라스부르 등 대도시 주변에서는 교통사고도 줄을 이었다. 프랑스 기상당국인 메테오 프랑스는 북부지역에는 최대 14㎝의 폭설이 쏟아졌다고 전했다.
스위스와 벨기에, 스페인에서도 지역에 따라 많게는 20㎝ 가량의 폭설이 쏟아져 이른 아침부터 출근길 교통대란이 벌어졌으며 남부 스페인에는 시속 100㎞의 폭풍이 휘몰아쳐 10여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됐다.
2007 중국 해저 7천m 탐사 有人잠수정 세계최초 개발
중국이 세계 해저 탐사 경쟁에도 불을 붙였다. 중국 언론은 2월2일 중국 해양과학자들이 해저 7000m까지 들어가 탐사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인 잠수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으며, 올 하반기 시험 탐사를 시작한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발표한 3인용 심해 잠수정은 길이 8m·폭 3m·높이 3.4m 크기로, 고래 형상을 본떴다. 지난해 발사된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 6호 개발진이 잠수정 개발에 참여했다. 중국 언론은 이 잠수정이 전 세계 해저의 99.8%를 탐사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1회 잠수로 12시간 바다 속에 체류할 수 있다. 특수 조명장치·카메라·음파탐지기가 달려 있고, 겉면은 수압에 견딜 수 있도록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었다. 미국·일본·프랑스·러시아의 잠수정들이 해저 6500m까지밖에 못 들어가는 데 비해, 중국 잠수정은 7000m 깊이에서 5시간 동안 머물 수 있다고 중국 언론은 전했다
2003년 하벨 체코대통령 퇴임, 극작가로 복귀
반체제 극작가 출신으로 만13년간 체코를 이끌었던 바츨라프 하벨 (Havel·66) 대통령이 2일 감동적인 대국민 연설로 자신의 임기를 마무리했다.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별인사를 한 하벨은 지난 1999년 체코를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시켰고, 지난해에는 유럽연합(EU) 가입을 성공시켰다. 하벨은 재임 기간 동안 국제통화기금(IMF)의 모임을 프라하에서 열게 했고, 나토(NATO) 정상회의도 프라하에서 열리도록 하는 등 체코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주력했다.
하벨은 이상주의에 매달려 일반 국민들로부터 유리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국내·외의 두터운 신뢰를 잃지 않았다. 체코의회는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실패해 그의 빈 자리를 더욱 실감하고 있다. 하벨은 퇴임 이후 정치 활동을 접고 다시 글쓰기에 몰두하는 옛 자리로 돌아갈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한국부동산신탁, 정부투자 공기업으로 첫 최종부도처리
2001년 검찰,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41억달러 해외 유출 발표
대우그룹이 97년 이후 3년간 김우중 전 회장 지시로 차입금 누락 등 방식으로 처리한 분식회계 규모가 41조원 가량 되고, 이를 근거로 금융기관에서 불법대출받은 액수가 10조원 가량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2일 김 전 회장이 영국의 비밀 금융조직인 BFC(BRITISH FINANCE CENTER)의 30여개 계좌를 통해 3년간 41억달러의 재산을 빼돌리고, 157억달러 상당의 외화를 해외에서 불법차입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날 강병호·장병주 전 (주)대우 사장과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사장, 이상훈 전 (주)대우 전무 등 4명을 특경가법(사기), 외환관리법(해외재산도피)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 영장이 청구됐던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에 대해선 법원이 “불구속 상태에 있는 신영균 현 대우조선 사장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며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대우 5개 계열사의 분식회계 액수는 (주)대우 27조원, 대우자동차 4조5600억원, 대우중공업 5조원, 대우전자 3조7000억원, 대우통신 8300억원 등 모두 41조900억원이라고 밝혔다. 이는 금감원이 작년 발표한 분식회계 총액 23조원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다.
불법대출액은 (주)대우 5조2200억원, 대우자동차 1조8500억원, 대우중공업 1조3925억원, 대우전자 9557억원, 대우통신 5800억원 등 총 9조9982억원이었다.
1996년 미국 영화배우 진 켈리 사망
영화 ‘싱잉 인 더 레인(Singin` in the Rain )’ 등으로 잘 알려진 영화배우 진 켈리가 1996년 2월 2일 83세로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1994년 7월 이후 2차례의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계속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환상적인 율동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던 켈리는 1940∼50년대 영화 ‘파리의 미국인’ ‘닻을 올려라’ 등에서 주연했으며 무용수, 안무가, 가수, 감독으로도 활동한 공로가 인정돼 지난 1951년 아카데미영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춤 속에 노동자들의 역동적인 삶을 묘사했다는 평을 들었던 켈리는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뒤 피츠버그에서 무용강사로 명성을 떨치고 1930년대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 뮤지컬 배우 겸 안무가로 변신했다.
그는 1942년 MGM 영화사에 픽업된 후 영화배우로 나섰으며 1950년대에는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춤의 제왕’ 으로 불렸다
1995년 이한기 前 총리 별세
이한기 전 국무총리가 1995년 2월 2일 요양 중이던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별세했다. 향년 78세였다. 이 전 총리서리는 서구에서 형성된 국제법을 한국적 시각으로 체계화한 국제법학계의 태두였다.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56년과 1958년 그가 펴낸 `국제법학(상)`과 `국제법학(하)`은 당시 국내법학 교재로는 일본학자들이 유일하게 인용할 정도로 국내외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았다. 특히 한일협정 직후인 1960년대 후반에 펴낸 `한국의 영토`라는 박사학위논문은 독도와 간도 등이 한국의 영토임을 국제법적으로 명쾌하게 갈파한 역저로 평가받고 있다.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해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며 도일(渡日), 동경에서 고교(제4고교)와 대학(동경제대) 시절을 보냈으나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1943년 대학졸업 후 귀국한 그는 한동안 신문기자로 활동하다 1949년부터 서울대에서 국제법의 학문적 정착과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1980년 9월부터 2년 간 감사원장직을 맡았고 1987년 5월부터는 한달반 가량 국무총리 서리를 지냈다. 총리서리에서 물러난 뒤엔 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직을 맡아 한일 양국간의 우호증진에 힘썼다.
1994년 국어학자 이숭녕 박사 별세
원로 국어학자 심악 이숭녕 박사(86)가 1994년 2월 2일 서울 원자력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우리나라 국어학의 거봉으로 추앙받았던 이숭녕 박사는 우리말의 음운체계를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구명하는데 한평생을 바쳐왔다.
이 박사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학과를 졸업한 뒤 평양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8·15 광복과 함께 경성대-서울대에서 국어학을 강의하면서 우리나라 국어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국어학을 필생의 연구과제로 삼고 음운론, 문법론, 어휘의미론 등 연구영역을 확대해 오면서, 지금껏 1백30여편의 연구논문과 20여권의 저술을 냈다. 대표적 저서로는 ‘음음론 연구’ ‘중세 국어문법’ ‘국어음운론 연구’ ‘국어학 논총’ 등이 있다.
학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문화상(1956), 3.1문화상(1962), 대한민국문화포장(1962), 국민훈장동백장(1970), 국민훈장모란장(1973년) 등을 수상했다.
1991년 최희용 WBA 미니멈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9년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
문교부가 1989년 2월 2일 과외허용에 관한 정부방침을 최종 확정하여, 대학생의 과외교습은 방학중이든 아니든 전면 허용하고 중·고교 재학생의 학원수강은 방학중에만 허용키로 했다.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현직교사 과외와 학원강사의 학원밖 과외교습은 방학중이라도 계속금지하며 대학생 과외라도 전문적 직업적 과외는 금지한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학교수업이외에 과외학습을 통해 학력을 향상시키고 학습결손을 보충하려는 노력을 막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며 "중앙교육심의회의 건의와 여론을 참작, 학생들의 학습권을 존중하면서도 학교교육의 정상적 운영이 저해되지 않는 선에서 과외금지완화 범위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과외허용으로 인한 계층간 위화감 등 문제점을 줄이기 위해 대학입시제도를 과외교습이 필요없는 방향으로 개선하고 여름방학 이전에 교육방송의 과외방송을 활성화 한다고 밝혔다.
1989년 로드리게스, 파라과이 군부 쿠데타로 실권 장악 -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35년 만에 실각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에서 1989년 2월 2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장군이 이끄는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지난 35년간 이 나라를 강압 통치해 온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이 축출됐다. 스트로에스너는 1954년 집권한 이래 경찰국가에 의한 공포정치를 확립, 강화해 통제사회를 구축했다.
나치스 도망자와 국제적인 마약밀매조직에 은신처를 마련해주며 거액의 보수를 받는 등 불법적인 행동을 취해왔다. 이에 미국정부가 1970년대부터 원조를 중지하자 소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에는 경제상태가 악화돼 민중봉기가 빈발했고 지배층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 약 300여명이 사망했고 스트로에스너르는 해외로 도주했다.
1985년 동호대교 개통
1983년 국민학교 4.5.6학년 교과서 개편
1982년 미국 X선 레이저장치 개발
1981년 한미 정상회담, 주한미군 철수계획 백지화
1981년 한국방송공사 교육TV 첫 방영
1970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방우영 취임
1970년 영국 철학자 러셀 사망
영국의 철학자이며 수학자, 노벨상수상자(1950년), 그리고 정치가로 알려진 버틀란트 러셀이 1970년 2월 3일 웨일즈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잉글랜드 몬머스셔 트렐렉에서 태어난 러셀은 트리니티대학과 캠브리지대학의 철학교수로 있었으며, 고전인 `수학적 원리(1910~1913년)`를 포함한 다수의 책을 썼다. 그는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영국 국가유공자 회원의 일원이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당시 징병거부단체에서 반전주의자와 탈영병을 돕다가 교수직에서 쫒겨났으며 1918년에는 '트리뷰널'에 레닌과 볼셰비키를 찬양하고 미군을 비난하는 논설을 썼다가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1920년 소련을 방문해 레닌과 스탈린을 만난 뒤로는 볼셰비즘과 결별했다.
그는 철학도의 필독서인 '서양 철학사(1946년)'를 쓰는 등 평생 70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쓰며 학문에도 전념했지만 핵의 남용을 묵과하지 못하고 아인슈타인과 함께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하는 등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했다. 또한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난하는 스톡홀름 전쟁범죄재판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68년 미국 북한 푸에블로호사건 비밀협상 개시
1964년 미국 레인저6호 달 고요의 바다에 착륙
1962년 미국 일본 관세인하협정 조인. 미국 쿠바와 전면금수
1959년 미국 남부버지니아서 처음으로 흑백공학 실현
1959년 맥밀런 영국 수상 소련방문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56년 북한 적십자사, 국제적십자연맹에 가입
1956년 한미원자력협정 조인
1954년 소련의 영화감독 베르토프 사망
1953년 미국 대통령 일반교서 발표, 얄타협정 폐기요청, 대만중립화 해제선언
1953년 바이올린 연주자 채동선 사망
1951년 유엔총회, 한국전쟁개입한 중공 탄핵안 가결
유엔군의 북진에 맞서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이에 유엔 총회는 전투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12월 14일 ‘정전 3인단(Three-man Group on Cease-Fire)’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캐나다의 L.페르슨, 이란의 N.엔테잠, 인도의 B.라우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 3인단의 임무는 한국에서 만족할 만한 정전의 기초를 결정하고 이를 총회에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 3인단은 중공대표와의 회담 ·교섭에 완전히 실패했으며, 이어 1951년 1월 1일에 중공과 북한은 대규모공세를 시작하였다. 이로써 총회의 정전요구에 응하지 않겠다는 중공의 의사가 명백해졌다.
이에, 1951년 2월 1일 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의거 중공은 한국의 침략자라는 결의를 채택하고, 이어 5월 18일에는 동 결의 제6항에 의거 부과된 ‘집단적 조치위원회(Collective Measures Committee)’의 보고에 따라 중공과 북한에 대한 전쟁물자의 공급중지를 가맹국에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특히 6월 23일의 유엔 주재 소련대표 Y.A.말리크의 성명을 통하여 침략군이 전투행위를 중지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유엔군사령부는 공산군사령부와 직접적인 연락을 취하고, 7월 초에 휴전회담 개시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1950년 국회, 농지개혁법 수정안 통과
1949년 초대 주미 대사에 장면 임명
1946년 제1회 전국 빙상선수권대회 소양강서 개최
1944년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 투입
2차 세계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이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를 전장에 투입한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비행기나 특수 잠수정으로 연합군의 함정에 자폭했다.
가미카제는 30척 이상의 연합군 군함과 350척이 넘는 전함에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43년 무솔리니 이탈리아 수상 사임
1943년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복(종전)
볼가강 하류에 위치한 스탈린그라드는 주요 산업의 중심지이며 카프카스 지방의 유전(油田)과 소련의 주요 지역을 잇는 석유공급로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를 선두로 한 33만 명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하여 기갑부대를 동원하여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10월 중순 무렵 가까스로 소련군을 볼가강 가까이로 밀어냈으나 추위와 보급품의 부족으로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었다.
1942년 11월 중순 소련군은 남북 협공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독일측의 루마니아 군대를 격퇴시켰으며, 23일에는 파울루스의 군대와 기갑부대 일부를 포위하였다. 독일군은 이들을 구출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파울루스는 항복 의사를 표명하였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시키는 등 격려하였으나 이듬해 1월 31일 파울루스는 소련에 항복하였고 2월 2일 살아남은 독일군 9만 1000여 명도 스스로 항복을 선택하였다.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22만여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배함으로써 수세에 몰리고 소련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반격함으로써 전국(戰局)이 전환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32년 국제연맹주최, 제네바 군축회의 개최
1926년 프랑스 제3대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탱 출생
1924년 그리스 공화제 선포
1922년 '율리시즈' 출판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율리시즈`가 1922년 2월 2일 프랑스 파리에서 초판이 출판됐다.
이날은 그의 40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율리시즈`는 1918년부터 미국의 한 잡지에 연재됐으나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한동안 연재와 출판이 금지당하는 바람에 이날 파리에서 출간됐다.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이스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예비학교에서 수학했으나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문학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00년 4월 그가 나름의 미학이론으로 입센을 해석한 `입센의 새로운 드라마`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됐다. 조
이스의 첫 소설인 `더블린 사람들`은 1904년 더블린의 한 신문에 연재됐으나, 작품의 외설성과 더블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영국 왕을 모욕하는 듯한 내용 등으로 책을 출판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그는 8년동안이나 책 출간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결국 1912년 책 출간을 포기하고 아일랜드를 등진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조국을 찾지 않았다.
그가 당시 세계문학의 수도였던 파리에 정착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한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세계 문학의 큰 별로 군림하던 그가 파리를 떠난 것은 파리가 2차대전으로 독일에 함락된 1940년이었다.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해 생활했으나 위궤양 수술 후유증으로 1941년 1월 숨을 거뒀다.
1920년 한국무용가 한영숙 출생
1914년 한국 화가 박수근 출생
1913년 뉴욕의 호화 기차역 그랜드 센트럴 개관
뉴욕 그랜드세트럴역이 1913년 2월 2일에 15만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찬사와 혼잡속에서 개관됐다. 주로 브롱스, 부르클린, 맨하탄에서 축하차 몰려온 사람들은 역원에게 열차 출발시간과 장소를 끊임없이 물어왔다. 한 역원은 24시간동안 같은 질문을 310번이나 받았다고 말했다.
몇몇 승객들은 새 역의 건축술, 전기설비 및 빌딩 건축에 사용된 대리석 원료에 대해 자세히 질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밤 하늘의 별들을 그려놓은 아름다운 천정을 쳐다보고 있기도 했다. 뉴욕 세트럴역의 회장인 윌리암 C.브라운도 아무도 모르게 역사적인 그랜드센트럴역 개관식을 시찰했다
1905년 미술사학자 고유섭 출생
1901년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출생
1895년 독립문 건립 기공
1882년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출생
1875년 오스트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 출생
1848년 미국-멕시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 체결
1801년 천주교 신유박해 시작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가 1801년 2월 2일(음력 1월10일)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리면서 신유박해가 시작됐다. 신유사옥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가 당시의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정순대비는 이같은 지시를 내린 것이다.
천주교를 버리지 않는 사람은 반역죄로 다스려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이가환 등 남인들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 등이 처형 또는 옥사했으며 정약전 정약용 등은 유배됐다. 또 가을에는 베이징의 천주교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황사영의 백서가 발견되어 관련자들이 처형되는 등 박해가 일단락되는 이듬해인 1802년 2월 4일까지 모두 100여명이 순교하고 400여명이 유배됐다.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기도 했다. /조선
1639년 선혜청에 진휼청을 설치
962년 신성로마제국 탄생
교황 요한12세가 동프랑크 왕 오토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962년 2월 2일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다. 이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연장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로마제국이라 불렸고, 또 고대 로마의 전통보존자인 그리스도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이라는 말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운 것은 15세기로 그 이전은 단순히 제국 또는 로마제국이라 불렸다.
이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이 라인동맹을 수립해 독일을 재편성한 직후 프란츠2세가 제위에서 물러나면서 해체됐다. 유럽의 중세와 근대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주권이 미치지 않았던 국가는 고작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정도였다. 이처럼 신성로마제국은 좁게는 독일의 역사였지만 넓게는 유럽의 역사였다. 유럽의 역사에서 황제란 곧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의미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오토1세의 아버지 하인리히1세를 비조(鼻祖)로 한 작센왕조에서 시작해 잘리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 대공위 시대, 가권 경쟁 시대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조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가장 오래된 가장 오래된 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