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후는 천계원년, 명희종과 대혼을 거행한다. 그녀의 성은 “장”이고 이름은 “언”이며, 자는 祖娥이고 아명은 寶珠이다. 하남 상부현 청생인 張國紀의 딸이다. 용모가 뛰어났으며, 글을 읽어서 이치에 밝았고, 의리를 알았다. 총명하고 예지있는 뛰어난 황후이다. 어린 부부는 결혼후에 처음에는 서로 사랑이 깊었다. 명희종은 그해 4월에 그녀를 정궁황후로 봉한다. 그러나 명희종은 어린애와 같았다. 매일 그저 놀 거리만 찾았다. 목수일을 좋아했고, 조정의 일은 신경쓰지 않았다. 또한 위충현과 유모인 객씨를 총애했다. 장황후는 위충현의 전횡과 조정교란에 대해서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부부일지라도 자주 둘만이 있을 경우엔 이를 경계하도록 권했다. 그러나 명희종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고 부부사이만 멀어지게 된다. 장황후는 심계가 깊은 여인이었다. 국가의 대사에도 자기주장이 있었다. 그녀는 객씨의 무도한 행위에 대하여 아주 불만이 많았다. 여러번 객씨를 궁중에 불러서 제거하려고도 생각했으나 객씨는 장황후를 의심하던 터인지라 장황후에 대하여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객씨는 원래 명희종의 유모여서 그녀의 손으로 명희종을 키우다시피 했다. 그리하여 자주 명희종의 어머니라 칭하고 궁내에서 위세를 부리곤 하였다. 비빈들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장황후에게도 마찬가지인지라 장황후는 면전에서 그녀를 질책하기도 했다. 그래서 객씨, 위충현과 장황후는 서로 적이 되어 서로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천계3년(1623년) 장황후가 임신을 하자 객씨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 장황후 궁중의 궁녀를 모조리 자신의 심복들로 바꾼다. 그리고 장황후를 모실 때에 소홀히 하도록 했다. 결국 어느 날, 한 궁녀가 장황후의 등을 안마할 때 너무 세게 쳐서 장황후는 유산을 하고 만다.
장황후를 몰래 해치는 동시에 객씨와 위충현의 두 사람은 장황후의 부친인 장국기에게까지 독수를 뻗친다. 이를 가지고 장황후를 연루시켜 폐위시키고 위충현의 조카인 위량경의 딸을 황후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장황후는 장국기가 양녀로 삼은 살인범의 딸이라고 소문을 냈다. 그녀의 생부가 살인강도인 孫二라는 것이었다. 명희종 주유교는 이 말을 듣고 이를 믿어버렸다. 그래서 진실을 묻지도 않고 장국기의 벼슬을 빼앗고, 고향으로 보내어서 만년을 그곳에서 지내도록 한다. 그러나 장황후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장황후에게는 부부의 정이 있었던 것 같다. 명희종은 객씨등이 장황후를 해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고 장황후가 객씨들을 해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왕왕 양자의 사이에 침묵을 지켰다.
원래 명희종 주유교는 신체가 아주 건강했다. 20이 막 넘었는데 병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무슨 원인에서인지 천계6년부터 몸이 날로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얼굴과 몸에 부기가 있었다. 천계7년이 되자 병석에 누웠는데, 자주 고열이 발생하며, 부종이 심해지고, 식사량이 크게 줄어 말하는 데에도 힘이 없었다. 조야 상하가 모두 불안에 떨었다. 이때 경사에서 위충현이 황위를 도모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온 성내가 어수선했다. 장황후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명희종이 병들자, 장황후는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했다. 아마도 양식이 생겼는지, 천계7년 주유교의 성격에도 약간의 변화가 발생한다. 그는 주위사람들을 의식하기 시작하였고, 장황후에 대한 태도도 점차로 호전되었다.
장황후는 겨우 스물을 넘긴 젊은 여인이었지만, 정치적인 두뇌가 있었다. 그녀는 냉정하여야 하며, 황위계승문제가 시급한 현안이라고 판단했다. 주유교의 병환은 깊어만 갔고, 더 나아질 기미도 없었다. 그리고 후사도 없다. 이리 되면 주유교의 동생인 信王 朱由儉을 떠올렸다. “兄終弟及(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음)”의 관례에 따라 신왕은 황위를 계승할 충분한 자격이 있고, 평판이 좋아서 능히 대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황후는 병중의 주유교에게 신왕을 언급하면서, 그라면 대사를 맡길 수 있다고 말하고, 주유교도 이에 동의한다. 이 때에 위충현등은 궁전의 내외에 불의의 사태에 대비한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이 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막고자, 장황후는 주유교에세 즉시 신왕 주유검을 부르도록 청한다. 그러나 객씨와 위충현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한다. 나중에 어렵게 신왕과 명희종이 서로 만나게 된다. 건청궁에서 이뤄진 이 비밀 회동에서 형의 온몸이 부어있고 목숨이 위태로움을 보고 주유검은 매우 안타까워 한다. 주유교는 억지로 정신을 차려서, “내 동생은 장래 요순과 같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 형수를 잘 돌봐 주거라.” 라고 한다. 신왕은 황제위를 준다는 말에 극력 사양한다. 이때 장황후가 발을 제치고 나오면서, "황권은 절대로 사양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국가가 아주 위험한 때이니, 당신이 반드시 사직을 맡는 대임을 져야 합니다.“ 라고 말한다. 신왕은 그저 땅에 부복하여 감히 말대답을 하지 못한다. 접견이 끝난 후에, 장황후는 몸조심하도록 부탁하고, 항상 사태변화를 예의 주시하도록 요청한다. 주유교는 흐리멍텅하게 살아왔지만 그가 제대로 한 일이 바로 신왕 주유검을 황위 후계자로 한 일이다. 장황후의 격려에 신왕은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천계7년 8월 26일, 희종이 붕어한다. 장황후는 즉시 명을 내려, 신왕을 입궁케 한다. 동시에 신왕이 대통을 잇는다고 선언한다. 다음 날, 주유검이 등극하고 나서야 장황후는 비로서 안심한다. 장황후는 자신의 기민함과 과감성으로 사직을 보존케 하는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다.
주유검은 황제가 된 후에, 장황후를 아주 존경한다. 장황후를 懿安皇后로 받들며 궁중에 모시게 한다. 숭정 17년(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는 아들들은 궁밖으로 내보낸 후, 후궁으로 들어와서 친히 공주를 죽인다. 그리고 후비들에게 자진하도록 명하고 자신은 태감 왕승은을 데리고 매산에 올라가서 목을 맨대. 다만 형수인 장황후의 행방은 기록이 없다. 그래서 수백년동안 후세사가들은 여러 가지 주장을 펼쳤다.
조사금의 <갑신기사>에 의하면 장황후는 이자성의 농민군에 투항하였다는 것이다. 장황후는 여러 번 멍청한 희종을 권하여 위충현에게 핍박받던 대신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민간에서 장황후이 평판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농민군들도 존경했다. 이자성은 그녀를 후궁현주로 불렀다고 한다. 이자성의 농민군이 북경을 함락한 후에, 이자성은 명령을 내려 장황후를 해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들이 입궁하자 아직 도망가지 못한 장황후와 만난다. 농민군은 궁녀로 하여금 그녀를 상좌에 앉게 부축하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어 호위해준다. 장황후는 감격하여 이자성의 농민군에 투항한다. 나중에 이자성이 패배하여 북경을 철수할 때 행방이 묘연해진다. 다만 이 설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조사금은 비록 명청교체시기의 인물이지만, 책에서 기록한 대부분은 자기가 들었고나 목격한 것이다. 다만 그는 망한 명나라이 관리로 성이 함락되자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서 수감된다. 그러므로 장황후의 투항은 그가 목격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견이 분분해지게 된 것이다. 장황후는 엄정하고 대장부의 기개가 있었는데, 무릎을 굽혀 자신의 명나라를 멸망시킨 농민군에게 투항할리는 만무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장황후는 북경함락이후에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왕원의 <거업당집>에 나오는 기록이다. 책에서는 “하남 위지의 사람인 왕대본은 농민군의 장수였다. 북경을 함락시킨 후 왕은 다른 4명과 같이 의안황후를 붙잡았다. 어떤 자가 황후에게 불손하자 왕대본이 대노했다. ‘이분은 일대의 국모이다. 어찌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바로 칼을 뽑아 황후를 죽였다. 차라리 죽어서 욕을 당하지 않게끔 한 것이다.”라고 씌여 있다.
이외에 다른 설은, 장황후는 농민군에 투항하지 않았고 변장하여 북경성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곡응태의 <명사기사본말>, 계육기의 <명계북략>. 담천의 <국각>등의 책에서는 숭정제는 농민군에게 북경이 함락될 때 사람을 장황후의 거소로 보내 자진을 권한다. 허나 장황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혼란을 틈타서 낡은 옷으로 얼굴을 가린 후, 성국공부로 도망혔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도 장황후가 궁중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 보다 가장 신빙성있는 추론은,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서 자진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숙의 <의안사략>을 보면, 농민군이 북경성에 들어온 후, “궁중이 시끄러웠다. 황후는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맸다.”고 되어 있고, 주동곡의 <상원집>에는, “서안 장맹견이 궁으로 들어가서 친히 황후가 죽은 것을 보았다. 일찍이 내게 말해 주었다.”라고 했다. 이외에 관방의 정사인 <明史> <淸史考>등의 서적에서는 장황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청나라가 성에 진입한 후, 명희종의 덕릉에 합장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 역시 추측이다. 아마도 나중에 명희종의 덕릉을 발굴하게 된다면 이 수수께끼는 풀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