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배우다
정월 초사흘 금요일이다. 방학 중인데 도시락을 싸 학교로 향했다. 주말이나 방학에 나가는 자연 학교는 급식이 없다. 국수집이나 국밥집도 있을 리 없는 외진 곳이다. 걷다보면 소진되는 열량 벌충하려면 배낭에 도시락을 챙김은 기본이다. 새해 첫날은 동해남부해안을 둘러오고 이튿날은 우포늪을 다녀왔다. 초사흘엔 집에서부터 걸어 용추계곡으로 들어 진례산성을 넘을 셈이다.
세밑부터 찾아온 영하권 날씨가 며칠째 이어진다. 두터운 잠바와 모자를 눌러써서 미명의 새벽에 길을 나서도 추운 줄 몰랐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남산교회 앞을 지났다. 어둠 속 메타스퀘어 가로수가 희미했다. 퇴촌 삼거리에서 창원대학 앞으로 가 도청 뒤를 돌아갔다. 역세권 개발 현장과 창원중앙역 굴다리를 지나 용추계곡으로 들었다. 평일 이른 아침이라 산행객은 드물었다.
용추계곡 들머리는 등산로는 서릿발이 솟아 있었다, 지난 가을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몇 해 전 태풍으로 유실된 교량이 새로이 번듯하게 놓여 있었다. 계곡 바위틈으로는 개울물이 졸졸 흘렀다, 아직 올 겨울이 강추위가 아니어선지 빙판으로 얼어붙지는 않았다. 날씨가 추워선지 먹잇감이 동이 나선지 산새들 소리가 적게 들렸다. 늦가을까진 나무열매를 따 먹느라 산새가 많았더랬다.
용추5교를 지나고 출렁다리를 건너니 창원대학에서 고산 쉼터로 가는 숲속 나들이길 이정표가 나왔다. 길섶에는 겨울에도 청청한 잎맥을 보여주는 맥문동이 군락을 이루었다. 용추계곡 식생에서 바위에 붙어 자라기도 하는 마삭넝쿨과 함께 상록 잎줄기였다. 반상록성인 인동덩굴과 쥐똥나무가 있기도 했다. 이들은 일부는 낙엽이 지고 일부는 파란 잎사귀를 단 채 겨울을 나고 있었다.
우곡사 갈림길에서 진례산성 포곡정 방향으로 올랐다. 너럭바위를 타고 흐르는 개울물은 고드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목이 된 산벚나무는 앙상한 가지마다 봄에 피어날 꽃눈이 점지되어 있었다. 계곡 들머리에선 산행객이 보이질 않았는데 중간에 이르니 간간이 보였다. 응달이라 아침 해가 떴지 싶었는데 햇살이 번지지 않아선지 여전히 추웠다. 대기는 미세먼지가 끼어가는 듯했다.
포곡정에 이르러 진례산성 남문이 아닌 동문 방향으로 향했다. 움집터를 지난 몇 그루 노송 쉼터에서 배낭을 열어 곡차를 두 잔 비우면서 잠시 쉬었다. 자연석으로 좌대를 만들어 쉬어가기 좋게 만든 자리라 내가 그곳을 지날 때는 반드시 앉아보는 곳이다. 용추계곡 일대에서 드물게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 만든 쉼터였다.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 비탈을 올라 동문 터에 닿았다.
이제 나아갈 길은 사람들이 다니질 않은 산비탈로 내려섰다. 가랑잎이 덮여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자손이 벌초 성묘를 다녀가는 무덤을 지나 임도에 닿았다. 진례 송정에서 신월에 이르는 정병산에서 용제봉 북사면의 길고 긴 임도였다. 산중 백숙촌으로 알려진 평지마을 뒤를 지나서도 무념무상 걷다가 너럭바위 쉼터에서 도시락을 비우면서 남겨둔 곡차를 마저 들었다.
산림은 북향의 식생이 우거졌다. 대암산을 지나 용제봉 가는 응달엔 낙엽활엽수들이 울창했다. 간간이 소나무도 섞여 자랐다. 몇 해 전보다 우람해지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우거진 숲을 사진에 담아 몇몇 지기들에게 보내면서 ‘나무가 부럽다면서 저 우람하고 꼿꼿한 기품에서 한 수 배우고 싶다’고 전했다. 나무들도 한 해 한 개 나이테를 둘러가고 나도 해가 바뀌어 나이가 드는데.
갈림길에서 용제봉 정상으로 가질 않고 신월 방향으로 돌아갔다. 나아가야 할 임도는 한참이었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니 진례 들판과 공장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철길과 고속도로가 십자로 걸쳐 지났다. 산기슭을 내려가니 장유사로 오르는 이정표가 나왔다. 언젠가 그 길을 걸었더니 날이 저물었다. 이번엔 신월마을로 내려섰다. 진영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창원으로 복귀했다. 20.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