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얼흥얼 외 2편
서진배
어떤 슬픔은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파란 사과 한 알을 쥐고 장례식장 안을 뛰어다니는 어린 상주가 있는가 하면,
벽에 기대어 흥얼거리는 어린 상주의 엄마가 있습니다
너무 어린 슬픔이거나,
너무 아린 슬픔이거나,
슬픔이 눈물을 따라가야하는데,
과일가게 간판에 한눈팔거나,
노래를 흥얼흥을 따라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슬픔은
가 본 길인데 길을 잃고,
어떤 슬픔은
갈 때마다 길을 잃고,
당신의 슬픔이 길을 잃어 당신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래가 흘어나올 때, 나는
당신의 슬픔을 따라가 길을 잃고,
당신의 흥얼거림을 따라 흥얼거립니다
당신의 흥얼거리는 노래마저 길을 잃고 한 멜로디를 맴돌 때, 나도
그 멜로디를 따라 맴돕니다
무슨 노래인지 묻지 않으면서,
무슨 슬픔인지 묻지 않으면서,
한 흥얼거림이 한 흥얼거림을 흥얼흥얼 따라가고 있습니다
액자의 기울기
나는 기운 듯한데, 너는 왜 계속 수평이 맞다, 하는 걸까
액자로 다가가 액자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다독이고,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네게 한 걸음 다가간다
고개를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여 본다
우리 앞의 벽이 기운 건 아닐까
또 한 걸음 물러서며 또 한 걸음 네게 다가간다
네게 머물 때까지 물러서 봐도,
너를 지날 때까지 물러서 봐도,
액자는 기운 듯한데,
너는
왜 계속 수평을 맞다, 하는 걸까
얼마나 더 물러서야 네 수평을 볼 수 있을까
액자 속 네 얼굴이 내 얼굴 쪽으로 기울어 그런 줄도 모르고
기울어진 네 얼굴에서 내 얼굴로
설탕 같은 웃음이 흘러오는 줄도 모르고,
네 얼굴의 웃음이
내 얼굴에서 웃음소리가 날 때까지 흘러와야 하는 줄도 모르고,
액자 속 너는
우리 앞의 영원을 본 사람처럼 웃고,
액자 속 나는
우리 앞의 끝을 본 사람처럼 웃고,
우리 앞의 시간이 기운 줄도 모르고,
―서진배 시집, 『 어쩌면 너는 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일지도』 (시인의일요일 / 2024)
서진배
충남 부여 출생. 2019년 《영남일보문학상》으로 등단.
바깥의 안부를 먼저 묻는,
당신의 사투리를 받아쓰겠다던 시인의 첫 시집
마음을 돌볼 줄 아는,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숨결의 시
서진배의 시는 결핍에서 온다. 아픈 가족사와 그 중심에 있는 어머니, 그리고 벗어날 길 없는 가난. 흔하다면 흔한 사연일 수도 있지만 결핍의 시간을 지나며 거기서 꽃핀 것이 서진배의 시다. 그런데 서진배 시에 돌올한 개성을 입힌 것은 마음을 돌볼 줄 아는 예민한 시선에 있다. 결핍에 아파하고 괴로워했던 시간을 견딘 이에게만 허락된 시심이 서진배의 시에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는다.
서진배의 시에 짙게 드리운 슬픔과 페이소스는 삶의 고단한 체험에서 빚어진다. 가난에 익숙해진 서민들이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사소한 순간들에서 서진배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발견한다. 서정시가 오랫동안 내내 지켜 온 자리를 서글프지만 담담하게 그의 시가 지키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는 담담한 전언은 지독한 슬픔과 지난한 아픔의 시간을 견디며 생성된 것이다. 서진배의 서정적인 시들이 종종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하거나 아이러니를 품고 있는 까닭은 체험의 단단함에서 비롯된다.
서진배 시인의 첫 시집에 지배적으로 흐르는 정서는 슬픔이다. 슬픔은 누군가를 상실한 체험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 결핍에서 흘러나오기도 한다.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감각이나 버림받은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서진배의 시는 그런 이유로 흘러나오는 슬픔을 예민하게 감각하면서도 슬픔에 젖어 들어 매몰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슬픔을 느끼는 결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사실에 오히려 주목한다. 서진배의 시에서 슬픔이 마음을 돌보는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서진배 시인에게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 혼잣말도 혼자 하는 말이 아니라는 시적 주체의 전언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서진배 시인의 인식과 바람이 담겨 있다. “세상에 혼잣말은 없”고 “지금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여기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며 “둘이 멀리서 하는 말일 뿐”이라고 시의 주체는 말한다. 벌써 묻고 이제 대답하는 시차가 있을 뿐 애초에 대상을 향하지 않은 혼잣말은 없다는 이 시의 전언은 서진배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서진배의 시 또한 “미처 못 한 말이고,/ 차마 못 한 말이고,/ 이제야 하는 말이고,/ 아직인 말일”지언정 독자를 향하지 않는 혼잣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독자를 향해, 세상을 향해,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우리’ 공동체를 향해 말을 건네고 마음을 건네며 슬픈 노래를 흥얼댄다. 그의 시는 “아직 만나지 못한” 독자를 향해 “아직 가는” 중이다. 이제 미지의 독자가 그의 말에 응답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