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 축의금 낼 때 제발 이러지 마세요..” 중년이 특히나 자주 하는 실수 1위
살아가며 누군가의 새 출발을 축복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빛나는 도리 중 하나입니다.
특히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가장 많은 관계의 그물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주말마다 날아드는 청첩장은 단순한 초대장을 넘어 지난 세월 내가 맺어온 인연의 무게와 품격을 시험하는 시험대가 되곤 합니다.
젊은 시절처럼 그저 가벼운 발걸음으로 축하만 건네고 돌아오기에는, 직장의 상사와 후배, 오랜 동창과 친인척,
그리고 사회적 모임의 수많은 시선이 얽혀 있어 축의금 봉투 하나를 건네는 손끝에도 적잖은 고민과 무게가 실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예의범절에 가장 밝아야 할 중년층이 결혼식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저지르며,
축하하러 가놓고도 상대방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와 불쾌감을 남기고 끝내 오랜 인연마저 등돌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과거 자신이 냈던 금액이나 옛날 물가 기준에만 갇혀, 오늘날의 현실적인 식대와 예식 환경을 무시한 채
어설픈 잣대로 축의금을 책정하고 대가족을 대동하는 행위’입니다.
이 실수는 악의나 인색함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드물기에 더욱 치명적입니다.
대다수의 중년들은 "그래도 내가 얼굴을 비추어 자리를 빛내주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담아 봉투를 냈으니
상대방도 고마워하겠지"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선의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서 치러지는 요즘의 결혼식 현실은, 십 년 전 혹은 이십 년 전 중년들이
자신의 결혼식을 치르던 시절과는 천지개벽 수준으로 달라져 있습니다.
서울과 수도권은 물론 지방 대도시의 주요 예식장들조차 1인당 뷔페 식대가 최소 6만 원에서 8만 원을 훌쩍 넘어서고 있으며,
호텔이나 고급 웨딩홀의 코스 요리는 1인당 10만 원에서 15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신랑 신부는 식장 대관료와 꽃장식 비용 외에도 하객 한 사람이 식당에 들어서서 식권을 받아 드는 순간,
그 한 사람 몫으로 고스란히 수만 원에서 십수만 원의 밥값을 식장에 현금으로 결제해야 하는
무거운 재정적 부담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많은 중년들이 과거 2000년대 초반이나 2010년대 초반의 기억에 멈추어 서서
"친구 자식이니까 5만 원이면 되겠지", "직장 동료니까 기본 5만 원, 조금 친하면 10만 원이면 충분하다"는 낡은 셈법을 고수하곤 합니다.
혼자 방문하여 5만 원을 내고 식사를 하고 가는 것조차 요즘 기준으로는 혼주와 신랑 신부의 입장에서
순수하게 적자를 메워야 하는 난처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중년들이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좋은 날 잔칫집에 사람이 북적여야 복이 온다"는 옛 어른들의 핑계를 앞세워, 봉투에는 달랑 5만 원이나 10만 원을 넣어두고
배우자는 물론 장성한 자녀들까지 두세 명을 줄줄이 데리고 식장에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접수대 앞에서 당당하게 "우리 식구들 다 같이 축하하러 왔네"라며 식권 네 장, 다섯 장을 챙겨 들고 뷔페 식당으로 향하는
중년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축의금을 정산하는 혼주와 신랑 신부의 가슴은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1인당 7만 원짜리 식장에 부부와 자녀 둘이 와서 네 장의 식권을 받아 식사를 하면,
그 가족이 한 끼 식사로 발생시킨 실질적인 비용만 28만 원에 달합니다.
그런데 축의금 봉투에 들어있는 돈이 10만 원이라면, 신랑 신부는 축하를 받기는커녕 그 하객 한 가족 때문에
제 주머니에서 18만 원이라는 생돈의 손실을 보아야 하는 처참한 계산서와 마주하게 됩니다.
장례식장은 슬픔을 나누는 자리이기에 형편이 닿지 않으면 조문만으로도 눈물겨운 위로가 되지만,
결혼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연회 계약이 얽혀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행사입니다.
잔치가 모두 끝나고 신랑 신부가 호텔이나 웨딩홀 정산실에 마주 앉아 조의록과 축의금 장부를 대조할 때,
그 어처구니없는 불균형을 마주한 젊은 신혼부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깊은 탄식과 허탈감입니다.
"아버지는 왜 저런 분을 친구라고 부르셔서 우리한테 이런 빚을 안겨주셨을까?"
"축하를 빙자해서 온 가족 주말 외식하러 오신 건가?"
중년의 당사자는 "내가 바쁜 주말에 먼 길 찾아가 박수 쳐주고 밥 한 끼 먹어주었으니 큰 도리를 다했다"고
흐뭇해하며 집으로 돌아가지만, 신랑 신부와 혼주의 뇌리에는 그 중년의 이름 석 자가 '파렴치하게 무임승차를 한 몰상식한 사람',
'자신의 체면만 차리고 남의 주머니를 갉아먹은 민폐 하객'으로 평생 낙인찍히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보답의 불균형’에서 발생합니다.
과거 상대방이 자신의 자녀 결혼식이나 본인의 경조사에 찾아와 10만 원, 20만 원의 성의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흘러 물가가 두 배 세 배로 뛴 오늘날 상대방의 자녀 결혼식에 찾아가 "내가 옛날에 10만 원 받았으니 나도
똑같이 10만 원만 돌려주면 도리를 다한 것"이라 착각하는 중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십 년 전의 10만 원과 지금의 10만 원은 그 화폐 가치와 식대 부담에서 하늘과 땅 차이임에도,
오직 숫자의 동일함에만 집착하여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안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십 년 전 허리띠를 졸라매어 정성을 다해 축하를 건넸건만,
돌아온 것은 물가 상승조차 반영되지 않은 성의 없는 되갚음과 온 가족의 뻔뻔한 식판 세례뿐일 때,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우정과 신뢰는 그날 하루 만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다면 품격 있는 중년으로서, 축복하러 간 자리에서 서로에게 얼굴을 붉히지 않고 진정한 덕담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원칙은 매우 명료하고 엄격해야 합니다.
첫째, 참석 여부와 동행 인원에 따른 철저한 현실적 계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예식 문화에서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여 식사를 할 계획이라면,
최소한 1인당 식대를 웃도는 10만 원을 기본 예의의 마지노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만약 배우자나 가족을 동반하여 두 명 이상이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식장 식대의 총합을 훌륭히 상쇄하고도 축하의 정성이 남을 수 있도록 15만 원에서 20만 원 이상의 봉투를
준비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마땅한 배려이자 어른의 도리입니다.
둘째, 형편이 여의치 않거나 깊은 친분이 아니라면 ‘불참의 미덕’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빠듯하여 5만 원 정도의 성의밖에 낼 수 없는 처지라면,
굳이 예식장에 찾아가 식권을 받아 밥을 먹는 것보다 마음을 담은 정갈한 축하 메시지와 함께 계좌로 5만 원을 보내는 것이
신랑 신부를 재정적으로 훨씬 더 깊이 배려하는 길입니다.
신랑 신부의 입장에서도 식대 손실 없이 순수한 축하의 정성만을 오롯이 전달받을 수 있기에,
오히려 얼굴을 비추고 적자를 남기는 하객보다 훨씬 더 고맙고 깔끔한 인연으로 기억에 남게 됩니다.
셋째, 자신의 과거 기억에 갇히지 말고 세태의 변화를 인정하는 유연함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때는 국수 한 그릇 대접하고 3만 원만 내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식의 낡은 꼰대식 넋두리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달라졌다면, 그 시대의 문법과 예절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교양이자 품격입니다.
내 추억의 잣대로 남의 잔치를 재단하려 들지 말고, 오늘날 청년들이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를 헤아려주는
따뜻한 시선이 봉투의 두께보다 먼저 갖추어져야 합니다.
결혼식이란 단순히 밥 한 끼를 공짜로 얻어먹고 도장을 찍고 오는 자리가 아닙니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 앞에 서서 새로운 가정을 선포하는 거룩한 순간이며,
그들이 감당해야 할 수많은 현실적 무게를 주변의 어른들이 덜어주고 축복해 주는 신성한 연대의 자리입니다.
내 알량한 자존심과 낡은 계산속에 취해 남의 가장 축복받아야 할 잔칫날에 재정적 부담과 마음의 상처를 안기고
돌아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봉투의 금액이 크고 작음을 떠나, 내가 건네는 그 축의금 봉투 하나가 새 출발을 하는 청년들에게 진정한 디딤돌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내 체면치레를 위해 상대방의 주머니를 갉아먹는 무례한 짐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식장 문턱을 넘어서기 전
스스로의 양심 앞에 깊이 되물어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후반전을 살아가는 중년이 젊은 세대와 온전하게 소통하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품격 있고 아름다운 삶의 지혜입니다.
첫댓글 봉투 하나에 식구들이 우루루 가는 일은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