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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3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인물화의 대가’ 정형모 화백 별세 향년 87세
2023년 중국 정찰용 풍선 미국상공 진입 격추
중국이 최근 몊년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5대륙에 정찰용 풍선을 보낸 것이 확인되었다. 이날 미국서 최초 발표한 중국의 정찰용 풍선이 미국 상공을 지나는데 대해 중국 정부가 ‘정찰용 무인 풍선’이 중국 것임을 인정하면서 유감을 표명했다. 중국은 이것이 중국에서 간 것으로 민간용이며, 기상 등 과학연구에 사용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이 풍선을 계속 감시하다가 2월4일 동해쪽으로 빠져나간 풍선을 미 공군 F-22를 동원해 격추 했으며 이들 잔해를 수거해 분석하고 있다
2022년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인 이슬람국가(IS)의 우두머리 아부 이브라힘 알하시미 알쿠라이시 자폭.
시리아 시간으로 3일 오전 1시 전후에 3대의 미 헬기가 투입돼 알쿠라이시가 은거하던 시리아 북서부 이들립주의 아트메흐 마을에 도착했다.
이번 작전에는 20명이 넘는 특수부대원들이 투입됐고, 무장 헬기와 공격용 드론 등의 지원이 있었다. 작전팀은 3일 오전 1시 전후에 올리브나무로 둘러싸인 3층짜리 단독 주택을 에워 쐈다. 알쿠라이시가 거주하던 가옥이었다.
뒤이어 아랍어로 이 집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확성기 경고음이 울려 퍼졌고, 여성과 아이들은 이 지역을 떠나라는 방송도 있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알쿠라이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내 기관총 등 총성이 들리는 교전이 오갔고, 이 과정에서 큰 폭발음이 들렸다.
미 당국자는 언론 브리핑에서 알쿠라이시가 폭탄을 터뜨려 자폭했고, 이 과정에 아내와 자녀들도 함께 숨졌다
2017년 최순실 특검 청와대 압수수색 시도 실패
2012년 한파 충북 제천 –25.9℃
2010년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 타살 판결
1984년 4월 2일 강원도 최전방 부대인 화천군 육군 7사단에서 복무 중이던 중대장 전령 허 일병(당시 21세)은 폐유류창고 뒤편에서 머리에 한발, 가슴에 두발 총상을 입은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현장에서 수거된 M16소총 탄피는 2발. 당시 국방부 특별조사단(특조단)은 자살로 결론내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군(軍)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남았다.
이후 의문사위는 진상 규명활동을 벌여 2002년 ‘허씨가 타살됐고 군 간부들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특조단은 자체 조사를 벌여 ‘허 일병이 중대장 전령 업무에 대한 심적 부담 등으로 자살했으며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는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양측이 공방을 벌여왔다.
이날 재판부는 허 일병의 시신에 대한 법의학적 소견과 의문사 진상 규명 위원회의 증거 자료, 국방부 특조단의 수사 자료 등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결과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우선 시신에 난 3개의 총상 중 두부 총상이 치명상이고 양쪽 가슴부위의 총상은 서로 근접한 시간 내에 발생했으며 왼손의 상처는 허 일병이 총구를 잡은 상태에서 총이 발사됐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판단되는 점을 고려했을때 사체가 사후 옮겨졌다고 생각되며, 사건 당일 허 일병 부대 중대장 김모씨는 자신의 전령이던 허 일병이 아닌 다른 부하와 전방철책 순찰에 나섰는데 이러한 중대장의 행보는 알리바이 확보를 위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중대본부 요원들은 중대장이 철책 순찰을 하는 사이 막사 물청소를 실시했는데 헌병대 조사가 나오기 전에 증거를 인멸하려는 시도였다는 것이 재판부의 시각이다.
하지만 허 일병에게 총을 쏜 사람이 밝혀지지 않았고, 국방부도 항소하겠다고 밝혀 사건을 둘러싼 진실공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09년 '해비타트' 창설 풀러 타계
전 세계 빈민층을 대상으로 '사랑의 집 짓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구호단체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의 창설자 미국인 밀러드 풀러(Fuller)가 2009년 2월 3일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풀러는 가슴과 머리의 통증을 호소한뒤 미국 조지아주 아메리쿠스 인근의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이날 오전 3시쯤 사망했다고 그의 아내인 린다 풀러가 밝혔다.
풀러는 사업을 벌여 30세의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됐지만, 돈만 추구하는 삶에 환멸을 느낀 그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그간의 삶을 반성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지난 1976년 전 재산을 팔아 해비타트를 창설했다.
2007년 바그다드市場 자폭테러 130여명 사망, 300여명 부상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트럭을 동원한 자폭 테러가 발생해, 132명이 숨지고 최소 305명이 다쳤다. 이번 테러의 희생자 규모는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개전 이래, 단일 폭탄테러로서는 최대라고 로이터 통신은 보도했다. 이번 테러는 이라크전 개전 이래 두 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냈다. 역대 최다 사망자(215명)를 낸 사드르시티 폭탄 테러(작년 11월23일)는 6차례의 연쇄 폭발 테러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날 테러는 한 차례의 폭탄테러론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조선
2006년 2월 3일 이집트 여객선 알 살람 보카치오 98호 침몰 사고
알 살람 보카치오 98호. 승객 1400여명을 태우고 가던 이집트 여객선이 2006년 2월3일 홍해에서 침몰, 1200명 이상이 사망·실종했다.
사고가 난 여객선 ‘알 살람 보카치오 98호’(1만1800t급)는 지난 1970년 이탈리아에서 건조된 배로 지난 2일 오후 7시께 사우디아라비아의 두바항을 떠나 200㎞ 떨어진 이집트의 사파가항으로 가던 중이었으나, 두바에서 100㎞쯤 떨어진 지점에서 레이더망에서 사라졌다.
외국인 100여명을 포함한 승객의 대부분은 사우디에서 일하는 이집트인들로 알려졌다. 이 중에는 사우디의 이슬람 성지인 메카에서 성지순례를 마치고 귀향하던 신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고해역은 수심이 최고 1000m에 이른다.
이집트 교통부 장관은 4일 오전 “배가 침몰하기 전에 소규모 화재가 발생했다.”고 발표하고 생존자인 나빌 지크리는 “화재는 배가 출항한 지 90분 정도 지난 뒤 발생했다”며 ”그러나 선원들은 이를 무시하고 그냥 항해를 계속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생존자인 아테프 아베드 라보는 “화재는 배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난 뒤 2시간 30분 정도 지난 뒤 발생했다”며 “배는 3일 새벽 2시께부터 침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물 위에 18시간이나 그냥 떠있었다”고 말했다.
보카치오 98호는 승객 뿐 아니라 자동차도 싣는 카페리 형식의 여객선으로 자동차 220여대가 적재돼 있었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 공식 선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미 의회에서 협상 선언 2006.6.5-9 제1차 협상(워싱턴), 2006.7.10-14 제2차 협상(서울), 2006.9.6-9 제3차 협상(시애틀), 2006.10.23-27 제4차 협상(제주도) 2006.12.4-8 제5차 협상(몬타나) 2007.1.15-19 제6차 협상(서울) 2007.2.11-14 제7차 협상(워싱턴) 2007.3.8-12 제8차 협상(서울)
2005년 헌법재판소 호주제도 헌법불합치 판결, 국회가 2005.3.2.에 호주제도 개정
2003년 이승엽 국내 최고 연봉 6억 3천만원에 책정
‘국민타자’ 이승엽(27·삼성)의 연봉이 6억3000만원으로 결정됐다. 삼성 라이온즈는 3일 2003년 연봉을 구단에 백지 위임한 이승엽의 연봉으로 국내 프로선수 중 최고액인 6억3000만원을 책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95년 데뷔 당시 연봉 2000만원을 받은 이승엽은 연봉이 무려 3150%나 뛰어오르며 입단 9년 만에 처음으로 ‘연봉 킹’에 올랐다. 또 지난해 연봉(4억1000만원)에서 2억2000만원이나 올라 프로야구 사상 최고 인상액을 기록했다.
삼성은 고심 끝에 이승엽의 연봉을 결정했다. 이미 LG 이상훈(32)이 6억원 벽을 허문 데다 김재하 단장이 “이상훈보다 1000만~2000만원 더 얹어 생색을 내지는 않겠다”고 공언했기 때문. 게다가 6억5000만원 이상을 주면 ‘너무 많다’는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6억3000만원을 택했다. 김 단장은 “이승엽의 등 번호 36번을 거꾸로 하면 63이 되고, 우리나라에서 최고 높은 건물이 63빌딩”이라며 ‘63’이 최고의 의미를 지닌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1995년 경북고를 졸업한 이승엽은 계약금 1억3200만원, 연봉 2000만원을 받고 삼성에 입단해 그해 121경기에 출전, 2할8푼5리를 기록하며 단번에 사자군단의 1루수 자리를 꿰찼다.
1996년 4000만원, 1997년 6500만원을 받으며 상승곡선을 이어온 이승엽은 97년 홈런왕과 최다안타, 타점왕을 휩쓸며 정규시즌 MVP에 등극, ‘라이언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연봉협상 테이블에서는 고작 2500만원밖에 오르지 않아 조정신청 직전까지 가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1999년 억대 연봉을 돌파한 그는 그해 홈런 54개로 신기록을 세우며 다음해인 2000년 1억9000만원이 뛴 3억원을 받게 된다. 최고액 인상기록을 갈아치우며 내친 김에 데뷔후 첫 연봉킹 등극을 노렸지만 복병이 있었다. 현대 정민태가 3억1000만원으로 앞길을 가로막았던 것.
삼성은 2002년 4억1000만원을 책정, 그에게 최고 연봉의 영예를 안기려 했지만 기아가 2시간후 이종범에게 4억3000만원, 그 뒤 LG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상훈에게 4억7000만원을 주는 바람에 다시 헛물을 켜야 했다.
당초 6억원선을 예상한 삼성은 LG 이상훈이 선수를 치자 그에게 6억3000만원을 안겨주며 신경전을 끝냈다.
2001년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 결성
1999년 생물학 발전에 공헌한 강영선 사망
1998년 다보스 세계경제 포럼(1.29~2.03)
1997년 `뿌리깊은 나무` 한창기 대표 별세
`뿌리깊은 나무` 대표 한창기씨(62)가 1997년 2월 3일 별세했다. .
전남 벌교생으로 1961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1968년 한국브리태니커사 대표를 맡아 `세일즈맨의 신화`를 창조했다. 1976년엔 월간문화종합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 우리나라 출판문화에 새지평을 열었다.
그가 기치로 내건 것은 한글전용과 가로쓰기. 이것이 주체성이 강조되는 70년대 청년문화와 맞물리면서 `뿌리깊은 나무`는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씨는 판소리 복원, 녹차개발. 칠첩반상기의 재현 등 전통생활문화를 중심으로 한 우리문화찾기 운동에 나섰다. 또 `판소리 전집` `산조전집` `슬픈 소리` `판소리 다섯마당` 등 전통음악을 음반에 담는 작업에 열정을 쏟기도 했다.
1997년 아리랑 TV(케이블 TV 채널 50) 개국
국제방송교류재단(이사장 이찬용)은 1997년 1월 3일 오후 서초동 사옥에서 국내 최초의 영어전문 TV방송인 ‘아리랑’(케이블TV 채널 50) 개국식을 가졌다.
국제방송교류재단(이사장 이찬용·이찬용)은 3일 오후 서초동 사옥에서 국내 최초의 영어 전문 tv방송인 「아리랑」(케이블tv 채널 50) 개국식을 가졌다.
행사장에는 이수성 국무총리를 비롯, 유종하 외무, 김영수 문화체육, 오인환 공보, 신경식 정무1 장관, 이세기 이경재 강용식 박종웅 신영균 이웅희 임진출 정영훈 권정달 의원, 홍두표 kbs 사장, 이득렬 mbc 사장, 윤세영 sbs 회장, 손주환 서울신문 사장, 안신배 경향신문 사장, 유혁인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위원장, 조경목 케이블tv협회 회장, 김석준 쌍용그룹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등 정-관계, 언론계, 재계 인사 3백여명이 함께 자리해 아리랑 채널의 탄생을 축하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오인환 장관이 대독한 메시지를 통해 “우리나라 방송 70년을 맞는 올해에 국내 외국인과 세계에 한국의 참모습을 알리는 외국어 방송을 시작하게 된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 고 축하했다
1966년 소련 `루나9호` 달표면 연착륙에 성공
소련의 달 탐사기 `루나9호`가 1966년 2월 3일, 달의 `고요한 바다` 연착륙에 성공했다. 이것은 소련이 연착륙을 위한 역추진 로케트 분화점 기술을 극복했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달표면이 딱딱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성과였다.
타스통신은 4일 루나9호가 달표면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4일 오후 11시50분 기지로 달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루나9호가 보내온 달표면 사진에 의하면 달표면에 먼지가 보이지 않고 요철이 심했으며 직경 10cm에서 2-3m에 이르는 돌모양의 물체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이것은 달의 `고요한 바다`는 거의 평원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수정해 주었다. 이번 루나9호의 달 탐사로 인간의 달상륙에 꼭 필요한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됐다.
1995년 버스전용전일차로제 실시
1995년 미국,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1995년 2월 3일 5명의 미국 우주인과 1명의 러시아 우주인을 태우고 미국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됐다. 이 우주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조종사가 조종했으며 우주상공에 떠 있는 러시아의 미르 우주정거장에 다가가 공동실험을 했다.
2백만㎏에 달하는 디스커버리호는 발사 3일째인 6일 지구상공 3백92km 궤도상에서 미르와 불과 11m거리로 밀착, 2시간동안의 랑데부에 성공했다. 디스커버리호와 미르는 세로로 일렬이 되어 캄차카반도 남단과 일본 북단상공에서 시속 2만8천㎞의 속도로 10분간 비행한뒤 서로 떨어져 1백20m의 거리에서 선회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우주선이 랑데부한 것은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디스커버리호와 미르 승무원들은 TV카메라로 서로 상대방의 모습을 지구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먼저 미르 승무원들이 그들의 우주정거장 옆을 날아가는 디스커버리호의 생생한 모습을, 구름에 덮인 푸른 지구를 배경으로 비추었다. 미르 승무원들은"디스커버리가 수평선 위에 있는 큰 별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동시에 디스커버리호도 검은 우주를 배경으로 T자형 미르의 영상을 지구로 보냈다. 디스커버리호는 11일, 8일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미국 케이프 커내버럴기지로 귀환했다
1995년 삼성전자, 2세대 64메가 D램 생산 발표
1994년 클린턴 미 대통령, 베트남 무역 금지조치 해제 합의
1989년 파라과이에 쿠데타 발생
1989년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불구속 기소
1981년 전두환, 레이건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주한미군철수 백지화 등 14개항의 공동성명 발표
1981년 브룬트란드, 노르웨이 첫 여수상 등장
1973년 파월 맹호부대 1진 월남서 개선
1972년 제11회 동계올림픽 개막(일본 삿포로)
1969년 아라파트 PLO 의장 취임
이날 카이로에서 개최된 '파타(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 민족평의회에서 아라파트를 PLO 집행위 의장에 선출했다.
아라파트는 1968년 3월에 벌어진 카라메전투 때부터 유명해졌다. 당시 아라파트가 결성한 게릴라 조직 '파타'가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자 이스라엘은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파타가 점령한 요르단의 국경도시 카라메에 공격을 전개했는데 아라파트는 파타 대원 450명으로 이스라엘군 1만 5,000명을 대파했다. 아랍세계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아랍이 거둔 최초의 승리에 환호했다.
PLO의장이 된 아라파트는 이후 요르단 암만에서 쫓겨나 레바논으로 본거지를 옮기는 등 계속된 좌절로 무장투쟁 노선을 변경하게 됐다. 1974년 PLO가 아랍 정상회담에서 유일한 합법기구로 승인받고 유엔의 옵서버 자격을 얻게 되자 아라파트는 무장투쟁을 자제하고 국제무대에서 대 이스라엘 외교전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캠프데이비드협정'에서 이집트에는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고 팔레스타인에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반환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하자 이스라엘에 맹공격을 퍼부었다. 덕분에 1982년 8월 이스라엘이 PLO의 근거지였던 레바논을 공격했고 아라파트는 베이루트에서 튀니지로 피신해야 했다. 아라파트는 당시 지도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이후 지도력을 회복한 아라파트는 1988년 11월에 알제리에서 독립국 선포를 하고 초대 대통령에 추대됐다. 이후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가져오는 듯 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아라파트는 2004년 11월 11일 75세의 나이로 숨졌다.
1966년 소련 `루나9호` 달표면 연착륙에 성공
소련의 달 탐사기 `루나9호`가 1966년 2월 3일, 달의 `고요한 바다` 연착륙에 성공했다. 이것은 소련이 연착륙을 위한 역추진 로케트 분화점 기술을 극복했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달표면이 딱딱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성과였다.
타스통신은 4일 루나9호가 달표면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4일 오후 11시50분 기지로 달사진을 보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루나9호가 보내온 달표면 사진에 의하면 달표면에 먼지가 보이지 않고 요철이 심했으며 직경 10cm에서 2-3m에 이르는 돌모양의 물체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이것은 달의 `고요한 바다`는 거의 평원이라는 기존의 생각을 수정해 주었다. 이번 루나9호의 달 탐사로 인간의 달상륙에 꼭 필요한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됐다.
1966년 조선조 마지막 왕비 순종효황후 사망
1962년 울산공업단지 기공
1961년 민의원, 대일정책 결의안 채택(선국교 후경제, 평화선수호)
1956년 한-미 원자력 협정 조인
1955년 중국, 유엔안보이사회 출석 거부
1954년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남쪽 5~10km에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설정
민간인출입통제선이 1954년 2월 3일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서 남쪽으로 5~10Km의 거리를 동서로 이어 민간인출입을 통제하기 위해 설정됐다. 이후 1955년 5월 정부는 민통선 북방에 출입영농 및 입주영 농을 허용했고, 비무장지대 안에 자리잡은 대성동마을을 비롯한 통일촌, 재건촌 등을 건설했다.
이후 국방부는 1989년 6월 1일부터 민통선 일부를 북상 조정해 10개지역 6177만평에 대해 민간인 출입통제를 해제했다. 현재 민통선 북방에는 2개 군, 23개 읍 과 면, 111개 마을에 약 9000여 가구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조선
1951년 문교부, 한국전쟁시 박물관 유물을 일본으로 옮기라는 미국 제안을 거절
“유물을 넘기시오! 대통령 명령이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25일, 국립박물관 경주 분관에 국방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사전 통보도 없이 그들은 금관총 금관(사진)등을 비롯해 옥피리, 황복사탑 금제 불상 2점 등 1급 유물들을 황급히 쌌다. 금관 등 상당수 유물은 그 뒤 한국은행 금괴와 함께 미국의 아메리카은행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1957~59년 국립박물관 미국 순회전 때 다른 유물과 섞여 전시된 뒤에야 이들은 국내로 돌아왔다.
전쟁 때 경주 문화재 수난사가 깃든 ‘경주분관 소개유물목록’이 발견됐다. 당시 박물관 유물을 일본 도쿄 제국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으로 옮기라고 제안한 미 정부 문서도 나왔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중박)이 <한국박물관 100년사> 발간을 위해 미 국립문서보관소 등을 뒤져 찾은 사료들이다.
‘경주분관…목록’의 경우 1954년 국방부 경위서를 보면, 1950년 7월25일, 27일 주요 유물 139점을 포장해 한국은행 대구 지점에 옮긴 뒤 작성했다고 나와 있다. <…100년사>에 공개된 1957년 미국 전시 출품 목록에는 ‘경주 분관 유물들이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보관중이므로 다른 유물과 합류시켜 전시할 계획’이란 구절이 보여 경주 유물들이 미국에 갔음을 알 수 있다. 김재원 초대 관장의 회고록 등에 이런 비화가 일부 언급됐지만, 구체적 정황을 담은 공문서가 발견·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박 쪽은 당시 유물들을 일본 도쿄제국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에 보내면 신성불가침한 문화재로 지켜질 것이라고 제안한 1951년 1월13일치 미 국무부 공문도 공개했다. 그러나 2월3일치 공문에서는 “한국 문교부가 신뢰할 수 없는 일본 이송을 반대한다”고 기록해 제안이 무산됐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 일본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한국 미8군 쪽에 국립박물관 도자기 소장품 여덟 상자를 ‘연구를 위해’ 요코하마에 보내려고 대기시켰다고 통보한 공문도 발견됐다. 중박 쪽은 “후속 문서가 없어 당시 반출하려던 도자기들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1947년 국대안(국립대학안) 반대에 따른 동맹휴학 가속화
1947년 2월 신학기가 시작되자 `국대안(國大案-국립대학안)`을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1946년 6월에 발표된 국대안을 무리하게 강행하려는 미군정과 이를 반대하는 학생들간의 팽팽한 대립은 해를 넘어서 더욱 고조됐다.
1946년 12월 서울대의 문리과, 법과, 상과 등 3개 대학이 동맹휴학에 돌입해도 문교부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경책을 고수하자 1947년 2월 3일 공과대도 맹휴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일부 교수까지 참여한 가운데 맹휴가 다른 대학, 심지어 중학교로까지 확대되자 러시 군정장관은 2월 13일 학생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사태가 일단락되고 5월말 미군정이 국대안에 관한 수정법령을 공포함으로써 반대운동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으로 4,956명의 학생이 제적됐고, 380여명의 교수가 해임됐다. 이들 중 일부 극렬한 좌익학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학생이 복적됐다.
1946년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개편
1938년 미국 프로복싱 선수 그리피스 출생
1930년 호지명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 결성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호지명(호치민)이 1930년 2월 3일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로써 베트남내 3개 지역에서 따로 활동하던 3개 공산당이 하나로 통일되어 홍콩에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이것은 ‘1개국 1공산당’ 이라는 코민테른의 국제지도방침에 의한 것으로,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호지명이 3개 공산당 대표를 홍콩으로 비밀리에 소집해 이루어졌다.
1890년 가난한 유학자의 아들로 프랑스의 식민지인 중부 베트남에서 태어난 호지명은 1911년 프랑스 배의 견습선원으로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가했다. 1919년에는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개항 요구’ 를 제출해 베트남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1923년 소련으로 들어가 코민테른의 활동가로 활동하다 1924년에는 소련고문단의 한사람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에도 파견됐다. 이후 1925년 중국 광주에서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조직해 조국해방에 전력투구했다. 1941년, 30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호지명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 을 결성하고 주석 자리에 올랐다.
일본 패망 후 194년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 을 선포하고 주석에 올랐으나 일본에 의해 쫓겨났던 프랑스가 베트남으로 돌아오자 힘의 열세를 깨닫고 타협을 선택했다. 1946년 3월 6일 결국 완전 독립이 아닌 프랑스 연합으로 남는 협정에 조인했으나 11월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고로 프랑스군이 6,000명의 베트남인을 학살하자 대불항전을 선언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을 이렇게 막이 올랐다. 호지명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전쟁 중이던 1969년 9월 3일 79세의 나이로 숨졌다.
1924년 우드로 윌슨 미국 제28대 대통령 사망
1921년 독일 극작가 하우프트만 사망
1919년 최초의 광도성표인 하버드 광도측정법을 확립한 미국의 물리학자 피커링 사망
1917년 미국 독일과 단교
1915년 오스만투르크, 수에즈운하 공격
1908년 의병장 기삼연 순국
구한말의 의병장 성재 기삼연 선생이 일본군에 체포돼 광주로 호송중이던 1908년 2월 3일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순국했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896년 3월 `토적복수`를 내걸고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주의 기우만, 고광순과 합세, 의병항쟁의 기세를 크게 떨쳤으나 기우만의 의병부대 해산을 반대하다 관군에게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정미7조약의 체결 등으로 국운이 크게 기울자 그는 1907년 호남지역 의병부대를 규합해 `호남창의회맹소`를 설립, 고창 문수산전투, 영광 법성포전투 등을 벌여 큰 전과를 세웠다. 이후 그는 장성 담양 나주 함평 광주 등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계속하다 1908년 담양 금성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해 친척집에 은신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기삼연 선생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2년 항일투사 박열 출생
1901년 메이지(明治)시대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사망
일본 최초의 사립종합대인 게이오대학의 전신인 게이오의숙을 창립한 메이지 시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楡吉)가 1901년 2월 3일 사망했다. 1860년 미국을 여행했고 1862년에는 바쿠후(幕府)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유럽을 견문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된 ‘서양사정’은 일본 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인간의 평등과 민권주의를 주장했지만 다른 아시아 민족의 민권을 무시하고 국가권력의 확장에 앞장섰다.
1885년 자신이 발행하는 ‘시사신보’에 ‘일본은 아시아 제국과 손을 끊고 서양제국에 편입돼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을 발표해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했다. 박영효는 후쿠자와의 지원에 힘입어 ‘한성순보’를 발간했으며 유길준은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건너가 그의 게이오의숙에서 사사했다.
1874년 미국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출생
1830년 영국 보수당 정치지도자 솔즈베리 출생
1809년 독일 작곡가 멘델스존 출생
1468년 독일, 인쇄술발명자 구텐베르크 사망
활판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1468년 2월 3일 사망했다.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으나 1397년경 독일 마인츠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1434년에서 1444년까지 스트라스부르에서 문자의 기계적 재생에 대한 고안을 되풀이하다가 인쇄기를 발명했다. 그리고 양질의 인쇄잉크와 양피지 같은 종이를 사용하여, 1455년에 42행 성서인 라틴어 성서를 인쇄하여 완성시켰다.
이후 인쇄술은 전 유럽에 보급되어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에도 공헌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결국 파산해 출자자인 푸스트에게 부채의 보상으로 인쇄공장을 양도한 후 빚더미 속에서 죽어갔다. 구텐베르크는 현재 무덤조차 소재가 묘연한 상태다.
1277년 삼별초난을 평정한 김방경, 백령도로 유배
479년 신라, 자비마립간 사망, 소지마립간 즉위
451년 가야, 취희왕 사망, 질지왕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