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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것은 중독의 시작
W.도브
11
“아, 피곤해 죽겠다아. 너 때문에 이 한 몸 끌구 여기까지 행차하셨다. 뭐 좋은 거 없냐?”
들어오자마자 소파위에 드러눕는 제영이를 향해 마침 와인 있다며 한잔 할거냐고 물으니 눈을 반짝이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웃으며 유리장을 열고 와인과 잔 두 개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작년 결혼기념일에 예식장에서 선물로 온건데.”
“……”
“너 조금만 마셔라? 남겨뒀다가 수온이랑 둘이 마실거야. 곧.”
내 말 마지막에 붙은 ‘곧’ 이라는 단어에 벌떡 일어서서 식탁 앞으로 다가오는 제영이. 잔을 만지작거리며 의자에 앉더니 날 향해 묻는다. …곧?
“응, 곧. 얼마 안 있으면 만나게 될 테니까.”
“…믿는 구석이라도 있니?”
“그거 얘기하려고 너 부른거야.”
…그래? 뭔데? 얘기해 봐. 예상했던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별 다른 표정변화 없이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내 눈을 쳐다본다. 제영이의 잔에 와인을 반 조금 안 되게 따르고 코르크 마개를 덮어 다시 유리장에 넣었다.
“뭐야?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니 코에. 미안하지만 그게 조금이야.”
“조금이 아니구 이건 쪼오끔이다, 아주.”
눈을 흘기더니 이내 와인잔을 한 번에 비운다. 꽤 맛있다며 만족스럽게 웃더니 다시 나를 향해 아까의 눈빛으로 재촉한다.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수온이를 봤던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한 간호사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 다른 간호사 친구인 것 같더라고. 내용이, 선생님, 뭐… 아무튼 그러고 수온씨- 라고 하더라. 그걸 듣구 그 간호사 휴대폰을 뺏어서 내가 물어봤지. 그 수온이가 강수온이냐고. 그랬더니 끊어버리더라고. 그 번호 저장해가지구 왔다. 대답 못하는거 보니 느낌이 팍 오더라. 근데 간호사가 왜 수온이 얘길 했지? 생각해보니까 그게 잘 이해가 안돼서. 아, 또 애들 예방접종 시키러 갔나? 유치원 그만둔지 좀 됐다고 하던데, 금세 다른 유치원 다니나……”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해보다 문득 제영이의 표정을 보니 굳어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시선도 아래를 향해선 날 보지도 않는다. 어라, 이건 예상했던 것처럼이 전혀 아닌데. 너무 피곤해서, 지금 자는건가? 그런 이상한 잠버릇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야, 한제영. 자냐?”
“……아니.”
“뭐야. 굿뉴스라고 얘기해줬더니 반응이 고작 이거야? 평소의 한제영이 아닌데 이건-.”
“…너한테만 굿뉴스겠지.”
“응? 무슨 소리야?”
미안한데, 나 사이다 좀 줄래? 소화가 잘 안되네. 날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탓에 제영이의 앞머리를 보며 갸우뚱하다가 냉장고를 열었다. 눈 앞에는 썰렁한 차가운 공기만 감도는 냉장고의 속내가 보인다. 사이다가 있을리가 없지… 냉장고 문을 다시 닫고 의자에 걸쳐두었던 겉옷을 입으며 사이다 사올테니까 기다리라고 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얼굴을 화악 덮는 거친 바람에 점퍼에 달린 모자를 쓰고 지퍼를 위까지 끌어올렸다. 역시 피곤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건가. 괜히 불렀나보다, 내일 말해도 되는데…… 에라이 미안하게 됐네. 잘 가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사이다 한 병을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서 본 식탁에는 빈 와인잔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갔나? 역시 피곤해서…… 띠리링, 어디선가 휴대폰 문자음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더듬어 소파 위의 쿠션을 들추니 내 휴대폰이 놓여있다.
[미안, 아무래도 졸려서 먼저 갈께. 니 얘기 사실 조느라 제대로 못 들었어. 다음에 다시 해줘]
“그래, 나도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더라.”
사온 사이다를 냉장고에 넣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소파 위에 누워서 액정이 꺼져있는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 전화, 하고싶다. 끊으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막아서 싹싹 빌어서라도,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그 곳이 어딘지, 수온이를 어떻게 아는지 물어보고 싶다. 플립을 열고 전화번호부를 눌러 번호를 찾았다. 이름을 뭐라고 저장해 뒀더라. 그냥 아무렇게나 저장한 거 같은데…… 그룹 지정을 안했으니 미그룹에 들어가서 봐야겠다. 근데 미그룹 전화번호가 0개다. 0개?… 그럼 이름으로 찾아볼까, 내가 모르고 그룹을 아무데나 해 버렸나. 전체를 누르고 처음부터 끝 목록까지 반복적으로 아래 화살표 키를 누르며 미간을 찌푸리고 찾았다. 없네. 없다. 이상한 문자가 들어간 이름도 없고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분명히 그 때‘저장되었습니다’라는 창을 보고 플립을 닫았는데 말야. 나 지금, 피곤한가? 제영이처럼 나도 피곤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그런건가?…… 그렇다면 일단 잠을 자고 내일 일어나서 확인해 봐야겠다. 그래, 그래야겠어.
“……한제영은 그럴리가 없지. 얘기도 못 들었다는데….”
말도 안 되는 말 지껄이고 있다, 서민찬. 잠이나 자자.
◆
눈을 뜨자 어둠이 보였다. 분명히 눈을 떴는데 어두워서 잠시 놀랐고, 일어서려고 다리에 힘을 주는데 통증이 와서 잠시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문득 내 머리위에 있는 창으로 희미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보여서 뒷걸음질을 쳐서 보니, 달빛이다. 지금 밤이구나. 꽤 많이 잤다는 것을 느끼고 또 한 번 놀라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 동안 탕비실에 아무도 안 들어왔던 걸까. 아님 구석에 있어서 내가 잘 안 보였나. 예약환자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 환자들……. 혼자 표정을 찌푸리며 방으로 들어오자 마침 나오려던 건지 담당의선생님이 내 앞에 서 있다. 찌푸린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디 있다가 이제 기어나와?”
“죄송합니다.”
“좀 놀랐어. 윤 선생도 꾀 부릴 줄 아는 사람인걸 몰랐네.”
“………”
“상담 하러 온 보호자들 뿐이어서 내가 대신 받았어. 저기, 혹시.”
말없이 쳐다보는 나에게 조금 침묵을 두다가 말을 잇는 담당의선생님. …강수온씨, 말했어?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자 알겠다는 듯 내 어깨를 힘주어 보듬고는 방을 나갔다.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힘껏 쓸어내렸다.
[……더 이상 소용 없잖아요, 나.]
[난…… 무능력한 사람입니다. 의사로써도, 한 남자로써도.]
그 때 하필이면 왜 그 말이 튀어나왔을까. 자제했어야 했다. 그녀가 기록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자신의 병에 대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을 때,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나를 터지게 했다. 그녀의 앞에서 이미 나는 한 남자였다. 더 이상… 부정하고 싶지 않다. 방을 나와서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저절로 익숙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나의 발걸음. 그리고 도착한 한 병실 문 앞. 그 문을 열면 어둠이 보이고, 희미한 달빛이 보이고, 그 아래에 서 있는 한 인영(人影)이 보인다.
“…선생님?”
왜 아직 안 잤냐고 물으니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 곧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다.
“하늘에 있으면 다 볼 수 있어서 좋을 거 같아요.”
“…?! 수온씨.”
“그냥, 좋을 거 같다구요. 생각해보니까 그럴 거 같아서요.”
“……”
“선생님. 저, 우리 아이들 보고싶은데, 서울에 잠깐 올라갔다 올게요.”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만만치 않게 그녀도 강경했다. 그녀가 말하는 우리 아이들, 이라면 아마 유치원 아이들을 말하는 거겠지. 그녀의 심정을 나는 지금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하루하루가 위태로운 환자이고,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돼요. 이제부터 사소한 것 하나라도 신경쓰지 않고 조심하지 않는다면 위험하니까. 당신에게 영향을 주는 모든 것과 사람들은 내가 나서서라도 막을겁니다. 막아야 하니까. 고개를 젓는 나를 보는 그녀의 시선이 문득 슬프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무린가요.”
“……잊지 말아요, 수온씨. 가장 중요하고 그만큼 힘든 시기예요. 버텨내야만 해요.”
“…그 끝은 이미 보이고 있네요.”
“끝은…… 다시 보이지 않게 할겁니다.”
“……”
“내가, 그 끝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당신곁에 있을거니까.”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겁니다. …너무 돌려말해서 알아듣지 못했으면 어떡하나 내심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그녀만 계속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웃고 있다. 그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연다.
“…말씀만도 고마워요. 선생님.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끝은 정해져 있는 거고, 저는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잖아요. 사람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숙명이라고-”
“내 말 뜻, 이해 못했어요?”
“…이해했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하시려는 말, 무슨 말인지 알아요.”
“…아뇨. 수온씬 지금 이해 못했어요.”
웃음기가 없어진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를 그대로 품 안에 넣었다.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흐른다. 그 정적 위로 내 심장박동 소리가 쿵, 쿵, 울려 퍼진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그 순간은, 그녀가 나를 힘껏 밀쳐내는 것으로 금방 깨져버렸지만. 눈은 어느새 동그랗게 커져있고 입술은 달싹대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
“실수 아닙니다.”
“……”
“지금 수온씨 앞에 있는 사람, 의사 윤영준이 아니라 그냥 남자 윤영준입니다. 아까 내가 한 말 뜻은, 좋아한다는 거였어요. 좋아하니까, 내가 수온씨 좋아하니까 끝이 보일때까지 당신 곁에 있을거라고 말한겁니다. 근데 이해 못했잖아요. 그래서 보여준거예요. 이건 순간의 실수도 아니고, 순간의 감정으로 착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다시, 숨막히는 정적이 흐르고 있다. 오랫동안 참고 또 참아서 터뜨린 감정은 아니지만,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솔직했고, 당신 앞에서 뛰는 심장소리를 느꼈고, 그래서 진심으로 내 마음을 말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다. 아무런 표정도, 동작도 없이 나를 밀쳐낸 자세 그대로 서서 초점없는 눈동자로 한 곳만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다. 그 눈동자에 담긴 내가 보일때까지 정적 속에서 나는 그녀를, 그녀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마워요.”
“……”
“저는…, 사람이 사람한테 상처를 주면, 결국 그 상처는 자기 자신한테 주는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마음에는 그보다 더 큰 상처가 생기는 거구요. 난 상처가 너무 많아서, 선생님한테 드리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한테 내가 상처주면 나 또한 상처입는 거니까, 더 이상 아픈 게 무섭고, 두렵고 싫어요.”
“……”
“전 많이 이기적이고, 이제 더 이상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예요. 그냥, 이렇게… 내가 그 사람한테 줬던 상처들 다 끌어안고, 끝까지 그리워하다 가고 싶어요. 그게 내가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 어쩌면 좋아한다는 말을 넘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이미 그녀가 내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한다고 말한다는 거, 나에겐 설레임 보다 두려움으로 먼저 다가오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마음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기에… 결국, 거절당할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생각지도 못한 이별과 그에 수반하는 병마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수온씨는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그녀의 마음은 아마 끝이 다가올 그 순간까지도 변치 않을 것이다. 또한 그녀에 대한 내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 우리는 사랑, 이라는 작자에게 물들어 변하는 과정 속에서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르게 말하면…… 이것은 중독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윤영준은 강수온에게, 강수온은 그 사람에게,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도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녀와의 모든 관계가 끝난 지금도,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사람의 사랑도 여전히 강수온일까. 그것만 풀리면 그녀는 이 사랑이라는 중독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그녀를 위해서 조금은 더 아파도…… 좋을지도.
◆
후드모자에 달린 끈을 최대한으로 당겨 묶고 차에 올랐다. 뒷좌석에서 졸던 코디가 벌떡 일어나더니 슬그머니 옆좌석 앞으로 몸을 숙여 내 얼굴을 살피더니 경악한다. …오빠!! 잠 못 잤어요?!
“어, 왜.”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가방을 뒤져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설마 어제도 술 먹었냐? 형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갑자기 얼굴 위로 느껴지는 엄청난 차가움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뭐야!”
“뭐긴 뭐예요 팩이지! 얌전히 계세요. 오빠 나올 때 거울도 안 봤죠? 하기사 거울 보고도 이 꼴로 나왔음 서민찬이 아니지.”
“이여, 이현주 너 짬밥 좀 먹었다고 이제 막말이 아주 편하게 나온다.”
“진짜 오빠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친구들 만나기도 싫어요 요즘에는.”
“만날 시간에 내 스타일 분석이나 해.”
아이 자꾸 말하지 말라니까요, 하며 자꾸 떨어지는 마스크팩을 손바닥으로 얼굴을 매섭게 때려가며 붙인다. 사적인 감정 싣지말라고 하니 잘 붙으려면 어쩔 수 없는거라며 새침한 표정으로 뒷좌석으로 다시 쏙 들어가버린다. 그렇게 팩을 붙인 채 다시 가방을 뒤져 대본을 꺼냈다. ……야, ………찬아. 민찬아.
“서민찬!!”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춘 듯 일시에 정지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귀에서 웅웅 울리던 정체모를 소리들이 멈추고,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위로 올라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가쁘게 숨을 몰았다. …나 귀 안 먹었어. 숨을 고르며 대답하는 나와 뒤돌아서 시선을 맞추는 형. …갑자기 왜 그래?
“아니, 숨 참았었어.”
“…딸꾹질 나냐?”
“그냥 해봤어.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이 감독님이 전화통화 하고 싶으시대. 너 번호 바뀐 것도 모르고 계시더라.”
“아…, 연락 드리는걸 깜빡했어. 번호 정리하려고 옮겨주는 서비스 안 받았는데.”
드리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많이 섭섭해하시던데. 이제 촬영도 거의 막바지니까, 한번 촬영장에라도 찾아가 보던지. …형의 말을 들으며 잠깐 눈을 감았다. 어제 제영이가 간 뒤로 잠이나 자자고 누웠다가 결국 멀뚱멀뚱 눈을 뜬 채로 다시 일어났지. 술 끊으려고 결심한지 하루만에 편의점으로 가고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꾹 참고 사이다를 소주라고 생각하고 들이키다가 어느새 깨어보니 아침이었다. 아까 경악하던 현주의 표정을 보니 내 얼굴 꼴은 안 봐도 비디오였겠지. 펴놓고 있던 대본을 덮고 눈을 떴다.
“형, 촬영 몇 시부터지?”
“열한 시. 그 전에 광고 스틸컷 좀 찍으러 가야돼.”
“그럼 그 전에 잠깐만 이 감독님 좀 뵙고 가자. 아무래도 뵙고 말씀드리는 게 낫겠어서. 촬영장소 어딘지-”
“알아. 그럼 그러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 입구 앞에서 차가 멈추고, 현주가 건네준 비니를 들고 내려서 골목길로 들어갔다. 앞에 대본을 든 스크립터로 보이는 여자분과 꽤 많은 스탭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낚시의자에 앉아있는 이 감독님의 낯익은 뒷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자 움찔 하며 뒤돌아보는 감독님. 곧 감독님의 얼굴에도 잔잔히 미소가 번지고, 10분만 쉬자!
“자식, 연락도 안 되고.”
“죄송해요. 제가 번호 바꾸고 나서 주위사람들한테 연락을 못했어요. 정신이 없어서… 이해해주실거죠?”
“됐다 임마. 근데 오늘 제영이 안 나왔어.”
“제가 걔 보러 왔나요, 감독님 뵈러 온 거죠.”
“그래. 아, 영화 끝나면 거기 김 감독이랑 같이 머리나 식히러 가자.”
뭐 좋은 데 아세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묻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죽여, 죽여, 하신다. …우리 이번에 자투리 씬 찍으러 배 타고 섬 갔었어, 제영이한테 들었지? 야, 거기 경치가 죽이더만. 우리나라에 그런 데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왜 거기다 원대병원이 엄청나게 돈 쏟아 부으면서 그 암센터 지었는지 이해가 가더라고. 아픈 사람들 요양하기는 딱 좋더라. 우리같이 머리 식히러 마땅히 갈 곳없는 사람들 가서 며칠 쉬다 오기도 딱 좋고. 거기 사는 사람들도 많이 없고, 관광객들도 없대. 거의 알려지지가 않았다고 하더라고. 내가 처음으로 우리 장소섭외 하는 녀석 머리 쓰다듬어줬잖냐.
“그래요? 보는 눈 까다로운 감독님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는 거 보니까 되게 궁금하네.”
“아차, 너 배멀미 하냐?”
“배 타본지가 오래 돼서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좀 했는데, 뭐 멀미약 먹고 가면 되죠. 언제쯤 끝나세요?”
“아마 한 두달정도는 더 잡아야 할 것 같아. 개봉일까지 좀 빠듯해서 어차피 후딱후딱 해야될 일이고. 너희는?”
“이번주가 마지막 촬영이요. 근데 민희 상태가 들쑥날쑥해서 잘 모르겠어요.”
민희 걔는 스트레스 굉장히 잘 받는 타입인가봐, 저번에 나랑 할 때도- 감독님이 말을 이으려는데 내 뒤 쪽을 쳐다보더니 손을 흔들고는 마시던 커피를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린다.
“십 분이 이렇게 빨랐나? 참, 아무튼 가기로 한거다? 얼른 가봐.”
“예. 연말에 다시 찾아뵐게요.”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서둘러 촬영장으로 뛰어가는 감독님의 뒷모습을 보다가 반쯤 남은 커피를 원샷하고 쓰레기통에 던졌다. 섬이라…, 갑자기 바다가 보고싶어 진다. 파도소리가 듣고 싶고 바다냄새도 맡고 싶고. 촬영장 가는 도중에 집으로의 일탈은 해봤어도 배 타고 섬까지 하는 일탈은 생각조차 못해봤는데, 이번에 한번 저질러 봐? 차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한다.
“네, 감독님.”
[오늘 촬영 내일로 미룬다. 미안하다.]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아니고 민희가 무슨 일 있댄다. 괜히 불안한건 또 뭐냐?]
“에이, 민희가 원래 스트레스 잘 받는 타입인가봐요. 이 감독님이랑 전작 같이 했을때도 그랬다고 하더라구요.”
[여하튼, 오늘 푹 쉬어. 내일 보자.]
전화를 끊고 다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하아, 한 번… 무작정 해 보라고 온 기횐가? 저기 앞에 세워져 있는 검은 밴이 보인다. 마침 형이 문을 열고 나오더니 두리번거리다가 곧 옆 쪽으로 사라졌다. 곧 다시 휴대폰이 진동하고, 확인해 본 발신자는 매니저 형.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냥 울리다가 끊기겠지, 하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른 길은 없나 두리번거리는 내 시선에 잡힌 다른 골목길로 재빠르게 달려나가니 도로가 나타난다. 마침 오는 택시를 잡아 탔다. …어디로 갈까요? 택시기사의 질문에 망설이다가 인천항이요, 라고 대답하자 룸미러 너머로 힐끗 나를 보더니 미터기를 켜고 달리기 시작한다. 창문을 반쯤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옷 안으로 스며들어온다.
“얼마나 걸려요?”
“여기가 역 쪽이니까 얼마 안 걸려요.”
“저, 그럼 인천항에서요.”
◆
“여보세요?”
[혹시 민찬이랑 같이 있어?]
“아니, 왜?”
[없어졌어. 전화도 안 받고, 아우……]
한꺼번에 넣으려던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눈 앞에서 다시 내려놓고 한 쪽 손을 털며 물었다. 없어졌다니? 어디서?
[이 감독님 뵙겠다고 촬영장에 잠깐 들러서 얘기하러 갔다가 여태 안 와. 감독님이랑 십 분정도 얘기하다가 촬영때문에 먼저 뒤돌아서셨다는데.]
“가봤자 어디 갔겠어? 집은?”
[문도 잠겨있고, 생각인데 집에는 없는 거 같아.]
“…내가 전화해보고 다시 전화 줄게.”
매니저 오빠의 전화를 끊고 민찬이의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신호음이 가는 동안 나머지 샌드위치 조각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천천히 씹고, 삼키는 동안 어느새 익숙한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렸고 다시 끊고 다시 연결했다. 그렇게 세 번을 통화연결 했을 때, 딸깍 하며 신호음이 사라지고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서민찬! 너 어디야?”
어디에 있는건지 어수선한 소음들이 들리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뿌우뿌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린데.
[…구야? 누구야?]
“서민찬! 어디냐구!”
[…한제영?]
“너 매니저 오빠 전화도 안 받고 어디로 샌거야? 스케줄 없어?”
[……나 지금 배 탔어!]
뭐? 배를 타?…… 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다 했더니, 뱃고동 소리였구나. …근데, 배를 왜 탔는데? 것도 혼자? 너 혼자니 지금?
[당근이지! 나 혼자 토낀거야.]
“그러니까 혼자서 왜 배를 탔냐구요. 어디 가는데?”
[섬에. 이 감독님이 죽이다고 칭찬이 난리시더라. 그래서 내가 사전조사 좀 해보려고 가는거다. 왜? 넌 실컷 보고 왔을 꺼 아냐-]
“…무슨 말이야?”
[너네 촬영하러 갔던 섬에 가는 길이라고-! 이제 배 출발하려나보다. 도착하면 내가 다시 전화할께-]
“뭐?…… 민찬아! 서민찬!”
◆ 로즈베리♥ love(ㄹ)ㅓ브 맛있는커피
금요일 밤부터 써서 토요일로 넘어온 새벽에 올리는 기분....
쏠쏠하달까요 ㅎ.ㅎ
업쪽 '사그중'
첫댓글 사그중 재미있어요.. 담편도 기대^^
◆감사합니다~ 쪽지드릴게요^^
사그중. 히야히야. 저런............... 안쓰럽군요. 다음편도 건필할께영.ㅋㅋㅋ
◆감사합니다~ 쪽지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