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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서라벌 포위와 광개토 대왕의 삼국 통일을 좌절시킨 후연!
BC 290년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니 요동과 길림땅 2천리를 빼앗겼으며, BC 108년에
한무제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망한 이래 우리나라는 100회에 달하는 외침이 있었는데....
말갈족이나 여진족 또는 왜구가 300명 이상 무리를 지어 침입해온 것 까지 포함하면 970회에 이릅니다.
우리가 침략한 횟수는 54회니 고구려는 12년 한나라 변경 침공한후 37년 무휼이 낙락을 습격했고 105년 태조
의 요동침략과 244년 동천왕은 2만으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을 공격했고 311년 미천왕때 서안평공격 및
385년 고국양왕이 4만으로 요동의 현도를 습격했으며, 광개토대왕은 395년 거란을 습격하고 402년 숙군성을
공격했으며 404년과 407년 후연을 침공했고 598년 영양왕이 말갈기병 1만으로 요서를 침공하는등 26회 입니다.
백제는 498년 탐라국을 정벌했고 동성왕때에 요서와 진평으로 진출(?) 했으며 신라는 208년 포상
8국을 격파했고 이사부는 512년 우산국을 정벌했으며, 733년 발해 남부 함경남도지방을 침공
했으나 눈으로 실패했고 819년 3만을 당에 파병해 운주절도사 이사도의 반란을 진압하는등
4회니 삼국은 32회에 달하는데 부여, 동예, 옥저, 마한, 가야 등 침공은 같은 민족이라 제외합니다.
고려는 918년 유금필이 금강산 북쪽 여진족을 공격했으며 여진족들이 살던 평안도 땅을 침공해 평안북도
서부 강동 6주까지 차지했고 천년간 여진족이 살아온 함경도에는 1107년 윤관이 침략에 나서 9성을
쌓았다가 포기했으며, 1274년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900척 전선애 15,000명이 가마쿠라 막부
의 일본 규슈를 침공했고 1281년에는 다시 전선 900척에 27,000명이 규슈를 침략했으나 실패합니다.
원나라 요청으로 1354년 최영 2천 출병과 1356년 공민왕은 유인우로 하여금 쌍성을 공격해 찾았고 1357년
인당은 서안평을 공격했으며 1370년 1월 이성계는 1만 5천으로 졸본의 오녀산성을 침공했고 10월에는
지용수와 이성계등 요동의 동녕총관부를 공격했으며 우왕때 1388년 이성계와 조민수가 5만을 이끌고
명나라를 치러가다가 회군했고, 1389년 공양왕때 박위가 100척으로 대마도를 침략하는등 14회에 달합니다.
조선은 1396년 태조때 김사형이 전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공격했고 1419년 세종때 이종무가 대마도를 침공
했으며 1416년 조연이 수백년간 함경도에 살던 여진족을 공격해 파아손을 치고 경원도호부를 설치한후
1433년에서 1443년에 걸쳐 김종서와 이천이 함경북도를 침공해 6진을 설치하고 이종무가 평안북도 동북
지방에 4군을 설치했으며, 1619년 강홍립이 1만 5천을 이끌고 후금을 향했고 1658년 나선정벌등 7회 입니다.
삼국시대 32회 + 고려 14회 + 조선 7회에 월남전까지 합치면 모두 54회에 달하는데.... 2차대전후 프랑스는
옛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1946년 베트남을 침공해 8년에 걸친 전쟁 끝에 디엔비엔푸가 함락당하니
1954년 제네바협정을 맺었으나 남북 베트남 통일선거는 공산당 호치민이 대통령이 되는걸 막으려는
미국의 입김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때 프랑스가 세운 괴뢰 정부인 월남이 거부하니 베트콩이 생겨납니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서 하노이를 폭격해 월남전쟁이 발발하는데 한국군은 5만명이
파병되니 연인원 313,000먕 중에 5,1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부상했으며 고엽제환자
134,000명이 발생했는데 소총은 물론 매일 전쟁수당을 미군으로 부터 달러로 받았으니 후에왕궁
박물관에 한국군은 “Puppet Army” 로 표기해 두었으니 미국 부용국으로 “괴로군” 이라는 뜻일까요?
이상이 우리나라가 다른나라를 침략한 사례이고 반대로 침략을 받은 것은 100회에 달하는데
말갈이나 여진족에 왜구등이 300명이상 무리를 지어 침입해온 것 까지
포함하면 더 많으니 ‘우리나라 역사’ 님은 970회에 이른다는데 그중에 일본이 714회 라고 합니다.
1) 신라시대 왜구(삼국사기) 20회, 2) 고려시대 왜구(고려사) 515회, 3) 조선시대 왜구
(조선왕조실록) 178회 4) 일제 침략 (1905∼1945) 1회, 합계 714회 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王陵碑) 에 396년 병신년 기사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인데.... 한국, 일본, 중국 및 북한의
해석은 여러가지로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396년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로 해석됩니다.
(백제와 신라가 왜의 신민이 됐다는건 사실이 아니니 고구려가 태왕의 업적을 높이기 위한 과장으로 봅니다?)
다르게는 “백잔․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그리고 왜 (倭) 는
신묘년 (391) 부터 건너왔기 때문에 왕께서 백잔과 왜는 공파하고 신라는 신민으로 삼았다.”
인데, 재일교포 이진희씨는 아예 일본 참모부에 의해 비문이 조작되었다는 설을 제시했지만
중국의 왕건군은 실제로 비와 여러 탁본을 조사하고는 탁본을 위해 회칠한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399년 신라 사신이 말하기를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고 성들은 파괴되었으며 노객은 천민이 되었으니
왕에 의탁하려 명을 청한다” 고 하니... 광개토대왕이 구원을 허락하는데 “400년에 5만의 보기
(步騎) 를 파견하니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 까지 왜군이 가득한데 관군이 이르자
왜인이 퇴각하는지라 추격해 임나가라 (任那加羅) 종발성 (김해 분산성) 에 이르니 항복 하였다.”
이때 400년에 왜군과 협력한 김해 금관가야도 사실상 멸망했으니 후퇴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는데.... 532년 신라 법흥왕때 이사부의 침공을 받고 항복하는 구형왕은
금관가야의 이름을 쓰지만 잔존세력으로 보며 근거지도 동래 복천동 고분 일대가 아닐까 하고
짐작되는데, 삼국사기에 보면 왜군이 신라를 침략한건 20회이고 서라벌까지 이른 것은 7회 입니다.
고구려군 5만이 신라와 가야를 장악했으니.... 이제 "고구려에 의한 한반도 통일" 이 이루어 질 순간에
고구려군은 황급히 철수해서 북쪽으로 돌아갑니다. 400년 정월 광개토대왕이 후연 모용성천왕에
조공했으나 2월에는 후연의 모용희가 3만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해서 5천명
포로와 700리 땅을 차지한 것인데 광개토대왕은 병력이 없으니 두 성을 구원하지 못하고 발만 굴립니다.
때는 오호십육국시대 (五胡十六國時代) 이니 5년전인 395년 후연의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 에게 8만을
주어 북위로 진격시키니 탁발규는 유인전술로 후퇴하다가 11월 참합피에서 기습해 후연군을
격파하자 이듬해 모용수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위를 정벌하던중 서전에서 승리했으나
참합피에서 병이 깊어 죽으니 모용보가 황제에 오르는데 북위는 396년 9월부터 후연으로 진격합니다.
397년 10월 북위에 수도 중산을 뺏긴 선비족 후연은 반란까지 일어나 요하 용성으로 후퇴하니 영토와 인구가
30% 미만으로 쪼그라 들었는데.... 고구려군이 남진했다는 소식에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략해
신성과 남소성을 차지했는데 후연에서 다시 반란으로 황제 모용성이 살해돼 혼란이 일자 고구려는 반격합니다.
광개토대왕은 두 성을 수복(?) 하고 요하 연군을 공격했는데.... 다음해 405년에는 후연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
요동성이 함락직전에 이르렀는데, 뒤늦게 도착한 황제 모용희는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요동성에 입성
하겠다며 공격중지를 명해 시일이 지체되니... 기세가 바뀌어 포기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광개토대왕은 결국 간신히 요동성을 지켜냈고 406년에는 목저성을 공격해온 후연군을 물리쳤으며
407년에는 5만대군을 동원해 대거 후연(혹은 백제?) 을 공격했는데 이 해에 한인(漢人) 풍발이
모반을 일으켜 국왕 모용희를 죽이고 고구려인의 후예인 고운 (高雲) 이 왕위에 올리니 북연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인이 왕에 오른지라 광개토대왕이 동족이 왕이 되었으니 전쟁을 그치고 우호관계를
시작했다고 말하는데, 그 할아버지는 50여년전 전연의 침입으로 수도 환도성 (국내성) 이 함락돼 인질로
끌려간 사람으로 고운은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모용운이 되었으니 모용씨 황족이라 한인이 바지사장에
내세웠다가 2년후 모용운을 살해하고 풍발이 천왕(天王) 으로 즉위하지만 북연은 436년에 북위에 망합니다.
후연왕 고운(高雲) 얘기를 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 는 악연이니 전연(前燕) 은
342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 을 함락하자 고국원왕은 단기(單騎) 로 달아나니,
모용황은 궁궐을 불사르고 도성을 파괴한후 미천왕릉 (美川王陵) 을 발굴해 시신과 왕모 (王母) 와
왕비에 도성 백성 5만명과 노획한 보물을 끌고가니 고구려는 수도를 동황성 (東黃城 강계) 으로 옮깁니다!
전연은 모용한의 계책으로 왕우에게 1만 5천 소수 병력을 평탄한 북로로 보내고 4만의 주력은
모용황왕이 직접 지휘해 험한 남로로 공격하니, 고구려는 적의 대군이 북로로 온다고
여겨 정예군을 북도에 파견해 적을 쳐부수었는(?)데.... 남도에서는 아불화도가가 분전
했으나 모용선비 선우량의 저돌적인 공격에다가 좌장사 한수에게 아불화도가가 죽으니 패배합니다.
모용선비는 국내성 함락후 왕비와 태후 주씨, 미천왕 시신에 5만명 국내성 주민까지 끌고가니 발걸음이 느린
저들을 두고 우리는 북도에서 돌아온 고구려군이 효성이 깊은 왕이 태후와 미천왕의 시신을 염려해
추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끌려가는 5만여명 포로 라도 찾아오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간이요, 하물며 저 5만은 수도 주민들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인데? 북도에서 군대가 늦게 귀환
했거나, 피로로 인해 당장 추격에 나설수 없었거나 ....그도 아니면 험한 남로이니 산길로 접어들면 대군
이라 하더래도 선두에는 소수만 설수있는지라 적이 곳곳에서 매복해 기습하면 낭패를 당할까 염려한 것일까요?
전연이 공격해온 저 전쟁의 원인을 살피건대 요하의 모용 선비 세력이 너무 커지자 동진의 평주자사 최비는
고구려에 협공을 제안하니 미천왕은 319년 단선비, 우문선비와 함께 모용 선비의 수도 극성을 포위했는
데.... "반간계" 에 걸려 우문선비를 의심한 고구려군이 후퇴해버리자 배신당해 홀로 남은 우문 선비를
격퇴한 모용 선비는 동진의 평주까지 거두어 세력이 커지니 고구려의 졸열한 오판과 후퇴가 원인입니다?
337년 모용 선비의 모용황이 전연을 건국하자 다음해인 338년 흉노 별종 갈족인 석호의
후조가 고구려 요동반도에 30만석 군량미를 실어다 주며 후조 + 고구려 + 단선비 가
모용 선비를 협공하자고 제안하고 극성을 포위했으나... 화공으로 후조군을 물리친
모용선비는 4년후 보복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 을 함락시켰던 것입니다!
고구려 수도는 그 전에도 함락된 적이 있으니 244년 고구려 동천왕은 2만 병력으로 비류수에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과 대진해 서전에서는 6천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추격하다가
역습을 당해 대패하니 불과 1천명만 고구려로 도망쳤는데... 관구검은 추격해 환도성
(국내성) 을 점령하니 왕이 낙랑으로 도망치는지라 관구검은 숙신까지 진격해 기공비를 세웠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서울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만 1700년 전에는 수도의 비중이 지금 보다훨씬 커서 나라의
절반이라 일컬어지는데... 수도가 함락되고 도성 백성의 대부분인 5만명이 포로가 되어 연나라로
끌려갔으니 고구려 나라가 망한거나 진배없는지라!!! 고국원왕은 343년 2월 왕세자를 연나라에 보내
1,000여 가지 보물을 바치면서 항복하니 전연 (前燕) 에서는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합니다.
고구려 고국원왕은 전연에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는등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해 미천왕의 시신을 겨우 돌려
받으면서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되는데, 전연은 항복의 진정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345년에
남소성을 공격하자 왕은 인내하면서 구원군을 보내지 않으니 성은 함락되었고, 이 갸륵한 충성심으로
왕비를 돌려받았으며 모후 주씨는 10여년이 흐른 355년 모용준때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로 돌아오게 됩니다.
수도와 백성을 잃은 고국원왕은 전연에는 저자세를 취하는 한편으로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만만해
보인 백제를 치다가 369년 치양에서 패하고 371년 태자 근구수의 역습을 받아 평양에서 전사하니
대위기에 빠지는데.... 다행인건 전 해인 370년에 고구려와 원수지간인 모용선비족의 전연이 저족
이 장안에 세운 전진에 망한 것이니 전연이 존속했다면 고구려는 협공당해 망해버렸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들 소수림왕은 전연이 망한후 황족으로 섭정 격인 태부(태재) 모용평이 망명해 오자 묶어서 전진에
바치니 우호관계를 맺어 한숨을 돌렸으며.... 장안의 전진은 중 순도(順道) 를 파견해 불상과
경문(經文) 등을 보내주니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고 왕은 태학을 설치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세력을 회복해 375년 백제 수곡성을 빼앗고 다음해 전진에 조공하니 중 아도를 보내줍니다.
다시 고구려에 불운이 닥치니, 전연을 멸하고 383년 화북을 통일한 전진왕(前秦王) 부견(苻堅) 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자 동진(東晉) 의 사현(謝玄) 이 비수대전 (淝水大戰) 에서 전진군을 대파하니
군대는 달아나는데.... 종군한 선비족 모용수(慕容垂)는 북쪽으로 돌아가 384년 화북의 업(鄴) 에서
후연(後燕) 을 건국하니 385년 고국양왕은 요동군과 현도군을 취했으나 다음해 모용농에게 다시 뺏깁니다.
391년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이 국력을 기른 덕분에 4만 대군을 동원해 할아버지 고국원왕
의 원수를 갚는다며 백제를 침략하였고, 이후 왜군에 포위된 신라에 구원군을 파견하기 위해
후연 (後燕) 의 모용성에게 400년에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고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이 됩니다.
397년 후연의 모용보는 북위의 침공으로 수도인 중산을 비롯 영토의 50% 에 해당하는 중부
지방을 뺏기니 달아나서 수도를 북쪽 용성으로 옮겼으니 옛 영토의 25% 정도에 불과하며
북위에 의해 끊긴 남쪽 지방은 동생인 모용덕이 남연을 세우니 후연은 세조각이 난 것입니다.
왜군은 391년부터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침공했고 399년에 서러벌을 포위해 위태롭자 김씨 내물왕은
자신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노객(노비) 이라고 낮추면서 원군을 비니 광개토대왕은 후연에
사신을 보내 조공해 배후의 안전을 도모한후 400년에 보기 5만 대군을 내려보내니 왜군은 달아납니다.
영락 9년(399년) 기해에, 백제가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통하였다. 왕이 평양에 갔을 때 신라가 사절을 왕에게
고하기를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차 성과 못을 파괴하니 이 노객(老客) 을 백성으로 여기시는 왕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를 베풀고 그들 충성을 칭찬하며 사절들이 돌아가 원군을 알리도록 하였다.
남하한 고구려군이 임나가라 종발성(김해 금관가야) 을 함락하자 왜군과 김해 금관가야인들도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도주했으니.... 고구려는 신라와 가야 두 나라를 손아귀에 넣었는지라 십여년만
저 점령지 백성들을 위무하고 안정화 시킨후 군수물자를 징발하고 백성들을 징용해 남쪽에서
백제를 치고 북쪽에서 고구려 본군이 남하했다면 한반도는 고구려에 의해 통일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후연은 북위에 수도를 뺏기고 북쪽으로 달아나 25% 로 세력이 줄었는데 서쪽 장안에 자리한 북위도 서너개
나라들과 다투고 있었던지라 대군을 후연땅에 주둔시킬수 없어 대다수는 철군했는데 서쪽이 안정되고
후연땅도 민심을 아우를수 있으면 물자와 백성을 군사로 징발해 북쪽으로 달아난 북연을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십년 여유 밖에 없는 후연으로서는 장래 북위의 침공에 대비해 국력을 키워야 했으니.... 가장
만만한게 동쪽에 고구려인데 그 병력 대다수인 5만 대군이 서라벌로 남하한걸 파악하고는 모용희가
3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땅 700리를 차지했으며 고구려인
5천명을 포로로 잡아 끌고가니 남진한 고구려군이 급히 철군한지라 삼국 통일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모용희는 황후 부씨가 죽자 슬픔에 잠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는데 큰 무덤을 축조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거나
곡을 하지않은 자는 처벌했고 대신들을 그 무덤에 순장시키려고 했으며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맨발로 상여를 메고 용성을 나섰는데, 가야에서 철수했던 왜군이 404년 백제의 도움으로 황해도를
침범하니 광개토대왕은 친히 나서 막아야만 했던지라 요서에서는 철수해야 했으니 후연으로서는 다행입니다.
후연 (後燕) 과의 전쟁으로 고구려가 남방전선에 소홀해진 틈을 타 백제가 “영락 14년 왜병을
앞세워 고구려의 대방계 (帶方界) 에 침입하니, 대왕이 친히 수군 (水軍) 과 친위병
[王幢] 을 동원하여 이를 격파하고 무수한 왜구를 참살하였다.” 고 한다. 백제의 도전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은 후연과 전투가 고구려 승리로 일단락된 뒤인 영락 17년에 이루어집니다.
“영락 17년에 대왕은 5만 보기를 파견하여 백제의 후방 깊숙이 쳐들어가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개선하는 길에 사구성(沙溝城) 등 6개의 성을 공파, 획득하였다.”고 한다. 후연과의 공방전과
남진정복이 일단락 된 뒤인 “영락 20년에 대왕은 조공을 중단한 동부여 (東夫餘) 를 친정하였는데,
동부여가 저항없이 왕의 덕화 (德化) 에 귀의하자 대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풀었다.” 고 한다.
그러나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 한족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모용보의 양자인 고구려계 모용운 (慕容雲) 을
황제로 추대하니 모용희는 용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해 죽었고 모용운이 북연을 건국햇지만 나라가
안정되자 2년후 풍발은 허수아비로 바지사장인 모용운을 죽이고 자신이 직접 천왕에 올랐으나 그후
북위의 공격으로 망하는 것이니, 이때 고구려군도 동쪽에서 협공했고 북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합니다.
전연이 전진에 망한 덕분에 고구려는 일어설수 있었는데.... 전진의 부견이 383년 비수대전에서 동진
의 사현에게 참패하지만 않았더라면 나라를 유지했을테니 신하인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할
수가 없었고.....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관계를 이용해 남진시킨 5만 대군으로 가야와 신라를
아우른후 북쪽과 동쪽, 남쪽에서 백제를 도모했다면 고구려에 의한 3국 통일이 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백제의 침공에 시달리던 풍전등화 같은 나라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에 갔다가 실패하고 이번
에는 왜국에 까지 원군을 청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귀국한후 3번째로 당나라로 갔으니...
당태종과 밀약하기를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한다고 약속했으니
그후 평양을 함께 함락했으나 통일 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까지라! 이를 어찌하리오!
342년 고국원왕이 전연(前燕) 에서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된건 부득이한 일인
반면에 광개토대왕이 후연 (後燕) 의 모용성으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에
된건 백제를 침략하고 왜군에 포위된 신라를 구원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데..... 전연도 배후의 고구려를 제압해야 장안의 전진과 싸울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배후에 적국이 있으면 다른 나라와 전쟁하기는 어려우니 독일과 소련, 소련과 일본은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며 일본의 전국시대에 가이국 다케다 신겐과 스루가국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가미국 호조
우지야스는 원수지간이었으나 복합 결혼으로 3국동맹을 체결한후 배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신겐은 북쪽 시나노로, 요시모토는 서쪽 오와리로 우지야스는 동쪽 무사시노로 진출하지요?
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백제왕과 경쟁이라도 하듯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에 책봉되고 남조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되는데, 한성의 백제를 침략해 멸망시키기 위해 배후를
안정시켜야 하니 불가피한 일이라 봅니다만..... 이후 영류왕 까지 모두 중국의 책봉을 받습니다.
그런데 영양왕의 경우는 좀 다른 것이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 요동군공, 다음해 고구려왕에 책봉
되고 조공을 바쳐 시간을 번 다음 598년 말갈 기병 1만기를 인솔해 요하 영주를 습격하자
문제가 30만 대군을 보내니....“요동 (遼東) 분토 (糞土) 에 있는 신(臣) 원..." 운운하는 사죄사를
보내 용서를 받고 다음 기회를 노리니 후대인 612년 양제의 113만 대군을 살수대첩으로 물리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