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굴이 있는 역사의 현장.
코스: 탄현역-고봉산
주유소-금정굴-황룡산(134,5m)-오성골프클럽-운정역. (7,4km/2시간40분)
같은 노선에서 理念이 같은 일본은 그렇게도 미워하면서 虎視眈眈 기회만 엿보는 북한은 하나 미워하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만 사는곳이 우리 대한민국인것 같다.
우리는 미국을 배워서 미국을 이기는 일본인들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일본을 증오하고 무조건 미워했음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나요?
1900년대 초만 해도 약육강식 철학이 유행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일본은 강자였고, 우리는 못난 약자였습니다.
지금처럼 당파 싸움만 하다가 망한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고 과학을 수입하고 실용주의 철학을 익혔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문을 닫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自尊心만 내세우며 관념주의 당파 싸움에 밤과 낮을 지샜습니다.
못나서 당해놓고 우리는 잘났던 일본을 지금까지도 원망하고 증오합니다.
나라가 시끄러울 지경으로 시위를 하면서도 북한에대한 시위는 한번도 없다는것 이상하지 않나요?
금정굴이란?
해방 이후 고양지역에서도 한국 다른 지역처럼 좌우익 대립이 심각하게 일어났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후 3일만에 고양 지역은 인민군에 넘어갔으나, 아직 아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라디오 방송을 믿고 피난하지 않은 주민들이 많았다.
들어온 북한군은 고양에서도 인민재판을 벌여 우익 인사들을 체포해 고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북한군은 7월 5일 고양군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선거를 치러 인민위원을 뽑았고, 주민들을 인민의용군으로 징집했다.
그러던 중 9월에 인천 상륙작전이 이루어진 이후 9월 20일에는 능곡이, 9월 28일에는 일산이 수복되었다.
그 사이 고양 일대는 인민위원회 등이 해산되고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어서 좌익과 우익 간의 학살 사건이 벌어지기시작했다.
국군이 고양에 진입한 이후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일이 시작되었고, 인민위원장 등 부역자들이 사살되었다.
10월부터 고양경찰서가 다시 복귀해 부역혐의자
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여기서 누가 부역자인지 가려내는 건 인민군이 아닌 이상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주민들이 고발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 상황
이었다.
부역혐의자들은 연행되어 각 경찰서 지서에서 1차 조사를 받고, 조사 후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이 연행 과정에서 고문 또한 빈번히 행해졌다고 한다.
이후 경찰에서는 임의로 이들을 분류해서 몇몇은 석방하고 몇몇은 금정굴로 끌고 갔는데, 이 과정에서 우익 치안대와 태극단[1]도 가담했다.
금정굴은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에 위치한 황룡산 자락에 위치한 굴로, 동굴은 아니고 일제강점기 때 금 채굴을 위해 수직으로 파 놓은 굴이었으며, 처음에는 굴 앞에 주민들을 세워놓고 총으로 쏘아 떨어뜨렸으나, 생존자가 나타나자 이후엔 굴 입구에서 총살한 후 굴 속으로 던져놓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후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20여 일에 걸쳐 학살이 이어졌다. 희생자들은 심사를 받는 줄 알고 금정굴 아래 공터에 모여 있다가 경찰에 지시에 의해 5~7명씩 현장으로 올라갔으며, 한번에 20~40명씩, 많게는 47명까지 끌려갔다고 한다.
또한 부역혐의자들의 가족 역시 학살의 대상이 되었고, 이들의 재산 역시 경찰에 의해 탈취되었다. 학살은 10월 말에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개입하면서 중단되었으며, 이후 의용경찰대원과 시국대책위원장 두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무영 당시 서장을 포함해 처벌받은 경찰관도, 치안대원도 없었다.
이후 학살 사건은 묻혀져 있다가 1990년 고양시민회장 김양원이 향토사 발굴 도중 금정굴 학살 사실을 접하며 첫 조사를 실시했고, 1993년에 고양시민회, 전교조, 항공대 총학생회 등 재야 시민사회단체 5개가 '금정굴사건진상규명위원회'를 결성해 고양시청, 고양경찰서, 경기지방경찰청, 국회의사당 등을 돌며 진상규명 운동을 시작했다.
뒤이어 유족회도 꾸려져 첫 위령제가 개최됐다. 1995년 9월부터 유족들이 스스로 현장 발굴을 개시하여 시청 녹지과 공익요원들의 방해 속에서도 153구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 광경은 10월 3일 MBC <PD수첩> '분단비극의 현장, 금정굴 열리다(최승호 취재)' 편에서 다뤄져[2] 여러 언론에 보도됐으나, 시 당국과 정부는 진상규명에 소극적이었으며 태극단 출신들도 학살 희생자들이 북한군 부역자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1999년 경기도의회는 '고양시 일산 금정굴사건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고양 금정굴 양민학살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내 금정굴 사건이 경찰의 주도로 다수의 민간인을 불법 살해하여 암매장한 사건이라는 결론을 냈다. 이에 태극단동지회와 각 보훈단체들이 금정굴 희생자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자 2001년 시 당국은 위령사업을 거부했고, 2002년 '금정산 위령사업 촉구 결의안'도 부결시켰다.
그럼에도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출범되면서 희망을 다시금 얻었고, 2006년에는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금정굴 사건에 대해 경찰 책임하의 불법 학살로 인정하였다.
이후 고양경찰서에서도 유감과 애도의 뜻을 표명하고 법원도 금정굴 유족에게 국가 배상을 판결했다.
2013년에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이 창립됐다.
한동안 발굴된 희생자 유해들은 안치할 곳이 없어 서울대학교병원 법의학 교실에 보관해 오다가, 2011년 고양시 청아공원 납골당으로 옮겨졌고, 이후 계약기간 만료로 2014년 하늘문 공원 납골당으로 다시 옮겨졌다.
2010년 새로 당선된 고양시장 측에서는 금정굴 유해를 안치하고 평화공원을 조성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태극단 출신들과 보수단체 등의 반발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고, 2014년 유해를 청아공원에서 하늘문공원으로 이장할 때도 고양시 측은 2,000만원의 예산을 상정했다가 여당에 의해 전액 삭감되었고, 이후 표결에 따라 절반 금액으로 정해지는 일도 있었다.
2015년 7월 금정굴 희생자 지원조례가 다시 고양시의회에 상정되었으나 통과는 불투명한 상황. 그 상태로 2018년 5월 8일 MBC <PD수첩>에서 또 보도됐다.
해당 조례는 보수 보훈단체들의 반발을 물리치고 2018년 8월에 고양시의회에서 최종 통과되었다.
(옮겨온 글)
이러한 우리나라의 과거는 어렵게 어렵게 버티어오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산을 넘고 깊은 강을 건너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6,25 사변은 동족상잔의 혈투였지만 일본은 우리가 너무나도 약했기에 어쩔 수없이 지배를 당했던 것이니 작금에 와서까지 멀고먼 나라로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미래를 향한 동반자요 자유우방의 평화를 꿈꾸는 평화속 이웃 나라 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마디로 북한과 일본을 두고 저울질 할때 누굴 믿고 누구와 같이 하겠는가?
이른바 지금정부에서 한 대일관계는 우리가 접어주면서 손잡은것이 훨씬 국익에 도움된다고 생각되는 것이니 당파싸움을 위한 반대 투쟁 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부디 현실을 직시 했으면한다.
탄현역.
탄현역 앞 초고층 아파트.
아파트를 통해 역으로 갈 수있는 아파트 입구.
홀트복지타운.
목련.
오늘 산행 들머리.
고봉산과 황룡산.
금정굴 입구.
금정굴.
새잎이 이렇게 돋아났네요.
철망따라.
고봉산.
사유지라며 기존 등산로 를 막아 우회 시켰네요.
야당쪽.
사유지로 기존 정상 구조물까지 철수 했습니다.
예전 정상이라고 했던곳을 지나 진짜 정상쪽 철망옆에서 쉬는 순간.
시그널 하나 남겨 둡니다.
운정역으로 갑니다.
오성골프클럽.
황룡산이란 이글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네요.
운정역 도착.
오늘 산행은 가볍게 마쳤습니다.
마두역 한식부페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귀가했습니다.
오랜만의 황룡산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