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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다른 성격의 방언들인가?
- 박길현 목사 -
흔히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방언은 사람이 사용하는 '외국어'인 데 반하여,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신비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확증할 수는 없지만, 요즈음의 사람들이 방언이라고 하는 신비한 소리를 고린도 교회에서 했던 방언과 비슷한 유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근거로 성경이 방언을 교회에 주신 선용해야 할 은사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은사로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사용하도록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방언이 이런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견해에 대하여 성경이 다른 관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성경이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핵심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계시역사적인 관점에서 본 방언
우선 성경이 가르치는 방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시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 전체가 방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이해해야 사도행전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성경 전체에서 방언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다 논해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계시역사에서 방언 이해를 위한 전체적인 틀을 이해함으로써 신약의 방언을 바로 이해하는 기초를 삼으려고 한다.
1) 방언과 언어
구약 성경에서 방언에 대한 언급은 그렇게 좋은 의도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다. 방언이라는 말이 먼저 언급되는 곳은 창세기 10:5, 20, 31이다. "방언과 종족과 나라"(5절),"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20, 31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방언'이라고 번역된 말(!Avl')은 신약에서 '방언'(glw/ssa)(행 2:4; 고전 14:2)이라고 번역된 말과 치환하여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족속과 지방과 나라에 따라서 분화된 언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방언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의 언어라는 뜻이 아니라, 용처가 제한된 일정한 언어를 의미한다. 즉 방언이라는 말은 특수한 상황과 지역과 그것을 사용하는 인종을 가진 언어를 의미한다. 방언은 특수성을 띠고 있다. 이에 반해 '구음'(hp'f')과 '언어'(rb'D' 의 복수형)(창 11:1)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자적으로는 구음은 '입술'을, '언어'는 '사건'을, 방언은 '혀'를 기본적으로 의미한다. 이 세 말이 일반적으로 언어라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어원적인 면에서 기본적으로 그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용례에서의 의미상의 구별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 된다.
2) 방언의 발생
성경에서 방언들의 발생은 바벨탑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바벨탑 이전의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구음이 하나요, 언어들(복수형)이 하나'(창 11:1)라는 말은 통일된 하나의 언어를 인류가 사용하고 있었지만, 지역에 따라서 약간씩 변화도 있었음을 추정하도록 해 준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경상도 말과 전라도 말이 각기 특성을 가졌지만, 하나의 통일된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상태였겠다. 이렇게 언어가 통일되어 있었으니 서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기서 문제는 발생하였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 아래 있었던 인류는 인간의 힘을 규합하여서 자기들 스스로 살길을 추구하였다. 홍수라는 대 사건을 겪고 나서 흩어지기 시작한 인간은 그러한 사건이 또 있을 것을 의식하여서 흩어지지 않기 위하여 자기들 스스로 하늘에 닿을 탑을 쌓고자 했다(창 11:1-4). 이러한 인간의 기도를 좌절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취하신 조처가 언어를 족속과 나라에 따라서 나누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각 방언들이 제한된 영역들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3) 방언 발생의 의미
이러한 방언들이 발생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려고 하지 않고, 인간 자신의 힘을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시도했음을 증거하는 표적이다. 그러므로 방언들은 인간 불신의 표적이다. 만약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셨다면, 또 다시 홍수 이전처럼 인간은 패괴 타락하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조기에 당하고 말 상황을 불러 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방언들로 나누신 것이다. 그러므로 방언의 등장은 인간 타락의 표적이요, 이렇게 타락한 인류의 힘이 집중되어 망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예방 활동의 표적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힘이 함께 모이는 것은 반역과 타락의 세력이 커진다는 사실을 내다보셨다. 이러한 세력의 집중은 죄악과 타락의 길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내다보시고 이런 조처를 취하셨다. 타락한 인간들의 힘이 한 곳에 모이고 하나의 나라가 되는 것을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지극히 위험한 요소로 보셨다. 방언은 이러한 의미를 상징하는 표적(징)이다. 즉 방언은 인류 죄성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담긴 심판적 의미의 표적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인류가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또한 상징하는 표적이기도 하다. 그래야 창조 때에 의도하셨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세상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의 방언은 하나님에 의한 창조세계의 회복을 암시해 주고 있다.
2. 바벨 사건 이후의 계시 역사에서 방언의 의미
바벨탑 이후에 성경의 역사에서 방언의 의미에 대한 암시 역시 부정적인 용도에 나타난다.
1) 신명기 28:49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이 구절에서도 '방언'(!Avl' )이라는 말이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과는 다른 족속들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사용하는 것과 다른 '언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방언'이라고 할 때에 우리 말에서 '지방언어'(촌말, 사투리)라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언어에서 족속이나 민족을 따라서 나누어진 언어라는 뜻으로 이해함을 전제로 할 때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방언'이라고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 된다.
여기서 방언은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멀리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불러오실 것을 말씀하시는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방언은 멀리서 이스라엘을 치러 오는 이민족이 사용하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 언어를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언어가 이스라엘에서 들려진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비극적 상황을 보여주는 표징이다(신 28:49-51).
2) 이사야 28:11-13
"생소한 입술(입술의 조롱)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교만하고 완고하여서 여호와의 말씀을 잔소리처럼 귀찮아하면서 조롱한 것(사28:9-10)에 대하여,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라는 구절은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을 가리키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이라는 구절은 '체계도 없고 이어짐도 없는 천단한 말이라는 뜻이다. 유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잔소리와 천단한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이다. 마치 젖을 뗀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라고 조롱하였다. 그들은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는 말씀을 순종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포를 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이와 같이 조롱하였던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이방인을 불러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조롱을 당하도록 하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비웃음을 당하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 가다가 넘어지고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완고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실 것에 대한 선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이것은 다른 방언을 말하는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가 고초를 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이 고린도전서 14:21에 인용되고 있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이해를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다루는 방언도 사람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이상에서 계시역사에서 방언은 인간의 언어를 의미한다는 것과 그것이 죄악된 인간에 대하여 심판의 징조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과 또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질 통일된 세계를 암시하는 표적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3. 신약의 방언
신약의 방언이 구약 방언의 표적인 의미를 잇고 있는가? 잇고 있다면, 우리는 신약 방언을 구약방언의 의미와 떼어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그러한 통일성 속에서 신약의 방언을 이해해야 신약의 방언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 현상을 주석적으로 간략하게 다룰 것이다.
1)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방언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후에 사도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4)라고 누가는 기록했다. 방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언어이다. 이 사실은 방언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시는 내용이 있음을 밝혀 준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 편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렇다면 이 때에 말했던 방언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말하는 하늘의 언어였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5절-11절이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왔고(5), 그 큰 무리가 각기 자기의 방언으로 듣게 되었으며(8), 그들이 온 곳이 9-11절까지에서 진술된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은 각 순례자들이 온 지역이나 나라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방언'(6,8-dia,lektoj )이라고 하는 말은 각 사람들이 온 그 지역이나 나라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 지역이나 각 나라의 말이라는 점에서 '그로사'(glw/ssa )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던 그 지역 혹은 나라의 말로써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때의 방언들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간혹 사도들이 자기들의 말로 말했는데, 성령이 각 방언으로 바꾸어서 듣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이럴 경우 성령이 통역자가 되고 사도들은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되는 셈인데, 하지만 이런 현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성령이 사도들에게 할 말씀의 내용과 생각을 주셨고 동시에 그들의 언어로 말하도록 말도 넣어 주셨다고 생각 된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신약의 말씀을 처음으로 전하는 사람 즉 구약식으로 말하면 복음에 대한 일종의 선지자와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선지자들에게 전할 말씀을 입에 주셨듯이 사도들의 생각과 입술에 설교할 내용과 말씀을 각 나라의 언어로 넣어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를 의미하며, 또 듣는 사람들은 신비한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사는 지역과 나라의 말을 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설교는 인간의 언어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각국의 언어로 전해진 내용이 무엇일까? 11절 끝 부분이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큰 일'(ta. megalei/a tou/ qeou/) 라는 말은 하나님의 '위엄'(LXX신11:2)이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에 디아스포라로부터 모여 든 사람들이 들은 하나님의 큰 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설교한 그 내용(행2:14-36)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 된다. 이것은 바로 복음의 내용이다.
오순절에 각국으로부터 모여든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로 복음의 내용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성령으로부터 복음의 내용을 듣고, 이어서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로부터 설명을 듣는 것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을 것이다.
방언으로 사람들이 들었던 것은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한 현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언으로 말한 내용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했던 것은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언 현상에 집착하는 현대적인 현상은 어쩌면 '지나가던 길손이 개귀를 잡고 씨름한다'는 속담처럼, 엉뚱한 것을 잡고 씨름하는 것과 마찬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방언으로 성령이 말하게 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으로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 거기서 방언이 타락한 인간의 나라가 연합되어서 뭉쳐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였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것에 비추어 본다면, 오순절의 방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복음이 온 세상적으로 전파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 세상에서 세워져야 함을 상징하는 것이다(행1:8). 즉 복음을 통해서 온 세상 나라가 통일되는 것을 뜻하는 징조로서 방언으로 설교를 시작하신 것이다(엡1:10,20-23 참고). 오순절의 방언은 인간의 반역적인 정신으로 깨어진 세상에 복음으로 통일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표징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표적(징)이 아니라 표적(징)이 가리키고 있는 내용 즉 복음이 전파한 내용 곧 하나님의 나라의 일(행1:3)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의 관심도 '방언에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로 모아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이 사건은 정녕 바벨의 저주의 반전(reversal)과 다른 것이 아니다"고 하는 말은 참으로 합당한 이해라고 생각 된다.
2) 고린도 교회의 방언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는 성격이 다른 천상의 언어였던가? 앞에서 암시했던 바와 같이 필자는 고린도전서 14:21-22을 주의해서 상고해 봄으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이해하고자 한다. 흔히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다룰 때에 이 구절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 구절들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열쇠라고 생각 된다.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14:21-22상). 여기서 '기록된 바'라는 구절의 성경 관주는 이사야 28:11-12과 신명기 28:49절을 지시하고 있다. 두 곳의 성경이 여기서 인용되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시는 지당한 지시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다른 방언하는 자들과 다른 입술들은 구약의 문맥에서는 이스라엘을 징치할 다른 나라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는 앗수르와 바벨론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옛 이스라엘에게는 앗수르와 바벨론 사람들이 다른 방언하는 자들이요, 다른 입술들이었다. 다른 입술이라는 말은 '다른 구음'(창 11:1)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강조하기 위한 중첩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인간의 언어라는 관점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이 깨달음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천상의 신비한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방언현상에 빠져 있는 현대 교회에 엄청난 도전을 주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현대 교회는 이러한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에서 다른 방언하는 자들과 다른 입술들은 누구인가? 고린도 교회의 역사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다른 방언하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방언을 말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그러면 이들이 하는 방언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위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라는 구절이 단서가 될 것 같다. 즉 듣지 아니하면 그들을 내버리고 듣는 사람에게 간다는 뜻을 이 구절은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는 말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복음을 듣는 자들이라고 이해 된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듣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의 언어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이해라고 생각 된다. 그러면 이런 이해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합치하겠는가?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은 시 재무관 에라스도나 가이오 같은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지거나 유력한 사람도 있었지만(롬 16:23; 고전 1:14), 하층민들이 많았던 같다. 아마도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볼 때에 평범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그래서 하층민으로 사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부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다(고전 11:21-22)고 하는 것이 옳겠다. 이런 가운데서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울은 강조한다(고전 1:26-31).
그리고 이러한 신자들은 주로 유대인 아닌 이방인들이 많았음을 짐작하게 한다(12:2; 행 18:8 참조). 아마도 헬라인들이 많았을 것이다(행18:4참조). 그리고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이 있었고, 거기서 이루어지는 운동경기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로마와 동양 사람들까지 참석하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행 18:4, 24; 19:1).
이렇게 볼 때에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은 참으로 다양하며,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언어적 토양은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 로마어와 기타 다양한 동서양 언어가 혼재해 있는 상황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토양은 문제도 많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반면 복음을 다양한 족속들에게 전하는 데는 유익한 토양이 될 수도 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현상 이해를 위해서는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현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천상의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소통하는 언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린도전서 14:21-22에서 방언이 믿는 자들을 위함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함이라는 말씀이 이해될 것 같다. 상상해 보자. 믿지 않는 헬라인이나, 아람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나, 혹은 로마 말을 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멀리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곳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고린도에 왔다가 전도를 받고 고린도 교회에 참여하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자기들의 언어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로 인한 사죄와 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주심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리고 그 말하는 뜻을 방언하는 사람들 자신들도 잘 모르면서도 자기들의 언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웠을까? 고린도 교회의 정황상 이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상정할 때에, 우리는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자를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를 위함이라'(22상- w[ste ai` glw/ssai eivj shmei/o,n eivsin ouv toi/j pisteu,ousin avlla. toi/j avpi,stoij)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을 어법을 고려하여 직역한다면 '방언들은 표적을 위함인데, 믿고 있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기 위함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방언이 표적이라는 사실과 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만약 여기서 말하는 방언이 천상의 신비한 언어였다면, 믿지 않는 외국인들에게 그것이 어떤 표적이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천상의 신비한 언어가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외국인들이 자기들의 말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소통언어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반하여 예언은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믿는 사람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사도행전에서 밝힌 성령 받은 사도들을 통한 주님의 제 2단계 사역의 방향성과 합치한다. 거기에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행 1:8)라고 방향성이 밝혀지고 있다. 천상의 언어였다면, 이런 방향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4. 고린도전서 14장의 다른 구절들과 조화의 문제
이와 같은 견해가 고린도전서 14장의 다른 구절들의 가르침과 상치되지는 않을까?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반론을 제기할 법한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물론 14장 전체를 자세히 주석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여기서 불가능함을 전제로 하자.
4.1) 2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첫째,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라는 말을 방언의 성격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 즉 방언은 성격상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언을 신비한 천상의 언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방언의 내용이 성격상 예언과 다름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라면(5-9절 참조), '방언을 하나님께 한다'는 말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방언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 즉 은사라고 생각하고 한 곳에 함께(23절 참조) 모여서 방언을 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말로 이해 된다. 이 경우 방언을 들을 사람이 특별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는 방언이라면 하나님께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반절 '왜냐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데(de.), 성령으로 비밀들을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듣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비밀들을 말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는 방언이라면 하나님께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리고 '비밀들'을 말하는 것이지, '비밀스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을 가리키지, 말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둘째, '영으로'라는 말은 '성령으로'라고 읽는 것이 옳겠다. '영으로'라는 말은 관사가 없이 쓰인 여격 명사로서 절대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사람의 영으로'라고 읽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의 영이 아니라 신자와 교회 속에 임재하여 계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함이 합당하다. 그리고 방언을 하는 것이 계시의 영으로서 임재하여 계시는 성령의 은사라면 성령으로 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자기의 영으로 방언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비밀들'은 그리스도 사역과 그 결과와 관련된 말이다(고전 2:1, 6-10; 13:2 참고). 구약시대에 숨겨졌었고 신약의 세상에도 숨겨져 있던 그래서 세상이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뜻으로 '비밀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여러 곳에서도 이 단어는 마찬 가지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엡 1:9; 3:3-11; 6:19; 골 1:26-27; 2:2-3; 4:3; 롬 11:25; 딤전 3:9,16). 비밀은 복음과 동의어다(롬 16:25-26). 여기서 복수로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주어진 결과가 너무나 다양하게 설명될 수 있는 풍부한 것이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방언을 신비한 하늘 언어라고 이해할 가능성을 더욱 배제시킨다.
4.2) 4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위의 맥락에서 볼 때, 이 말씀도 방언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기보다 실제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 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건설한다. 하나님의 은사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충만함을 누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통역이 없이 하는 방언은 개별적인 유익에 그치는 것이다(5절 참조). 즉 방언이 개별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교회에도 통역을 통해서 그 내용이 주어질 수 있으므로), 통역 없이 하는 방언은 개별적인 유익밖에 세우지 못하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방언이 신비한 언어이기 때문에 자기의 덕만을 세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4.3) 9-10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이 구절은 분명히 알아 듣기 쉬운 말이 아니라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하는 방언을 상정하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알아 들을 수 없이 하는 천상의 신비한 언어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들을 사람이 마땅히 와 있지도 않는 상황에서 은사 받았다고 생각하고 '한 곳에' 함께 모여서(23절 참조) 방언을 행하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상정하고 하는 말로 이해 된다. 따라서 여기서도 사람이 사용하는 외국어를 함께 말함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어려움을 상정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알아 듣지 못하는 외국어로 인하여서도 서로에게 야만인이 될 수 있다(11). 그리고 서로에게 야만인이 될 수 있다는 이 가르침은 방언이 인간의 언어라는 것을 상정하고 있음을 희미하게 암시하는 것 같다. 또 "뜻 없는 소리가 없나니"라는 구절도 동일한 암시를 주고 있는 것 같다.
4.4) 14-15절에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칼빈은 14절에서 기도와 방언을 관련지어 말하는 것을 새로운 주제로 생각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외국어들로써 방언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과 같이 또한 기도방면에서도 잘 못되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서 "나의 영이"이란 말을 "나에게 주어진 그 은사"와 꼭 같은 뜻으로 이해했다. 반면 박윤선은 방언은 '지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높은 층계에 속하는 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는 자 자신도 지능으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박윤선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 영이 하는 신비한 언어로 이해했다. "나의 영"이라는 말은 '인간의 영'으로 이해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나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의 영이라는 하지(Hodge)의 견해를 소개했다. 이 구절의 이해가 결코 쉽지 않음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첫째,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이라는 구절이 가정법 구절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해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해를 위하여 또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둘째, 기도하는 주체는 '나'다. 나라는 주체가 '방언을 의지해서' 기도한다. 그런데 이 방언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성령이 교회의 정초를 놓기 위하여 초대교회인 고린도 교회에 임재하여 계시면서 주시는 방언이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주체는 나이지만, 방언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셋째, 여기서 '나'와 '성령'의 관계에서 주체인 내가 성령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기도하기는 하지만, 성령이 주시는 방언으로 말하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음 구절 즉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외국어이기 때문에 몰이해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나와 성령과는 서로 다른 주체이기 때문에 몰이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넷째, 이렇게 생각한다면, "나의 영"이라는 말은 방언을 주시는 성령을 '경외하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닐까? 즉 '내가 모시는 성령'이라는 뜻으로 사도가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서 일인칭 소유격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용될 때는 경외를 담고 있다(요 20:28; 눅 1:47). 그러므로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성령을 경외하는 뜻으로 "나의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섯째, 이렇게 이해할 때에 15절도 쉽게 이해 된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는 말씀은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 된다. 즉 성령으로 기도한다면 자신이 이해하면서 기도하도록 해야 하고, 성령으로 찬송하는 것이면 자신이 이해하는 중에 찬송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 되기 때문이다. 통역의 은사란 이해란 의미에서 필요한 것일 것이다.
여섯째, 대체 자기가 자기의 영으로 기도한다면, 자기 마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자기 영으로 기도한다면, 그 내용이 자기 생각과 이해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정상적인 은사 가운데서 인간의 영이 방언을 한다면 인간의 영과 마음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이런 견지에서 생각할 때에 영과 마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여기서 말하는 "나의 영" 또는 '영으로"라는 말을 사도가 자기가 모신 성령을 경외하여서 하는 말로 이해하도록 한다. 성령과 자기의 이해하는 정신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이해불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도가 강조하는 바는 이해되는 중에서 기도도 찬송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4.5) 16절에서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이해에 대한 사도의 강조는 계속된다. 16절에서는 앞절의 기도와 찬송에서 축복으로 진행한다. 그리고 주체를 자기에서 2인칭 단수 '너'로 바꾼다. 그리고 '너'의 축복에 배우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감사하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축복하는 것을 "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상의 맥락에 비추어서 이 말을 '성령으로'라고 읽는 것이 옳지 않을까? 성령으로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을 듣는 사람도 이해하게 해야 아멘으로 참여하게 될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이해를 강조하는 기조는 19절까지 이어진다.
4.6) 23-25에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 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24절),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25절)"(한글개역)
여기에서 무식한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올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증을 위한 가증일 수도 있겠다(위에서 2절의 설명 참조). 왜냐하면 다음의 23절이 반드시 외국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23절에서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즉 '가령 누가 교회에 들어와서 그것을 보았다면, 신비한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를 알아듣지 못하여서 방언하는 사람들을 미쳤다고 말하는 것 같이 23절을 읽을 수 있겠다'는 점이다. 하지만 23절의 말씀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행하던 '방식'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된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한 곳에' 모여서 모든 사람들이 방언들을 말한다면"이라고 역하고 보면 온 교회가 한 곳에 함께 모여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하는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각자가 하는 말을 각자가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은사라고 여기고 함께 외국어로 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들어야 할 특정 대상이 와 있는 특정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은사인 방언을 하기 위하여 온 교회가 한 곳에 함께 모여서 방언들을 말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고린도 교회가 행하던 방언 현상이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방언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모인 곳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때에 만약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본다면(설명을 위한 가정) '모두가 미쳤군' 하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무질서와 조롱받을 행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24절은 23절과 대조적으로 '한 곳에'라는 말이 없다. 하지만 23절과 동일한 곳 동일한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같은 곳 동일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예언의 경우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책망과 판단 받음을 통해서 숨은 죄악이 드러나게 되므로 교회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한다. 모두가 모두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예언은 그래도 방언보다는 낫다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사도는 온 교회가 한 곳에 모인 상황에서 예언의 유용성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의도가 사도의 마음에 있으니 24절에서 '한 곳에'라는 말을 빼버렸는지도 모른다. 같은 말을 또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7) 26-33a에서
사도는 좋은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것이 사도가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즉 방언이든지 예언이든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적당한 수의 사람이 질서와 통역과 분변과 양보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도록 가르친다(26-30). 그리고 예언은 모두가 모두에게서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모두가 한 곳에서 하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하라고 말하고 있다(31). 또 예언이 계시를 받아서 하는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30). 방언도 그 내용은 예언과 같은 차원의 것이라는 것을 이 부분(27-30)의 문맥은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예언을 주도하시던 성령께서 방언을 주도하셔서 자기 그릇을 통해서 방언하게 하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방언도 계시적인 차원에서 성령께서 주도하셔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런 일을 주도하시는 성령은 은사자의 판단과 사려를 무시하는 분이 아니라, 은사자의 생각을 따른다. 그래서 성령은 은사자의 제어를 받으신다(32절). 이런 맥락에서 28절의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구절을 생각하면, 방언 제제가 성령이 은사자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과 통역이 없는 상태에서 표적인 방언을 은사로써 사용하려거든 개인적으로 하라는 요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 된다. 상황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
[정리]
이상에서 고린도 교회의 방언도 사람의 언어였다는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것이 고린도 전서 14장에서도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이 근거는 사도행전 2장과 멀리는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에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 해 보았다. 여기서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
첫째,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인간의 언어다.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다른 것이 아니다.
둘째, 방언은 계시적인 내용 곧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말하는 외국어다. 듣는 사람이 알아 들을 때 그 사람에게 구원이 선포된다는 것을 표하는 인간의 말 곧 외국어다. 따라서 말하는 내용을 듣고 그 말을 알아듣는 불신자가 하나님의 하신 큰 일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방언의 목표다. 듣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요, 들어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선언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표적이 성경의 방언이었다. 따라서 믿은 후에는 이 방언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표징은 그 실체가 이해되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즉 매미 허물과 같은 것이다. 그 실체인 내용은 복음이요, 성경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방언은 계속해서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서의 방언이 가리키는 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가 왔음을 바로 알라는 뜻으로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자는 복음의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
셋째, 방언이 특별계시 사건들과 관계가 있는 표징이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계시가 성경으로 완성이 된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언이 끝났다고 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사도들의 시대로 방언이 끝났다고 하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장로교 목사들까지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넷째, 어떻게 해석하든지 고린도전서 14:21-22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인간의 언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고 있다. 가령 고린도 교회의 방언을 비밀스런 하늘의 언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상징적으로 지시하는 바는 심판과 구원의 표적인 인간의 언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한다. 즉 방언하는 것을 보고 낯선 외국인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바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 지금도 복음이 처음으로 전해지는 상황에서는 방언 현상이 있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곳이 사도적 교회와 같은 초대교회의 상황임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으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방언을 사용하실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렇게 하여서 지금의 교회도 사도의 교회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실 목적으로 주께서 방언을 사용하실 수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교회를 사랑하셔서 스스로 이런 조처를 취하여 교회의 하나 됨을 확증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일도 주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방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방언을 달라고 주님께 요구할 성격이 아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복음이 확증되면서 교회가 세워졌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방언을 계속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집중하여서 복음의 내용을 배우고 실천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에 진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출처 :개혁주의 마을
@레인
라라라가 하늘의언어라는 증거를
대라니까.....
@주님내안에 성경에 있는것이 증거고
너의 머리에 뱀이 확증이다
@레인
성경에 라라라가 있다고?
그래서 네가 거짓의아비 뱀이란 것이다
@주님내안에 그래서 예수님이 모세의 몸으로 부활하냐?
창작을 해라 아주
@레인
@레인
예수께서 죽은자들로부터 살아나셨다는
뜻을 아느냐?
모르면 다 너같은 소경이 되는것이다
@주님내안에 죽은자들 가운데 살아나신것이지
넌 흠정역만 보는것 같드라
@🥀사랑🌻
개 아이콘을 쓰는걸 보면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지 ~~? ㅎㅎ
@레인
난 한글깅제임스다
흠정역은 간혹 참고로만 볼뿐이다
그래 그럼 죽은자가운데 살아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
설명해보라 ~~
@주님내안에 말 그대로지
국어 못하는건 아니겠지?
@레인
하하하 ~~~~~~~~~~~~~~~~~~~~
그래서 네가 소경이란것이다~~
.너네들 나한테 좀 배우고나서
다시 시작하면 안되겠냐
내가볼때 너희들은 백프로 사이비야
@주님내안에 ㅋㅋ
니가 나한테 사이비라한게 한두번이냐?
@주님내안에
신약에 전파된복음을 알려주랴?
고전15:12~3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자들로부터
살아나신것이 전파되었는데도
어찌하여 너희가운데 어떤사람들은
죽은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그러나 죽은자들의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죽은자들이 누군지 모르게되면
복음전하는것은 사실상 거짓말이
되는 것이야 ~~
그래서 한국교회를 비판하는것이지~~
미워서 그러겠느냐?
@주님내안에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15:12-13, 개역한글)
@주님내안에 12 Now if Christ be preached that he rose from the dead, how say some among you that there is no resurrection of the dead?
13 But if there be no resurrection of the dead, then is Christ not risen:
(1 Corinthians 15:12-13, KJV)
@레인
그래 그럼 죽은자가 누구냐?
죽은자가 누군지 모르면
공부하나 마나 헛일이라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많으나
제대로 믿는자들은 거의없다는
것이야 ~~
@주님내안에 내가 너한테 알려줘봐야 뭐할거냐
알아듣지도 못할텐데
넌 너의 길을 가라
@레인
너 혹시 크리스탈 아니냐 ~?
@주님내안에 ㅋ
그러니 내가 너에게 알려줘봐야 소용없다는것이다
@레인
너 혹시 크리스탈 아니냐 ~?
크리스탈이 영어에 능통해 영어자랑
많이하는데 ~~
넌 아무래도 연구대상이다
@주님내안에 너의 이 말투 여자같다
넌 진짜 연구대상이다
@주님내안에
크리스탈이
나 따라다니면서 댓글질하다가
오히려 실력 많이 늘었더라 ~~
옛날엔 자기몸이 부활한다고
기를 쓰더만 이젠 포기한것 같더라 ~~
싸우면서 배우기도 하고 그런 것이야
진리를 알게되면 모든 걸포기하게
되있다는 것이다
세상 욕심도 없어지고 빨리 죽었으면
한단다
오직 죽은자들의부활에 이르려는
소망때문이지 ~~
진리를 깨달았으면
거짓선지자 따라다니지 말고
그리스도신비에 대해 깨닫기를
기도 하거라 ~~~
@주님내안에 교만이 가득찼구나
너 맘대로 창작실력도 늘었고 ㅋ
포기한것이 아니라
너는 그런 귀한 진주를 받아들이루가치가 없는사람이라 버린거야
한두번 훈계한 후 멀리하랬는데
나도 너같은자들을 멀리하고싶다
가치도 없는것들
@주님내안에 아이고~! 왜 또 이렇게 나와서 이 난리십니까?
어여 들어가 약드시고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