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법·친권 상충… 비용 등 현실적 문제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코로나19 이후 불안과 우울증을 호소하는 아동·청소년이 증가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의힘 김병욱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불안장애로 진료받은 아동·청소년은 2019년 5만433명이었으나 2021년 6만3463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청소년은 내과, 이비인후과 등은 혼자서도 방문할 수 있는 반면, 정신과는 부모 동의가 없다면 진료를 거부당하기 일쑤다. 왜 그런 걸까?
◇의료법상 문제없지만, 부모가 진료비 환불 요구 가능
고등학생이 부모 동의 없이 정신과에서 진료 받아도 의료법 상 문제될 건 없다. 현재 의료법 제15조에 따르면 의료인과 의료기관 개설자는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는 의료진은 미성년자가 부모 동의 없이 진료를 받으러 와도 거부하면 안 된다.
그런데 법적으로 상충되는 지점이 있다. 민법 제5조에 따르면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얻어야 법률행위를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미성년자의 법률행위는 취소될 수 있다. 의료행위도 마찬가지다. 의료진 입장에서 부모 동의 없이 내원한 청소년을 진료해도 이후 방문한 부모가 환불을 요구하면 속수무책이다.
강남푸른정신건강의학과의원 신재현 원장은 “실제 청소년을 진료했더니 그 부모가 연락해서 왜 자신의 동의도 없이 진료했냐고 항의했을 때 많이 난감했다”며 “청소년은 정말 힘들어서 방문했을 테지만 일회성으로 치료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림대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홍현주 교수는 “우리나라는 청소년의 자기결정권이 법적으로 명확하지 않고 친권이 강하다”며 “법령 상 상충되는 부분도 많아 의료진 입장에서는 혼자 내원한 청소년을 치료하기도, 안 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비용, 치료 지속성 등 현실적 문제도 산적
비용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무시하긴 어렵다. 정신과 치료는 단기간의 진료보다는 상담, 약물치료 등 어느 정도의 기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내담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상담치료는 보통 3~6개월은 받아야 효과가 나타난다. 항우울제 복용 기간 역시 통상 6개월이다. 경제적으로 부모에게 종속된 청소년이 6개월 간 치료를 이어갈 가능성은 낮다.
청소년 혼자 치료받으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한계도 있다. 청소년 정신건강 문제의 원인은 크게 학업, 가족, 또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많은 부분이 부모와 연관 된다. 이는 곧 부모도 같이 치료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부모의 동의 여부와 별개로 부모 없이 청소년 혼자서만 치료받으면 그 효과는 낮을 수밖에 없다.
◇치료 기관 접근 어려워지자 “우울증 갤러리처럼 왜곡된 관계에 기대…”
그러면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청소년은 무조건 부모와 동행해야 하는 걸까? 역시 어려운 문제다. 정신과 진료 자체를 거부하는 부모들이 많다. 홍현주 교수는 “의료진 앞에서 죽을 정도로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부모한테 연락하는 건 피하는 아이들이 있다”며 “부모에게 연락해 보면 대다수는 아이를 집으로 보내라고 말하든가 나중에 불이익을 받는다는 잘못된 정보로 아이들을 설득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부모들이 우려하는 건 정신과 진료가 진학, 취업, 보험 가입 등에 미치는 불이익이다. 그런데 우려는 과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급여든 비급여든 진료기록은 개인정보다. 진학, 입시 과정에서 노출될 일은 없다. 취업 과정에서도 사기업은 요구할 수 없고 항공조종사와 같이 특수한 직종 임용 시에 요구된다. 일상에서는 재판처럼 법률에 근거한 요청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공개되지 않는다. 보험 가입은 거부권 행사가 보험사 고유의 권한이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만 상황을 방치했을 때 벌어질 결과와 득실을 따져보면 비교적 가볍다고 볼 수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쉽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면서 청소년들은 왜곡된 관계, 정보에 기대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된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처럼 말이다. 익명이 보장되는 우울증 갤러리는 청소년들에게 고충을 털어놓는 장소로 작동했다. 그러나 몇몇 이용자가 해당 청소년들에게 접근하면서 집단 괴롭힘, 극단적 선택 종용, 심지어는 성 착취까지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가천대 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배승민 교수는 “공신력 있는 기관에 접근하는 것도 진료를 받는 것도 어려워지자 정말 힘든 아이들이 우울증 갤러리처럼 왜곡되고 비정형적인 시스템에 기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계 있을 뿐, 청소년도 혼자서 치료받을 수 있어야…”
가장 이상적인 건 빈틈없는 안전망이다. 학교 등 교육기관에서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청소년을 발굴한 다음 부모를 설득해 함께 치료 기관에 방문하도록 돕는 것이다. 다만, 현재 청소년 정신건강 관련 서비스가 고위험군에 집중되다 보니 치료 공백이 발생하는 실정이다. 임상적으로 자살 신호라 여겨지는 자해가 발생해도 신고하고 개입하는 절차가 없다. 배승민 교수는 “상담사가 100% 있는 학교도 많지 않고 따라서 꾸준하게 상담을 받는 청소년도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지 여부를 잘 볼 수 있는 스크리닝 제도가 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이 부모 동의 없이 정신과를 방문해도 치료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이나 유럽은 청소년이라도 부모 동의 없이도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권리를 보장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는 ▲만 12세 이상 미성년자일 것 ▲의사, 상담사 등 전문가가 봤을 때 해당 청소년이 치료 방법을 잘 이해하고 소비자로서 현명하게 참여할 정도로 성숙할 것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혼자서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신재현 원장은 “청소년은 단지 가정에 속해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조건에 제약을 받을 뿐이지 꼭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스스로 자신을 돌보려는 의지가 있고, 여건이 된다면 얼마든지 혼자 치료를 시도하고 도움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오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