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거주하는 동포.
교포(僑胞) 또는 해외교포(海外僑胞)·해외동포(海外同胞) 등이라고 한다. 종전에는 일반적으로 교포라 하였다.
해외교포란 한반도 밖의, 바다 건너의 교포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재외교포란 재일교포·재미교포 등의 재외를 종합한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중국의 화교(華僑)에 대해 한인교포를 한교(韓僑) 또는 조교(朝僑)라 하였다. 한교는 한국인교포를 말하고 조교는 조선인교포를 말한다. 우리 나라 행정부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재외동포이다. 재외동포란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재외동포는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재외국민(在外國民)이고 하나는 한국계 외국인(韓國系 外國人)이다. 재외국민이란 한국적을 갖고 외국에 거주하거나 영주권을 갖고 있는 자를 말하고 한국계 외국인이란 외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말한다. 최근 학계와 언론계에서 한민족을 강조하여 해외한민족, 재외한인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외국으로 이주한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인들이 중국 산동성
문등현(文登縣)에 건립한
신라방(新羅坊)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신라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후손을 현재 파악할 수는 없다.
그 뒤 고려시대와 임진왜란시 및 병자호란시 많은 한인이 해외로 이주하였으며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을 때에도 많은 한인이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 또는 일본에 흡수 동화되어 현재로서 알 길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 국가의 보호하에 정식으로 이주한 것은 1902년 수민원(綏民院)이 건립되고 이에 따라 하와이로 이주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현재 외국에 거주하는 교포의 이주사는 이보다 앞선 1860년에서 시작된다.
1860년 러시아의 연해주로 한인들이 이주한 기록이 나온다. 이때부터 함경북도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특히 1869년의 흉년으로 많은 농민들이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갔으며 특히 20세기에 들면서 우국지사들이 유민의 대열에 참가하여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한다.
특히 한국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던 1905년, 한국이 일본에게 합방 당하던 1910년,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우국지사들의 큰 물결이 북방으로 흘러간다. 수민원이 생겨 정식으로 하와이로 이주하던 노동이민은 1905년 일본의 저지로 중단된다.
3·1운동 이후 한인들은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일본영토에 포함되었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은 적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를 맞아 산업이 부흥하고 부족한 노동력을 한국에서 충당하기 위해 한인들을 유인하는 정책을 썼다. 처음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집에 처자를 둔 농민들로 1∼2년 일본에서 돈벌이를 하고 돌아오려는 임시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노동자의 수도 증가하였고 체류기간도 장기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은 1932년 중국에 만주국을 건립하더니,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9년에는 연합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감행하였다. 이런 가운데 부족한 노동력을 한국에서 징발하여 처음에는 탄광, 군수공장, 국가시설 건립에 동원하였고 후기에는 징용과 징병으로 징집하여 갔다.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일본에는 200만 명의 한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아 귀국을 서둘렀으나 배가 부족하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귀국조건이 까다로워졌다. 마침내 한국으로의 도항작업이 끝났을 때에는 60만 명의 한인들이 일본에 남게 된다.
이들이 재일교포를 이루게 된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미군과 결혼한 여자들이 년간 100명 안팎으로 미국에 이주하였고 많은 고아들도 미국의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해외이주에 획을 긋는 것은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따라 년간 2만 명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 무렵 캐나다로의 이민도 시작된다.
1962년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가 계약노동자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기술이수를 목적으로 3년 계약으로 하였으나 8천여 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 대부분은 계약기간 완료 후 독일에 남아 취업을 계속하였고 가게를 마련하여 독일 이외의 유럽 여러나라들에도 분산되어 오늘날 유럽의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때 중남미로의 이주도 시작되었다.
재외교포 이민사의 또 하나의 큰 계기가 된 것은 베트남(월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에 한국군만 파견된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건설회사들이 많이 진출하였고, 베트남에 있는 미국회사에 한인들이 많이 고용되었다.
1975년 베트남전쟁이 끝나자 많은 기업들이 중동으로 이주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분산되어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호주·뉴질랜드까지 이주하였다. 이리하여 오늘날 세계 120여 개 국가에 한인교포들이 거주하고 있다.
1995년 1월 1일 외무부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가 4,485만 명, 북한 인구가 2,295만 명, 재외교포가 522만 명으로 교포는 전체 인구의 7.2%를 점한다.
재외교포를 지역별로 집계하면 중국에 194만398명, 미국에 180만1684명, 일본에 69만6811명, 독립국가연합에 56만1145명, 중남미에 9만34명, 아시아·태평양지역에 8만6711명, 캐나다에 7만3032명, 유럽에 6만6086명, 중동에 9,356명, 아프리카에 3,316명 등이다.
이러한 교포수는 중국의 화교, 이스라엘의 해외유태인, 그리고 이탈리아 해외교포 550만 다음으로 많으며 우리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교포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다.
교포의 생활은 각국에 이주한 시기와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무엇보다 거주 국의 법적제도와 주민들의 태도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다른 환경에 거주하면서도 한인들에겐 공통된 특성이 있다. 이를 보기 위하여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이주한 역사의 순서에 따라 독립국가연합, 중국, 일본, 미국, 중남미, 유럽 순으로 그곳 교포들의 생활을 살펴본다.
1995년 1월 1일 현재 독립국가연합 내에는 46만1145명의 교포가 거주하고 있다. 멀리 벨라루시아나 우크라이나에도 교포가 있으나 보다 많은 인구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그리고 러시아연방에 거주한다. 우즈베키스탄에는 22만336명, 카자흐스탄에 10만3525명, 그리고 러시아연방에 10만8325명이 거주하고 있다.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한 초기의 한인들은 농민들이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마련한 한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이것을 빼앗기고 소작인이 되거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농지를 개간해야 했다. 소작인이 되었다하여 편안한 것은 아니다. 한인들은 토지세, 인두세 이외에도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세금,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세금을 내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인이 러시아의 국적을 얻으려면 러시아정교(正敎)의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를 받으려면 교리문답을 배워야 하며 교리문답을 배우려면 러시아어를 알아야 했다. 따라서 학력이 없는 농민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이 증가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한인을 세 종류로 나누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 러시아 국적을 취득치 않은 사람, 그리고 잠시 후 귀국할 사람으로 나뉘었다. 한인들은 귀화한 사람을 ‘원호(元戶)’ 그리고 귀화하지 않은 사람을 ‘여호(余戶)’라 불렀다. 러시아의 국적을 취득하면 토지의 소유가 가능하여 국적을 취득치 못한 사람과는 다른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보다 당시 러시아 극동지구의 총독 여하에 따라 한인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한인에게 호의를 갖는 그로데코프 같은 총독이 부임하면 여호라도 대우를 받았고, 운테르베르겔 총독처럼 한인에 대해 비우호적인 총독이 부임하면 원호라도 심한 고생을 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우국지사들이 중국의 북간도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주를 한다. 이것은 농민의 이주와 달리 망명이민이라 할 수 있다. 연해주에 망명한 우국지사들은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도왔다. 1910년 6월 한인 대표들은 모임을 갖고 13도의군을 조직하고 고종의 러시아 파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한일합방이 알려지자 한인 대표들은 신한촌에 모여 한국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8624명이 서명을 했으며, 이것을 미국 국무장관 앞으로 발송을 하였다. 또한 특공대를 조직하여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려다 실패하였다.
한인들은 권업회를 조직하여 장기전을 도모하고 애국심의 함양과 선전을 위해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의병활동은 러시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당시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 압력을 가하여 한인들의 활동을 저지하였던 것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원동(遠東)지역은 구제정 러시아군인, 첵코군, 백군, 홍군 등이 혼합되어 혼잡을 이루었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4대 강국이 간섭을 하여 이른바 시베리아전쟁이 시작되었다.
1917년 연해주에 상륙한 일본군은 다른 연합국 부대가 철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1922년까지 머물렀다. 한인들은 이때 일본군에 대항하는 러시아 유격대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병영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원동지역 중요 도시를 공격하였고 한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을 공격하였다. 이것을 ‘신한촌사건’ 또는 ‘4월 참사’라고도 한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가두에서 수백 명을 사살하였고 가택수색으로 수천 명을 체포하였으며 공공건물을 방화하는 등 신한촌을 초토화하고 물러갔다.
1921년 6월,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에서 있었던 사건은 한국인 의병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항일전쟁을 하던 의병부대들이 정비를 가다듬고 새로운 편성을 위하여 자유시에 모였다.
이것을 기회로 러시아군은 일본의 권유로 한인 부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한인부대를 포위하고 한인 부대간의 갈등을 기회로 한인부대를 향하여 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한인 의병 700여 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한다. 이에 한인부대들은 서둘러 만주로 돌아가고 말았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한인들도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1917년 3월 크라스노야르시크에서 전로한인총회(全露韓人總會)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원호와 여호의 대립이 있어 결국 총회는 둘로 나뉘어 한 무리는 다음 해 하바로브스크에서 모임을 갖고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후일 고려공산당으로 발전하였다.
1922년 일본군이 러시아 원동지역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이곳을 소비에트화하며 집단농장 건설을 추진한다. 한인들은 이에 적극 협력하여 원동지구 건설에 노력한다. 그러나 한인들은 또다시 무서운 시련을 경험하였다. 1937년 중국에서 중일전쟁을 발발하고 유럽에도 전운이 감돌자 스탈린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37년 9월 추수가 끝난 한인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가축을 싣는 화차에 실어 한 달 여의 시베리아 횡단 끝에 중앙아시아에 하차시켰다. 추위에 시달리며 가는 도중 노약자와 어린이가 죽었다. 특히 하차한 곳에서 많이 죽어 2세 이하의 어린이는 다 죽었다고 한다.
하차한 곳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이며 이 곳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우며 강우량이 적어 유목민에게나 적합한 곳이다. 한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더지와 같이 땅굴을 파고 겨울을 지냈다.
다음해 봄 한인들은 강을 찾아 운하를 파고 논을 만들어 가져간 벼를 심었다. 대륙성기후라 일조량이 많고 물만 있으면 벼농사에는 좋은 조건이다. 한인들은 첫해 농사에 성공하였고, 계속 벼농사에 성공하여 강제이주 3년 후에 원상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한인들이 재배한 쌀이 이웃 한민족은 물론 유럽의 소련에까지 확대되어 ‘한인’하면 쌀, 쌀하면 ‘한인’을 연상하게 되었다.
강제이주를 당한 다음해 농사에는 성공하였으나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강제이주를 명령한 스탈린은 다시 한인을 적성민족으로 간주하여 한국어를 소련의 소수민족언어에서 제외시키고 한국어 학교를 폐쇄하였으며 한국어를 가르치던 교사를 해임하거나 다른 과목을 가르치게 하였다.
한인들은 자기가 거주하는 공화국 이외의 지역으로 여행할 수 없었으며, 군대에도 갈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빨리 모국어를 잃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은 모두 농장에 배치되어 농업에 종사했는데 성실하여 많은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김병화와 황만금이다. 김병화는 북극성농장에 배치되어 이곳에서 열심히 일하여 노동영웅 칭호를 두 개나 받았으며, 그가 사망한 뒤 그 농장을 ‘김병화농장’이라 개칭하게 되고 다쉬켄트 한 거리를 ‘김병화거리’라 명명하게 되었다. 황만금이 이끈 농장은 ‘포리토젤’농장으로 이곳은 전 소련에서 관광공사에 등록된 유일한 농장이 되었다.
관광공사에 등록된 농장이란 외국인에게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는 뜻이며 소련 내에 있는 3만 여 개의 집단농장에서 포리토젤농장만이 등록된 것이다.
스탈린에 의하여 한국어가 소련의 소수민족언어에서 제외되고 탄압을 받았을 때 카자흐공화국 서기장은 당시 카자흐공화국에 이주한 한국계 신문인 ≪레닌기치≫(후에 ≪고려일보≫가 됨)를 계속 간행하게 하였고 한인들의 극장을 계속 보호하였다.
이것으로 ≪레닌기치≫는 구소련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판 신문으로 살아남았고 카자흐스탄 수도인 알마타에 있는 ‘조선극장’은 유일한 한국어 사용 극단으로 남아 지방공연을 하면서 한 맺힌 한인들을 위로하는 유일한 집단이 되었다.
소련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이후 열심히 일을 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열이 높아 자기를 희생하면서 2세, 3세들을 교육시켰다.
그 결과 한인 2세, 3세들은 화이트칼라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이 와해되고 독립국가연합이 설립되면서 모두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공화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국어를 선포하여 우즈벡 공화국에서는 우즈벡어가,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어가 국어가 되었고 이때까지 사용하던 러시아어는 외국어, 국제어가 된 것이다.
화이트칼라직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공용어인 우즈벡어 또는 카자흐어를 몰라 결국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형편에 놓였다. 이들은 현재 중앙아시아를 떠나 조상들이 살던 연해주로 재이주를 하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재소한인들은 도시마다 고려인협회를 조직하고 고려인문화센터를 설립하여 한국어학습과 한국전통문화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각 도시의 고려인협회는 다시 공화국의 고려인협회 그리고 이들을 망라한 독립국가연합의 고려인협회를 갖고 있다.
이들 고려인협회가 친한적인 성격이 강하자 북한은 서둘러 통일촉진위원회(약칭 아소크)를 조직하여 고려인협회를 견제하고 사람을 모아 북한관광을 시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사할린에는 4만 여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사할린 남부가 일본의 영토였던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징용당한 사람들이다. 그 당시 광산 등에서 근무하다 광복이 되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고 이곳에 있던 일본인들만 철수하고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곳에 남게 되었다.
그 뒤 일본인 처를 가진 한인 남자들이 일본으로 철수하여 사할린에 남아있는 한인들의 귀환을 위하여 노력하고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도 소련의 국적 또는 북한의 국적을 거부하면서 한국으로 귀환하기만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러시아는 한국과의 국교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한국정부는 이들은 일본이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 등으로 모두에게 버림받고 억울한 세월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정세가 호전되었고 일본의 변호사와 국회의원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1988년 이후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를 시작하면서 원한에 사무친 사할린 억류 한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2세, 3세는 도시로 진출하여 지식인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주로 중아아시아에 거주하거나 타지에 살아도 중앙아시아를 고향으로 생각하여 명절이나 연휴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간다.
중앙아시아에 뿌리 내린 한인들은 두 가지 면에서 특성을 가졌다. 하나는 교포들이 갖는 민족문화의 보존과 자부심이고 다란 하나는 전 독립국가연합에서 모범적인 소수민족이 된 것이다. 이곳의 교포들도 다른 곳의 한인과 같이 이웃한 유목민을 무시하고 대전통(大傳統)인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습득하는데 주력하여 왔다.
따라서 이웃한 문화와 섞이지 않고 한국적인 전통을 많이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인은 역경을 성실로서 극복하려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유감없이 발휘한 곳이 재독립국가연합의 교포들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는 127개 민족 가운데 모범적인 소수민족이다.
중국에는 1995년 1월 1일 현재 194만398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교포들의 분포는 길림성에 118만2714명이고 이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82만1479명이 포함되어 있다.
흑룡강성에 45만2633명, 요령성에 23만1462명, 내몽고자치구에 2만2641명, 북경에 1만1848명, 하북성에 6,250명, 산동성에 5,953명, 상해에 1,334명,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교포가 2만5563명이다. 한인들의 분포는 동북 3성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장백조선족자치현이 있다.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을 청 태조의 발상지라 하여 사람들의 입주를 금하였다. 이것을 ‘봉금령’이라 한다. 봉금령으로 인하여 한인들이 가까운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에 거주할 수 없어 러시아의 연해주 보다 늦게 한인들이 이곳에 이주하게 된다.
연해주를 점령한 러시아는 봉금령에 아랑곳없이 무주의 땅으로 침입하여 중국이 더 이상 봉금령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한인의 이주를 허락하며 관내의 중국인 이주를 장려하였다. 정확한 이주 년대를 알 수 없으나 1869년 한반도에 큰 흉년이 있어 한인들은 대거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였다. 이곳을 북간도라 하였다.
러시아의 연해주와 같이 중국의 북간도로 이주한 한인들은 초기에는 농민이 주류를 이루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우국지사들의 망명이민이 증가하였다. 당시 북간도에서는 연길 보다 용정(龍井)이 한인들의 중심지였다.
한인들은 연해주에서와 같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고 특히 중국인이나 만주족이 버린 늪지대를 개간하여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시작했다.
중국인의 통념으로 벼농사는 양쯔강 이남에서나 가능하고 만주와 같은 북부에서는 밭농사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여 왔다. 이러한 곳에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일구어 중국인은 한인을 ‘물오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중국에 벼농사를 지어 경제적인 공헌을 하였으나 중국에서도 한인들이 고생하기는 연해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던 한국인들은 애써 일구어 놓은 논밭을 중국인에게 빼앗기고 소작인이 되었다. 더욱이 중국의 지주는 러시아보다 더 가혹하여 지주에게 바치는 토지세 이외에 지주의 집에 가서 노력봉사를 하여야 하고 굴뚝세, 문지방세, 인두세 등 가진 잡부세를 부담하여야 했으며, 심지어 중국식으로 머리를 깍게 하고 중국옷을 입게 하였다.
중국으로 이주한 한인 우국지사들은 초기 교육부터 시작하여 용정(龍井)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학교를 건립한다. 서전의숙을 효시로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동학교, 정동학교, 길신여학교, 봉명학교 등이 개인의 공헌으로 세워지고 종교단체에서는 은진서숙, 해성서숙, 대성학교, 청일학교, 동흥학교 등을 건립하였다.
한편 압록강의 대안인 서간도에는 신성학교, 삼광학교, 삼성학교, 사양학교, 삼성여학교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등이 세워졌다. 이들 학교에서는 무엇보다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이곳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독립운동의 역군이 되고 해방 후에도 남한과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다.
한국에서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중국에도 확산되어 용정을 중심으로 크고작은 항일운동이 전개되었고 상해(上海)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한국에서 우국지사들이 만주로 대거 이주하여 무력 항일전쟁을 계속하였다.
유명한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가 전개되는 것도 1920년 만주의 북간도 영내이다. 1932년 일본이 만주에 만주국을 건립하면서 항일의병의 일부는 관내로 이동하고 만주에 남은 사람들은 지하로 들어가 중공군과 합작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중국은 짱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과 마오쩌뚱(毛澤東)의 공산당군이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것을 ‘해방전쟁’이라 하는데 만주에서 중공군과 합작으로 동북연군을 편성한 한인들은 해방전쟁에 역시 큰 공헌을 하였다. 해방전쟁이 끝나자 바로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항미원조(抗美援朝)’라 하여 북한을 도와주었다.
이에 중국 교포가 적극적으로 북한을 후원하고 북한을 위해 참전하였다. 항미원조가 끝날 무렵인 1952년, 중국은 연변에 조선족자치주를 허용하여 한인에 의한 자치주가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는 사람과 자치주 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 자치주를 ‘집거지구’라 하고 다른 지역을 ‘산재지구’라 한다. 집거지역인 자치주는 인구에서만이 아니라 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면에서 재중(在中)한인의 중심지가 된다.
자치주의 공용어는 한국어이며 외부의 간판도 한국말을 먼저 쓰고 한자를 쓴다.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에는 자치단체인 인민정부와 인민위원회, 당위원회 등이 있다. 연길에는 고등교육기관인 연변대학을 위시하여 의학원, 농학원 등이 있어 산재지구에서도 이곳으로 유학을 온다.
연길에서 출판되는 한글교재는 중국 전체의 한인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언론기관으로 TV·라디오방송국이 있고, ≪연변일보≫가 있다. 또한 2개의 출판사가 있고, 많은 연구소와 연구회 등이 있다. 연변에는 극장을 비롯해 곡마단, 영화관 등 문화 시설이 있어 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연길의 시장에는 북한사람들도 장사를 하는, 국제적인 시장이다. 한편 한국에서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연길은 소비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과의 왕래에서 가장 큰 소득은 한국과 미국의 교포들이 세운 연변과학기술대학이다.
장백조선족자치현은 압록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한의 해산과는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어 서로 소리를 질러 대화가 가능할 정도이다. 산악지대인 장백은 인삼의 재배로 유명하다. 자치현이기 때문에 자치주와 같이 한글을 공용어로 사용하고 모든 영역을 교포들이 이끌고 있다.
산재지구란 연변을 제외한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등 한인 교포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말한다. 이들 산재지구에도 한인들은 대도시에 집중적인 거주지를 갖고 있다. 예컨대 요령성 심양에는 교포들의 집거지역인 서탑지구가 있다. 서탑지구에는 6층 건물의 한인들 문화예술관이 있다.
이곳에는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방이 여럿 있으며 각종 행사를 진행한다. 민족문화예술관 이외에 서탑지구에는 민족학교, 민족식당, 민족백화점, 민족서점 등이 있다. 민족백화점은 한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맷돌, 독, 키, 멍석 등 한인들만 사용하는 것도 이곳에서 살 수 있다.
이러한 구역이 길림성의 길림시·장춘시와 흑룡강의 할빈시·목단강시 등 한인 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 있다. 북경에도 1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지만 북경에는 한인교포들의 집거지역이 없다.
중국은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한인교포들은 유리한 입장에 있다. 특히 한인들은 벼농사를 지어 중국인보다 높은 수익을 올리고 중국 내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문맹율이 가장 낮은 민족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재중교포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민족으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그러나 대약진에 이어 1960년대에 시작하여 10년이나 계속된 문화대혁명 당시 연변에서 주덕해(朱德海) 주장을 위시하여 민족주의자들이 수난을 겪었으며 한국어를 폐지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이 지나면서 연변을 비롯해 원상을 회복하였으나 주덕해는 하북성의 한 농촌에서 문화대혁명의 끝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중국교포는 한반도 외부에 자치주와 자치현을 갖고 있는 유일한 교포이다. 중국교포는 중국 55개 소수민족에서 중국족보다 교육수준이 높고 일인당 국민생산고가 높은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중국교포는 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하고 한국적 전통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국 건설에 큰 공을 세워 중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도 강하다.
1995년 1월 1일 현재 일본에는 69만6811명의 교포가 있으며 오사카에 24만9255명, 도교에 14만9001명, 고베에 8만3653명, 나고야에 7만7152명, 요고하마에 3만9550명, 후쿠오카에 3만4582명, 시모노세키에 3만3935명, 니가다에 1만2385명, 센다이에 1만954명 그리고 삿포로에 6,344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와 같이 거의 전국에 교포가 분산되어 있으면서 오사카 이꾸노구에 집거하고 있다.
해방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잔류하게 된 사람은 60만 명이며 이들이 재일교포를 형성한다. 해방 초기 모든 사람들이 귀국을 서둘렀고 지역마다 ‘조선인연맹’을 결성하여 귀국을 돕거나 일제강점기 억압되었던 한글과 한국사를 가르치는 사설학교들이 도처에 자생적으로 성립되었다.
조선인연맹은 자발적인 집단이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졌으나 좌경하여 일본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뒤늦게 이것을 안 반대파가 ‘거류민단’을 결성하였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재일교포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결과 투쟁을 일삼은 것이다.
조선인연맹은 ‘한신교육사건’이 있은 뒤 해산 당한다. 한신교육사건이란 오사카와 고베지역의 한인들이 일본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기준미달인 한인한교에 폐교령을 내린 것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사건이다. 해산 당한 조선인연맹은 그 후 북한 외상 남일(南日)의 ‘남일선언’이 있은 뒤 ‘조선인총연맹(조총련)’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북한을 지지하는 집단으로 탈바꿈하였다.
민단과 조총련은 사사건건 대립했지만 가장 심한 대립은 1960년의 북송사건과 1974년의 문세광(文世光)사건 때이다. 북송사건이란 북한의 감언이설로 10만 명의 재일교포가 북한으로 간 사건을 말한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단은 사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2년간 계속된 북송은 바로 중단되었다. 북송된 사람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 북송된 사람들은 아직도 마치 인질과 같이 북한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일본의 가족이 오늘까지 계속 생활용품을 보내고 있다.
문세광사건이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가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陸英修)를 문세광이 저격한 것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문세광이 살던 이꾸노구의 민단지부들이 조총련지부를 습격하여 조총련이 대피한 사건이다.
일본은 민단·조총련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심한 차별을 하였다. 재일교포는 14세가 되면 구청에 가 외국인등록을 한다. 이때 열 손가락 지문을 찍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지만 고등학교 진학시 한인학생을 받지 않는 학교도 많다. 학교를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된다. 한인은 결혼에서 또 한번 좌절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재일한인의 일생은 좌절의 연속인 것이다.
이러한 편견과 차별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 박종석의 ‘히다치사건’이다. 1970년 히다치회사에 합격한 박종석은 한인이라는 이유로 입사를 거부 당했다. 이것을 안 박군의 일본인 동창이 중심이 되어 ‘박군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고 박군의 억울함을 일본사회에 호소하였다. 이때 양식있는 일본인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이 모임은 일본 전국으로 확산 되었으며,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히다치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움직임은 다시 미국에까지 확대되었다. 불리한 일본법원은 박군에게 승소판결을 내려 히다치에게 박군의 월급을 지불하고 박군을 채용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한인들은 자신감을 얻고 갖가지 권익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단이 주동이 되어 공공아파트입주권을 획득하고, 아동수당과 노인복지수당을 얻게 되었으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지문날인제도를 폐지시켰으며, 현재는 지방의회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권요구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재일교포는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편견과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일본인으로부터 게으른 민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환경과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한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중국이나 미국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어렵겠지만 재일교포는 이것을 이겨내고 있다.
1995년 1월 1일 현재 미국에는 184만7716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10만 명이 넘는 도시만 열거하면 로스앤젤레스 50만5951명, 뉴욕 45만3333명, 시카고 22만3365명, 샌프란시스코 13만6662명, 시에틀 11만8427명, 그리고 휴스턴 10만4549명 등이다. 미국의 모든 주에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로스앤젤레스·뉴욕·시카고처럼 한인들이 다수 집결되어 있는 곳도 있다.
재미교포의 역사는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무자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방해로 1905년 한인의 이주가 중단되었다. 미국으로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는 것은 1965년 미국이 새이민법을 발표하고 한국인 2만 명의 이주를 허가한 이후부터이다.
초기의 이민들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재미교포와는 세대차이가 심하여 연속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1965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한국에서 이미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자녀의 교육 또는 보다 낳은 삶을 위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 때문에 이들을 ‘엘리트 이민’이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대학졸업이라는 학력이 미국에서는 유리한 것이 아니었고 한인들은 교수, 연구원, 의사 등 몇 영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미국 사회의 저변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저변은 오히려 한인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다. 이에 한인들은 자영업을 선택하여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술병가게, 야채가게, 생선가게, 식품점, 음식점, 세탁소, 주유소 등을 경영하고 이런 사업에 성공하면 식당, 봉제공장 또는 모텔을 소유하면서 재산의 규모를 늘려 나갔다.
이처럼 한인들은 한 직업을 장기간 유지하지 못하고 직업과 직종을 자주 바꾸는 특성을 보였다. 이보다 중요한 특색은 한인들의 업소가 대부분 흑인마을에 있다는 점이다.
한인은 유색인종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수입의 일정 양을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습관을 몰라 흑인들과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 한인들은 자녀의 교육을 중요시하여 가게는 흑인가에 있어도 주거지는 부유한 백인마을에 있는 경우가 많다. 거주지와 상점이 떨어져 있고 부유한 백인마을에 거주하면서 돈만 벌어 가는 한인들을 흑인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만이 노출된 것이 1992년 5월 LA에서 있었던 한인촌사건이다. 흑인청년이 고속도로에서 백인경찰에게 집단폭행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들 가해자가 무죄로 판결되자 흥분한 흑인들이 시내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흑인들은 한인촌을 습격하여 가게를 불지르고 기물을 부수거나 약탈해 갔다. 한인들은 이것을 보고도 방어할 도리가 없었다.
이 LA사건은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1937년 소련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와 더불어 해외교포의 3대비극으로 일컬어진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많은 교포들이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다른 도시로 분산되어 갔다.
한인들이 로스앤젤레스를 떠났다 하여도 이곳의 한인촌은 여전히 재미(在美)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고 한국을 대표하는 말 그대로 한인촌이다. 이 곳 한인촌에는 거리의 표지판에 한글이 쓰여져 있으며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소도매상이 밀집되어 미국 서부는 물론 중부에서까지 한국제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는다.
이곳에는 상점뿐만 아니라 신문사와 방송국 그리고 한인회관 등이 밀집돼 있고, 특히 발달한 통신망을 이용하여 한국에서의 뉴스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 한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어를 모르는 한인들이 거주하기 편리하고 한국을 옮겨다 심은 것과 같다하여 이곳을 ‘한국 나성구’라는 별명까지 있다.
로스앤젤레스를 위시하여 뉴욕·시카고 등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대도시에는 일정한 날을 정하여 ‘코리언 퍼레이드’를 행한다. 한국을 상징하는 여러 대의 꽃차에 군악대와 농악대가 가두를 행진하며 한국을 마음껏 자랑하는 행사이다. 시가행진에 이어 공원이나 극장에서 갖가지 놀이·경영대회·잔치 등을 베풀어 한인들은 고향의 맛을 음미하고, 미국인에게는 한국을 소개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LA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역사는 짧지만 이해 빠른 속도로 미국사회에 진출하여 이른바 모범적인 중간층 소수민족이 되었다. 이것이 흑인들의 반감을 얻게 된 까닭의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미국, 캐나다의 한인은 근면한 민족으로, 자녀의 교육열이 높은 민족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한인 2세, 3세들의 사회상승률은 높은 편이다.
1995년 1월 1일 현재 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 여러 나라에는 9만34명의 교포가 거주하고 있다. 쿠바를 포함하여 한인들이 없는 나라가 없으며 1000명 이상 거주하는 나라로 브라질에 3만8131명, 아르헨티나에 3만2387명, 과테말라에 1,890명, 칠레에 1,459명 그리고 페루에 1,149명이 살고 있다.
중남미로 이민이 시작된 것은 1905년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메리다주에 도착한 1,031명의 계약노동자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대농장에 팔려와 가진 고생을 했다. 그 뒤 이들의 후손이 멕시코 농촌에 거주하거나 일부는 쿠바에까지 유입되어 그 흔적이 없어졌다.
두 번째로 이주한 사람들은 한국전에서 포로가 되어 북한도 남한도 거부하고 이 곳 중립국을 택한 사람들로 1956년 브라질에 50명과 아르헨티나에 12명이 도착하여 주민들과 결혼해 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정식 이민이 남미에 도착한 것은 1963년 브라질에 도착한 17가구 92명이었다. 이들은 양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농업을 위한 계획이민으로 남미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농장의 조건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이주한 한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대부분 쌍파울루로 이주하여 수용소에 있다가 결국 빈민가로 유입하게 되었다. 6회에 걸친 이민집단들이 모두 농장을 포기하고 단 한번 카톨릭의 주선으로 이주한 53세대 313명만이 농장건설에 성공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이민 가는 사람들에게는 미화 1천 불 만을 지참하게 하여 남미로 이주한 사람들은 평생 입을 옷을 가져갔다. 빈민가에 이주한 한인들은 이것을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길밖에 없었다.
남자는 차를 몰고 밖에서 기다리면 여자들은 옷보따리를 들고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보부상’ 노릇을 하여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가져간 옷을 다 팔고는 현지에서 옷을 도매로 구입해 팔기도 하고 집에 재봉틀을 놓고 옷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재봉틀 한 대가 두 대가 되고 차차 원주민을 고용하기도 하면서 사업을 확대하여 갔으며, 마침내 쌍파울루의 의류도매상가를 잠식하면서 브라질 의류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의류의 제조에서 도매·소매 그리고 의류원단을 짜는 견직업에까지 진출하여 남미의 의류계를 지배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등 남미의 다른 나라에 이주한 한인들도 대체로 유사한 과정을 거쳐 그 나름대로 성공하였고 주재국의 특성에 따라 직업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남미의 한인들은 남미 여러 나라가 경제적·정치적으로 불안하여 그곳에 영주하는 것보다 자녀를 미국에 유학시키거나 큰 돈은 미국에 예치하는 등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으로 이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남미를 경유지로 생각하고 최종 거주국은 미국 또는 최소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 심지어 호주에까지 행선지를 잡는 사람도 있다.
1995년 1월 1일 현재 유럽에는 6만6086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터키를 포함하여 한인들이 없는 나라가 없으며, 그 중에서도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나라가 있다. 1000명 이상 거주하는 나라를 보면 독일 2만9202명, 프랑스 9,584명, 영국 9,091명, 스페인 6,784명, 이탈리아 4,549명, 그리고 오스트리아 1,423명이 거주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는 미국과 달리 단일민족 또는 몇 개의 민족이 이룩한 나라들로 민족의식이 강하다. 이곳에 한인이 정착하게 된 것은 대략 네 가지 경로로 구분된다. 한국전 때 한국에 주둔한 군인 또는 병원과의 인연으로 이주한 사람, 그곳에 유학하여 10여 년을 머물어 영주하게 된 사람, 서독의 광부·간호사처럼 계약노동자로 이주하였다가 임기가 완료되었으나 계속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 그리고 최근 한국상사의 파견근무자로 이주하였다가 한국기업을 포기하고 그곳에서 사업을 계속하며 정주하는 사람 등이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경우가 옛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됐다가 정주한 사람들이다. 서독으로부터 기술인수라는 명목으로 젊은 남자가 광부로 갔으며, 여자들은 병원의 간호사로 역시 3년 계약으로 갔다. 이들 광부와 간호사는 1만8000여 명이었는데 대부분 미혼이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결혼을 하였다.
남자보다 여자가 많아 남자들은 대부분 한국여자와 결혼하였으나 한국여자는 한국광부 아니면 유학생 또는 독일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한국의 광부였다. 한국 광부들은 3년 계약이 끝난 뒤 여자 때문에 독일에 남아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여성들은 상냥하고 친절하여 병원에서 인기가 많아 계약기간을 넘기고 모두 재계약으로 체류기간을 연장받았다.
광부출신들은 광산에서 고생하였기 때문에 강한 의지와 생활력을 갖고 있다. 더욱이 고생을 하면서 얻은 동지애는 비할 데 없이 강하여 어떤 사람이 어느 도시에서 식품점을 개점하면 서독에 있는 모든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그의 사업을 도왔고 혹시 사업을 하다 실패하게 되면 그가 재기할 때까지 계속 도움을 주었다.
이리하여 독일은 물론 독일 이외의 다른 나라로 진출해 사업을 하는 사람까지 서로 도우면서 한인들은 협력하여 유럽 전역에서 자리를 잡고 사업을 확대하였다.
최근에 볼 수 있는 유럽으로의 이민 형태는 상사직원이 영주하는 것이다. 한국의 재벌기업의 현지 상사직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여 4∼5년이 지나면 현지에서 사업에도 익숙해지고 무엇보다 자녀의 교육 때문에 귀국을 주저하게 된다. 따라서 여지껏 행한 사업을 계속하면서 한국본사에 사표를 낸다.
이럴 경우 초기에는 본사에서는 크게 노하며 마치 배신자 취급을 하였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이런 일을 장려한다. 이는 후배들의 진급을 위하여 자리를 내어주는 일인데다, 사표를 냈다 하여도 결국 유럽 현지에서 본사의 제품을 판매하기 때문에 회사로서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귀화를 신청하면 현지정부는 빨리 수용하여 그 사람의 사업과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나라의 중상류 사회에 바로 진입하게 되었다.
1975년 이후 동남아시아로 퍼져 나간 한인들이 유럽의 상사직원과는 다르나 처음부터 사업을 시작하였다는 의미에서 기업이민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최근의 이주자와 유사하다 하겠다. 동남아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은 기념품상점, 식당, 여행사 등을 차려 어려운 노동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이주국에 정착하는 셈이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분산된 한인들이 한인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번창하였던 것과 같이 유럽 여러 나라의 교포들도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많이 하였다.
한인교포들은 이주 시기와 방향에 따라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구한말과 일제 초기의 한인들은 주로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 만주로 이주하였고, 현재는 이들의 3세, 4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일제시대는 일본에 노동자로 이주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강제로 동원되어 갔다. 이들은 현재 2세, 3세가 지배적이다.
광복 후 1960년대의 교포들은 남북미대륙과 유럽 등 서구문화권으로 이주하여 문화적 충격을 크게 받으며 적응의 어려움을 경험하였고, 이들은 1세가 지배적이다.
교포들이 어느 나라에 이주하든 모두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시련을 경험하고 고생하였으며, 특히 국권을 상실하였을 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비록 이주의 시기와 장소가 서로 다를지라도 그들이 경험한 시련은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의 특성을 발휘하여 모두 거주국의 모범적 소수민족이 되었다. 한인들은 위기와 악조건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자기를 희생하며 자녀교육에 헌신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 결과 다음 세대의 사회상승률이 높아진다. 이래서 한인을 ‘아시아의 유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첫댓글 맨 위에 빨간글씨로 칠해놓은 부분...지금 몇번을 읽고 있는데, 저게 무슨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중국의 화교(華僑)에 대해 한인교포를 한교(韓僑) 또는 조교(朝僑)라 하였다. 한교는 한국인교포를 말하고 조교는 조선인교포를 말한다. 우리 나라 행정부에서 사용하는 용어는 재외동포이다.]
한민족과 화교를 동일시 하는 의미로 읽혀지네요?
게다가 맨 마지막엔 한민족과 유대민족을 동일시하네요? 참 꼴깝들떨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글 앞뒤가 하나도 안 맞네요.
@외노자꺼져
저 빨간글씨에 따르면 재외동포들은 화교라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조선족으로 위장한 한족들이 재외동포(f-4)로 엄청 많이 들어와있으니까요.
뭐 조선족 자체가 본문에서 기술한대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공신들>입니다.
중국인 중에서도 정통성있는 중국인이죠.
어떤 덜떨어진 민족주의자는 조선족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공로를 자랑스럽게 떠벌리고다니던데,
제정신인지 모르겠더군요. 그 민족주의자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한국인의 입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음을 모르는 것으로보아 한국국적 취득한 화교라고 생각됩니다.
저 본문에서 보면, 조선족들은 한민족을 위해 항일 운동한 것이 아닙니다.
@외노자꺼져 모택동의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항일운동한 거죠. 이런 조선족들이 한민족의 독립운동가로 불리는
기가막힌 현실입니다. 6.25로 중공-북한과 합작하여 남한사람들 학살한 공로로 연변자치주를 받은
한민족의 역적들이 조선족들입니다.
재외동포법을 폐지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저 본문에 실린 전세계 한민족이라 주장하는 외국인들이
재외동포법의 혜택을 다 받으려고 할테니까요.
중국의 화교(華僑)에 대해 한인교포를 한교(韓僑) 또는 조교(朝僑)라 하였다. 한교는 한국인교포를 말하고 조교는 조선인교포를 말한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방식을 예를 든것 같군요. 실제로 중국에선 중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한교, 북한인은 조교라 합니다.그런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중국의 예를 든 이유를 모르겠내요...
<중국의 화교에 대해>라는 부분이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졌거나, <중국의 한민족에 대해>로 바꿔야
문맥상 맞을 것입니다. 보통 사전은 그 뜻이 명확하고 모순이 없어야되는데, 제가 보기엔 일부러 저렇게
표기한 것 같습니다.
화교=한교=조교=조선인교포=한국인교포=재외동포=한민족 이런걸 유도한 것 같습니다.
동북공정의 한 형태라고 보입니다.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