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종학 교수님께서 조선8대명당에 대한 새로운 제안에 대하여 쓰신 글을 읽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글로 옮겨 봅니다. 우선 8대명당이란 단어 자체가 너무 자의적이고 시대적 공간적 범위설정이 모호하기에 보편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크게 드는게 사실입니다.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자의적으로 선정을 하니 객관성은 하나도 담보되지 않는게 주지의 사실이고, 시기적으로도 조선 건국 이후에 용사된 음택을 선정할지 아니면 역사 이래로 남아 있는 분묘들을 모두 포함할지도 고민해볼 사항인데다가 공간적으로 현재 남한의 묘소들만 가지고 논하는 것도 한계가 잇어 보입니다.
연리광김이란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조선 중후기에 그 가문들이 이룬 업적은 눈부시고, 그 명문가에 대한 풍수적 안목이 집중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업적이 같은 성씨에서도 특정한 가문 즉 연안이씨에서는 저헌 이석형의 가문 그리고 광김에서는 사계 김장생의 가문에서 일어났기에 특정의 묘소에 눈길을 주는 것이고, 연리 가문에서는 저헌의 묘소가 출발점이라고들 다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헌과 그 후손들의 업적에 대한 내막을 조금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 보면 무언가 다른 점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선 저헌의 손자 6장(長 자 항렬) 중 제대로 벼슬한 이가 크게 없어 보입니다. 6명중 문과 급제자는 경장이 유일해 보입니다. 거기에 더해 6장의 자식들 그러니까 저헌의 증손자 대에서도 크게 출사한 분이 있는가 싶게 한미합니다. 월사 이정구의 조부인 이순장( 교수님께서 만드신 도표는 경장으로 오류가 있슴)만 해도 출사조차 하지 못했고 월사의 부친인 이계 또한 삼등현령이란 직책에 머물렀지요.
세밀히 보면 6장의 후손중 장손인 이수장계와 이순장의 후손들이 주로 출사를 해서 크게 발음한 것으로 보이고 그런 인물들이 지헌을 기준으로 본다면 너무 멀어 보입니다. 물론 저헌의 고손인 월사가 대제학 좌의정에 올랐으니 그게 고손발복이고 5대손인 연평부원군 이귀가 반정공신이 되는 것이 저헌 묘소의 영향이라면 할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묘소발음이란 것이 한없이 가는 것이라고 보기엔 의문점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장경에서 체백이 땅에 묻혀 골기가 형성되고 그것이 지기와 만나면 길함이 있다라는 얘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이 수백년 간다고는 할수 없는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저헌으로 본다면 이순장의 아들인 이귀는 오대손, 이시백은 6대손이 되고
이순장의 가계에서는 백부 이명한과 현주 이소한이 오대손 그리고 이일상 까지 본다면 이미 6대를 넘어갑니다. 이정보나 이천보 등 보자 항렬은 9대 , 대제학 이복원이나 영의정 이시수까지 내려가면 10대와 11대까지 계대차이가 납니다. 이런 분들이 저헌묘소의 영향으로 영달했다고 보는게 타당할까요?
한 묘소의 영향이 부자간 부터 시작해 5대손쯤 지나면 골기의 쇠락으로 후손에게 미치는 게 작아지는게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렇지 않다고 하면 김수로왕의 묘소기운이 현대의 김해김씨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하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조선 태조의 건원릉이 좋다고 선조가 왕위에 올랐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헌의 묘소역량을 크게 보지 않습니다. 풍수를 공부하던 초기부터 능원리를 여러차례 답사했고 스승을 따라 가기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저헌의 묘소를 대명당으로 보는 견해는 공부 초기보다 갈수록 약해졌습니다. 이 묘역이 여러 주장대로 쌍유혈이며 그렇기에 포은선생의 묘소가 좋은 자리에 들었음을 인정합니다. 반면 저헌의 묘소는 혈적한 자리에서 너무 내려와 여기에 용사된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이 묘역이 쌍유혈이고 포은의 자리가 음(陰)에 해당하는 자리이며 상대적으로 높고 거친면이 있는 저헌선생의 뒷자리가 양(陽)에 해당하는 자리로 봅니다. 모든 우주의 이치에 음양이 있고 오행이 존재하듯이 이 묘역도 쌍유혈이며 각각 음양의 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저헌 가문의 발음의 흐름이 저헌묘소가 시작이지만 결정적인 원천은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1.저헌의 손자 6장 중 수장과 순장의 가문이 발음한 이유는 무었인가?
저헌 묘소의 발음으로 가문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고손인 월사가 대제학 좌의정에 오르고 오대손 이귀가 인조반정공신에 오르면서 가문이 커지기 시작하는데는 월사 가문에서는 이순장( 지금은 파묘됨)의 묘소와 이수장의 묘소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고 봅니다. 장자인 이수장의 후손에서는 이귀 이후로 이시백의 형제들 발음이 이어지고 일단 끝이 납니다. 이순장의 후손에서는 손자인 월사 증송자인 백주 이명한 그리고 고손자인 이일상까지 이순장의 묘소발음을 받으면서 삼대 대제학의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일상의 증손 발음은 또다른 묘소의 직용으로 보는데 그 원천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2. 저헌의 손자인 6장의 후손들의 발음이 끝나고 나니 이번엔 월사의 손자 8상(八相)의 후손에서 발음이 한번 더 오면서 저헌의 후손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다량 나오는데 그 원천은 저헌묘소는 너무 계대가 멀어졌고 가문은 한미해져 가다가 갑자기 한 가문에서 인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가문은 월사의 손자들인 팔상 중에서 이만상의 가문입니다. 이만상은 아버지인 백주의 병간호를 하다가 요절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유일한 아들인 이봉조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에 더해 현감 이상의 벼슬이 줄줄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 영달의 원천에 나는 이봉조의 묘소가 작용한다고 봅니다. 현재 일죽면 사무소 뒤에 자리한 그 소를 답사해 보면 조선 후기 연안이씨들의 발음이 그 한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봅니다. 그의 고손 이내에 대제학 둘에 상신 셋이 나오고 판서는 훨씬 많으니 대단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저헌의 묘소발음보다 고손 이내의 후손에서 수많은 인물이 영달하는 것으로 보아 이봉조의 묘소를 더욱 역량이 큰 자리로 보는 것이 제 견해인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해보면 연안이씨 저헌의 후손들의 발음은 저헌의 묘소보다 이순장의 묘소나 이수장의 묘소가 크게 작용했고 후대에서는 이만상의 아들인 이봉조의 묘소역량이 뛰어나 가문의 부흥을 완성했다고 봅니다. 저헌의 묘스는 그래서 그런 후손들의 묘소보다도 더 떨어진다고 보기에 대명당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어폐가 있다고 봅니다.(물론 이순장의 묘소역량도 아주 크진 않다고 봅니다)
능원리 내에서 큰자리는 포은 묘소가 큰게 사실이고 그에 더해 이수장묘소가 좋다고 봅니다. 또한 역사적 기록은 없는 분이지만 이수장 묘소의 안산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에 이갱이란 분의 묘소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가 후손의 부귀를 약속하는 자리였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