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각 나 무
김홍은
나는 소백산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단양을 지나는 구절양장의 죽령재를 넘는다. 소백산을 휘감아 불어오는 한여름의 더운 바람도 꼬불꼬불한 외길을 돌아오다 지쳐, 나뭇가지에 쉬어 안개에 젖어 목을 축인다. 산맥을 따라 지는 해 그늘의 그림자도 아련히 산 계곡으로 저물고, 화전민 생활 같은 고단함은 밭이랑으로 쌓여간다. 굽이굽이 흐르는 듯한 푸른 숲의 물결을 바라보며 죽령재를 나그네의 심정으로 걸어 본다.
봄이 와도 흰눈이 쌓여 늦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국망봉은 오르고 또 올라가도 어머님의 때 묻은 명주 치마폭같이 아늑하게 느껴짐은 그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초원지대로 부드러움을 담뿍 담고 있어서인가. 초여름이 가까워서야 그제서 조용히 철쭉꽃을 지천으로 피워 놓는 연화봉 언저리의 아름다운 정취를 누가 마다할까. 고독한 봉오리마다 홀로이 피고 지는 은은한 풀꽃들은, 산마루 고갯길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중을 나와 맞이하고 있어 소백산을 한번 다녀간 사람들은 더욱, 소백산을 잊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잊지 못할 소백산의 노각나무가 있다.
소백산을 몇 번 다녀갔지만 민박을 한 것은 지난여름이 처음이었다. 휴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계곡은 한산하여 적적함이 감돌다 못해 쓸쓸하게 보였다. 주인아주머니도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그저 무표정이다. 방문을 여니 나그네들이 남기고 간 저마다의 구접스런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엉성한 문살을 바라보니 때 묻어 얼룩져 있는 문창호지로 저녁 햇살이 비쳐 가난하였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좁다란 툇마루에 걸터앉으니 아욱죽을 끓여 먹던 고향의 여름 방학 생각이 시장기를 부추겼다. 우리 일행은 여장을 풀었다. 모든 생활의 찌꺼기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런 심산에 와 몇 달만이라도 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현실이 앞을 가로막고 말았다. 뻐꾸기의 울음을 퍼 담아 놓은 저녁상 앞에는 소백산의 취나물 맛도 일품이었지만, 들마루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받아 산채에 비벼 먹으니 이 정취를 어디 가서 느껴 볼까. 사방으로 둘러 피어 있는 말발도리꽃이며, 말채나무, 함박꽃나무, 노각나무꽃은 산아가씨가 되어 마주 앉으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다래꽃의 은은한 향기는 나그네의 심정을 더욱 뒤흔들어 공연한 가슴을 설레게도 하였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니, 산에 왔는데 이왕이면 소백산 도토리묵에 동동주 맛을 보아야 잠이 올 것이 아니냐며 대학원생들이 내 마음을 옆에서 부추겼다. 나도 동행한 선생님도 못 이기는 척 그들의 이끌림에 동조되고 말았다. 고요한 산기슭은 어둠으로 병풍을 치고 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별들 뿐 사방은 적막하여 추야장장(秋夜長長) 같은 밤을 연상케도 하였다. 밤이 깊어 가면서 계곡의 물소리는 소백산이 녹아 가슴으로 흐르는 것 같아 야릇함도 느껴졌다. 녹두적을 굽는 구수한 냄새가 한결 구미를 일게 했다. 일행의 술잔이 오고가는 동안 주인아주머니는 멀찌감이서 우리들의 정담을 담아 정성껏 녹두적을 구워내고 있는 모습도 풍류스럽게 보였다. 소백산의 별미인 동동주와 안주를 나르는 동안 주인아주머니도 어느덧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산 속에서 살아가는 여인의 한 젖은 고독한 슬픔들이 슬며시 술잔 위로 소리없이 쏟아져 넘치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숨겨진 첫사랑 이야기는 우리들의 가슴을 아예 술독에다 빠뜨려 넣고 말았다. 꽃 같던 열여섯 열일곱 살 때의 남녀간의 눈빛만 마주쳐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던 시절, 이 처녀를 좋아하던 한 마을에 사는 총각이 대문 앞에다 몰래 박가분(옛날 화장품 종류의 이름이라 함)을 사다 놓은 것이 겁이나 오빠한테 일르는 바람에, 자기를 좋아하던 총각을 죽도록 매만 맞게 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자신들의 지난날의 일들이나 되는 것처럼 재미있어 하였다. 이제는 추억스런 그리움이 되어 지금도 그 시절이 한 폭의 그림처럼 살아 나기도 한다며……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지났지만 고향에 가도, 그 때의 정스러움이 담겨져 있어서 그런지 먼 발치로나마 그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고 하였다. 이런 산 속에 홀로 살다 보니 때로는 아름답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늘 높이 연을 날리건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며 한숨을 쏟았다. 나는 쓸쓸해 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실연에 빠져 있던 나의 첫사랑이 아픈 상처로 묻어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그 때의 그 총각을 만나기라도 한 듯 신이 나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옛 사랑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나그네의 정에 취하기라도 하였는지 이번에는 자기도 한잔을 내겠다며 항아리에 남아 있는 술을 감질 나는 술병에 담아 오던 것을 아예 치워버리고 커다란 바가지에다 가득 퍼 왔다.
우리 일행은 아주머니의 후덕한 인심에 빠져 내일 하여야 할 식생조사조차 다 잊은 채 술잔을 비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주머니의 사연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 여인은 전쟁의 미망인 이었다. 꽃다운 청춘을 외로움과 눈물로 슬픔을 안으로 접으며 살아온 분임을 알았다. 소백산의 고독을 혼자서만이 지니고 사는 듯 눈가장자리로 이슬 같은 눈물 방울이 젖어 있는 것을 희미한 전등불빛 너머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깐 남편은 결혼한 지 2년도 채 안되어 6.25 전쟁터로 나간 이후, 지금까지 종무소식(終無消息)이라는 것이다. 피눈물 나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뒤엉킨 한평생을 살아온 한 많은 이 여인…… 결혼 후 얻은 한 살 된 아들이 어느덧 성장하여 손자까지 안겨주었다며, 이제는 기다림도 지쳐 버렸고 눈물도 흘릴래야 더 이상 흘릴게 없어 체념했다는 아주머니의 얼굴은 허무한 인생의 그림자만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그렇게도 기다리던 남편을 불과 2년 전 서울의 국군묘지에서 그 이름이 담긴 비석을 아들이 찾아냈단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러움이 복받쳐 있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노각나무의 꽃송이로 수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외로움이 밀려오는 밤이면 뜰 앞에 서 있는 노각나무를 끌어안고 흐느끼며 마음을 달랬지만, 지금은 남편의 모습이 그리울 땐 국군묘지를 찾아가 비석을 끌어안고 울다가 돌아온다고 하였다. 돌아 올 때는 텅 빈 가슴은 빈발걸음이 되어 무겁기만 하다며……. 아침 햇살에 잠이 깬 노각나무꽃을 바라보니 꼭 그녀의 슬픔을 담아 피어난 듯 흰 꽃잎은 소복한 여인의 감추어진 속살만큼이나 곱고, 노란 꽃술은 못다한 사랑인 양 애달프게만 보였다. 나는 노각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며, 아주머니의 슬픈 마음을 보는 것만 같아 공연히 가슴이 찡하게 밀려왔다. 여인의 슬픔을 담아 피었는지 소백산에서 노각나무가 분홍빛 꽃으로 피는 변종도 발견하게 되었다. 서둘러 길을 떠나가는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는 아주머니의 쓸쓸한 모습은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면서 한 그루의 노각나무로 변하여 가고 있다. |
첫댓글 아침 햇살에 잠이 깬 노각나무꽃을 바라보니 꼭 그녀의 슬픔을 담아 피어난 듯 흰 꽃잎은 소복한 여인의 감추어진 속살만큼이나 곱고, 노란 꽃술은 못다한 사랑인 양 애달프게만 보였다. 나는 노각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며, 아주머니의 슬픈 마음을 보는 것만 같아 공연히 가슴이 찡하게 밀려왔다.
여인의 슬픔을 담아 피었는지 소백산에서 노각나무가 분홍빛 꽃으로 피는 변종도 발견하게 되었다. 서둘러 길을 떠나가는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는 아주머니의 쓸쓸한 모습은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면서 한 그루의 노각나무로 변하여 가고 있다.
아침 햇살에 잠이 깬 노각나무꽃을 바라보니 꼭 그녀의 슬픔을 담아 피어난 듯 흰 꽃잎은 소복한 여인의 감추어진 속살만큼이나 곱고, 노란 꽃술은 못다한 사랑인 양 애달프게만 보였다. 나는 노각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며, 아주머니의 슬픈 마음을 보는 것만 같아 공연히 가슴이 찡하게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