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성지 주요 시설
한국 순교성인 시성기념 교육관 : 사무실, 성물판매소, 봉헌초, 순례도장, 박물관 학예연구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승리의 팔마를 순교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 : 최봉자 수녀 작. 2001년. 그리스도교에서 `팔마(Palm)` 는 죽음을 넘어 이룬 승리를 상징한다. 작가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순교자들에게 당신이 거둔 승리의 영광을 주는 장면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절두산 순교 기념탑 십자가 : 1962년 순교자현양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이 탑은 낙뢰로 훼손되었으나 탑의 일부인 십자가는 남아서 보존되고 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 절두산에서 치명하신 유명, 무명의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념비를 조각하여 세웠다. 절두산의 순교자 중 13위가 현재 `이벽 요한세례자 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을 기다리고 있다.
성녀 마더 데레사상 : 임송자 작. 2018년. 가난한 이들의 벗, 마더데레사 수녀의 절두산 순례(1985년 1월 29일)와 시성(2016)을 기념하여 세웠다.
형구 돌 : 조선시대에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하여 고안된 도구
루르드 성모상(초 봉헌) :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에서 발현(1858)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본 따 조성되었다. 1979년 9월 26일 복자 축일 미사가 끝난 뒤에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에 의하여 축성 봉헌되었다.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 성당과 박물관의 설계는 서울대 이희태 교수가 맡았는데 절두산 주변 지형과 역사적 의미, 순교정신을 조화롭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성미술(聖美術) 제작에는 서울대 교수였던 조각가 김세중을 중심으로 윤명로, 정창섭, 이순석, 최의순,이남규 등의 작가들이 참여해 순교의 역사에 예술적 가치를 더했다.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 전뢰진 작. 1972년. 정부 주도로 출범(1966)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민족의 귀감이 되는 인물 15인을 선정하고 동상 건립을 추진하여 세워졌다.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공로를 인정받은 김대건 신부는 종교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동상 건립 대상 인물로 선정되었다.
오성바위 :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블뤼안토니오 주교, 오에트르 베드로신부, 위앵 루카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성인이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될 때와 다시 한양에서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라고 전해진다.
척화비 : 1871년부터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성인 남종삼 세례자 요한상 : 병인 박해때 순교한 남종삼의 시복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9년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 프란치스코가 기증하였다. 남종삼은 1984년 시성되었다.
남상교(성인 남종삼의 아버지)의 청덕비 : 현풍현감, 충주목사, 동지돈령부사 등을 역임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병인박해 순교자이자 남종삼 성인의 부친이다. 현풍현감으로 지낼 당시 그의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기려 세운 비석은 1974년에 절두산으로 이전되었다.
은언군과 송마리아의 묘비 :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던 은언군의 부인 송마리아는 천주교인이었다는 이유로 신유박해때 사약을 받았으며, 이 사건은 귀양 중이던 은언군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 묘비는 둘을 사면하여 철종 2년에 세웠다.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상 : 김세중 작,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위해 방한하였던 교황 바오로 2세의 절두산 순례(1984년 5월 3일)를 기념하여 제작하였다.
절두산 순교성지
서울의 산티아고, 절두산 성지순례
소재지 :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96-1
휴관일 : 매주 월요일 휴관
가는 법 : 지하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 왼쪽 양화진길 도보 10 분. 간선버스 602, 603, 604, 706번, 지선버스 5712, 5714, 6712, 6716, 7013A, 7013B, 7612번 합정역 하차. 마을버스 마포07번 종점(절두산 순교성지) 하차
사이트 http://www.jeoldusan.or.kr
이용 시간 : 오전 9시 30분~오후 5시. 매일 오전 10시, 오후 3시(월요일 제외) 미사
목차
‘머리를 자른다’는 뜻, 절두(切頭)
이름 없는 순교를 기억하며
1킬로미터의 순례, 850킬로미터의 가르침
그날의 절두산을 떠올린다. 그들은 묵주도 쥐지 못한 빈손으로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겠지. 성스러운 땅의 기운은 종교와 무관하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천천히 묵상하듯 거닌다. 여느 길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성지의 평온이 그 길에 가득하다.
‘머리를 자른다’는 뜻, 절두(切頭)
어떤 길과 땅은 그곳만의 진한 분위기를 갖는다. 사람과 건물이 새로이 들고나도 장소에 깃든 상징은 지워지지 않는다. 한 번 드리워진 상징은 땅의 일부로 녹아들어 어느덧 그곳의 전부가 된다. 그곳을 걷는 것은 그 의미 위를 걷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산티아고 가는 길’이 대표적이다. 성 야고보(산티아고)의 무덤에 경배하기 위해 가는 순례의 길. 중세기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의 가교 역할을 한 이 길은 성 야고보의 순례와 순교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시간이 흘러 그 길은 이제는 종교와 무관하게 사람들을 부른다. 사람들은 그 위에서 순례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과 마주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성 야고보의 순교지로 그 종착점의 거대한 상징이다. 거대한 대성당의 성 야고보의 상이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과 벅찬 보람을 안긴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서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850킬로미터를 걸어 도달하는 길은 아니지만 이름 모를 순교자들의 넋이 깃들었다. 순례의 차등을 어찌 따질까만 무명의 설움과 희생은 성 야고보의 순례보다 한층 숭고해 보인다. 그래서 성지는 절두산의 새로운 이름이다.
절두산은 원래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해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렸다. 용두봉(龍頭峰), 가을두(加乙頭)라고도 했다. 한강을 향한 봉이라 지명에 ‘머리’(頭)가 빠지지 않는다. 그만큼 풍광이 좋았다. 『동국여지승람』에서 강희맹은 ‘언덕의 발부리가 호수 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고 형세도 높아서 호수 가운데 승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예부터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다. 절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용두봉이, 가을두가 절두산(切頭山)이란 끔찍한 이름 하나로 불리기 시작한 건 1866년이다. 병인양요와 병인박해다.
1866년 초 대원군은 천주교를 금하는 법령(금압령)을 내렸다. 그로 인해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과 프랑스 선교사 아홉 명이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는 조선을 침공했다. 그들은 양화진을 거쳐 서강까지 정탐한 후 강화도를 공격했다. 병인양요였다. 격노한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오욕을 씻겠다며, 양화진 잠두봉에 새 처형장을 만들었다.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머리를 자른다’는 뜻의 절두(切頭)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도 이때부터다. 다시 머리라는 뜻을 담았지만 그 의미는 예전과 같지 않다.
이름 없는 순교를 기억하며
합정역을 나와 골목길로 스며든다. 한강변의 외국인 선교사묘원과 양화진 터를 차례로 지난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그 너머에 있다. 언덕에 지어진 순교 기념박물관이 보인다. 천주교회 측은 ‘산의 모양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기념관의 설계를 공모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현대건축 1세대인 이희태가 설계를 맡았다. 혜화동성당과 국립극장을 설계하는 등 종교와 문화 분야의 건축에 능한 전문가였다. 그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순교 정신과 전통 미학을 담았다. 기념관은 두 개의 원과 종탑이 주가 되는 상징을 이룬다. 원형의 지붕 아래는 순례성당과 기념관이다. 옛날 선비의 갓을 형상화했다. 그 사이의 종탑은 순교자들에게 채워졌던 목칼을 의미한다. 세계 건축 설계 콘테스트 은상과 대한민국 건축상을 수상할 정도로 빼어난 건축물이다.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절두산에 지어진 순교 기념관과 성당이다.
절두산으로 들어서는 첫 층계 앞에 ‘절두산 순교성지’라고 쓰인 동판이 있다. ‘SINCE 1866’이라고 적혔다. 순례의 첫걸음이다. 그리고 곧 길가의 형구돌을 지난다. 엽전 모양의 큰 돌이 세로로 섰고 중심을 관통하는 공간에는 교수형을 위한 밧줄이 있다. 구멍 앞쪽의 밧줄에 목을 걸면 형구돌 뒤쪽에서 잡아당기는 사형 기구다. 그 사용법을 알고 나니 그들의 순교가 더 이상 막연할 수가 없다. 충청북도 연풍 공소에서 1974년에 이전했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절두산 순교박물관 입구에 이른다. 성지는 크게 박물관과 성당 그리고 이들 앞에 정원처럼 자리한 십자가의 14처로 나뉜다. 기념관 입구의 계단을 오르기에 앞서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이 있다. 최종태의 조각이다. 그는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다. 성북동 길상사의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으로도 유명한 조각가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은 절두산의 첫 순교자인 이의승·김예쁜·이봉익의 세 가족을 기린다. 몸통에는 옆으로 누인 머리만 붙었다. 목 부위가 없는 전신상은 절두(切頭)를 말한다. 무수한 사람이 절두산에서 이름 없이 목숨을 잃었다. 봉천동에 살던 황해도 사람 이의승의 가족은 처음 순교함으로 그 이름을 보존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계단을 오르자 왼편으로 회랑과 원주가 나온다.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추녀다. 이희태의 건축에 자주 등장하는 경회루 모티프다. 회랑을 돌아 오르자 박물관과 순례성당이 단의 차이를 두고 ‘ㄱ’자 형태로 자리 잡았다. 건물 전체의 규모에 비해 성당은 아담하다. 실내는 제단을 중심에 두고 부챗살로 퍼져 있다. 순교정신과 신앙이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매일 순례자 미사를 드리며 순교의 의미를 기린다. 성당과 접한 박물관 입구의 왼쪽에는 이순석의 작품 「빨마」가 걸렸다. 종려나무 가지인 빨마는 승리를 뜻한다. 순교가 가져다준 종교의 자유다. ‘절두산 길’이라는 부제가 그 의미를 부연한다. 총 3천 점 가까운 유물을 소장한 박물관은 기념관의 2층과 3층을 활용했다. 성당 지하에는 우리나라 천주교 성인 28인의 유해도 모시고 있다.
1킬로미터의 순례, 850킬로미터의 가르침
기념관 바깥의 동쪽으로는 십자가의 14처가 이어진다. 1킬로미터 남짓한 길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하기까지의 열네 장면을 그린 동판이 지표 역할을 한다. 김대건 신부 동상을 중심으로 정원을 크게 한 바퀴 돈다. 봄날에는 길 주위로 철쭉이 활짝 핀다. 다양한 나무와 꽃들도 심었다. 그 자리마다에 모두 이름표를 붙였다. 공원이나 생태관찰로로 부족함이 없다. 그 화사함이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나무 그루터기마다에 그려진 고운 장미 문양도 이채롭다. 여러 가지 순교 유물과 조각도 야외에 전시한다.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순례의 길이다. 산티아고처럼 장대한 길이 펼쳐지지는 않지만 순례의 의미만은 그 못지않다. 신자들은 십자가의 14처를 따라 기도하며 걷는다. 한걸음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은 평정심을 얻는다.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강변으로는 또 다른 김대건 신부의 상이다.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형상이다. 사람들은 김대건 신부의 손을 잡고 기도한다. 동상의 손끝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닳았다. 그러므로 빛난다.
박물관 아래 마리아 상 앞은 촛불 봉헌대다. 순교자를 기리고 소망을 담아 촛불을 밝힌다. 모든 염원은 간절하다. 바람 앞에 위태하지만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우리가 생을 견뎌내는 힘도 저 같은 염원과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겠지. 조급한 마음은 시나브로 잊혀진다. 시기와 질투 대신 용서와 화해 그리고 마음의 쉼이 자리한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강변의 산 중턱에 자리해 강변의 풍경과 일몰이 장관이다. 방주를 타고 홍수의 시련을 견딘 노아에게 신은 무지개를 선물했던가. 절두산은 순교자의 희생으로 본래의 절경도 회복했다. 기념관 초입에서 당산철교 아래 방향으로는 순교자 기념탑도 있다. 지난 2000년 9월에 세워졌다. 기록에 전하는 28인을 비롯해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념한다.
기념탑은 세 개의 탑으로 이루어졌다. 가운데에는 형틀을 상징하는 조형물 아래 순교자들의 전신을 부조했다. 오른쪽의 잘린 머리를 형상화한 기념물이 인상 깊다. 왼쪽에는 순교자들의 전신을 부조한 기념탑이다. 순교자들의 머리맡에는 ‘무명인’이라고 적혔다. 이름 없는 순교다. 그것은 잠두봉이 절두산이 된 것처럼, 누에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변태의 과정이요, 인고의 세월이다. 서울의 산티아고, 1킬로미터 남짓한 절두산 성지순례의 길이 전하는 850킬로미터 순례길 못지 않은 귀한 가르침이다.
절두산 순교성지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