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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용담정 수운 최제우 대신사 상
경주 황성공원 내에 자리한 해월 최시형 신사 상 花開於扶安(화개어부안) 結實於扶安(결실어부안) 부안에서 꽃이 피어 부안에서 결실하리라 -해월 신사 어록 - 해월신사의 제자 용암 김낙철 성도사(1858~1910) 내외
전해올 정도로 천 석 군의 집안이었다고 한다. 김낙철은 3형제 중 맏이인데 자는 汝仲, 이름은 洛喆, 본관은 扶安이다. 그리고 동생의 자는 明仲, 明眞이고, 이름은 洛鳳, 洛眞이다.1890년 6월 7일/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포덕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집에 머물렀는데 김낙철은 동생 낙봉을 비롯하여 김영조, 손화중과 같이 찾아가 처음으로 직접 지도를 받게 되었다. 해월도 신입교인을 지도하는 한편 전라도 관내 도우들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해 7월에 부안, 금구, 전주 등지를 순회하였다. 윤상오 소실이 부안 신리에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곳으로 가서 수백 명의 도인을 모아 놓고 교화하였다. 이로부터 전라도 각지에서는 동학군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내 도도집(都都執)의 책임을 지고 참가하여 대단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그 해 3월 보은장내집회가 있은 이후부터 각지에서는
탄압이 심해지기 시작하여많은 교도들이 체포되어 가산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하는 경우가
속출하였다. 하였으며, 동생 낙봉도 신소능과 더불어 부안 줄포에 도소를 설치하고 혁명대열에 참가하였다. [녹두장군 전봉준(김용덕, 김의환, 최동희 공저)]에 의하면 전봉준은 3월21일(음력) 백산에서 동학혁명군의 대오를 편성하여 전투태세를 갖춘 후 4월3일(음력) 일대를 부안현 부흥역(扶興驛)으로 보내어 부안현 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이철화(李哲和)를 결박하고 군기고를 타파한 후, 이곳 군기와 전곡을 접수하였다고 한다. 이때 군장급(軍長級)은 신명언. 백이구 등이었다.
식량난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제주도 배들이 부안의 문포와 대벌리항에 와서 많은 양곡을 사들여 배에 싣고 수로로 떠나려 하는데 일부 동학군들이 이들의 식량을 약탈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낙철은 급히 현지로 달려가 동학군들을 크게 꾸짖고 단 한 홉의 양곡도 빼앗지 못하게 보호하여 무사히 선단을 귀환케 하여 주어 제주도민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짐승과 무엇이 다르다 하랴」하고 극력 만류하여 놓아 주었다. 이처럼 민심의 수습과 안정에 힘쓰며 동학군들의 민폐를 엄금하였다. 따라서 현감 이철화는 여러 동학접주와 사전 협의하여 행정을 처리 하였다. 7월이 되자 이철화 대신 윤시영(尹時榮)이 현감으로 임명되어 왔으나
그도 모든 일을 동학접주들과 상의하여
처리하였다. 그러나 10월(음력) 공주전투에서 동학군이 패하자 정세는 뒤집혔다. 김낙철 형제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동학군 소탕령으로 이 해 12월 11일(음력) 부안에서 체포되었다. 1894년 12월 23일/ 경군(京軍)과 일병(日兵)이 부안에 도착
수감 중인 동학군
32명(김낙철 선생 포함)을 인도하여 나주로
압송하였다. 무수타지(無數打之)해댔다. 무참한 난타로 동학군들은 여러 차례 기절을 하는 등 급기야는 사형에 처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제주도에까지 전해지자 제주선인(濟州船人) 4~50명이 나주에 몰려와 “갑오년 제주도의 흉년으로 제주도 경내 기만명인민이 아사지경에 이르렀을 때, 부안의 김낙철 형제의 애휼지덕으로 기만 명 인명을 보존하였거늘 김낙철 형제가 죽게 되었는데 하늘이 어찌 무심한고 (若金某兄弟 至於死境 天何不願乎 )라고 외치며 만약 김낙철. 낙봉 형제를 죽일 터이면
우리들을 대신 죽여 달라”며 나주목사에게 살려 줄 것을 청했다. 돌리고 나머지 27명의 동학군은 1월 6일 신시에 무참히 사살했다. [녹두장군 전봉준] 기록에는 이때 나주옥에는 전봉준 장군과 손화중도 있었는데 이들은 1월6일 서울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십부대신에게 “김낙철. 낙봉 형제의 덕화로 하관도 생명보존했을 뿐 아니라 부안 경내 인민이 다 김형제의 덕화로 생명보존하였거늘, 김형제를 죽일 터이면 나를 대신 죽이고 그들을 살려달라”며 애걸. 이때 서울 감옥에는 구암 김연국을 비롯하여 전봉준. 손화중 등 각지에서 체포되어 온 동학군 수백 명이 여러 곳에 갇혀 있었는데 전봉준 장군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고초도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부안 사람들은 그들이 갑오년에 체포된 그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야로 청수단에 청수를 모셔놓고 김낙철 형제가무사하기를 기원하였다. 김낙철 형제가 부안에 나타나자 동민들과 군 유지들은 쌀을 가져온다, 고기를 가져온다하며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온 이들 형제분을 극진하게 환영하였다. 이는 동학혁명 때 이들 형제가 도소를 잘 지휘하여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군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신사로부터 여러 가지 도리를 배워 각처에 다니면서
포덕하니 동학군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강암 손병흠, 용암 김낙철,
김낙봉 형제, 염창순, 이용한, 이춘경, 장석 도집 임춘호 등이 있었다. 해월신사를 대신하여 체포됨으로써 동학의 명맥을 살려 놓았다. 그러나 이 생생한 역사적 사실은 천도교의 정사인 ‘천도교서’와 ‘천도교창건사’에는 빠져 있다. 이는 김낙철이 한 때 구암 김연국을 따라 시천교에 몸담고 있었던
관계로 여겨진다. 김낙철을 석방한 것은 김낙철은
모르고 있었지만 해월신가 6월 2일 경성감옥에서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해월신사의 안위를 위해 혹심했던 극형도 참아왔건만... 동생과 함께 비통한 마음으로 수원 남문누상에 올라 북쪽의 아득한 하늘을 향해 봉두난발로 허리 굽혀 4배를 올렸다.
일반도인들은 ‘해월신사가 화선(化仙)하였으니 운이 끊겼다.’며 반도하는 교인이 태반이었다. ‘요순공맹이 수천년 전에 돌아갔으나 그 덕이 오늘에 미치고 있거늘 해월신사 역시 육신은 돌아가셨어도 그 덕화는 죽지 않았다.’며 반도들을 설득했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산군에 있었다. 1900년 3월/해월신사 영위조문 차 동생 낙봉과 함께 정산에 있는
의암 손병희를 찾아가 조문하였다. 편의장에 김낙철이 선임되었다. 편의장은 한 도만 맡은 편의장이
아니라 팔역(八域)을 통괄했다. 1916년 2월 3일 뜻한 바 있어 의암 손병희를 찾아가 ‘해월신사의 정통연원은 의암, 구암, 송암 등 3인 중에 의암이 주장으로 임명받았으니 이제 정통연원에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에 의암 손병희는 친히 이 뜻을 받아들여 직접 전수 하리라하고
즉석에서 수수예식을 봉행하였다. 그 후 충남 논산군 은진면 남산리 산37-10로
옮겼다. <위 내용은 '부안독립신문'에서 발췌 정리한 것.>
용암 김낙철 선생의 제자이자 호암수도원 창립자 학산 정갑수(1884~1952) 성도사
학산 정갑수의 제자 해원 박기중(1898~2000) 종법사
동학(東學) 2대교주 崔時亨 '통문'담긴 문집 발견 (전주(全州)=연합(聯合)) 동학(東學) 2대 교주인 해월(海月) 崔時亨의 문집과 농민군 지도자가 쓴 친필 수기등 동학관련 희귀자료 10여점이 발굴돼 동학혁명 1백주년을 맞아 갑오년 당시의 동학교단 동향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북(全北) 부안(扶安) 천도교 호암수도원의 朴奇重종법사(96)는 15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동학 2대교주 崔時亨의 '해월(海月)文集'과 부안(扶安) 출신인 농민군 지도자 金洛喆대접주의 친필수기인 '龍菴誠道師歷史略抄', 동학교단 초기역사를 담고 있는 '大先生事蹟', 김낙철부부의 사진원본등을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5일 언론에 공개했다. 이중 학계의 관심과 함께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자료는 '해월문집'과 '용암성도사역사약초'. 해월문집에는 崔時亨이 1885년부터 1892년말까지 각지역의 동학지도자들에게 보낸 '통문'을 연도별로 정리해 1880년대와 1890년대 동학교단의 동향과 갑오년 직전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학교세의 조직화 과정을 상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 문집은 가로 21㎝ 세로 24㎝크기의 한지에 순한문체로 씌어져 있는데 이자료를 통해 갑오년 당시의 동학교세및 동학농민혁명에 미친 동학사상과 지도부의 역할등을 새롭게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농민군지도자의 친필수기로는 처음 공개되는 '용암성도사역사약초(일명 김낙철 역사)는 국한문 혼용체이며 김낙철이 죽기 직전인 1917년말경에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수기는 김낙철이 1890년 동생과 동학에 입교한 이후의 체험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농민군 1,2차 봉기에 참여한뒤 경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32명의 농민군과 함께 나주(羅州)로 압송돼 고문을 받은 사실, 서울로 압송된뒤 일본 순사청에 수감되어 있던 전봉준,손화중,최경선등 농민군 지도자들을 만난 정황등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겨놨다. 이 자료들이 발견된 호암수도원은 1948년 김낙철 대접주의 수제자인 鶴山 丁甲秀가 설립한 것으로 동학관련 자료들이 소중하게 간직돼오다 동학 1백주년을 맞아 햇빛을 보게됐다. 동학농민혁명에 끼친 동학사상의 역할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해온 朴孟洙교수(원불교 영산대학)는 " 해월문집은 그동안 동학사상의 역할과 종교적 측면을 과소 평가해왔던 기존 학계의 입장이 전면적으로 재검토돼야 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김낙철역사는 1,2차 봉기에 참여했던 농민군 지도자로서 두차례에 걸쳐 체포됐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실을 증언해 준 유일무이한 자료"라고 평가했다.(끝) (1994년 연합뉴스 보도 내용)
학산 정갑수 종법사 묘역 학산선생 사모님 묘비. 鶴 山 丁 甲 秀 先 生 論 說 覓 心 論 멱 심 론 무진년(茂辰年1928) 七月 마음을 찾는 말씀 大道대도는 無形무형이라、 以心學之이심학지니 其所明證기소명중은 吾所獨知오소독지오、人所難見인소난견이나 然而知之本연이지지본도 亦難測여난측하니 知而不知지이부지는 无爲自化무위자화라。 큰 도는 형상이 없는지라 마음으로써 배우나니 밝게 증험한바는 내가 홀로 아는 바요、사람들이 쉽게 보아내지 못하는 것이나 앎의 근본은 또한 헤아리기 어려우니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은 하염 없이 스스로 화하는 이치이다。 此是神明所助차시신명소조니 神明者신명자는 誰也수야오 天地元氣천지원기며 卽吾心之靈神즉오심지령신이니라。 心一則 天地之氣一也심일즉천지기기일야 以合一之心이합일지심으로 用事 용사하면、 天地造化權能천지화권능이 在我재아오、不在他也부재타야로되 此是眞言차시진인지언이요。 이것은 神明이 돕는바이니 신명이란 것은 누구인가? 천지의 큰 기운이며 곧、내 마음의 신령이니라。 마음이 순일하면 천지의 기운이 순일하며 천지의 기운이 합일된 마음으로 일을 행하면 천지의 조화와 권능이 나에게 있고、다른데 있지 아니하되 이는 眞人의 말씀이요。 非凡愚之可測 비범우지가측이뢰되、神明신명은 人所固有인소고유니 固有者고유자는 卽天之一分子所受也 즉천지일분자소수야라。 凡我有衆범아유중이 受天之氣수천기기는 同是一般而賢愚之不同동시일반이현우지불동은 何也하야오。 범부(凡夫)는 가히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로되、신명은 사람이 본디 가지고 있는 바이니 곧 한울님의 한 입자를 나누어 받은 것이다。 무릇 모든 사람이 한울님의 기운을 받는 것은 한결 같은데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이 같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心定則氣正심정즉기정하고 沈移則氣不定심이즉기부정하나니 心定之地심정지지에는 百體從公백체종공하고 心移之地심이지지에는 日事違法일사위법이라。 公者天下之公琺也공자천하지공법야니 無偏無私무편무사하여人我間碍障인아간애장이 劈破故벽파고로 信義신의가 自在자재하고 禮道예도가 鄭重정중하여 衆沈중심이 悅服열복하나니、 내 마음을 한울자리에 정하면 기가 바르고 마음이 그 자리에서 옮기면 기가 바르지 못하나니 마음이 정한 곳에는 모든것이 공정함을 따르고 마음이 옮겨진 곳에는 일용행사마다 법을 어기게 되느니라。 공정한 것이란 천하의 공변된 법이니 편벽이 없고 사사로움이 없어 남과 나 사이에 거리낌과 가리움을 없애어 주는 까닭에 신의가 스스로 머물고 예도가 정중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이 기쁘게 복종하나니、 保安之策보안지책과 濟衆之法제중지법이 捨此而安求乎사차이안구호아。 나라를 안보하고 중생을 건지는 법이 이를 버리고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反是則違矣반시즉위의니 私念사념이 妄動망동하면 情慾정욕을 未祛미거라。 이를 돌이켜 어기어 사사로운 생각이 망령되어 움직이면 정욕을 물리치지 못하나니라。 河哉하재오 芶究其理則구구기리즉 理所固然리소고연이라。 어째서인가 진실로 그 이치를 궁구하면 이치가 원래 그러한 바이니라。 稅間行樂세간행락이 衣食住三件의식주삼건은 人所難免인소난면이오。 세간의 즐거움 중에서 입고 먹고 삶의 세가지는 사람으로서 면하기 어려운 바요。 人各有妻子인각유처자하니 愛護之情애호지정은 孰不同然숙불동연가。 사람은 제각기 처와 자식이 있어 사랑하고 보호하는 마음은 누구인들 같지 않겠는가。 終身後종신후이라도 所望소망을 未充미충이 奚有贍暇해유섬가하여 念及於他哉념급어타재아。 是故시고로 聖人성인이 以心度心이심탁심하며、推己恕人추기서인하여 人愛인애를 我憂아우하며 我樂아락을 人樂인락하여 子然感化者자연감화자는 回向其天賦之固有德性회향기천부지고유덕성이니 몸이 다한 뒤에라도 바라는 바를 채우지 못하는데 어찌 한가롭게 생각이 다른곳에 미치겠는가? 이르므로 성인은 마음으로 마음을 헤아리며 스스로를 미루어 남을 용서하여 남 사랑하기를 나를 걱정하듯 하며、 나의 즐거움을 남과 함께 나누며 자연히 감화된 사람은 한울님이 주신 본래의 덕성으로 돌아가나니、 聖人성인은 卽즉 度人之天也夫탁인지천야부인저 苦海衆生고행중생이 況淪莫息황륜막식하여 忘失天性者久矣망실천성자구의러니、 幸逢聖運행봉성운하여 導我眞路도아진로하니 始覺吾心시각오심이 本紛面目본분면복이라。 성인은 곧 사람의 천성을 헤아리느니라。 괴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중생이 세상사에 빠져서 쉬지 못하고 천성을 잃어버린지가 오래였는데、 다행히 성스런 운수를 맞이하여 참된 길로 우리를 이끄니 비로소 깨달은 내마음은 마땅히 행하여야 할 참면목이다。 我天아천을 我侍아시하여 自能自强자능자강하니 万般運用만반운용이 無非神功무비신공이라。 나의 한울님을 내가 모시어 몸소 능히하고 몸소 굳세게 하니 모든 운용이 한울님 공덕이 아님이 없는지라。 造化能變조화능변을 復何可比哉부하가비재아。 조화가 능히 변하는 이치를 다시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人面獸心인면수심은 自身자신을 自毁자훼하니 俯仰之間부앙지간에 罪所難逃죄소난도라。 福善禍淫복선화음이 以類必報이류필보니 天理昭命천리소명이 如鏡照功여경조공이라。 얼굴은 사람이되 마음은 짐승인것은 제몸을 스스로 허무니 모든 행동마다 죄를 피하기 어려운 바라。 착한 사람에게 복이 오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이라。오는 것은 같은 종류에 따라서 반드시 보답이 있으니 한울의 이치가 밝게 드러남은 거울이 비는 것과 같으니라。 善惡之分선악지분은 在公私재공사하고 公私之別공사지별은 在利害재리해하니 利害相反리해상반에 禍福화복이 係焉계언이라。 선과 악의 나뉨은 공과 사에 있고 공과 사의 구별은 이롭고 해로운 데에 있나니 이롭고 해로운 것이 서로 반대외어 재앙과 복이 각각에 달려있느니라。 哲人철인은 以公爲利이공위리하고 以私爲害이사위해로되 凡夫則不然범부즉불연하여 從公則害我종공즉해아하고、循私則利我순사즉리아하나니、 以私爲利者이사위리는 卽不過眼前之樂而一身즉불과안전지락이일신이 孤偶고우하고、 以公爲利資이공위리자는 普及於濟衆之澤而보급어제중지택이 擧世同和거세동화하리니 和之本화지본은 一則利我일즉리아오 一利正法일즉정법이라。 철인은 공정으로써 이익을 삼고 사사로운 일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되、 범상한 사람은 그렇지 아니하여 공정하게 하면 나를 해롭게 한다고 하고、사사로이 하면 내게 이롭다고 하나니、 사로써 이익을 삼는자는 곧 눈앞의 즐거움이 있으나 일신이 고독할 뿐이고 공으로써 이익을 삼는 자는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혜택이 미쳐 온 세상 사람과 함께 화합할 것이니、 화의 근본은 하나인 즉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인 즉 법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孰不武利我之心숙북무리아지심이리오마는 其在正法기재정법아여서는 人莫不感服인막불감복이니 堯舜之民요순지민도 各安其堵然後각안기도연후에 億兆願戴也억조원대야라。 누구라도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리오마는 그 바른 법앞에 있어서는 누구도 감복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요임금과 순임금의 백성도 저마다 그 안도가 된 다음에 억조의 모심을 바라리라。
因其性以導之인기성이도지하면 伋其和也급기화야하여서는 民皆堯舜민개요순이니、 況斯世運兮황사세운혜여 聖人之敎法성인지교법이 覺我而本天각아이본천하며 刷我而新精쇄아이신정하여 敬人경인을 如敬天여경천하며、 愛人애인을 如愛己여애기하여 包宇宙而爲家포우주이위가하여 蛤萬像而化育합만상이화육하니 人人覺悟인인각오하면 斯稅之同歸사세지동귀가 如水就下여수취하하리라。 그 본성 따라 인도하면 그 화함에 미쳐서는 백성이 다 요순이니、 하물며 이 세상 운이여 성인의 가르치는 법은 내가 본래 한울인 것을 깨닫게 하며 나를 고침으로써 정기를 새롭게 하며 남을 공경하는 것을 한울님 공경하듯 하며 남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우주를 감싸 내 집 같이 하여 삼라만상을 화육하니 사람마다 깨닫고 깨우치면 이 세상이 함께 돌아감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으리라。 沈雖我心심수아심이나 非聖利不悟비성즉불오니 覓心之法멱성지법도 非聖德之薰陶비성덕지훈도면 爲能容易오위능용이오아。 마음은 비록 내 마음이나 성인이 아니면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마음을 찾는 법도 성인의 훈도의 덕이 아니면 어찌 쉽게 될 것인가? 嗟我有衆차아유중은 敬之畏之경지의지이다。 아 ~ 아、 나의 여러 수도인이여、 공경하고 어려워 할지어다。
****************************************************************************** 위의 《멱심론(冪心論)》은 《학산鶴山 정갑수丁甲秀 선생 傳記》중에서 발췌한 내용. 시쳇말로 스캔을 뜨면 간단히 해결될 사안이지만, 정독과 함께 참고서적에다 인터넷까지 뒤적여 가며 자판에 두드리는 수고를 자청. 대충 설렁설렁 넘겨서는 아닐 될 내용이기에. 한문에 대한 주석도 실려 있었지만 나름 행간의 의미도 잘근잘근 곱씹어 가며...
성인(聖人)의 천성(天性)을 헤아려 참면목에 도달해야 한다는 요지의 잔잔한 말씀이 되려 가슴을 일렁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