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6-1)
(2021년 9월 3일∼9월 14일)
瓦也 정유순
<제6일-1> 합천해인사(2021년 9월 8일)
해인사의 해인(海印)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인삼매(海印三昧)는 일심법계의 세계를 말하며 부처님 정각(正覺)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곧 있는 그대로의 세계, 진실 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 객관적인 사상의 세계이니 바로 영원한 진리의 세계다. 곧 우리들 마음의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바다[海]물속에 비치[印]는 경지를 해인삼매라 하였다.
<가야산해인사 일주문>
또한 해인삼매는 오염됨이 없는 청정무구한 우리의 본디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며, 우리의 마음이 명경지수의 경지에 이르러 맑고 투명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비치는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모습을, 한없이 깊고 넓으며 아무런 걸림 없는 바다에 비유되어 참 지혜는 무량한 시간, 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가야산해인사 당간지주>
이 해인삼매에 빠지기 위해 일주문을 지나면 당간지주가 나오고 <세계문화유산 해인사고려대장경판전> 표지석이 보인다. 해인사 사찰(寺刹)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지만 우리가 보통 <해인사팔만대장경>으로 알고 있는 <해인사고려대장경판>이 국보 제 32호로 지정되었으며,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 등은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대장경판전) 표지석>
조금 더 들어가면 해인총림(海印叢林) 전각이 보인다. 총림(叢林)은 강원(講院)과 선원(禪院)·율원(律院)·염불당(念佛堂)·종무원(宗務院) 등을 갖춘 종합수련원으로, 1967년 해인총림이 가장 먼저 설립되었으며 초대 방장은 성철(性徹)스님이다. 1969년에 조계총림(송광사)이 세워졌고, 1984년 이후에는 영축총림(통도사), 덕숭총림(수덕사), 고불총림(백양사), 팔공총림(동화사), 금정총림(범어사), 쌍계총림(쌍계사) 등 총 8개의 총림이 세워졌다. 방장(方丈)은 종합수행도량의 최고 어른이다.
<해인총림>
사천왕문과 해탈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이 나오고 구광루가 딱 버틴다. 구광루(九光樓)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맞배지붕 건물로 해인사 개창 당시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1817년(순조 17) 정축년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 이후 1819년(순조 19)에 중건되었고, 이후 1949년 중수하였으며, 1993년에 현재의 규모로 재건축되었다. 원래는 기능상 재식시(齋式時) 법요(法要)를 집행하던 곳이었으나, 현재는 아래층의 경우 홍보를 위한 홍보시설과 서점 등으로 사용되고 있고, 위층은 설법과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 구광루>
구광루 앞 마당에는 해인도(海印圖)가 그려져 있다. 해인도는 신라(新羅) 때 의상대사가 팔만대장경의 정수(精髓)인 화엄경의 가르침을 도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해인도를 합장하고 일심(一心)으로 출입로를 따라 천천히 한 바퀴, 세 바퀴, 다섯 바퀴, 일곱 바퀴 등 홀수로 돌면서 평소에 염송하는 ‘나무석가모니불’·‘나무관세음보살’·‘나무아미타불’ 등 명호를 외우면 팔만대장경의 진리와 함께 하게 되며, 부처님과 보살님의 가호를 받아 지혜와 복덕을 얻게 되어 마침내 무량한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광루마당에 그려진 해인도>
<해인도>
구광루 왼쪽 계단을 올라가면 해인사의 본전(本殿)인 대적광전 영역이다. 해인사(海印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2009년 12월 21일 사적(제504호)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가야산(伽倻山)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가야산해인사 대적광전>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은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으로 삼게 하였다.
<가야산해인사 금강계단>
<가야산해인사 법보단>
해인사는 화엄경(華嚴經) 중심 사찰이기 때문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이 없고, 화엄세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주 법당이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영원한 진리를 상징하고, 빛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뜻으로 태양을 가리키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니 전각에 빛 광(光)자가 들어간다. 또한 우주만물을 모두 간직한 연화장(蓮花藏) 세계를 의미하여 화엄전(華嚴殿)이라고도 한다. 전각의 뒤편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 양 옆으로는 금강계단(金剛戒壇)과 법보단(法寶壇)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해인사 비로지나불>
<가야산해인사 대방광전>
대적광전 뒤의 계단을 오르면 해인사를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만들어준 고려대장 경(高麗大藏經)이 있는 법보공간(法寶空間)이다. 현재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이보다 앞서서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고, 이를 다시 새겨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팔만대장경판전 입구>
<수다라장 안쪽 입구>
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기원하고자 국가가 주도하여 조성한 대장경의 조판은 대몽항쟁이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든 1238년(고종 25)부터 1247년(고종 34) 사이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장경을 새기기 위해 먼저 초조대장경의 인경본과 송의 개보장, 요의 거란장 등 여러 판본을 두루 수집하였다. 이어 여러 승려들과 문인 지식인 등을 모아, 수집한 판본 등을 토대로 대장경의 원문 오탈자를 바로 잡고 어떤 경전을 대장경에 포함시킬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팔만대장경판전 배치도 - 네이버캡쳐>
대장경의 조판에는 판본을 수집하여 교감하는 일 말고도 나무를 베어 썩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바닷물에 3년 이상을 담가 기초 가공을 하고, 경판을 만들어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겨 그 위에 다시 옻칠을 하고 방부처리를 한 후, 경판 귀퉁이에 각목과 마구리를 대고 구리판으로 네 귀퉁이를 감싸서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하는 수많은 공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대장경판은 지금까지도 좀먹거나 뒤틀림 현상이 적게 일어나며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팔만대장경판전 내부>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한 면에 약 23행 14자씩 새겼으므로 전체 글자 수는 5천만 자에 달한다. 경판의 재질은 산벚나무가 64%이상이고, 14%가 돌배나무, 그 나머지는 후박나무와 단풍나무라고 한다. 글자를 새기고 경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결을 메워 매끄럽게 한 다음 다시 생옻을 두 세 차례 덧칠하였다. 팔만대장경의 판수는 8만1,352매에 이르는데 판의 앞뒤로 모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실제로는 16만면 이상을 새겼다.
<팔만대장경판 - 네이버캡쳐>
고려팔만대장경판은 조선이 개국할 때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것을 1398년(조선 태조 7)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에 있던 절인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합천해인사로 옮겨왔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인수대비(仁粹大妃) 등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후 성종(成宗) 때 해인사의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팔만대장경판전>
장경판전(藏經板殿)은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건물이다. 고려대장경의 판전은 같은 양식과 규모의 두 건물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어 건물 자체도 특수하다. 남쪽 건물은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 건물은 법보전(法寶殿)이다. 해인사 경내에는 많은 법당이 있으나 대부분 근세에 건립된 것이고 이 장경판고만이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건물에 사용되었던 와당(瓦當) 또는 평와(平瓦)에 나타나 있는 ‘弘治元年(홍치원년)’이라는 각명(刻名)으로 보아 건립연대를 1488년(성종 19)으로 추정하고 있다.
<팔만대장경판전 수다라장>
<팔만대장경판전 법보전>
해인사는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가 일어났는데, 불가사의한 일은 이런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건물뿐이고, 바람이 통과하는 창살뿐이다. 장경판전을 제외한 해인사의 대부분의 전각들은 일곱 번의 대화재로 소실되어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이다.
<팔만대장경판전>
오래전에 이곳을 방문한 모 대통령께서는 이렇게 귀한 국보를 허술한 곳에 보관하면 손상될 것을 우려하여, 국가 예산으로 현대식 항온항습(恒溫恒濕)시설 등을 갖춘 건물을 지어 옮겼는데, 얼마 가지 않아 경판에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슬어 예전의 건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자연을 과학적으로 활용한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할 뿐이다.
<1920년대 해인사 - 네이버캡쳐>
장경각 왼쪽으로 돌아 나오다 보면 신라 말엽에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이 만년에 은거하여 시서(詩書)에 몰입하던 학사대(學士臺)가 있다. 고운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 수많은 학이 날라 와 경청했다고 한다. 최치원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 후에 이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나 자라 지금의 전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2012년 11월 천연기념물(제541호)로 지정되었으나, 2019년 태풍 링링의 피해로 고사하여 2020년 2월 3일 문화재 지정을 해제 하였다.
<학사대 전나무 - 네이버캡쳐>
해인사를 떠나기 전에 일주문에서 부근에 있는 성철스님 사리탑을 둘러본다. 성철(性徹, 1912∼1993)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조계종의 종정(6∼7대)을 역임하여 올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 같은 사자후로 한국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철의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話頭)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역대 최장 기록에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철스님 사리탑>
※ <제1일>부터 <제12일>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함양 남계서원/청계서원>편이 연재됩니다.
첫댓글 와야님 후기 감탄하며 계속 보고 있습니다👍
화이팅 입니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