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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글(스크랩)모음 스크랩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8년(2014년) 4월 24일 후기/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25)
관문 추천 0 조회 55 14.04.25 08: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8년(2014년) 4월 24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25)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4월 24일 후기.hwp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879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879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스물다섯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에는 반야화 법우, 효주 법우, 환희장엄 법우, 저 관문 이렇게 4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Chapter Twenty-Seven The Twelve Links of Interdependent Co-Arising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230페이지 18째 줄부터 243 페이지 6째 줄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제3부 기타 불교교리

 

CHAPTER TWENTY-SEVEN The Twelve Links of Interdependent Co-Arising

27장 십이연기(十二緣起)

 

Another way that artists sometimes depict the Twelve Links is to draw an embryo in the womb for consciousness; the child just before birth for mind/body; the child from one to two years old, when his or her life is dominated by touching, for the six senses and their objects; the same child from three to five years old for contact; and an adult for desire or attachment.

화가들이 12연기를 이렇게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자궁 안에 있는 태아는 의식을 나타낸다. 막 태어나려고 하는 아이는 마음/몸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이것저것을 만지는 한두 살 먹은 아이는 6처를 나타낸다. 3-5 살 먹은 아이는 접촉을 상징한다. 그리고 어른은 욕망 또는 집착을 나타낸다.

 

There do not have to be exactly twelve links. In the Abhidharma texts6 of the Sarvastivada School, it says that you can teach one, two, three, four, or five, up to twelve links. The one link belongs to the unconditioned realm (asamskrita). The two links are cause and effect. The three links are past, present, and future. The four links are ignorance, volitional actions, birth, and old age and death. The five links are craving, grasping, coming to be, birth, and old age and death. The six links are past cause, present cause, future cause, past result, present result, and future result. Because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exist in consciousness, and the six ayatanas exist in name and form, in the Mahanidana Sutta the Buddha lists only nine links. At other times Buddha taught ten links, omitting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그런데 반드시 열두 개의 고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Abhidharma) 문헌(주6)을 보면 하나, 둘, 셋, 넷 또는 다섯에서 열두 개에 이르는 고리를 언급하고 있다. 한 개의 고리는 조건 지워지지 않은 영역, 즉 무위(無爲)에 속한다. 두 개의 고리는 원인과 결과이다. 세 개의 고리는 과거, 현재, 미래이다. 네 개의 고리는 무명, 의지적 행동, 의식, 늙음과 죽음이다. 다섯 개의 고리는 갈망, 집착, 존재하게 됨, 태어남, 늙음과 죽음이다. 여섯 개의 고리는 과거의 원인, 현재의 원인, 미래의 원인, 과거의 결과, 현재의 결과, 미래의 결과이다. 무명과 의지적 행동은 의식 속에 들어있고, 6처는 이름과 형상에 들어있으므로 마하니다나 경에서 부처님은 아홉 개의 고리만 들고 있다. 부처님은 무명과 의도적 행동을 생략한 채 열 가지 고리만 가르치신 경우도 있다.

 

6 There is a collection ("basket") of Buddhist teachings called Abhidharma ("super Dharma"). These are extended explanations of the teachings the Buddha gave. At first, in order to lend credence to their work, the authors of the Abhidharma tried to make these writings look like discourses of the Buddha. In the second stage, these writings were accepted as independent and given the name Abhidharma. During the third stage, as Abhidharma developed, it became more and more analytical. This fine and detailed analysis is often dry and difficult to understand. Sometimes it is analysis just for the sake of analysis, rather than guidance for the practice to help us transform our suffering. The fourth and final stage of Abhidharma was to shorten and simplify the long, detailed analyses so that they became easier to understand.

주6) 불교의 가르침에는 아비달마[大法(대법)]라고 부르는 문헌군[광주리]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장해서 설명한 것이다. 처음에 아비달마 저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신빙성을 더하고자 자신들의 글을 부처님의 말씀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자 이 작품들은 독립적인 것으로 인정되어 아비달마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세 번째 단계를 통해 아비달마가 발전해감에 따라 그것은 더욱 더 분석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훌륭하고도 세세한 분석은 딱딱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고통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수행의 지침이라고 하기보다는 분석을 위한 분석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의 아비달마는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길고도 세세한 분석을 줄이고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Sometimes when the Buddha taught Interdependent Co-Arising, he began with old age and death and the suffering that accompanies them. In the sutras that do not include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as links, the Buddha ends by saying that mind/body is conditioned by consciousness, and consciousness is conditioned by mind/body. The Buddha never wanted us to understand the Twelve Links in a linear way ? that there is a line going from ignorance to old age and death or that there are exactly and only twelve links. Not only does ignorance give rise to volitional actions, but volitional actions also give rise to ignorance. Each link in the chain of Interdependent Co-Arising is both a cause and an effect of all the other links in the chain. The Twelve Links inter-are.

때로 부처님은 연기를 가르칠 때, 늙음과 죽음과 그에 따르는 고통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무명과 의지적 행동을 언급하지 않는 경전들에서 부처님은 의식이 이름과 형상을 낳고 이름과 형상이 의식을 낳는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부처님은 열두 가지 고리를 직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무명에서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직선적으로 이해하거나 다만 정확히 열두 가지 고리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명이 의지적인 행동을 낳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행동도 무명을 낳을 수 있다. 연기의 사슬에 들어있는 각각의 고리는 그 사슬에 들어있는 나머지 모든 고리의 원임임과 동시에 결과이다. 열두 가지 고리는 상즉적으로 존재한다.

 

In the tendency to see the teachings of the Buddha as an explanation of how things are rather than as a support and guide to the practice, the Twelve Links have been misunderstood in many ways. one way has been to see them as a way to explain why there is birth and death. The Buddha usually began the Twelve Links with old age and death to help us get in touch with suffering and find its roots. This is closely linked to the teachings and practice of the Four Noble Truths. It was after the lifetime of the Buddha that teachers more often than not began with ignorance, to help prove why there is birth and death. Ignorance became a kind of first cause, even though the Buddha always taught that no first cause can be found. If ignorance exists, it is because there are causes that give rise to and deepen ignorance. The Buddha was not a philosopher trying to explain the universe. He was a spiritual guide who wanted to help us put an end to our suffering.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의 지침 또는 조언이 아니라 사물의 발생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보려는 경향 때문에 열두 가지 고리는 여러모로 오해되어 왔다. 그중 하나는 그것을 태어남과 죽음이 있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대개 늙음과 죽음으로 12연기를 시작하고 있는 까닭은 고통을 알고 그 뿌리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사성제의 가르침과 수행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논사들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게 된 이유를 밝히고자 대개 무명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난 뒤의 일이다. 부처님이 늘 최초의 원인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은 일종의 최초의 원인이 되어버렸다. 무명이 있다고 하면, 무명을 낳고 심화시키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 부처님은 우주를 설명하고자 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부처님은 우리가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돕고자 한 정신적인 안내자이었다.

 

Two other theories based on the Twelve Links evolved after the lifetime of the Buddha. one was called the Three Times and the other the Two Levels of Cause and Effect. According to these theories,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belong to the past; birth and old age and death belong to the future; and all the other links from consciousness to coming to be belong to the present. It is true that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existed before we were born, but they also exist in the present. They are contained within all the other links, which include the so-called links of the present and future.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난 뒤 12연기에 근거한 두 가지 이론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자면, 무명과 의지적 행동은 과거에 속하고, 태어남과 늙고 죽음은 미래에 속하며, 의식에서 존재하게 됨에 이르는 나머지 다른 고리들은 모두 현재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명과 의지적 행동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들은 현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나머지 고리 모두에 포함되어있는 것이고, 소위 현재와 미래에 속하는 고리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Regarding the Two Levels of Cause and Effect, at the first level,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are said to be causes, and consciousness, mind/body, the six ayatanas, and contact are said to be effects. At the second level, feelings, craving, grasping, and coming to be in this life lead to birth and old age and death in a future life. Theories like these are not entirely inaccurate, but we have to be able to go beyond them. All commentaries and theories contain some misunderstanding, but we can still feel gratitude to these commentators and theorists for taking the teachings in a new direction to help people transform, while basically conforming to teachings of the Buddha.

양중인과(兩重因果)에 따르면, 첫 번째 단계에서 무명과 의지적 행동이 원인이 되고, 의식, 마음/몸, 6처와 접촉은 결과가 된다고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금생(今生)의 느낌, 갈망, 집착과 존재하게 됨은 다음 생의 태어남, 늙고 죽음이 된다. 이러한 이론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기는 해도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줄 알아야 한다. 주석과 이론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지만, 주석가와 이론가들이 근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사람들이 변화를 얻는 데 도움을 주고자 그 가르침을 새로운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When we hear from commentators that some links are causes (namely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and others are effects (namely birth and old age and death), we know that this is not consistent with the Buddha's teaching that everything is both a cause and an effect. To think that ignorance gives rise to volitional actions, which later give rise to consciousness, which then gives rise to mind/body would be a dangerous oversimplification. When the Buddha said, "Ignorance conditions volitional actions," he meant that there is a relationship of cause and effect between ignorance and volitional actions. Ignorance nourishes volitional actions, but volitional actions also nourish ignorance. Ignorance activates consciousness by producing feelings of discomfort, craving, boredom, intention, and aspiration, so these feelings are called volitional actions. once these feelings are active in consciousness, they make ignorance stronger. The tree gives rise to and nourishes its leaves, but the leaves also nourish the tree. Leaves are not just the children of the tree. They are also the mother of the tree. Because of the leaves, the tree is able to grow. Every leaf is a factory synthesizing sunshine to nourish the tree.

주석가들이 어떤 고리는 원인(말하자면 무명과 의식)이고, 다른 것들은 결과(말하자면 태어남과 늙고 죽음)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원임과 동시에 결과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 무명이 의지적 행동을 낳고, 의지적 행동은 나중에 의식을 낳고 의식은 마음/몸을 낳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할 만큼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무명이 의지적 행동을 낳는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무명과 의지적 행동 사이에는 인과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뜻이다. 무명이 의지적 행동을 조장하지만 의지적 행동도 무명을 조장한다. 무명은 불안, 갈망, 권태, 의향 그리고 열망 같은 느낌을 일으켜서 의식을 활성화하기 때문에 이러한 느낌들을 일러 의지적 행동이라고 한다. 이러한 느낌들이 일단 의식 속에서 활성화되면, 그것들은 무명을 강화시키게 된다. 나무가 잎을 낳고 자양분을 공급해주지만, 잎도 나무에게 자양분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잎은 그저 나무의 자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잎은 나무의 어머니이기도 한 셈이다. 잎이 있기 때문에 나무도 자랄 수 있다. 각각의 잎은 햇빛을 합성해서 나무에게 자양분을 공급해주는 공장 같은 역할을 한다.

 

The interbeing of leaf and tree is parallel to the interbeing of the Twelve Links of Interdependent Co-Arising. We say that ignorance conditions volitional actions, but ignorance also conditions consciousness, both through volitional actions and directly. Ignorance conditions mind/body as well. If there were no ignorance in mind/body, mind/body would be different. Our six organs and the six objects of these organs also contain ignorance. My perception of the flower is based on my eyes and on the form of the flower. As soon as my perception becomes caught in the sign "flower," ignorance is there. Therefore, ignorance is present in contact, and it is also present in feelings, craving, grasping, coming to be, birth, and old age and death. Ignorance is not just in the past. It is present now, in each of our cells and each of our mental formations. If there were no ignorance, we would not become attached to things. If there were no ignorance, we would not grasp the objects of our attachment. If there were no ignorance, the suffering that is manifesting right now would not be there. Our practice is to identify ignorance when it is present. Grasping is in volitional actions, feelings, coming to be, birth, and old age and death. Our infatuations, our running away from this or toward that, and our intentions can be seen in all the other links. Every link conditions every other link and is conditioned by them.

잎과 나무의 상즉성은 12연기의 상즉성과 같은 것이다. 무명이 의지적 행동을 낳지만, 무명은 의식을 낳기도 하는데, 그것은 직접 이루어지기도 하고, 의지적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무명이 마음/몸을 낳은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음/몸에 무명이 없다고 하면 마음/몸은 달라질 것이다. 6처에도 무명이 들어있다. 꽃에 대한 지각은 눈과 꽃의 형태에 근거하고 있다. 지각이 ‘꽃’이라는 표시에 사로잡히는 순간 무명이 있게 된다. 따라서 무명은 접촉 안에 있고 또한 느낌, 갈망, 집착, 존재하게 됨, 태어남, 늙고 죽음에도 있다. 무명은 단지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현재에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세포와 정신의 형성물 각각에 들어있다. 무명이 없게 되면 사물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무명이 없게 되면 집착의 대상에 사로잡히는 법이 없게 된다. 무명이 없게 되면 바로 지금 나타나있는 고통도 없게 된다.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그 모습을 드러낸 무명을 확인하는 것이다. 집착은 의지적 행동, 느낌, 존재하게 됨, 태어남, 늙고 죽음 안에 들어있다. 우리의 심취(心醉), 기피 또는 지향과 의도도 나머지 모든 고리 안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고리는 나머지 모든 고리를 낳고 그것들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

 

With this understanding, we can abandon the idea of a sequential chain of causation and enter deeply the practice of the Twelve Links of Interdependent Co-Arising. Although it says in the sutra that consciousness brings about mind/body, that mind/body brings about the six ayatanas, and so on, we must understand this as a way of speaking and nothing more. We have to see the Twelve Links in a broad, open way.

이렇게 이해하면, 인과관계가 순서대로 일어난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고 12연기의 수행을 철저하게 할 수 있게 된다. 경전을 보면 의식이 마음/몸을 낳고, 마음/몸은 6처를 낳는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편의상 그렇게 말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편협하지 않은 열린 자세로 12연기를 보아야한다는 말이다.

 

Consider, for example, craving as the fruit of feeling. Sometimes a feeling does not lead to craving, but to aversion. Sometimes the feeling is not accompanied by ignorance, but by understanding, lucidity, or loving kindness, and the outcome will not be craving or aversion. To say that feeling brings about craving is not precise enough. Feeling with attachment and ignorance brings about craving. We must link each of the Twelve Links with all the other links. This is what the Heart Sutra means when it tells us, "No Interdependent Co-Arising." The Twelve Links are "empty," because each of them would not exist without all the others. Feeling cannot be without craving, grasping, coming to be, birth, old age and death, ignorance, volitional actions, and so on. In each of the Twelve Links, we see the presence of the other eleven. Feeling can lead to craving, non-craving, or equanimity.

예를 들어 갈망을 느낌의 결과라고 생각해보자. 느낌이 갈망을 일으키지 않고 반감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느낌이 무명이 아니라 지혜, 밝음 또는 자애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경우도 잇는데, 그때 그 결과는 갈망이나 반감이 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느낌이 갈망을 낳는다고 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집착과 무명이 들어있는 느낌이 갈망을 일으킨다. 열두 고리 각각에 해당되는 것을 나머지 고리 모두에 연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반야심경에서 ‘연기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이다. 열두 고리는 ‘공(空)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각각의 고리는 나머지 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갈망, 집착, 존재하게 됨, 늙고 죽음, 무명, 의지적 행동 등이 없이는 느낌도 존재할 수 없다. 열두 고리 각각에 나머지 11가지 고리가 들어있음을 알아야 한다. 느낌은 갈망, 갈망 없음, 또는 평정을 낳을 수도 있다.

 

Ignorance is avidya, the lack of light. Vidya is understanding or wisdom. The presence of light means the absence of darkness. The presence of day means the absence of night. The presence of ignorance means the absence of understanding. The Buddha said, "When ignorance comes to an end, understanding arises."7 Ignorance leads to volitional actions, the will to live. When you are angry, you want to do something. But does understanding lead to the will to die? No, it leads to the will to live, also. In understanding there is loving kindness and compassion, and when you are compassionate, loving, and understanding, you want to do something to help alleviate the suffering. Anger, hatred, and ignorance are forms of energy. Understanding and compassion are also forms of energy.

무명은 아비드야(avidya), 즉 빛이 결여된 상태이다. 비드야(vidya)는 이해 또는 지혜를 말한다. 빛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둠이 없다고 하는 말이다. 낮이 있으면 밤이 없다. 무명이 있다는 것은 지혜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명이 사라지면, 지혜가 생긴다.” 무명은 의도적 행동, 즉 살려고 하는 의지를 일으킨다. 화가 나면 뭔가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 죽으려고 하는 의지를 일으킨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도 살려고 하는 의지를 일으킨다. 지혜에는 자애와 연민이 들어있고, 우리가 연민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지혜를 얻게 되면,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한다. 분노, 증오, 무명은 힘의 형태를 띠고 있다.

 

7 Samyutta Nikaya IV, 49 and 50.

 

On one side, there are actions for grasping things or satisfying our desires. on the other side is the volition to be present in order to help alleviate suffering. That is the intention of Buddhas, bodhisattvas, and all people of goodwill. They have love, understanding, and therefore the willingness to be present amidst the suffering in order to bring relief, comfort, and joy. The expression‎ "volitional action," or "will to live" has to be understood in these two ways: (1) to live in order to experience pleasure for oneself alone or to oppress others, or (2) to be present in order to help. Social workers do not go into slum areas because they want power or riches. They go because they want to serve, to fulfill their need of loving. That is also a volitional action.

한편으로는 사물에 집착하거나 우리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행동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것은 모든 부처님들과, 보살들과 선한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마음 자세이다. 그들은 자애와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심, 위로, 기쁨을 가져다주기 위해 기꺼이 고에 속해 있다. ‘의지적 행동’ 또는 ‘살려는 의지’ 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자기 홀로 쾌락을 누리기 위해 살아가는 것. (2)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사회사업가들이 빈민촌에 들어가는 것은 권력이나 부를 바라기 때문이 아니다. 봉사를 하고 자비심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의지적 행동, 즉 의도적인 행동이다.

 

When the Buddha looks at a flower, he knows that the flower is his own consciousness. There is nothing wrong in having consciousness. It is only when we water unwholesome seeds ? ignorance, hatred, jealousy, anxiety ?that consciousness causes suffering to ourselves and others. Consciousness is the base for distinguishing, planning, helping, and doing good work. That kind of consciousness is present in the Buddha and the bodhisattvas. The Buddha said, "How lovely is the city of Vaishali." He said, "Ananda, don't you think that the rice fields are lovely? Shall we go into town and share the Dharma?" These statements are based on lucid consciousness, consciousness full of understanding, care, and love.

부처님은 꽃을 바라보실 때, 그것이 당신의 의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의식이 일어나는 일에는 잘못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의식이 나와 남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무명, 증오, 질투, 걱정 같은 건전하지 못한 씨앗에 물을 주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의식이 있어야 분간하고, 계획을 세우고 돕고 착한 일을 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의식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비사리성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아난다여, 저 논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마을에 들어가서 법을 이야기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러한 말씀은 맑은 의식, 즉 지혜, 배려와 사랑이 가득한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We have to water the seeds of our own lucid consciousness. There is ignorance in us, but there is also wisdom. The seed of awakening is also present in each link. In compost there are flowers; and in flowers there is compost. If we know how to make compost, it will quickly become flowers. If we know how to look after flowers, they will last longer. Don't think there is only ignorance in the Twelve Links. There is also the seed of awakened wisdom. If you throw away the Twelve Links, you will not have the means to arrive at peace and joy. Don't throw away your ignorance, volitional actions, or consciousness. Transform them into understanding and other wonderful attributes.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맑은 의식의 씨앗에 물을 주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무명이 있지만 지혜도 있다. 각각의 고리에는 깨달음의 씨앗 또한 들어있다. 거름 속에 꽃이 있고 꽃 속에 거름이 들어있는 것이다. 거름을 만드는 법을 알면 그것은 재빨리 꽃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꽃을 돌보는 법을 알면 꽃들은 오래 피어있게 될 것이다. 열두 고리 속에 무명만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의 지혜의 씨앗도 들어있다. 열두 고리를 버린다면, 평화와 기쁨에 이르는 수단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무명, 의지적 행동, 또는 의식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깨달음과 다른 속성들로 변화시켜야 한다.

 

As you can see, there is also a positive side to the Twelve Links, although Buddhist teachers since the time of the Buddha seem to have overlooked this. We need to find words to describe the Interdependent Co-Arising of positive states of mind and body, and not just of negative states. The Buddha taught that when ignorance ends, there is clear understanding. He didn't say that when ignorance ends, there is nothing. What does clear understanding condition? Clarity, the absence of ignorance, gives rise to the desire to act with love and compassion. This is called the Great Aspiration (mahapranidhana) or mind of awakening (bodhichitta) in Mahayana Buddhism. When you practice the Four Noble Truths, you see that you can liberate yourself and other beings, and you stop running away from and destroying yourself. The positive side of volitional actions is the motivating energy called the Great Aspiration that propels us toward the beautiful and the wholesome, rather than toward the hell realms.

부처님 시대 이후 불교의 논사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이미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연기법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의 부정적인 상태의 연기만이 아니라 긍정적인 상태의 연기를 설명하는 데 적합한 말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무명이 사라지면 밝은 지혜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무명이 사라지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밝은 지혜는 무엇의 조건이 될까? 무명이 사라진 밝음은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행동하려는 욕구를 가져온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커다란 열망[대원(大願)] 또는 깨달음의 마음[보리심(菩提心)]이라고 부른다. 사성제를 수행하면, 나와 남을 해탈에 들게 할 수 있고 스스로를 망치거나 스스로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지적 행동의 긍정적인 측면은 지옥계가 아니라 아름답고 건전한 곳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대원(大願)이라고 하는 동기화하는 힘이다.

 

Just as volitional actions condition consciousness, the Great Aspiration conditions wisdom. When our ignorance has been transformed, what we have been calling consciousness becomes wisdom. Consciousness is described in the Vij?anavada schema in terms of eight consciousnesses, and these are transformed into Four Wisdoms. When the seeds of awakening, love, and compassion in our store consciousness have been developed and matured, our store consciousness (alayavij?ana) is transformed and becomes the Great Mirror Wisdom that reflects the reality of the cosmos. All the seeds that can become the Great Mirror Wisdom are already present in our store consciousness. We only have to water them. Great Mirror Wisdom is the outcome of the vow to save beings as our volitional action.

의지적 행동이 의식을 일으키듯이 대원(大願)은 지혜를 일으킨다. 무명이 변화되면, 의식이라고 불러왔던 것이 지혜가 된다. 유식학파에서는 의식을 팔식(八識)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식은 네 가지 지혜로 변화된다. 우리의 장식(藏識, 아뢰야식) 안에 있는 깨달음, 사랑, 연민의 씨앗이 개발되고 성숙되면, 장식(藏識, 아뢰야식)은 우주의 실재를 비추는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된다. 대원경지가 될 수 있는 모든 씨앗은 이미 우리의 장식 속에 들어있다. 우리는 그것에 물을 주기만 하면 된다. 대원경지는 중생을 구하는 것을 우리의 의지적 행동으로 삼겠다는 서원의 결과물이다.

 

When we invoke the name of Avalokiteshvara, this is the willingness and capacity of being there, listening, responding to suffering, and helping beings. When we invoke the name of Samantabhadra, that is the willingness and capacity of acting mindfully and joyfully to serve others. When we invoke the name of Manjushri, that is the willingness and capacity of looking deeply, understanding, and being the eyes of the world. With this kind of will, guided by clear understanding, our consciousness becomes an instrument of engagement in the world. The presence of a Buddha is an example of this kind of volitional action, an offering of consciousness of what is going on, the willingness to help, and knowing what to do and how to do it in order to alleviate the suffering in the world. That consciousness manifests in mind/body, just as it does for everyone else. But the quality of the Buddha's mind/body is different from ours, and we can see and feel that.

우리가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 고통에 응하고 귀 기울여서 중생들을 돕는 일을 기꺼이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보현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기뻐하고 알아차리는 자세로 남을 돕는 일을 기꺼이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수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깊숙이 들여다보고, 깨닫고, 세상의 눈이 되는 일을 기꺼이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밝은 지혜에서 인도된 이런 종류의 의지로, 우리의 의식은 이 세상에 참여하는 도구가 된다. 부처님의 존재는 이런 종류의 의지적 행동이 있다는 하나의 실례이고, 이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고 있으며, 기꺼이 돕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는 의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모든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음/몸에 나타난다. 그러나 부처님의 마음/몸이 가진 특성은 우리의 것과는 다르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We have to learn the ways to use our consciousness as a tool of transformation. Our six sense organs ? eyes, ears, nose, tongue, body, and mind ? can contribute toward the arising of Great Mirror Wisdom. We see that the Buddha also has six senses that enter into contact with six sense objects, but he knows how to guard his senses so that more internal knots will not be tied. The Buddha uses his six senses skillfully and realizes wonderful things. The first five consciousnesses become the Wisdom of Wonderful Realization. We can use these five consciousnesses to serve others. Mind consciousness, upon emancipation, becomes the Wonderful Observation Wisdom, wisdom that can see things as they are.

우리는 의식을 변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우리의 6근 - 눈, 귀, 코, 혀, 몸, 마음 - 은 대원경지(大圓鏡智)가 일어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부처님도 6경과 접촉하는 6근을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정신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당신의 감각을 지키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부처님은 당신의 6근을 교묘하게 사용해서 훌륭한 일들을 성취한다. 전5식(前五識)은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된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의식을 이용해서 남을 도울 수 있다. 의식은 해탈로 말미암아 묘관찰지(妙觀察智),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가 된다.

 

When the six senses and their objects make contact, this contact gives rise to a pleasant, unpleasant, or neutral feeling. When a bodhisattva sees a child suffering, she knows how it feels to suffer, and she also has an unpleasant feeling. But because of that suffering, concern and compassion arise in her and she is determined to act. Bodhisattvas suffer like the rest of us, but in a bodhisattva, feelings do not give rise to craving or aversion. They give rise to concern, the desire and the willingness to stay in the midst of suffering and confusion, and to act.

6근과 6경이 접촉할 때 그 접촉으로 인해 즐겁거나 괴롭거나 중립적인 느낌이 일어나게 된다. 보살은 괴로워하는 아이를 보면 그 괴로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므로 편하지 못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괴로움 때문에 배려와 연민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 보살은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보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지만, 보살의 경우에 느낌이 갈망이나 혐오를 낳는 법은 없다. 보살의 느낌은 배려, 즉 고통과 혼란의 와중에 기꺼이 머물며 행동하고자 하는 바람을 낳는다.

 

When a bodhisattva sees a beautiful flower, she recognizes that the flower is beautiful. But she also sees the nature of impermanence in the flower. That is why there is no attachment. She has a pleasant feeling, but it does not create an internal formation. Emancipation does not mean that she suppresses all feelings. When she comes into contact with hot water, she knows it is hot. Feelings are normal. In fact, these feelings help her dwell in happiness, not the kind of happiness that is subject to sorrow and anxiety, but the kind of happiness that nourishes. When you practice breathing, smiling, being touched by the air and the water, that kind of happiness does not create suffering in you. It helps you be strong and sane, able to go further on your way toward realization. Buddhas, bodhisattvas, and many others have the capacity of enjoying a pleasant feeling, the kind of feeling that is healing and rejuvenating without becoming attached. The feeling that we have when we see people oppressed or starving can give rise in us to concern, compassion, and the willingness to act with equanimity, not with attachment.

보살은 아름다운 꽃을 보면 그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또한 보살은 그 꽃이 무상(無常)하다는 것도 안다. 그 때문에 집착이 없다. 보살은 즐거운 느낌을 갖는다 해도 그것이 정신적인 형성물을 만들어내는 법은 없다. 해탈은 보살이 모든 느낌을 억누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보살은 뜨거운 물을 접하게 되면 그것이 뜨겁다는 것을 안다. 느낌은 정상이다. 사실 이러한 느낌은 보살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도와준다. 그 행복은 으레 슬픔과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행복이 아니라 정신을 강화시켜주는 종류의 행복이다. 숨 쉬고, 웃고, 물과 바람을 접할 때 느끼는 종류의 행복은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강해지고 또렷한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깨달음을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집착하는 일 없이 치유력과 활력을 주는 종류의 느낌, 즉 유쾌한 느낌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학대받거나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가지게 되는 느낌은 배려와 연민의 마음 그리고 집착하는 일 없이 평정심을 유지한 채 기꺼이 행동하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The Wisdom of Equality comes from the seventh consciousness, manas. Manas is the number one discriminator. It says, "This is me. This is mine. This is not mine." That is manas's specialty. We have to keep this consciousness, so that it can become the Wisdom of Equality. Our consciousness has to be transformed and not thrown away. It is the same with the Five Aggregates. We don't say, "The Five Aggregates are suffering," and throw them away. If we do, there will be nothing left ? no nirvana, no peace, and no joy. We need an intelligent policy for taking care of our garbage.

평등성지(平等性智)는 제7식, 즉 말나식(末那識)에서 생긴다. 말나식은 구별하는 데 가장 뛰어난 선수이다. 그것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말나식의 본분이다. 이 말나식을 지켜야만 그것은 평등성지가 될 수 있다. 식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지 버려야 되는 것이 아니다. 5온 역시 마찬가지이다. ‘5온은 고통이다.’고 하면서 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남아나는 것이 없게 된다. 열반도 평화도 기쁨도 없게 된다. 우리에겐 쓰레기를 잘 처리할 수 있는 현명한 정책이 필요하다.

 

Wonderful Observation Wisdom transforms manas into the Wisdom of Equality. We are one. We are equal. I may think that you are my enemy, but while touching the ultimate dimension, I see that you and 1 are one. Sometimes we only need to touch the Earth once, and the Wisdom of Equality appears right in the heart of our manas consciousness. Wonderful Observation Wisdom takes the place of the sixth consciousness, mind consciousness. Before the disappearance of ignorance, the sixth consciousness gives rise to many wrong perceptions, like seeing a rope as a snake, and a lot of suffering. Thanks to "transformation at the base" ? the store-consciousness becoming Great Mirror Wisdom ? the sixth consciousness can be transformed into Wonderful Observation Wisdom.

묘관찰지는 말나식을 평등성지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는 서로를 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인 차원을 접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번 지구와 접하는 것, 즉 절을 한번 하는 것만으로도 평등성지가 말나식의 한가운데 곧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묘관찰지는 제6식, 즉 의식(意識)을 대신한다. 무명이 사라지기 전에 제6식은 뱀을 밧줄로 보는 것과 같은 수많은 잘못된 지각과 고통을 낳는다. ‘근본 변환’ 덕분에 즉 장식이 대원경지가 됨에 따라 제6식은 묘관찰지로 변할 수 있게 된다.

 

The fourth wisdom, Great Mirror Wisdom, brings about miracles. In the past, our eye consciousness made us infatuated or put us in the dark. Now, with our eyes open, we can see the Dharmakaya, the teaching body of the Buddha. When our mind is clear like a calm river, the sixth consciousness is Wonderful Observation Wisdom and our store consciousness is Great Mirror Wisdom.

네 번째 지혜인 대원경지는 기적을 낳는다. 지난날 우리는 안식(眼識) 때문에 판단력을 잃거나 어둠 속을 헤매야 했다. 이제 눈이 열리게 됨에 따라 우리는 법신(法身)을 볼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잔잔한 강처럼 맑게 되면, 제6식은 묘관찰지가 되고 장식은 대원경지가 된다.

 

Clear understanding conditions the Great Aspiration and wisdom. If consciousness conditions mind/body, what does wisdom condition? We have body and mind, bodhisattvas have body and mind, and the Buddha has a body and a mind. We should not throw away our body and mind in order to experience liberation. We use the term Nirmanakaya (transformation body) to describe the bright side of mind/ body. In this body and mind, there is no longer ignorance, volitional actions, or wrong consciousness. The function of this body and mind is to awaken and liberate living beings. Love and compassion can manifest in hundreds of thousands of different forms. Avalokiteshvara can appear as a child, a politician, or as a beautiful woman with a voice as clear as the song of the kalavinka bird, the Indian cuckoo. A bodhisattva can be beautiful or ugly, poor or rich, healthy or sick. Any mind/body that has the function to bring about love, understanding, and happiness is the transformation body of the Buddha.

밝은 깨달음은 대원(大願)과 지혜를 낳는다. 의식이 마음/몸을 낳는다면, 지혜는 무엇을 낳을까?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고, 보살들에게도 몸과 마음이 있고, 부처님에게도 몸과 마음이 있다. 해탈을 누리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음/몸의 밝은 측면을 설명하는 데는 화신(化身)이라는 용어를 쓴다. 이 몸과 마음에는 무명, 의지적 행동 또는 잘못된 의식이 더 이상 없다. 이 몸과 마음의 기능은 중생들을 일깨우고 해탈시키는 것이다. 자비는 수만 가지나 되는 갖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어린이, 정치인 또는 가릉빈가 새, 즉 인도 뻐꾸기의 울음소리처럼 맑은 목소리를 가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보살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고 부자일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고 건강할 수도 있다. 사랑, 지혜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능을 가진 마음/몸은 모두 부처님의 화신이다.

 

If mind/body conditions consciousness on one side and the six ayatanas on the other, and the transformation body conditions wisdom on one side, what does it condition on the other? We can say that it conditions the result body (Sambhogakaya), which is the fruit of deep practice that is said to be marked by thirty-two signs. Every body is a collection of the Five Aggregates and has mental and physiological components (name and form). In the case of the Sambhogakaya, the physiology and the psychology contain clarity, bodhichitta, and the Four Wisdoms as means for teaching the path, and do not contain ignorance.

마음/몸이 한편으로는 의식 또 다른 한편으로는 6처를 일으키고, 화신은 한편으로는 지혜를 낳는다고 하면, 화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을 일으킬까? 보신(報身)을 낳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깊은 수행의 결과 32상(相)을 갖추게 된 몸을 말한다. 5온이 쌓여서 이루어진 몸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정신 및 생리적 구성 요소(마음/몸)를 가지고 있다. 보신(報身)의 경우 생리와 심리 속에 무명은 들어있지 않고, 길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인 네 가지 지혜와 보리심 그리고 깨끗한 것들이 들어있다.

 

Even within a Buddha's mind/body, there is contact. The Buddha drinks water and wears warm clothes. If he is not protected from the cold, he will become ill. When the six sense organs of the Buddha are in contact with the six sense objects, the Buddha has feeling, but that feeling does not lead to grasping and attachment. Contact in a Buddha (Sambhogakaya) is purified and mindful, and feelings are the same. The Sambhogakaya is wholly protected, because he practices guarding his six sense organs and their objects. We can also practice shining the light of mindfulness on the contacts that take place between our sense organs and sense objects. If we do not guard these contacts, even if we sit in a meditation hall for twelve hours a day, we are not practicing. When we walk, talk, eat, or whatever we do, if we guard our senses, the contacts that take place between our sense organs and sense objects will be clear and calm.

부처님의 마음/몸 안에도 접촉은 있다. 부처님도 물을 마시고 따뜻한 옷을 입는다. 추위를 막지 못하면 부처님도 병이 들 것이다. 부처님의 6근이 6경과 접촉할 때, 부처님은 느낌을 얻게 되지만, 그 느낌은 집착이나 애착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보신불(報身佛)의 경우 접촉은 정화되고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고, 느낌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신이 완벽하게 지켜질 수 있는 까닭은 6처를 지키는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접촉에 알아차림의 빛을 비추는 수행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접촉을 잘 지키지 못하면, 하루에 12시간씩 선방에 앉아있다 해도 그것은 수행이 될 수 없다. 걷고, 말하고, 먹거나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감각을 잘 지킨다면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접촉은 맑고도 잔잔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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