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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음악의 상관성
지난 호에서는 예배의 구성 요소에 대하여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했다. 말하자면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봉독이나 말씀의 선포(설교)를 통해서 전달되어진다. 그리고 이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인사와 축사, 사죄, 시편 찬송, 그리고 찬송, 신앙고백, 송영, 집도문도 말씀의 간접적인 형태인 것이다. 둘째, 주의 만찬은 종교개혁자들의 말대로 '보이는 말씀'인 것이다. 성만찬을 진행함에도 말씀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셋째, 기도는 기독인의 생활에서나 예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기도 중에 최고의 기도는 '주의 기도'이다. 이 주의 기도 중에 찬양과 경배, 감사와 간구, 죄 사함과 영적 승리, 주님의 권세와 영광이 다 언급된다. 넷째는, 성도의 교제( )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경직되어진 거룩한 예식이 곧 예배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옆에서 어떤 형제나 자매가 와도 자신의 기도나 찬송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약에 새 신자가 교회에 나왔다가 그런 무례한 일을 당했다고 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저렇게 철면피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 계속 다녀야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특별히 찬송을 인도하는 자들은 멘트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핵심도 없는 잔소리 가까운 멘트는 오히려 찬양에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배에 있어서 친절하고, 진지하고, 약간 유머가 담긴 예배의 멘트는 그 예배를 생기 있고,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소망의 공동체로서의 예배드리는 구성원들에게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격식에 매여 진실과 사랑과 경건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설교의 전달방법에서도 문어체보다는 구어체로, 구어체보다는 시어체(詩語體)로 표현되어져 단어 하나 하나에 생명력을 가지도록 소중하게 다뤄진다면 좋을 것이다. 어떤 음악사학자는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리듬이 그렇게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에 있어서 예배의식과 음악의 상관성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예배의 언어는 시(詩)였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음악적인 요소는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진다. 신구약성경에 '음악'이란 말은 3번( 대하 34:12; 전 12:4; 겔 33:32) 나온다. 또한 '노래'라는 단어를 포함한 성경절수는 무려 250절이나 된다. 성경 중에 시편에만 117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 시편은 '성도들의 노래'를 적은 책이기도 하다.
구약의 예배 가운데 나타난 말씀의 예전은 어떠했는가? 1926년 시편 연구가로 유명한 궁켈(Gunkel)의 시편 주석에는 지금껏 시편을 전쟁, 죄, 좌절과 감사의 경험을 가진 한 인간의 호소로서만 여겨 오던 해석에서 벗어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쌓는 예전 중에 읽혀지기 위하여 기록되어진 부분이 적지 않다는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다.
말하자면 시편은 예배에서 불려지기 위하여 기록되어졌다는 주장이다. 다윗은 성전 예배를 위하여 3만 8천 명의 레위 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중에 4천명은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한 음악가들이었다(대상 15:16; 23:5).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성전에서 드려진 음악은 철저히 훈련된 음악가들로 시편 33편 3절의 기록대로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라고 하였으니 '정교한 소리'를 내기 위하여 피나는 연습과 함께 수련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되어진다. 이처럼 시편은 새 노래로,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되어지기 위하여 사용되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시편을 분석해 보면 전체 150편 가운데 저자가 밝혀진 100편중에 다윗(73편), 아삽(12편), 고라 자손(10편), 솔로몬(2편), 모세, 헤만, 에단이 각 1편이다.
나머지 50편중에도 다윗의 저작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살펴 볼 때 다윗은 전쟁의 용사인 반면에, 왕이요, 시인이자 구약 성전 예배의식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가하면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의 저자이기도 한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고전 14:26)라고 밝히고 있다. 교회에서 예배로 모임을 가질 때에 신약시대에는 일정한 순서가 정립되지는 않았었다. 그러기에 방언과 방언의 통역, 그리고 예언, 찬송시 등 집회 시에 다소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예배 질서를 잡기 위해 바울은 은사는 충만하지만 무질서한 고린도교회에 예배 순서의 질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은 시(詩)가 3분의 1을 차지한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기는 겨우 지난 200년 전부터이다 구약성경의 시는 고전적인 시나 유럽계통의 시와는 다르며, 심지어는 후기 유대문학의 시와도 다르다. 시편 . 잠언 . 아가 . 예레미야 애가 . 오바댜 . 미가 . 나훔 . 하박국 . 스바냐서는(표제 따위를 제외하고는) 전체가 바로 시이다. 욥기 . 이사야 . 호세아 . 요엘 . 아모스서의 상당 부분은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예레미야서는 절반 가량이 시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의 창세기 . 출애굽기 . 민수기 . 신명기 . 사사기 . 사무엘 상하 . 전도서 . 에스겔 . 다니엘 . 스가랴서는 대부분 산문체로 되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시로서 이루어져있다. 단지 구약의 7책들 즉 레위기 . 룻기 .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더 . 학개와 말라기에만 한 줄의 시도 나타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히브리적 문체의 시들은 누가복음(사가랴의 찬양 1:68-79; 마리아의 찬양 1:46-56; 시므온의 찬송 2:29-32)과 계시록(4:11; 5:9-10; 7:15-17; 11:17-18; 15:3-4, 18; 19:1-8)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여러 경구적인 교훈에서도 히브리시의 평행법적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예배의 언어는 시(詩)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2. 예배의 형태는 찬송(讚頌)이었다
구약에 '찬송'이란 말을 포함한 성경 구절이 178절이나 된다. 신약에는 34절에 언급되어지고 있다. 신구약 성경에 212절에 '찬송'이란 말이 언급되어져 있다. 이것은 시편 22편 3절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표현한 구절처럼 과연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의 제사가 여호와의 임재에 있었다면 신약의 예배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하신 것처럼 성령의 임재 하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이라는 어원적인 의미다. 이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뜻인 것이다.
비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8-19)라고 하였다. 여기서 '시'는 시편을 가리키고, '찬미'는 교회에 정식으로 인정된 찬송을, '신령한 노래'는 아직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노래들을 지칭한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세속적인 음악들이 교회 안에까지 침투하여 들어오고 있다. 그래서 교회음악의 홍수시대를 이루고 있다. 홍수에는 막상 마실 물이 귀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음악의 경우가 그런 것 같다. 교회음악 중에 예배음악은 세속적인 리듬, 멜로디, 하모니 등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어떻게 같은 세상에 살면서 그 시대적인 문화의 옷을 벗을 수 있겠느냐? 하고 질문할 것이지만 노력하기 나름이다. 조금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교회에서 예배 시에는 피아노나 오르간 등 악기의 음색까지도 구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라고 하였다. 성도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할 존재들이다. 제사라는 말은 구약의 '희생 제사'를 염두에 둔 표현이기도 하다. 구약의 레위기는 '피의 제사'를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희생 제사를 언급하면서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14)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드린 '주의 만찬'이 예배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를 부인하는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폄하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은 세세에 영원히 찬송 드려할 내용인 것이다. 찬송가 212장 후렴에는 이렇게 찬송하고 있다.
♬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어린 그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
그래서 천상의 예배의 장면인 계시록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헨델의 메시야 53번째 곡에서도 "죽임 당하신 어린양 피 흘리사 우리를 구원하셨네/ 그에게 권능 또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세..."라고 위대한 주님의 대속의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 이 합창의 중후한 화음만큼이나 더 위대하고 웅장한 주님의 사역인 것이다 .
우리가 예배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찬송, 그리스도의 이룩하신 구속의 사역에 대한 찬송을 많이 불러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마귀의 권세는 깨어지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건설되어질 것이다.
3. 예배의 결과는 감사(感謝)와 축복(祝福)이었다
우리가 매주일마다 드리는 예배와 찬송! 살아 있는 예배! 여기에는 감사와 찬송과 축복이 가득 차고 넘쳐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고 하였다. 이 말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지으신 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 바로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다.
서양사에서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하게 말살된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기의 종교적인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학만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긍정하는 문학으로 탈바꿈되었다. 또한 자유주의 정신으로 교회의 교리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진리를 탐구하려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한 노래를 많이 부르게 되었다. 미술작품도 중세기에는 종교적이면서, 성경에서 그 소재를 얻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 방향이 자연이나 인물 중심의 소재로 바꿔졌다. 그러면서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인간 자신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마르틴 루터의 루터주의(Lutheranism)에 있어서는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강조했다. 중세기의 사제 중심의 라틴어 집례를 반대하고,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회중들이 부를 수 있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면서, 곡은 플레인 송(Plain song)이나 민속가요에서 빌어오기도 하고 특별히 자신이 작곡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코랄(Chorale)이라고 하는데, 가사는 길고 객관적이며 강력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독일찬송 중에 린카르트(M. Rinkart, 1586-1649)가 작사한 "다 감사드리세"(Nun danket alle Gott, 찬송가 20장)가 유명하다. 이 찬송은 30년 전쟁이 독일을 지날 때 기근과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장사지냈으며, 어떤 때는 하루에 40∼50구의 시체를 장사지낼 때도 있었다. 그러한 최악의 사태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찬송 시를 줄곧 썼다. 원래 그는 이 찬송을 가정에서 식사를 하기 전에 부르기 위해 지었다. 그러나 후에 이 곡이 국가적인 행사 때 불려지게 되기도 했으며, 지금은 훌륭한 예배 찬송으로 자리를 굳게 하고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 다 감사 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한편의 찬송이다. 독일 찬송은 루터교 찬송에도 영향을 주어 주관적이고 객관적이며, 열정적인 성격의 찬송을 많이 낳게 하였는데, 스패너의 동료였던 쉿츠(J. J. Sch ts, 개편찬송가 11장 작사)의 친구 니안데르(J. Neander)의 "다 찬양하여라"(찬송가 21장)는 참으로 우수한 찬송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담긴 찬송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감사와 찬양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공회 찬송가'를 분석해보면, 장조의 곡이 무려 96.77%나 된다. 이것은 찬송의 분위기가 긍정적이고 밝고 힘찬 곡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박자의 구성을 보더라도 4분의 4박자가 전체의 50.5%나 된다. 심지어는 공회찬송가 364장 BETHANY 음률인 "내 주를 가까이"라는 찬송까지라도 잘못인 줄 알면서도 4분의 4박자로 고쳐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나면 이 민족의 고질병인 '한'(恨)조차 물러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와 같이 예배는 감사와 축복과 은혜가 넘쳐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너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흐른다. 예배는 그 언어 자체가 시(詩)처럼 아름답고, 운율을 타고, 시냇물이 흐르듯, 강물이 흘러가듯 큰 물결과 같은 찬송과 찬양이 넘쳐나야 되겠다. 그럴 때 예배의 연장선인 성도의 삶도 감사와 축복이 넘쳐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는 찬송이 살아나야 한다. 명상과 기도의 찬송도 필요하지만 감사와 은혜와 경배의 찬송이 넘쳐나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마다 성령이 충만하여 은혜가 넘치고, 사랑의 언어인 시의 운율이 흐르며, 찬양과 감사가 넘쳐나는 예배를 드리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