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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隋) 나라
중국의 통일왕조(581∼618).
문제·양제(煬帝:廣)·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랫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즉 양견의 처는 북주의 주국(柱國:제2勳位)이던 독고 신(獨孤信)의 딸이었고, 그 처의 언니는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였으며, 양견 자신의 딸은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임과 동시에 정제(靜帝)의 어머니였다.
양견은 북주에서 그의 전권(專權)에 맞서는 위지형(尉遲) 등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상국(相國:首相)·수왕(隨王)이 되어, 그의 사위인 정제로부터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쉽게 북주를 빼앗아 수조(隋朝)를 개창하였다.
양견을 수나라의 고조(高祖)라고도 하는데, ‘隋’란, 원래 양견이 수왕(隨王)이 되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隨’자에 ‘착(o)’이 있으면 뛴다는 뜻으로 왕조가 안정되지 않는다 해서 ‘隋’로 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587년 그의 보호국으로 강릉(江陵:湖北省)에 도읍을 정하고, 남조(南朝) 양(梁)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後梁)을 멸망시켰으며, 589년 그의 차남인 진왕(晉王) 광(廣:煬帝)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통합함으로써, 동진(東晉)의 남천(南遷) 이래 317년에 걸쳤던 중국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제는 내정에 힘을 쏟아 재정적으로는 긴축정책(緊縮政策)을 취하였으며,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터키계(系)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598년(고구려 영양왕 9)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황실에서는 문제의 장남 용(勇)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간지(奸智)가 넘치는 진왕 광이 형인 용을 대신해 황태자가 되고 뒤에 즉위하여 양제(煬帝)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들 양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양제는 문제의 유업(遺業)을 이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완성하고,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東都:東京)를 뤄양[洛陽]에 조성하고, 토욕혼(吐谷渾)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611∼614년 돌궐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양제는 중국 통일 후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서둘러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원정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 원정 기지에 가까웠던 산둥[山東] 지방 백성들은 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나라의 영토여서 북주를 멸망케 한 수왕조에 대한 반감도 높아서, 반란사건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613년 제2차 고구려 원정 도중에 일어났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나, 그 후 수나라는 본격적인 반란기에 들어갔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이 있을 무렵 옛 남조(南朝)의 영토 안에서도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은 삽시간에 각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양제는 강도(江都:揚州)에 행행(行幸)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617년 타이위안[太原:山西省] 유수(留守) 이연(李淵)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타이위안의 호족들을 끌어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恭帝)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唐朝)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양제의 총애를 받던 왕세충(王世充)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越王:)을 옹립, 수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鄭國)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 황실은 그 맥이 완전히 끊겼다. 중국 법제의 모법이기도 한 당나라의 율령제(律令制)는 거의 이 때 그 기초가 다져진 것이다.
관제(官制)로는 상서(尙書)·문하(門下)·내사(內史)·비서(秘書)·내시(內侍)의 5성(省), 어사(御史)·도수(都水)의 2대(臺), 태상(太常)·광록(光祿)·위위(衛尉)·종정(宗正)·태복(太僕)·대리(大理)·홍로[鴻'A]·사농(司農)·대부(大府)·국자(國子)·장작(將作) 등 11시(寺)를 두었다. 그러나 정치의 중추적 기능은 상서·문하의 2성에 집중되어 있어, 상서성에는 이부(吏部)·예부(禮部)·병부(兵部)·도관(都官:당의 刑部)·탁부(度部:당의 戶部)·공부(工部) 등 6조(曹)를 두었는데, 이는 당나라 6성(省)·1대(臺)·9시(寺)·5감제(監制)의 기초가 되었다. 지방에는 주(州)·군(郡)·현(縣)을 두어 그 장관을 각각 자사(刺史)·태수(太守)·영(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주와 군은 그 넓이에 있어 차이가 없었으므로 군을 폐지하고 주에 현이 직속하게 하였다. 또한 자사가 그 때까지 장악하고 있던 병권(兵權)을 빼앗아 지방행정에서 병제를 분리하여 부병제(府兵制)를 따로 두었으며, 지방의 관리는 모두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꾀하였다.
토지제도로는 북위(北魏)에서 비롯된 균전제(均田制)를 북제(北齊) 때 보완한 제도를 근간으로 해서 시행하였으나, 그 세부적인 것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수나라는 중앙의 지배권력을 말단 백성에까지 침투시키기 위해 북위(北魏) 이래의 인보제(隣保制)를 두어 500가(家)를 향(鄕), 100가(家)를 이(里), 25가를 여(閭), 5가를 보(保)라 하여 각각 그 장(長)을 두었다. 특히 옛 북제(北齊) 지방에서는 모열(貌閱)이라 해서 백성의 머릿수를 일일이 확인하여 나이 등의 부정신고를 엄중하게 단속하였다. 이 같이 제도를 정비한 결과 인구의 장악수(掌握數)가 증대하여 609년에는 호수(戶數) 890만 7,549, 인구 4,601만 9,956명에 이르러, 이후의 당나라 초기 때보다 월등히 많은 인구수를 나타냈다.
또한 문제(文帝)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라 해서 그 때까지 귀족의 출세의 발판이 되어온 관리임용법을 폐지하였고, 양제는 관리임용법으로서 진사과(進士科)를 두었는데, 이것은 뒤에 당나라에 과거제(科擧制)라 불리어 성행하게 된 관리임용제의 창시로, 고려에서도 이를 실시하였다. 양제는 즉위 후 문제의 율령을 개정하여 대업율령(大業律令)을 발포하였는데, 후에 당나라가 제정한 율령은 문제의 개황율령(開皇律令)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의 남북통일에 의해서 그 때까지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문화가 하나로 융합하게 되어 남조계(南朝系)의 문화계 종사자들도 수나라 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사상면에서 왕통(王通)은 《문중자중설(文中子中說)》을 남겼는데, 그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바탕에 두고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전파한 특이한 사상가로, 후세에 그 사상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문제가 불교에 귀의(歸依)하여 주(州)마다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웠고, 양제도 진왕(晉王)으로 불릴 때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다. 지의(智)의 천태종(天台宗), 길장(吉藏)의 삼론종(三論宗)은 수나라 때 개창되었다.
문학면에서도 남북융합의 바람이 불어, 그 때까지 육조문학(六朝文學)이 외형의 아름다움을 위주로 명맥을 이어온 데 대한 반성이 가해졌다. 이 당시에는 새로운 경향의 문학이 생겼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唐) 시대에 일어나는 문학 융성의 소지(素地)를 숙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미술면에서는 불교 조각 가운데 석조물이 오늘날에도 많이 남아 있다. 뤄양 남쪽 룽먼[龍門]석굴의 약방동본존(藥方洞本尊)과 양협보살(兩脇菩薩)·양협나한(兩脇羅漢) 등과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가까운 톈룽산[天龍山]의 제8동굴은 문제 때인 584년에 조영(造營)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에서 가까운 위한산[玉5山]의 불곡사(佛錐?에는 수나라 기년(紀年)의 좌고(坐高)에서 30 cm~1 m에 이르는 불상이 많다. 또한 산둥성의 윈먼산[雲門山] 석굴에는 제1동굴과 제2동굴이 있는데, 제1동굴에는 중앙에 큰 좌불(坐佛), 좌우에 협시보살(脇侍菩薩)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경직된 블록적(的) 구성으로 당(唐)시대의 원만한 형식에 가까우나 우미(優美)하다기보다는 웅장하고 중후하다. 금동불 중에는 석조와는 달리 우아하고 친밀감에 넘치는 소상(小像)이 있다. 또한 한말(漢末) 삼국 이래 쇠퇴하였던 동경(銅鏡)의 제작이 성행하여 수경(隋鏡)이라 불리는 사수문(四獸紋)·사신문(四神紋)·단화문(團華紋) 등이 있다. 이들 거울의 배면 외구(背面外區)에는 문학적으로 표현된 명문(銘文)이 있으머, 그 안에 문제의 연호(年號)인 ‘仁壽’라는 글씨가 보여 수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랴오허강[遼河]을 경계로 수나라와 국경을 상접한 고구려는, 589년 수나라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원(中原)을 통일하자, 그 세력의 동진을 경계하여 재빨리 병사·군량 등을 증강하고 병기를 제조하는 등 가상적국(假想敵國)으로서 대하였다.
평원왕에 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598년(영양왕 9) 친히 말갈병(靺鞨兵) 1만여 기(騎)를 거느리고 랴오허강 서쪽의 요서(遼西)지방에 쳐들어가 양국은 첫 충돌을 하게 되었다. 이에 수의 문제(文帝)는 수륙군 30만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으나, 육상부대는 도중에 홍수를 만난 데다가 군량미의 수송이 여의치 않아 군사들은 굶주렸고 질병까지 유행하여 곤욕을 치렀다. 고구려의 평양성을 향하여 항행하던 해상부대는 폭풍을 만나 큰 타격을 받자, 수나라 원정군은 고구려와 싸워보지도 못하고 회군(回軍)하였다. 그 후 양국 관계는 고구려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요서를 공격한 데 대한 사과를 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일단 정상을 회복하였으나, 수의 식자층에서는 고구려를 다시 정벌하자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문제에 뒤이어 즉위한 양제는 부황(父皇) 때의 한(恨)이 남아 있는 데다, 고구려가 돌궐(突厥)과 비밀히 내통하면서 조공(朝貢)조차 바치지 않자, “고구려왕이 친조(親朝)의 예를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때맞추어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시달려 온 백제와 신라는, 번갈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토벌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위협이나 주변정세에도 고구려는 굴하지 않고 입조(入朝) 요구를 묵살, 거부하였다. 고구려의 태도에 화가 난 양제는 원정을 결심하고 전쟁준비에 총력을 기울여, 612년(영양왕 23) 제1차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당시의 수군(隋軍) 규모는 수군(水軍)을 제외한 육군만도 좌익 12군(軍), 우익 12군에 총수 113만 3800명, 군량운반자는 그 2배에 이르러, 출정 군사가 모두 탁군(郡:北京 부근)의 본진을 떠나는 데 40일이 걸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해전술에도 수군은 고구려군의 지략과 용맹에 고전하다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으로 섬멸되어 개전 4개월 만에 전군을 철수하였다.
수나라는 613·614년 2차·3차의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수는, 고구려가 3차원정 때 제의한 강화(講和)조건에 따라 고구려 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였으나, 고구려 영양왕은 끝내 수나라에 가지 않았다. 수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무리하게 강행한 징발·사역 등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2차 원정 때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전국이 반란에 휩쓸려, 결국 고구려의 원정이 수왕조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모처럼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수는 3국에 정치적·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칠 기회를 맞았으나, 그 후반기의 잦은 원정·반란 등으로 인한 국력 소모로 자체의 문화조차 뚜렷이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렇다 할 문화적 교류도 없이 다만 승려들이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해 건너간 데 그쳤으며, 간접적으로는 율령·관제(官制)·과거제도(科擧制度) 등 수에서 제정된 제도들이 당(唐)·송(宋)을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에 전래되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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