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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 75년 헌정사상 처음
2018년 서울고법 민사12부(재판장 이범균) 국가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기지촌 여성 117명에게 국가배상책임 인정판결
2016년 홍콩 카오룽반도에서 대규모시위(어묵혁명) 홍콩경찰 30여 년 만에 시위대 향해 발포
2014년 일본 폭설 사망 633명, 도쿄 45년 만에 27cm 나가노현 49cm 후쿠시마 44cm
2013년 한파 대관령 –25.6℃
2010년 뉴올리언스 세인츠(NFL), 창단 후 첫 우승
2010년 2월 8일 제44회 수퍼볼(Super Bowl)에서 NFL(미 프로풋볼리그)의 뉴올리언스 세인츠가 우승했다. 세인츠는 두 차례(1971·2007년) 수퍼볼 정상에 오른 전통의 강호 인디애나폴리스 콜츠를 상대로 31대17로 승리했다. 창단 후 43년 만의 첫 우승이다. 세인츠는 1967년 창단 후 20년 연속 5할 이하의 승률을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엔 겨우 7차례 얼굴을 내밀었다.
세인츠는 올 시즌 70.6%의 NFL 역대 최고 패스 성공률로 리그 최다 득점을 이끈 브리스의 활약에 힘입어 NFC(내셔널 콘퍼런스) 1위를 차지했다. 이번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브리스는 MVP를 4회 수상한 최고 쿼터백 페이튼 매닝을 압도했다. 브리스는 이날 39번 패스를 던져 32번을 성공시켰고, 2개의 결정적인 터치다운 패스를 기록했다.
한편, 제44회 슈퍼볼이 미국 텔레비전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률 조사회사인 닐슨미디어리서치는 7일 저녁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선라이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44회 슈퍼볼 시청자가 1억650만명으로 추정돼 지난 1983년 미군 야전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매쉬(M-A-S-H) 시리즈 최종회 당시의 1억597만명을 능가했다고 8일 발표했다.
2007년 전 플레이보이잡지 모델 안나 니콜 스미스, 호텔서 돌연사
2007년 2월 8일 플레이보이 잡지 모델 출신 배우 안나 니콜 스미스(Smith.39)가 미국 플로리다주 할리우드에 있는 하드록호텔 객실에서 졸도해 숨졌다.
스미스의 개인 간호사는 스미스가 묵고 있는 객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경찰에 신고했으며, 경호원이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으나 사망했다.
금발의 육체파 배우인 스미스는 1990년대부터 섹시한 의상과 매력적인 몸매로 대중문화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플레이보이지 모델, 청바지 모델, 리얼리티쇼 사회자 등을 맡고 영화에도 출연하며 ‘제2의 마릴린 먼로(Monroe)’로 불렸다. 최근에는 체중을 30㎏ 가량 줄이는 데 성공하면서 체중감량제 회사의 대변인으로 활동해왔다.
스미스는 1994년 당시 63세 연상인 89세의 텍사스 석유 재벌 하워드 마셜(Marshall) 2세와 결혼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남편이 결혼 14개월 만에 사망하자 남편의 전처 소생 장남인 피어스 마셜과 유산상속을 놓고 분쟁을 벌여왔다.
2003년 일본 요미우리(讀賣) 신문, 중국이 다탄두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보도
2003년 2월 8일, 중국이 1년전 12월 미국의 미사일방위체제(MD)에 대항하기 위한 미사일 다탄두화 실험에 성공했다고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중국 소식통을 인용, 보도했다. 이번 실험 성공으로 중국이 미국의 MD에 대항하기 위해 핵전력을 급속히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고 요미우리는 평가했다.
실험은 산시(山西)성 인민해방구 전략미사일 부대(제2포병) 기지에서 실시됐으며 다탄두 각개 목표 재돌입 비행체(MIRV) 방식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MIRV 방식이란 미사일이 대기권에 진입하기 전에 각각의 탄두가 분리되어 각각의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방식이다. 이는 냉전시대 때 미국과 소련이 개발한 방식이며, 탄두 하나하나에 유도장치가 달려 있는 MaRV(기동 재돌입 비행체) 방식보다는 떨어지지만, 단순히 탄두를 여럿 단 MRV(다탄두 재돌입 비행체) 방식보다는 발전한 것이다.
중국이 다탄두화를 서두른 것은 미국의 조지 W 부시 정권이 동아시아에서 MD망 구축을 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요미우리는 중국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분석했다. 미국의 MD망을 돌파할 수 있는 다탄두 미사일을 보유하는 것이 대미 억지력을 유지, 향상시킬 수 있는 방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대미 미사일은 미국 본토를 사정거리에 두고 있는 대륙간탄도탄(ICBM)과, 대만과의 충돌 등 유사시에 미군 개입을 견제하는 중거리 미사일로 나뉜다. 이번 실험에 사용된 ‘동풍 21’은 후자쪽으로, 1980년대 이후 50기 정도가 배치돼 있다고 요미우리 신문은 전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중거리 다탄두 미사일을 실험한 것은 중국 주변국가들에 위치한 미군기지를 인질로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라며 “장거리 ICBM의 다탄두화는 2~3년 안에 가능하고, 원자력 잠수함에 ICBM을 탑재하는 것도 4~5년 후에는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3년 제10차 로또복권 추첨 결과, `1등 당첨금 835억원`에 13명 당첨
2003년 2월 8일 오후 8시45분쯤 서울 신림동의 D호프집. ‘로또복권’ 추첨 생방송이 시작되는 순간 10개 테이블에서 40여명의 손님들 대화가 멈췄다. 이들의 시선은 벽에 걸려 있는 TV에 동시에 쏠렸다. 곧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현금화될 확률 ‘814만5060분의 1(약 0.00001%)’인 복권 번호표는 휴지조각으로 갈갈이 찢겨졌다. ‘1등 당첨금 835억원’을 두고 대부분 국민을 몸살나게 한 전대미문의 ‘10회 로또복권’ 추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130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복권 구매자 수를 고려하면 1인당 평균 2만원(10게임)을 투자한 것으로 계산됐다. 그러나 구매자 중 1200여만명이 최소 1만원 이상의 손해를 봤고, 또 너무나 허황한 꿈에서 깨어나면서 허탈감에 빠졌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naver) ‘세상살이 토론장’에서 한 네티즌은 “전국민 돈을 내서 13명에게 돈을 모아준 셈”이라고 했다. 너도 나도 ‘대박의 꿈’을 좇던 로또광풍이 지나간 뒤 우리 사회 곳곳은 정신적 공황(恐慌)상태에 빠진 듯했다..
심지어 로또광풍은 일부 사람들에게 범죄와 결탁된 도덕적 해이 현상을 부추겼다.
농협 돈 8억여원을 빼돌려 주식에 투자했다 투자금을 대부분 잃어버린 모 농협직원 김모(33·경남 창원시)씨는 ‘인생역전’을 꿈꾸며 1000만원을 빼돌려 전액 로또복권을 구입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지난 9회차 때 로또 1000만원어치를 구입했지만 당첨금 1만원인 5등에 40게임만 당첨됐다
2001년 조선일보 등 중앙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 시작
중앙언론사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2001년 2월 8일부터 시작됐다. 서울지방국세청은 이날 400여명의 조사요원을 조선일보 등 23개 중앙언론사에 투입, 60일간의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이에앞서 국세청은 6일부터 주요 신문사에 용지를 공급하는 4개 제지회사에 70여명의 조사인력을 투입,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중앙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는 1994년 이후 7년 만의 일이다.
국세청은 “이번 조사는 5년마다 한번씩하는 정기 법인세 조사일 뿐, 어떠한 정치적 목적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고 밝혔지만 한나라당은 “최근 언론보도에 불만을 품은 현 정권이 언론사 세금추징, 자금줄 차단 등을 통해 언론 길들이기 작업에 나선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공정거래위원회도 11일부터 언론사 조사에 착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공정위는 ‘지난해 말부터 준비해 왔던’ 일이라고 설명했으나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있는 시기와 겹쳐 ‘언론 압박용’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2001년 연극 `품바`의 작가 겸 연출가 김시라씨 별세
연극 `품바`의 작가 겸 연출가 김시라씨가 2001년 2월 8일 향년 55세로 별세했다. 각설이 타령을 끌어들인 민중극 `품바`로 1980년대 소극장 연극에 새 바람을 일으킨 그는 전남 무안군 일로면에서 태어났다. 한 때 시를 쓰다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광주의 한을 어떤 식으로든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한 김씨는 연극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공`을 보고 연극의 힘을 절감해 연극에 뛰어들어 1인극 `품바`를 만들었다.
낮은 자들의 한을 각설이 타령 속에 녹여내며, 힘있는 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과 냉소를 담아낸 `품바`는 1981년부터 20년 가까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공연됐다. 김씨는 극작가 겸 연출가였으나 공연마다 고수로 북을 치면서 걸쭉한 사설로 세상을 꼬집고 극의 분위기를 돋궜다.
군사정권 시대의 답답한 세상을 살던 사람들에게 `품바`는 신명을 북돋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공연 내용을 문제삼은 당국의 금지로 해외 공연이 좌절되는 등 어려움도 겪었다. 그는 2001년 `품바` 20주년을 맞아 대대적 기념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98년 노벨문학상 수상한 할도르 락스네스 사망
195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슬란드 작가 할도르 락스네스가 1998년 2월 8일 레이캬비크 교외의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95세였다. 락스네스는 레이캬비크 출생으로 1919년 첫 작품 ‘자연의 아들’을 출판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청년 시절의 그는 세계의 여러 종교와 철학들에서 만족할 만한 믿음을 찾으려고 한 반항적인 불가지론자였다. 1924년 자서전의 성격이 짙은 소설 ‘카슈미르의 대직조공’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자신이 신봉하는 가톨릭에 대한 호교론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끝에 가서는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만다. 그 다음해부터 3년 간 미국에 머물면서 사회주의로 전환한 뒤 일생동안 그것을 고수했다.
1930~32년에 다시 아이슬란드로 돌아가서 2편의 연작 소설을 썼는데 이들 작품은 1936년 영어로 번역돼 ‘살카 발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이 소설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다작(多作)의 작가였으며, 간결하고 힘찬 고대사가 스타일의 문체를 현대문에 잘 재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소설은 풍자와 야유, 약자에 대한 동정으로 가득 차 있다.
1996년 `비날론` 개발한 월북 화학자 이승기 박사 사망
월북 화학자 이승기 박사(91)가 1996년 2월 8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지난 1961년부터 35년 동안 국가과학원 함흥분원 원장으로 재직해온 이박사는 북한의 화학공업과 경공업을 일으키는데 큰공을 세운 인물로 해방 전 일본에서의 연구경험을 토대로 `비날론`이라는 화학섬유를 대량생산해 낸 주인공이며 석탄화학공업의 대가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전세계가 석유화학공업시대로 들어선지 오래됐음에도 북한이 아직 석탄화학공업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이승기와 북한당국의 자력갱생 구호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 북한전문가는 "그가 없었으면 북한이 오래전에 석유화학공업시대로 들어섰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90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중앙고보를 거쳐 일본에서 유학했다. 교토대학을 졸업한 후 이 대학에서 연구사 조교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947년 공과대학 학장까지 지냈으나 1950년 8월 북으로 올라갔다. 1957년 제2기 최고인민회의부터 지금의 제9기까지 대의원으로 있으며 `김일성상` 계관인 `노력영웅` 인민과학자 칭호 등을 받았다.
1992년 통일국민당 창당(대표최고위원 정주영)
1990년 사할린 동포 모국방문 2진 120명 50년만에 방문
1989년 남북고위급회담을 위한 첫 예비회담
1988년 서울대 민병구 박사, 국내 첫 인공심장 개발
서울대 의공학과 민병구 박사팀이 세계 최소형의 모터식 인공심장을 개발했다고 1988년 2월 8일 발표했다. 민병구 박사팀은 1986년부터 정부의 특정연구개발사업으로 인공심장 개발을 추진, 그동안 미국-일본에서 개발된 모터고정식 인공심장에 비해 크기가 3분의1 이상 줄어든 모터이동식 인공심장을 개발하는데 성공, 1월 12일 미국특허 471890호를 획득하는 개가를 올렸다.
새로 개발된 인공심장은 인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혈전 등이 형성되지 않는 폴리우레탄 재질을 이용하여 좌우 심실사이를 박동모터가 이동되도록 하는 새로운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심장용적이 5백cc, 무게 6백g 정도로 인체에 무리없이 이식할 수 있어 실용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종래 미국-일본에서 개발된 모터식 인공심장은 박동모터가 2개의 심실가운데에 고정된 구조로 인체 이식용으로는 용적이 지나치게 커서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1987년 김만철 일가 귀순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북한을 탈출한 지 24일 만인 1987년 2월 8일 별전세기편으로 서울에 도착, 귀순했다. 김만철 일가는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 북한 청진항 소속 어로감시선 50톤급 청진호를 타고 청진항을 빠져나왔으나 배가 기관고장을 일으키자 일본의 한 항구 외항에 정박중 20일 오후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발견되어 쓰루가항으로 예인됐다.
김만철씨는 "살기 위해 북한을 떠났다"고 밝혔다. 이들의 처리와 최종행선지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북한 중국간에 신경전과 협상이 전개된 끝에, 일본 정부에 의해 추방형식으로 대만으로 보내진 다음 이들의 의사에 따라 한국으로 귀순하게 된 것이다. 대만을 거쳐서 비행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의 첫마디는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아왔다”였다.
김만철 일가의 귀순은 당시까지 분단 이후 단일 귀순 케이스로는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이후 97년 5월 안선국씨와 김원형씨 일가 14명이 해상탈북했고, 2002년 5월 북한주민 21명을 태운 어선이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출발하여 서해 공해상을 통해 귀순했다.
1985년 김대중 2년3개월 만에 미국에서 귀국
1984년 제14회 동계올림픽 개막(유고 사라예보)
1979년 홍성에 지진 발생 1973년 모자보건법 공포
1963년 이라크 군부구데타 키셈수상 피살
1962년 미국 국무성 월남에 군사원조사령부 설치 발표
1961년 한미경제원조협정 조인
1955년 소련 수상 말렌코프 실각 후임에 불가닌 취임
1948년 북한, 조선인민군 창설 선포
1946년 독립촉성회와 반탁운동위원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통합(총재 이승만)
1946년 평양에서 북조선인민위 발족 위원장에 김일성
1944년 일제, 한국인에 전면 징용제 실시
1944년 이두-향가 연구의 개척자인 일본의 오구라 신페이 사망
고대 한국어인 이두와 향가 연구의 개척자인 일본의 오구라 신페이 교수가 1944년 2월 8일 별세했다. 그는 동경제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1911년 서울로 건너와 고대 한국어 연구를 본격 시작했다. 1927년에 향가와 이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그는 고대 한국어와 한국어 방언에 온 힘을 쏟았다.
1926년에 경성제대 교수, 1933년에 동경제대 교수로 근무하며 고대 한국어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그에게 일본 학사원 은사상과 조선문학 공로장이 수여됐다. 이처럼 한국 고대 문학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향가의 해독은 일본 학자들 손에서 시작됐다. 일본인 학자 아유가이가 처용가, 서동요, 풍요 세편을 해독해 1923년 `조선사 강좌`에 소개한 것이 그 효시였다.
오구라 교수는 1929년 `향가 및 이두 연구`로 향가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오구라는 이 책에서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향가 11수 등 현존하는 향가 전체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다.
한국에서는 양주동 박사가 그 뒤를 이어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조선 고가 연구`(1942)로 집대성했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양주동은 오구라의 성과에 자극받아 1937년에 돌연 국학자로 전향했다. 얼마뒤 '청구학총'19호에 '향가의 해독'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학계를 놀라게 한 양주동은 오구라의 대저가 절반 이상의 개정이 필효하다며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양주동의 '조선 고가 연구'는 정확성과 문학적 감성, 논리의 완벽성에서 오구라의 연구성과를 압도했다.
1928년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전쟁수단의 전시사용 금지에 관한
의정서, 국제적으로 발효
1919년 ‘2ㆍ8독립선언’ 선포
1919년 2월8일 일보 도쿄에서 재일유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대통령 T.W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계기가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1918년12월15일자(The japan Advertizer)에서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다는 보도와 12월18일자에 파리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고 하는 보도를 접한 재일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9년 1월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김도연, 백수관, 최팔용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2월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일본정부, 일본국회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고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10명의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다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보다 더 강경하게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1906년 런던트리뷴지, `을사조약은 고종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고종은 포로신세`라는 기사와 함께 을사조약체결경위와 고종이 전달한 밀서를 번역 게재
1904년 일본이 중국 여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 러일전쟁 발발
일본 해군이 1904년 2월 8일 중국 여순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 함대에 기습공격을 개시함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도고 제독이 이끄는 주력 함대는 이날 비밀리에 여순항까지 접근한 후 야습으로 그곳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격침시킴으로써 공격 개시 첫날부터 전쟁을 주도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에 당황한 러시아 함대는 소극적인 수세작전으로 일관했다. 덕분에 일본함대는 여순 근해를 단숨에 장악하고 여순항을 완전 포위했다. 계속된 일본의 공격에 다수의 러시아 함대가 격파됐다.
이틀후인 2월 10일 일본은 형식적이나마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 양국간의 전쟁은 본격화됐다. 일본 해군 함대가 비록 러시아보다 규모는 작았으나 병사들의 전투능력과 사기, 그리고 장비 수준면에서는 영국 해군에 못지않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일본은 전력이나 국토, 인구 등 모든 면에서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란 일반의 예상을 비웃듯 처음부터 승승장구했다. 여순항 주변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쉴새없이 여순을 공격했으나 러시아의 방어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고립된 상태에서 3차에 걸친 일본군 공격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러시아군도 한계상황에 도달, 마침내 1905년 1월 1일 항복함으로 여순도 일본군 수중에 들어갔다.
양측 전투손실은 러시아군이 3만1천여명, 일본군이 5만8천명일 정도로 피해가 컸다. 여순전투로 전쟁의 승부는 이미 결정되었지만, 일본 육군이 1905년 3월 만주 봉천에서 32만 러시아군을 격파했고, 도고 제독이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도 5월 27일 러시아 발틱함대를 참패시킴으로 전세를 확정지웠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만주 단독점령을 우려하며 중재에 나서, 양국은 1905년 9월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함으로 러일전쟁이 막을 내렸다.
1883년 미국 경제학자 슘페터 출생
1877년 청, 주영공사관 설치
1874년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 출생
1856년 이탈리아의 세균학의 창시자 바시 사망
1828년 프랑스 작가 베른 출생
1819년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 출생
1725년 러시아의 차르, 황제 표트르 1세 사망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1725년 2월 8일 사망했다. 알렉세이 14세 황제의 후처에게서 태어나 10세때인 1682년 왕위에 오른 표트르는 어린 탓에 누나 소피아의 섭정을 허용했지만, 소피아의 음모가 알려지자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고 1689년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비록 어려서 크렘린에서 쫓겨나 정규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못했지만 키가 컸고 총명했으며 호기심이 많았다. 하사관으로 신분을 감추고 유럽을 여행하며 문물을 배울 정도로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는데 전력을 다한 표트르는 러시아 근대화를 우선과제로 삼았다. 긴 수염과 거추장스런 옷을 서구식으로 바꾸는 일대개혁을 단행했으며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보내 그곳의 선진 문화와 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서방으로의 창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발트해로의 진출이 급선무인 것을 깨달은 표트르는 스웨덴과 21년간이나 북방전쟁을 벌여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통한 `서방으로의 창구`를 여는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도 재편해 원로원을 창설하고 지방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징병제와 사관학교를 세워 강한 러시아 군대도 도모했다. 1721년 그가 세운 원로원이 그에게 임페라톨(황제)과 대제라는 칭호로 그를 호칭함으로써 러시아의 절대주의 왕권도 본격 시작됐다.
1703년부터 네바 하구의 삼각주에 새로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 이곳을 `유럽에 대한 창구`로 사용함과 동시에 발트해 지배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다. 부국강병책으로서 군사 행정 산업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이 표트르에 의해 단행됨으로 비로소 러시아는 후진성을 벗어나 유럽의 일환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1612년 `휴디브라스 Hudibras`로 유명한 영국의 시인 새뮤얼 버틀러 출생
1587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잉글랜드에서 참수
1572년 조선 중기의 사상가 남명 조식 선생 사망
조선 중기의 대표적 사상가 남명 조식 선생이 1572년 2월 8일 타계했다. 조식은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 이황과 자주 비교되는 유학자였다. 조식과 이황은 같은 해에 태어나 지척에 살았으나 일생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동반자적 경쟁관계`였다.
둘은 성리학이 조선의 사상적 근간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16세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독립적 학파를 구축한 거유(巨儒)였다. 남명은 지조의 사상가였다. 여러차례 관직 맛을 본 퇴계와 달리 남명은 평생 재야였다. 현실과 타협하는 자를 소인으로 보고 학자의 실천궁행을 역설했다. 이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내면적 수양인 경(經)과 사리판단의 근거인 의(義)를 강조했다.
이런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곽재우, 정인홍 등 그의 많은 제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이 점은 일제시대에까지 영향을 미쳐 남명 연구는 오랫동안 배척돼 왔으나 1980년대 민주화 시기가 돼서야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시작됐다.
1452년(조선 문종 2) 황희 정승 세상 떠남(1363- )
1398년(조선 태조 7) 서울 숭례문 창건
1329년 문익점 탄생
문익점은 11세 때 이곡의 제자가 되었고 1360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 1363년에 사신으로 원 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붓뚜껍에 목화씨를 숨겨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만든 무명옷을 선보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