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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 충전소(大名*大明*大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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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구조주의 비평(1) : 블라디미르 프롭, 민담 형태론
러시아 형식주의 말기에 글을 썼고 후일 프랑스 구조조의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블라디미르 프롭은 바흐친만큼이나 뒤늦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주로 1914년에서 1930년대까지 글을 썼으나 50년대에 가서야 서구에 알려진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맑시즘이 압력을 받아 러시아 형식주의가 흩어져갈 무렵 1928년에 쓴 <민담 형태론>은 30년이 지나서야 영어로 번역되고 구조주의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레비-스트로스는 1960년 그 책에 대한 공격적인 서평을 썼고 프롭은 이에 대한 방어를 한다.
알렌 던디즈는 프롭을 미국에 소개했고 70년대에 브래몽, 그레마스, 토도로프 등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프롭의 이론을 세련시킨다. <민담 형태론>은 프롭 자신이 후일 회상하듯 민담의 모든 복잡한 형태를 연구한 게 아니고 동화라는 특정 타입만 연구한 책이었는데 편집자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민담으로 제목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 내용은 동화 형태론인 셈이다.
프롭은 기존의 민담 연구 방식이 비과학적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야기 그 자체가 ‘어떻게 제시되는가’를 탐색하는 형태로의 전환이다. 형태의 구조가 연구되고 나서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연구가 뒤따른다. 예를 들어 그는 각 나라의 민담을 비교할 때 혹은 민담의 유사성을 밝힐 때 그 기준은 내용이 아닌 구조에 의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발한다. 그는 이 반복의 구조가 인간 내부에 잠재한 근원적인 소망과 관계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동화의 반복되는 내용을 특정 도식으로 표시하고자 했다.
동화를 보면 인물들은 달라지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는 같다. 이 행위를 중심으로 동화를 분석해볼 수 있다. 프롭은 이 행위에 ‘기능(function)'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기능이란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나는 주요 행동들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말을 타고 고주의 창문으로 뛰어든다고 해서 말타고 뛰어들기가 기능은 아니다. ‘연이을 구하기 위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기능이다. 그러니까 기능이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전체 이야기 속에서 차지하는 역할, 그리고 그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와의 관계 속에서 산출된 그릇 같은 것이다.
기능은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구조이다. 이 기능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그리고 동화 속에서 기능이 일어나는 순서는 같다. 다시 말하면 순서대로 일어난다. 모든 동화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한 가지 유형에 속한다. 이것이 동화의 형태소이다. 식물학에서 형태소란 구성부분들의 상호연과성과 이것이 전체와 갖는 관계들, 즉 구조이다.
프롭은 100편의 동화를 분석하여 31개의 기능을 밝혀낸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도식으로 연결짓는다. 모든 동화는 이 연속된 기능들 가운데 어느 부분이 모여 엮어지며 순서는 차례를 따른다. 어떤 동화가 이 31가지 기능을 모두 갖는다면 그 동화의 형태소는 괄호 속의 기호를 죽 늘어놓은 꼴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위의 것들 중 어떤 부분들이 결합하게 된다. 프롭은 모든 동화가 형태상 유사하다면 하나의 근원에서 유래했다고 가정할 수 있고 이 단일 근원이 지리학적인 문제보다 인간의 심리학적인 문제에 더 기인한다면 각 나라의 동화구조를 통해 인간의 동질성과 민족의 특수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프롭의 형태소가 문학 연구에 이바지한 것은 주제나 내용으로 작품을 가늠하는 대신 기능이라는 어떤 틀을 뽑아내어 관계들 속에서 작품을 보려한 것이었다. 이것이 여러 문장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길을 터주었고 보편 구조로 가는 길목을 연 것이다.
겉보기엔 각기 다른 얘기들인데 기능으로 가려보니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묶어볼 수 있고 한 분야의 것들을 묶을 수도 있고 다른 분야끼리도 묶을 수 있다. 내용보다 표층 구조를 철저히 탐색하여 문학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 프롭의 이론은 새로운 서사분석의 시발점이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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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화기호학 정면 비판 | ||||||||||||||||||||||||
조재룡 박사, 메쇼닉 다룬 저서에서 소쉬르 기호학 재해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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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대립되는 미메시스 개념을 시작으로 산문 개념 전반에 대한 점검이 이뤄진다. 기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소쉬르에 대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문화기호학 전반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최근 들어 부각되기 시작한 번역 문제 제반의 문제를 '문학번역'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다룬다.
<시, 시학, 주체성>이란 부제의 1부는 세 개의 글로 구성된다. 첫 번째 아티클에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대립되는 미메시스 개념을 번역의 문제를 중심으로 언급하면서, 사양 전통의 양분된 시 연구의 지형도를 가늠해본다. 특이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양자의 불화가 현대 시학 연구에도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소쉬르와 벤브니스트, 비트겐슈타인과 훔볼트를 아리스토텔레스를 계승한 축에, 하이데거와 리쾨르를 이와 대비되는 플라톤을 계승한 축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현대성, 즉 모더니티 전반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한다. 벤야민과 보들레르의 사유 전반을 고찰하며 메쇼닉이 전개했던 모더니티에 관한 물음의 증거처럼 제시한다. 저자는 메쇼닉이 제시한 현대성 개념이 동시대성과 결코 혼동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한 로티나 리오타르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한다. 즉, 모더니티는 시간에 구속받는 개념이 아닌데 비해서 포스트모던은 ‘포스트’라는 접두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시간 속에서 설정된 한시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대성에 관한 메쇼닉의 사유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푸코와 하버마스, 리오타르와 로티를 망라한 포스트모던 계열의 학자들의 사유를 비판한다.
이러한 현대성의 물음과 더불어 주체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부의 마지막 장에서이다. 저자는 단수 개념의 주체를 비판하고, 나아가 메쇼닉이 전개한 주체 개념을 토대로 ‘시’와 ‘시적인 것’ 양자의 구분을 제안한다. 이러한 논지는 발화행위의 주체를 제시한 벤브니스트의 작업에서 출발하여 메쇼닉의 리듬 이론을 소개하면서 완성된다. 산문은 이야기나 서사와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부정성(否定性), 즉 산문이 아닌 어떤 것에 의해서 정의되어 왔다는 사실을 프랑스의 문헌들과 사전들을 뒤적이면서 찾아낸다. 서사이론 전반을 비판한 첫 글에서 목격되는 저자의 의도는 “정해진 서사의 모델”이라는 환상이 기호학의 야망을 반영할 뿐, 문학텍스트의 특수성 연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데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결국 단 하나의 산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산문 개념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통해서 산문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자들로 오히려 말라르메나 보들레르, 네르발이나 뷔퐁 같은 시인들을 꼽는다. 저자에 따르면, 프랑스의 문학기호학(바르트, 크리스테바, 그레마스)은 소쉬르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소쉬르를 철저히 이분법에 근거해 해석하였던 옐름슬레우를 모델로 삼아 전개한 이분법의 집결이자 완성이다.
특히 크리스테바의 가설들이 문학텍스트 연구에서 벗어나 왜 정신분석학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는가 라는 물음을 메쇼닉의 제안들을 적절하게 인용하거나 적용하여 밝혀내고자 시도한다. 문학기호학 전반이 시에서 출발했음에도, 결국 시를 연구대상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집요하게 캐물으며 기호학이 토대를 두고 있는 인식론 전반이 철저한 이분법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는 헤겔과 메쇼닉의 이론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을 주장하면서, 이원론을 벗어나 진정한 시학을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제안들을 끄집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번역이론은 프랑스의 번역이론 만큼이나 풍성한 논의들 생산해왔음에도 이데올로기적 판단과 이론 자체의 폄하로 인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 1세대 번역가 김안서를 필두로 진행된 한국번역이론 정립의 시도는 1930년대 <해외문학파>의 다양한 제안을 통해서 서구의 번역이론 정립과정과 유사한 수순을 밟게 된다고 밝힌다.
번역비평학회의 학술이사를 맡고있기도 한 저자가 제시한 번역에 관한 내용들은 새롭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한국의 번역이론과 프랑스의 번역이론 사이에 접점이 존재하며, 이러한 접점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직역과 의역” 논쟁에서 출발하여, 문화 번역론, 운문 번역론을 거치면서 보다 정교해졌으며, 한편 번역이론의 이와 같은 쟁점들을 포착할 접근 방법은 양국의 번역 이론가들이 문학 텍스트의 특수성 문제를 중심으로 드러내었던 번역태도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결국 번역이론은 충실성, 직역과 의역, 문학 텍스트의 특수성, 시학 등등의 개념들이나 “원문은 노후하지 않는데 번역문이 노후하는 이유”를 캐묻는 일련의 인식론적 도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번역, 특히 문학번역 전반의 문제를 김안서나 이하윤을 위시로 한 한국과 메쇼닉이나 베르만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살피고 나아가 보들레르의 정형시 번역의 문제를 예로 들면서, 문학번역의 가치를 강조한다.
마지막 장은 저자가 직접 앙리 메쇼닉 교수와 인터뷰한 내용을 싣고 있다. 앞서 다루어졌던 내용들 전반에 관해 저자는 시학이나 번역의 문제, 주체와 리듬의 문제를 중심으로 물음을 제기하면서, 메쇼닉 교수의 고견을 청해들어 메쇼닉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서로서 격을 갖추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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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구조주의 이론들
이러한 고전적 구조주의에 많은 수정과 첨가가 이루어졌다. 몇몇 이론들은 초기 이론에 근거하여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구조주의적 명제를 검증해 나갔다. 다른 이론들은 구조주의적 관점을 확장시켜 인류학자들이 수집한 보다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들을 수용해 나갔다.
이번 절에서는 현대 구조주의자들이 제기한 몇몇 쟁점들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이들이 모두 구조주의자로 분류될 수는 있으나 그들의 결론은 종종 서로 충돌한다. 구조주의는 커다란 우산과 같은 것이어서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해석들을 포괄한다.
상호작용 밀도
집단소유 대 개인소유
사회적 복잡성의 단계
형식 대 기능
복합관계 대 단일관계
기능적 대체물: 회피와 ``참기''
갈등구조와 결연구조
뒤르켐과 짐멜의 초기 구조주의에 자극을 받아 최근에는 인구 크기가 법의 형식화를 가져온다는 명제가 더욱 정교해졌다. 인구증가의 효과 중 하나는 ``상호작용의 밀도''가 증가한다는 것이다.[8,9,10] 칵테일 파티를 생각해 보자. 손님들이 도착하기 전에는 단지 두사람, 즉 주인과 안주인으로 시작된다. 이 순간에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모든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세번째 사람이 도착하면 상호작용의 가능성은 급격히 증가한다. 이제 주인과 손님, 안주인과 손님, 주인과 안주인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이들 중 두사람이 쌍을 이루어 나머지 한 사람과 상호작용할 수도 있다. 네번째 사람이 참가하면 이러한 승수효과는 더욱 확장된다. 물론 파티가 한창 진행중일 때쯤이면 상호작용 밀도는 처음 시작때보다 훨씬 상승해 있을 것이다.
각각의 상호작용을 행위자들을 연결하는, 양끝에 화살표를 갖는 선으로 표시한다면 ``상호작용 밀도''(interaction density)는 당신이 그릴 수 있는 선의 개수를 의미할 것이다. 각각의 상호작용이 협동과 갈등이라는 양 가능성을 포괄한다고 가정할 때, 칵테일 파티가 예컨대 2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협동과 갈등의 가능성은 하나(주인과 안주인간의 화살표)에서 30을 훨씬 초과하는 수로 증가할 것이다. 화살표의 수, 즉 상호작용 밀도는 간단한 수학 공식에 의하여 계산할 수 있다.
이러한 협동과 갈등의 가능성은 인구증가 자체보다 훨씬 빨리 증가하므로(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인구는 산술함수지만 상호작용 밀도는 기하함수다), 인구증가는 집단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고자 할 때 행정적 조정의 필요를 급격하게 증대시킨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구성원들이 누구인지, 각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각자가 다른 구성원이나 집단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따라서 조정--인구증가에 의하여 위협받는 통합을 유지하는 임무만 담당하는 관리자--의 필요성은 더욱 늘어난다. 이상의 추론으로부터, 특정 사회단위의 관리자의 수는 그 사회의 인구수보다 훨씬 빨리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며, 관리자의 증가율은 상호작용 밀도의 수학적 함수로서 정확히 계산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여러 조직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예측은 입증되고 있다. 관리직원의 수는 상호작용 밀도 모델에 근거한 로그함수에 의하여 정확하게 예측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컨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작은 대학에 비하여 큰 대학은 훨씬더 많은 비율(많은 수가 아님)의 행정직원을 가지고 있고 훨씬 더 많은 예산이 행정부문에 소요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행정업무의 많은 부분이 흔히 법이라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과 목적을 조정하는 수단이 바로 법이라면, 상호작용 밀도 모델에 의하여 법제도는 사회의 인구수보다 급격히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미국 법전문직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그것은 미국의 인구증가율을 훨씬 상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4] 더욱 중요한 것은 법률가 수의 실제 증가율과 상호작용 밀도 모델에 의한 예측치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결과는 Mayhew와 Levinger가 입증한 바 있는, 미국의 강력범죄 증가율이 인구증가율보다 훨씬 빠르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이러한 이론에서는 사회의 관습에 대한 주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골수 구조주의자에게 사회의 관습은 무의미하다. 인구의 증가는 새로이 생겨나는 다양성을 조정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반드시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법이거나 또는 법을 증대시키는 다른 행위들(이를테면 독재, 심리치료, 종교, 의무교육, 조직화된 스포츠 등)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구조주의 입장을 요약해보자. 어떤 집합체든(대학이든, 소년야구단이든, 도시든, 국가든) 그것이 직면하는 어떤 완고한 현실이 존재한다. 그 현실이란, 집단의 다른 구성원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수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 의사소통의 시간적 한계가 있다는 것,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청와대에 제안이나 고충을 써보내는 수천명의 시민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상상해보라.) 우리의 조직적 행위를 카오스적 혼란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완고한 현실에 대처해야 한다. 그래서 조정할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 관습을 대체하여 법이 조정수단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행하기 전에 한가지 지적해 둘 것이 있다. 상호작용 밀도 이론은 다른 경제학 이론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ceteris parabus)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 즉, 인구증가가 법제도의 크기와 형식성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예측은 사회가 다른 대체수단을 찾아내지 않는 한에서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슷한 인구를 가졌는데도 법제도의 크기가 현격하게 차이나는 사회들(예컨대 미국과 일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구조주의적 탈출구이다. 집단적 행위를 다른 방법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법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인구증가의 파괴적 결과를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탈출구가 어째서 관습이론가들에게 뒷문을 열어주는 결과가 되는지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비슷한 인구수를 가지면서도 서로 다른 법발달 단계를 나타나내는 두 집단을 찾을 수 있다면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이라는 가정은 더욱 중요해진다. 인구수의 효과를 수정할 수 있는 요소 중에는 재산권과 노동력을 조직하는 방식이 있다. 1950년대 초기 이스라엘의 두 집단정착촌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20]
그 중 하나인 키부츠라고 불리는 공동체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게 공유되었다. 구성원들은 공동체 소유의 주택에서 살았고, 공동식당에서 함께 식사했고, 모든 물건은 모두에게 속한다고 생각했고, 공중목욕탕과 공중화장실을 이용했고, 아이들은 공동보육원과 학교에 다니면서 공동체 교사와 보모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작업을 모든 구성원이 함께 했다. 농사와 관리직은 서로 순환되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모든 직업에 대해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공동노동의 효과에 대한 뒤르켐의 설명[-쪽]을 상기하라)
다른 하나는 모샤브이다. 여기서도 토지는 공동소유였고 농기구의 대부분도 공유되었다. 그러나 농작물은 개인소유였고 개별 가족들은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었으므로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작황에 차이가 났다. 게다가 생활수단도 사적 소유였다. 각 가족들은 자기만의 집을 가졌는데, 집들은 서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식사와 자녀양육도 개별 가족의 책임이었다. 가재도구나 사치품도 사적 소유였다.
이런 차이 이외에는 두 공동체가 대단히 유사했다. 양자 모두 동유럽출신 정착민들에 의하여 1921년 건설되었다. 이스라엘 정당들에 대한 정치적 성향도 같았다. 양자 모두 같은 크기의 토지 위에서 같은 종류의 작물을 경작했다. 또한 인구크기도 비슷했다. 그렇다면 뒤르켐과 짐멜에 따라 두 공동체가 매우 유사한 법을 가질 것이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모샤브는 형식적인 법체계를 가졌으나 키부츠는 그렇지 않았다. 모샤브의 형식적 법은 사법위원회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공동체 규칙을 강제하는 임무를 맡은 독립된 상설기구였다. 위원회는 구성원간의 분쟁을 심리하는 권한과 승인된 제재를 가함으로써 결정을 강제하는 권한을 가졌다. 위원회는 성문화된 절차에 따라 운용되었고 성문화된 규칙을 강제했다. 키부츠에는 이런 위원회도, 성문화된 규칙과 절차도 없었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법발전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구조주의자들은 두 공동체의 조직구조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는다. 모샤브는 가족을 생산과 가사와 자녀양육의 기초단위로 삼았기 때문에 법적 형식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으나 키부츠에서는 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족의 프라이버시와 개인주의를 위하여 모샤브가 포기했던 것을 키부츠에서는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구성원들과의 친밀한 일상적 접촉 때문에 키부츠에서는 아무도 집단규범을 함부로 위반할 수 없었고 위반자는 다른 구성원들에 의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제재를 받았다. 키부츠의 생활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공유하는 것이었으므로, 구성원들은 항상 일상적 비공식적 비난과 제재의 가능성에 놓여있었다. 조롱, 눈을 치켜 뜸, 여론의 비난, ``조용히 처리하기'', 약간의 비공식적 특권의 거부, 작업에 협조 안해주기 등, 이 모든 것이 일탈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런 것을 위해서 위원회 같은 것은 둘 필요가 없었다. 대단히 둔감한 사람만이, 한번도 쓰여진 적도 없고 공식적으로 천명된 바도 없지만, 집단공유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모샤브에서의 일상생활은 가족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각 가족은 자족적 단위였으므로 다른 구성원과의 접촉은 빈번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샤브 구성원들은 다른 구성원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공동체 규칙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질 수 있었다. 정당하지 못한 행위가 있어도 다른 구성원은 이를 눈치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규칙위반은 오랫동안 감지되지 않을 수 있었고 누가 위반자인지조차 불분명한 경우도 있었다. 자족성과 격리성 덕분에 집단규범에 반대하는 사람도 대중의 여론을 무시한 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도 공동체 전체 성원의 계속되는 따가운 시선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반대나 일탈의 모습이 키부츠의 공동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었다. 키부츠에서 일탈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 경우란 대단히 드물다. 계속되는 대면적인 비난과 불명예를 참아낼 수 있는 드문 능력의 소유자에게나 겨우 가능한 일이다.
모샤브가 공식적인 사법위원회와 성문화된 규칙을 발전시킨 것은 사적 소유와 사적 생활이 비공식적 제재와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면에서는 모샤브와 유사했던 키부츠는 공식적 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구조주의자들은 말한다. 모샤브의 법형태는 단순한 방법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를 조정하기 위한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고...구조주의 이론답게, 구조적 조직형태가 공식적 법의 탄생과 성장을 가져왔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모샤브와 키부츠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두 공동체의 관습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직형태의 특수성 탓에 모샤브에서는 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같은 구조주의 이론이긴 하지만, 이 이론은 인구압력을 법의 주된 동인으로 보는 이론의 약점을 지적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두 공동체의 인구수는 거의 같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또한 이 이론도 법을 관습의 재선언으로 보는 입장을 반박한다. 모샤브의 사법위원회가 공동체 규범을 설정해야 했던 이유는 공동체의 조직구조가 관습의 발전을 방해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관습이 사회무질서에 대처할 수 없을 때 형식적 법이 발달한다는 점에서는 두 이론의 의견이 합치한다.
이제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두 정착촌에 관한 연구결과가 보다 일반적인 예측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가 모샤브의 법발달의 원인이라면, 개인주의와 사적활동을 중심으로 조직된 체계가, 일본이나 중국, 소련과 같이 지방적 집단적 조직을 강조하는 체계보다, 법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일반적 예측을 가능케 한다. 집단주의적 사회보다 미국에서 법체계가 훨씬 발달한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은 아직 덜 성숙되어 있고 너무 단순한 것일지 모르지만, 구조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이는 한 어떤 방식으로 사고를 전개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러 중요한 제도들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하여 사회과학자들을 매혹시켰던 구조의 한 측면은 사회의 복잡성(complexity)의 정도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사회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일련의 발전과정으로 역사를 파악한다. 산업생산과 대량유통, 보험, 거대한 정부기구, 대중매체, 고속의 운송수단 등을 가진 현대사회는 아마존 열대우림의 부족사회보다 (다양한 사회적 행위와 구조 사이의 정교한 연결관계를 갖는다는 의미에서) 훨씬 더 복잡하다. 화폐, 문자, 직업적 분화, 사소유권을 가지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생각된다[21]. 구조주의자들은 사회적 복잡성의 증가를 진화의 과정으로 본다(예컨대 [7]). 이런 의미에서 인간사회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단순한 생명체로부터 정교하고 복잡한 유기체가 진화했다는 생물학자의 관점과 유사하다. 동물이나 식물들처럼, 사회적 복잡성도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라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이런 추론을 법의 성장에도 적용한다. 다른 사회영역의 구조적 복잡성의 증가와 법의 성장을 연계시키는 것이다. 여러 다른 발달단계에 있는 사회들을 비교하는 것도 그러한 적용의 예이다. 65개의 사회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사회의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세가지 법형태(조정, 경찰, 법률가)가 차례로 발전한다.[21] 가장 단순한 사회는 세가지 법형식 중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 키부츠처럼 독립된 통제기구를 갖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복잡성이 조금 증가하면 오로지 조정(mediation)만이 존재하게 된다. 조정이란 두 당사자간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함으로써 당사자들이 분쟁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3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복잡성 정도가 다음 단계에 이르게 되면 조정 외에 경찰력(police force)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에 이르면 세가지 법형태 모두--조정, 경찰, 법률가(lawyers)--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 ``선행''단계의 법형식 없이 경찰이나 법률가만을 가지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구조적 명령에 의하여 사회는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순차적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이런 결론을 법의 일반적 진화이론으로 받아들인다. 즉, 사회적 복잡성의 증가에 따라 야기되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정한 순서에 따라 누적적으로 법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사회에서는 법이 필요치 않다. 복잡성이 약간 증가하면 조정이 필요해진다. 다음 단계에서는 경찰이 필요해지고 마지막으로 법률가가 필요한 단계에 이른다. 각 단계는 이전 단계의 형태가 부적합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다. 그 부적합성은 복잡성의 증가로 인하여 발생한다.
지금까지 법의 발전과 다양성을 가져오는 구조적 조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두 사회의 법형식이 (특정 유형의 법원이나 경찰력을 가지는 것으로서) 유사하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은 매우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사회는 경찰력을 정치적 반대를 억누르기 위한 국내 정보망으로 사용하는 반면, 어떤 사회는 주로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서 경찰력을 사용할 수 있다. 뉴욕시의 이혼법정은 이혼소송에서 고무도장의 역할만 수행하는 반면, 뉴욕주 한 시골마을의 이혼법정은 이혼을 막기 위한 카운슬러나 조정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시카고의 소액법원은 금융기관의 수금원 역할을 주로 수행하는 반면, 같은 주 남부지방의 소액법원은 일반인이 겪는 소액의 그러나 성가신 분쟁을 신속하고 저렴하게 해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인 법의 기원에 관하여 탐구할 때에도, 법이란 공식적인 제도라는 축과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대응이라는 축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제기될 수 있다. 공식적인 제도와 그것의 통제대상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인자가 무엇이냐고...
멕시코의 사례[17]는 인구압이 법의 유형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부분적으로 입증한다. 동시에 이 사례에서는 동일한 법형식을 정반대로 이용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멕시코의 두 마을은 동일한 형식적 국가법의 지배를 받는 동일한 공동체 법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법원의 실제 기능은 매우 달랐다. 두 마을간에는 구조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A마을에서는 가족내 분쟁이 법원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남편과 아내는 친척 어른들에게 호소하여 분쟁을 해결했다. 친척 어른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양 당사자가 화해하도록 권위를 행사했다. 그들은 처벌을 가했고 결정을 내렸으며 이 결정은 대부분 이의 없이 복종되었다. 분쟁이 법정까지 가는 유일한 경우는, 화해가 도저히 불가능해 보여서 법원의 공식적 절차를 이용하여 이혼을 발표하고 상대방이 새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한 경우뿐이다.
한편 B마을에서는, 화해를 구하는 분쟁이든 결별을 구하는 분쟁이든 반드시 법원까지 가서 결말을 보는 경향이 있었다. A마을보다 B마을이 법원을 이용하는 빈도가 훨씬 많다. 인구압에 기인한 구조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다. 1900년경 B마을 인근의 광산이 폐쇄되자 B마을의 인구는 거의 두배로 불어났다. 실직한 광부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구증가는 법발전에 세가지 중요한 영향을 가져왔다. 첫째, 확대가족으로부터 분리된 마을 사람들이 늘어났다.
A마을 확대가족의 어른들은 가족분쟁의 주요 결정자들이었으나(할아버지, 숙부, 형제들이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고 이들은 결정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B마을에 이주한 가족들은 이러한 어른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분쟁을 해결해 줄 가족법정이 존재할 수 없었다. 둘째, B마을이 커짐에 따라 여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국가당국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와 국가는 마을주민들의 혼인을 종교적이고 법적인 것이 되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부부간에 분쟁이 생기면 교회와 국가는 즉각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다. 반대로 A마을은 이러한 외부세력의 개입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었다. 이 마을의 혼인은 대부분 신성한 것도 법적인 것도 아니었다. 소규모의 정체된 인구 덕분에 이를 변화시키려는 외부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셋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B마을의 인구증가는 농지의 부족현상을 가져왔다. 가족 어른들은 자기 땅 옆의 토지를 아들들에게 물려주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아들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농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어른들의 영향력은 감소되었다. 어른들은 자식들의 복종을 끌어내기 위한 매력적인 유산을 거의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자식들의 행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도 없었다.
자식들이 멀리 떨어진 새 농장으로 옮겨감에 따라 ``바로 옆집''에 살 때와는 달리 쉽게 관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다른 친척들이 알게 될 때쯤이면 분쟁은 이미 격화되어 있고, 사실관계는 모호해져 있고(누가 누구를 먼저 때렸느냐, 남편이 자주 밤늦게 귀가했느냐, 아이들을 제때 먹이고 있었느냐), 서로 모욕을 주고받아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어른들의 권위는 감소되었고 반항하는 자식들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법원이 어른들을 대체하여 주된 분쟁처리기구가 되었다. 여자들은 바람난 남편이 가정에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시아버지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법의 권위는 증대되었고 어른들의 권위는 감소되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모샤브같은 보다 사적인 가족구조를 만드는 요인으로 인구압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모샤브처럼 공식적인 법제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이론적으로는 두 마을이 동일한 법원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상으로는 두 마을의 법원이 매우 상이한 기능을 수행했다. B마을의 인구증가에 수반된 구조적 차이 때문이었다.
구조주의자들은 복합관계(multiplex relationship)와 단일관계(simplex relationship)의 구분을 매우 유용하게 생각한다. 단일관계란 매우 한정된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말한다.[6] 단일관계의 상대방과는 특정한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만 대화를 한다. 관계를 유지할 다른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표를 사는 손님과 매표원의 관계, 114안내원과 전화번호를 문의하는 사람의 관계, 강의하는 교수와 강의 듣는 학생의 관계 등이다. 이렇듯 단일관계는 특정한 거래를 행하기 위한 실용적인 업무에만 관련되어 있다.
단일관계는 효율적이다. 간단한 점심을 들기 위해서는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주문만 하면 된다. 여종업원에게 어머니 수술경과가 어떠시냐고 묻지 않을 것이다. 최근 참석했던 결혼식 사진을 꺼내놓지도 않을 것이다. 납세신고서에 대해 토론하지도 않을 것이고 여행경비로 얼마나 마련해야 할지도 묻지 않을 것이다. ``가요톱텐'' 순위에 대해서 얘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을 주고받으면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여종업원에 대해 아는바가 없기 때문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낯선 사람간의 거래는 간단하고 제한적이다. 그래서 패스트푸드점은 당신이 잘 아는 이웃 식당보다 싼값에 신속하게 수백만개의 햄버거를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 식당에서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음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제 당신과 Fred 아저씨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Fred 아저씨는 당신 외삼촌일수도 있고 당신 이웃에 사는 삼촌뻘 친구일 수도 있다. 그는 당신에게 믿을만한 투자조언가이고, 당신 집의 저당권자이며, 사업상의 동료이기도 하고, 당신 큰아들의 대부이기도 하고, 당신 지역의 제1당 위원장이기도 하고, 당신 가족의 주치의이며, 프로축구경기나 발레공연의 티켓을 나누어 갖는 사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신이 시도 때도 없이 들르는 이웃 식당의 주인이기도 하다.
지금쯤 당신은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이쿠, 어떻게 한 사람하고 그렇게 얽혀있을 수 있지? 게다가 그렇게 관계가 복잡하면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의 이런 반응은 복합관계가 현대사회에서는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가 단순했을 때는 이런 관계가 일반적이었다. 복잡한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단일관계가 전형적이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대부분 전문화되었기 때문이다. 투자조언도, 의료행위도, 담보부대출도 모두 전문가의 일이 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사회에서는 이 모든 일들이 복잡한 친족관계와 얽혀 있었다. 사람들은 복합관계 하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이것이 법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구조주의의 기본명제는 이런 것이다: 복합관계가 감소할수록 사회통제를 위하여 법이 동원될 필요성은 증가한다.[1, 41-48쪽] 구조주의자들에 따르면, 복합관계는 사람들에게 다중적인 통제수단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당신이 Fred 아저씨와 그 많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 당신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해도 또는 당신들 중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일을 시키고자 할 때도 당신은 상대방에게 당신들의 복합적인 관계가 가져다주는 보상에 대해 넌지시 암시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다른 사람도 당신이나 Fred 아저씨의 자리를 쉽게 대신할 수 없다. 당신들 각자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특수한 지위의 조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저당권에 대해 분쟁이 생겨도 Fred 아저씨에 대한 분노나 복수심을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다. 과잉반응하면 당신은 가족의 주치의와 오락 파트너와 아들의 대부와 지구당에서의 지위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단일관계와 비교해 보라. 관계 자체가 제한적이므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자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는 하나의 측면으로만 형성되므로 분쟁은 쉽게 관계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복합관계의 당신이나 당신 아저씨는 교회에서, 사교클럽에서, 파티에서, 가족모임에서, 이웃들 모임에서 양쪽을 잘 아는 제3자에게 협조와 이해를 구할 수 있지만, 단일관계의 사람들은 법 이외의 동맹군을 찾을 수 없다. 복합관계에서 사람들이 제공할 수 있던 모든 비공식적 유인은 사라지고 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따라서 사회구조가 단일관계에 의하여 지배되면 될수록 법은 공식적이 되어가고 점점더 사회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구조주의는 법발달을 가져올 수 있는 조건을 보여준다. 한편 구조주의는 법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대체물도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단일관계에서 갈등은 법이 아니라 ``회피''(avoidance)나 ``참기''(lumping it: ``네가 참아라''라고 할 때의 의미)를 낳을 수도 있다.[3] 현대사회에서는 타인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거나 못된 짓을 당했을 때도 그냥 ``참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는 단순히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리고 상대방을 다시는 보지 않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비용이 적게 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복합관계에서는 이런 반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 하나 때문에 관계를 끝장낸다는 것은 다른 모든 관계도 한꺼번에 끝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합관계 하의 분쟁에서 회피를 사용하는 것은 비용이 너무 크므로 사람들은 보통 양쪽을 잘 아는 제3자에게 의존하여 평화를 도모한다. 따라서 복합관계가 주류인 단순하고 가난한 사회에서는 분쟁해결수단으로 조정이 널리 사용된다.
미국같이 복잡하고 부유한 사회는 분쟁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이런 곳에서는 단일관계가 보통이므로, 소송이나 ``참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단일관계에서는 조정자 역할을 해 줄 사람을 발견하기 곤란하다. 가족에 대한 통제를 상실한 멕시코 B마을 어른들처럼, 관계가 벽에 부딪쳤을 때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줄 연결수단을 우리는 이제 모두 잃어버렸다. 따라서 만약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이를테면 집주인이 겨울인데도 돈을 절약하려고 난방을 끊어버린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수단은 (폭력을 제외하고) 소송을 제기하고 판사의 비인격적 판단을 받아 경찰력을 동원하여 분쟁을 강제로 해결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비공식적인 방법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
법의 성장과 관련하여 구조주의자들은 파벌주의(factionalism)와 다원주의(pluralism)를 구분하기도 한다. 파벌주의적인 레바논의 한 마을과 다원주의적인 멕시코의 한 마을을 비교해보면 양자의 차이가 어떻게 법구조의 차이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다.[16]
레바논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 개의 파벌 중 하나에 속했다. 두 파벌간의 분리는 거의 완벽했다. A파벌의 구성원은 B파벌의 그 누구와도 결혼도, 거래도, 예배도, 교제도 함께하지 않는다. 365일 내내 적대감이 흘렀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두 파벌 구성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마을 내에서는 해결할 방도가 없었다. 같은 파벌 내의 두 사람간에 분쟁이라면 통상 파벌 내의 어른들이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마을의 어떤 어른도 파벌간의 분쟁을 해결할만큼 권위를 가지지는 못했다. 어른들은 모두 두 파벌 중 하나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컨대, A파벌의 어떤 사람이 B파벌 사람의 염소를 도살한 혐의로 체포되면, 양측은 마을 외부의 유력한 정치인이나 판사들에게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여기서 ``해결''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은 뇌물이 아니면 연줄에 기댄 청탁이다. 이런 종류의 영향력을 더 많이 행사할 수 있는 쪽이 승리하게 된다.
레바논 마을이 이렇게 외부 ``입법자''들에게 의존하는 반면, 멕시코의 한 마을은 내부적인 조정 시스템을 발달시켰다. 레바논 마을과 멕시코 마을간의 근본적 차이는 멕시코 마을은 두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대신, 사람들은 서로를 가로지르는 다원주의적 결연을 가지고 있었다. 각 개인은 어떤 집단과는 가족적 연계에 있었고, 다른 집단과는 종교적 연계에 있었으며, 또다른 집단과는 사회적 연계에 있었고, 또다른 사람들과는 동년배집단이나 경제적 관계를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각 개인은, 마을의 모든 사람들과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모든 사람이 속하는 여러 집단들과 일상적인 상호의존관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쟁이 일어나도 기존에 서로 연계성을 갖는 사람들간에 일어나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연계성을 계속 유지하길 원했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구조는 신속하고 원만하게 분쟁을 처리하도록 하는 여러 유인들을 가진다. 멕시코 마을에서는 외부의 법에 대한 의존을 발견하기 곤란했다.
다원주의는 복합관계와 관련 있는 구조이다. 둘 다 사람들을 묶어주는 다중적인 연결망을 의미하고, 둘 다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이나 동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복합관계와 다원주의는 각각 상이한 수준의 구조를 지칭한다. 다원주의/파벌주의는 집단간의 관계 패턴을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 수준 아래에서는 단일관계도 있을 수 있고 복합관계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레바논 마을에서 A파벌의 구성원들은 파벌 내부의 분쟁을 외부의 도움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파벌 내부는 복합관계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파벌주의로 인하여 이러한 복합관계는 A의 경계선 안쪽에만 머물고 B파벌의 구성원에까지 확장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http://203.249.122.1/~nomos/connecting4/node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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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나는 영화감독 중의 하나가 이창동이다. <초록물고기>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주인공(막둥이, 한석규)은 신도시에서 떠밀려난 원주민의 한 자식으로서 '개발'이 심어준 꿈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그 혜택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죽음을 통해 알게 된다. 지금까지도 이 영화는 칼라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흑백 명암이 강한 흑백영화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지난 화요일 프로이트 세미나 끝나고 화신씨와 영화를 보았다. 이창동 감독의 세번째 영화인 <오아시스>......어떠한 리얼리즘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포복절도할만한 유머장치(그야말로 영화 스토리와는 별도로 배치되어 있는)가 있을까? 어떤 불쾌함을 가지고 나의 심기를 건드려 놓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극장으로 갔다. 중증 뇌성마비에 걸린 여주인공 공주(문소리)와 방금 교도소를 나와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종두(설경구)의 사랑 이야기..... 이들의 사랑은 정상인과 장애인과의 격이 없는 소통을 주장하는 휴머니즘 을 이야기하지 않는다....오히려 이 영화는 가식적인 휴머니즘의 가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주변 사람들은 종두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으며, 공주는 원천적으로 발화행위를 거부당하고 있었다....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적 타자가 된 주체들이 철저하게 거부당하는 정상인들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까발기는 '정치영화'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치영화라고 규정함에 있어, '정치'에 관한 기존의 관념에 대해 되짚어 볼 필요하다. 흔히 정치라고 하면 그것은 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귀족과 노동자 계급을 상대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 나가면서 만든 권력획득 과정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주장하는 '정치'란 철저하게 문화정치의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럼 문화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미화 과정에 대한 투쟁을 의미한다. 세계는 그 자체로서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시선을 통해서 이해된다. 즉, 세계는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반영'의 문제 속에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규정하는 일정한 이해방식 속에서 의미화 과정을 거쳐 인식되는 것이다. 그것은 푸코의 '에피스테메'일수도 있고, 알튀세의 '이데올로기'일수도 있으며, 보드리야르의 '기호'나 라깡의 '기표체계'일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세계는 주체가 서 있는 일정한 위치(문제설정) 속에서 특정한 부분만이 보여진다는 것이다. 주체의 시선을 통해 세계가 구성된다 함은 곧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의 생각과 이를 표상해주는 언어가 주요 문제가 된다. 일명 '언어학 패러다임'의 핵심 문제가 되는 이러한 논점은 세계에 대한 의미화 과정이 주로 기표체계, 상징, 이미지, 도상의 일정한 규칙(문법)에 따라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이 속에서 세계를 묘사하고 그려내는 기호나 표상체계의 변화 자체는 세계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급진적인 정치 주장으로 확장된다. 가령,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라는 말은 언어학 패러다임에서 말하는 정치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바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상언어의 총체라고할 수 있는 영화는 시선의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대중문화라 볼 수 있다. 문화정치적 맥락 속에서 영화 <오아시스>를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필자는 기호학자 그레마스(A.J.Greimas)의 '기호 사각형'을 가지고 영화 <오아시스>를 내용층위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1) 주인공와 권력과의 관계 타자(종두)---------------------------동일자(큰형네 가족) ㅣ ㅣ ㅣ ㅣ 비동일자(카센터 직원) -----------------비타자(큰형, 막내) 타자(공주)----------------------------동일자(오빠네 가족) ㅣ ㅣ ㅣ ㅣ 비동일자(이웃집 부부)------------------비타자(오빠) 종두와 공주는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받는 타자로서 등장한다. 여기서 중증 뇌성마비라는 공주의 상황과 사회 부적응자라는 종두의 상황은 정상인과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구별을 허문다. 즉, 신체적 비정상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동일자로부터의 소외 여부가 타자의 존재근거를 마련해준다. 사실 종두의 캐릭터 속에서 우리는 그가 정상인인지 비정상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데, 그는 겉모습은 공주와는 다르게 정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두 캐릭터의 설정은 권력관계에서 소외된 주체들의 존재근거가 유사하다는 뜻에서 서로의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사랑)을 모색하도록 만든다. 한편 비동일자로 설정된 카센터 직원과 공주를 볼보는 이웃집 부부는 타자로 설정된 종두, 공주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비타자로 설정된 종두의 큰형과 막내, 그리고 공주의 오빠는 동일자 집단에서 권력을 가진 주체들이면서 비동일자와의 관계에서도 일정한 권력의 영향력을 카센터 사장, 간병인 고용자로서 행사하고 있다. 비타자이면서 권력주체인 이들은 서로 상이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먼저 유사한 측면은 이들이 모두 서민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종두네 가족은 그나마 있던 재산을 큰형의 카센터 개업에 모두 써보리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서민가족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공주네 가족은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장애인 아파트라는 그나마 좋은 환경으로 이주한 서민가족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은 종두의 대리 복역과 공주가 장애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만의 가족을 위하는 가족 이기주의의 모습을 유사하게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하루 살아 하루 먹기에도 힘겨운 이들 주체들은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오는 불평등을 종두와 공주를 통제, 관리함으로써 비껴 나가려 한다. 이들의 권력은 매우 불안정한 것인데, 영화는 사회적 타자 내부의 또 다른 위계가 존재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두 주인공의 관계 변화 성적 가해자(종두)-------------------------성적 피해자(공주) ㅣ ㅣ ㅣ ㅣ 성적 비피해자(공주네 가족)-----------------성적 비가해자(종두네 가족) 성애적 관계(종두와 공주의 베드씬)-----------강간(공주에 대한 종두의 강간 미수) ㅣ ㅣ ㅣ ㅣ 비강간(종두와 공주의 데이트)---------------비성애적 관계(우연하게 공주 목격) 종두와 공주의 관계는 성적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서로 사랑하는 성애적 관계로 변화한다. 먼저 성적 가해자와 피해자의 명확한 장면으로 포착되는 곳은 종두가 공주를 강간하려는 장면에서이다. 이때 성적 비피해자로 등장한 공주네 가족은 직접적인 성적 피해를 보지 않았으면서 합의금의 명목으로 일정한 이득을 챙기려는 성적 피해자의 대리자로서 등장한다. 이에 따라 성적 비가해자인 종두네 가족은 종두를 대신해 합의금을 물어야 하는 성적 가해자의 대리자로 등장한다. 하지만 종두네 가족은 종두를 대리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들은 종두를 어느때든 버릴 수 있는 비열한 권력의 대리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유기체의 유지를 위해 그동안 일정 기여(종두의 대리 복역)를 했던 종두는 강간이라는 사건을 통해 큰형 가족의 부양식구로 설 자리를 쉽게 잃게 된다. 한편 종두와 공주는 성애적 관계로 발전해 자신들만의 행복감을 만끽하려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족이라는 동일자의 그늘에서 언제나 선별적 선택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욕망 역시 가족의 원만한 유지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이미 종두의 큰형을 대신한 대리 복역과 공주의 장애는 종두의 큰형가족과 공주의 오빠가족이 그런대로 유지될 수 있는 일정한 자양분의 역할로서 은밀하게(공공연한 것이 아닌)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두와 공주의 성애적 관계는 이전의 강간이라는 일탈적 관계를 너머 진지하게 발전되고 있었지만, 가족이라는 검열기관에 의해 제지당하게 된다. 동생의 성적 욕망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던 공주의 오빠는 종두를 강간범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공주 오빠가 진정으로 화가 났던 것은 여동생에 대해 일종의 아버지 역할을 했던 자신의 지위가 종두에 의해 위협받았다는 질투심에 기인한다. 여동생을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게 하면서도, 자신이 여전히 여동생의 아버지 (성적 욕망의 대상)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의식은 현대권력기구의 추잡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3) 두 주인공의 마자막 교감과 파국 마지막 교감(나무를 자르는 종두와 라디오를 켠 공주)-----교감 저지(경찰의 종두 체포) ㅣ ㅣ ㅣ ㅣ 교감 비저지(공주를 지키는 오빠 부부------------------마지막 비교감(종두와 공주의 상봉 저지) 종두는 경찰서를 탈출해 마지막으로 공주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공주의 집에는 오빠부부가 있다. 두 주인공의 마지막 교감은 공주가 무서워했던 창밖 나무 그림자를 제거하는 종두와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라디오를 켠 공주의 행동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교감은 곧 경찰의 체포로 인해 끝이 난다. 두 주인공의 마지막 교감에 대해 오빠 부부는 적극적인 저지자로서 등장해야 하지만, 화면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감 비저지의 위치에 있게 된다. 결국 종두가 체포됨에 따라 종두와 공주는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이별을 맞게 된다. 종두와 공주의 마지막 교감에 사용되는 소통장치는 매우 인상적이다. 사회 부적응자이면서 철저하게 유아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있는 종두는 마지막으로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행위, 즉 타인을 생각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타인에의 배려는 어쩌면 사회적 그물망에 종두가 어쩔수 없이 포섭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가로수를 자른다는 것은 공중도덕을 해치는 일이다. 따라서 그는 공주라는 타인을 배려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적 규율체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공주가 자신의 의사표현을 대신해 라디오를 크게 켜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 생각한다. 라디오와 거울에 반사된 햇빛이 유일한 친구였던 공주에게 있어, 밤이라고 하는 시간적 제약은 라디오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유일한 도구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는 전혀 공주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곧 아무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되어 버린다. 이 장면은 보나빠르뜨를 분석한 맑스를 생각하게 만든다. 맑스는 왜 멍청이 보나빠르뜨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을 하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면서, 그 뒤에 농민의 지지가 있었음을 목격한다. 보나빠르뜨의 집권 후 반혁명의 물결이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맑스는 보나빠르뜨 집권의 결정적 요소였던 농민이 철저하게 소외되는 상황을 보았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이해를 표현할만한 언어를 스스로 가지지 못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비극적 상황을 어둡게 묘사했다. 공주에게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했기 때문에, 자신의 대리자인 라디오가 결정적인 순간에 '소음'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는 대중이 자신을 스스로 대변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한다면, 어떠한 변화도 이룰 수 없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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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의 최근 연구서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들은 대개 일간지 북리뷰란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 보인다. 지난 두 주간에 나온 책들 중에서 과학분야에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나 평전분야에서 <안데르센 자서전>(Human & Books) 등은 누가 보더라도 손꼽을 만한 책이고, 당연히 1면에서 다루어졌다. 오늘 배달된 빌 브라이슨의 책은 이미 영미권에서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만큼(교양과학서쪽에선 보통 베스트셀러가 믿을 만하다) 신뢰할 만한 책으로 보인다. 양성자와 담백질과 쿼크의 역사를 말하지만, 저자가 비교적 과학의 문외한이라는 점도 독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다(색인 포함 558쪽). 이 분야에서 경쟁했던 책은 ‘창조론을 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란 부제를 단 <과학적 사기>(이제이북스)인데, 문제는 정작 읽어야 할 창조론 과학의 신봉자들이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왜 하필이면 그리스에서 과학이 탄생했을까>(몸과마음)도 눈길을 끈다. 안데르센의 자서전(896쪽)과 경합을 벌인 책은 모처럼 나온 파크 호건의 <셰익스피어 평전>(북폴리오, 644쪽)이다. 원저는 1998년에 옥스포드대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신간인 만큼 내용이 풍성할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책이고, 또 사실이 그래 보인다. 역자는 시인 김정환. 어디선가, 이참에 셰익스피어 전집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는데, 한번 기대해 봄직하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사이언스북스, 470쪽)도 흥미로워보이는 평전이다. 헤르만 헤세의 세번째 부인의 니논 헤세의 편지모음 <헤세, 내 영혼의 작은 새>(웅진닷컴, 752쪽)도 헤세의 독자들이 반길 만한 책이다. 그러나 역시 1순위는 안데르센의 자서전(원제는 ‘내 인생의 동화’)이다(뒷표지에 특이하게도 황동규 시인의 추천사가 실려 있는데, 알고보니 이 신생출판사의 발행인이 문학평론가 하응백씨이다. 그럴 만한 관계이다!) 인문서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보이는 것의 날인(Signatures of the Visible)>(한나래)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제임슨의 대중문화론, 더 구체적으론 영화론이다.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그의 책으론 아도르노 연구서인 <후기 마르크스주의>(한길사, 2000) 이후 3년만에 소개되는 책인데,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은 왜 아직 안나오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새삼 불러일으킨다. 신간의 복사본을 내가 갖고 있는지 어쩐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 참에 찾아서 읽어볼까 한다. 원서는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 않았는데, 우리말 역서는 485쪽에 25,000원. 이젠 웬만한 역서들이 원서보다 비싼 시대가 돼 버렸다(번역만 괜찮다면야 나무랄 건 없지만). 이론서로서 같이 언급되어야 할 책들은 기호학 삼총사이다. 즉 얼마전 출간된 박상진의 <에코 기호학 비판>(열린책들)에 이어서 신항식의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문학과경계사), 박인철의 <파리학파의 기호학>(민음사) 등이 같이 나왔다. 그것도 모두 국내 연구자들의 저작이다. 반갑고 대견한 마음이 드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건, 그레마스가 이끄는 파리학파 연구서이다. 분량도 516쪽으로 묵직하다. 이 분야에선 작년에 나온 김성도의 <구조에서 감성으로>(고려대출판부) 이후에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김성도 교수의 책은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부분적으로 표절이다). 그래서, 에코와 바르트, 그레마스까지 구색이 맞춰졌는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러시아 문화기호학의 태두 유리 로트만에 관한 연구서가 아직 부재한 것이다. 이 분야에도 국내에 유능한 연구자들이 있기 때문에 곧 만족스런 성과물이 나올 걸로 믿는다. 영어권 저작으론 최근에 E. Andrews가 쓴 <Conversations with Lotman>(University of Toronto Press)이 출간됐다. 200쪽쯤 되는 콤팩트한 책이다. 번역도 시원찮은 영화이론서들보다는 추천할 만한 책이 <2002 한국시나리오선집>(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재생지 800쪽이 넘는 두께에 작년에 개봉된 영화 81편중에서 시나리오 10편이 추려져 실렸다. 경쟁률이 8대 1쯤 되는 셈이다. 개인적으론 <복수는 나의 것>, <질투는 나의 힘>, <오아시스>, <로드무비> 등의 시나리오가 눈에 띄는데, <가문의 영광>이나 <광복절 특사>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도 읽어볼 수 있다. 어느 정도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고려한 선집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좀 있다면, 이런 책도 사서 꽂아두기를 바란다. 고전분야에서는 드니 디드로의 주요 저작 중의 하나인 <부갱빌 여행기 보유>(숲)을 손꼽을 수 있다. 당대의 낙원으로 상상되던 타히티에 관한 부갱빌의 여행기 부록이란 형식을 통해서, 계몽사상가 디드로가 자신의 유토피아관을 펼쳐보이고 있는 책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가 민음사에서 출간됐고, 역시 민음사에서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양의 끝>도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왔다. 투르니에의 책은 잘 알다시피 <로빈슨 크루소> 다시 쓰기이고, 그런 점에서 쿳시의 되받아쓰기로서의 <포>와 비교할 만하다. 그리고, 지젝의 책들. 물론 번역이 아니라 원서들이다. 이미 예고되던 <신체 없는 기관(Organs without Bodies)>(Routledge)이 출간됐다. 270쪽 정도로 예고돼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200쪽 조금 넘는 분량으로 생각보다 얇다. 지젝이 라캉주의자뿐만이 아니라 헤겔주의자로서 반(反)헤겔주의자인 자신의 ‘적’ 들뢰즈와 대결하고 있는 책이다. 이건 아마도 판권을 갖고 있는 도서출판b에서 내년쯤에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리고 지젝 입문서로서 딱 좋은 <지젝과의 대화(Conversions with Zizek)>(Polity)가 출간됐다. 지젝과 Glyn Daly와의 대화로만 구성돼 있는데(댈리는 곧 지젝 연구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170쪽이 안되는 분량으로 콤팩트하다. <향락의 전이>에 실린 지젝의 자가-이너뷰와 함께 지젝에 입문하는 데 아주 요긴할 듯해 보이는 책이다. 지젝의 신간 두 권은 모두 발행년도가 2004년으로 돼 있는 미래의 책들이다. 벌써/어느새 2004년의 책들이 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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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개념의 창안
들뢰즈에 따르면 변화된 세계어세, 그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과 이론은 출현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새로운 사상과 이론은 출현하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새로운 현실에 대처하지 못하는 철학은 들뢰즈가 보기에 기존의 무력한 사고틀과 개념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 그친다.
그래서 도처에서 상투성이 지배하는 상황이 된다. 시각적, 청각적, 개념적 상투성은 전면화되고 그러한 상투성을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 세계인 의식도 역시 상투성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익명의 상투성은 우리 밖의 외부 세계에서 유통되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를 관통하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내적 세계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유할 때에도 심리적인 상투성에 따라서 사유하는 것이고, 느낄 때에도 상투성에 따라서 느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자신들이 우리 주위의 여러 상투성들 가운데 또 하나일 뿐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질식할 것 같은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말을 바꾸어 표현한다면, 대안적인 이념이나 새로운 사유가 부재하는 전면적인 이데올로기적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진리 또는 실재를 주장할 수 있는 입지점의 부재, 그 어떤 원천에서 유래된 진술이라도 그것이 진술되는 순간 여전히 진부하고 상투적인 이데올로기로 변화되는 상황, 새로운 사유나 개념이 창안되지만 곧 이전의 진부함으로 동화되어버리는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 다시 말해서 상투성을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이 또 하나의 상투적인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가 되어버리는 상태가 들뢰즈가 묘사하는 고전적 여화의 패러다임, 고전적 사유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 때문에, 영화에 대한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가 내러티브 또는 이야기를 영화에 대한 철학적 접근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영화 이미지가 결국에 내러티브로 귀결된다면, 내러티브의 상투적인 구조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투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가능성을 들뢰즈는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기호 또는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에서 찾으려고 한다. 은폐되는 이미지의 숨겨진 부분을 찾아내는 일, 우리가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밝히는 일은 상투성에서 벗어난 가능성을 가진 이미지가 무엇이고, 또는 상투성이 끝나고 새로운 이미지가 시작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일이다. 이미 이 책의 처음에서 언급했듯이, 영화에서 들뢰즈의 개념이나 논의에 상응하는 주제나 이야기를 찾아내는 일은 불충분한 작업이다.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영화에서 사상의 단편이나 요약 또는 감성적인 구현물(사상의 재현)을 찾아내는 일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또 하난의 내러티브 또는 진부함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생성과 과정으로서의 스토리 텔링 또는 화행speech act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에 더하여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 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은 영화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즉 기술적이고 미학적인 특성에서 확보되어야 한다. 이는 들뢰즈가 형식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에서 새로움의 모색이 가장 잘 수행되고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투성에서 이미지로, 이데올로기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배치로 이행하는 일은 미학적이자 정치적인 프로젝트다. 더 이상 기존의 개념과 이데올로기 안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감염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야와 관점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 철학, 그리고 영화를 새로운 개념의 창안 또는 새로운 기호의 창안이라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들뢰즈가 내러티브나 스토리에서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 또는 새로운 이미지의 가능성을 찾지 않는 것에는 다른 사상적 흐름의 영향도 있다. 그것은 구조주의 의미론의 확장 과정이다. 그레마스Greimas라는 언어학자에 의해 수행된 의미론의 확장 과정은 단순히 문학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사회과학에까지 확장된다. 다시 말해서 구조주의 의미론 중에 문학에서의 내러티브를 다루는 면의 확장을 말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일정한 패턴 또는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무수한 형태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결합으로 무한한 이야기의 구성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행위자가 있다. 행위자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 주인공이 수행하고 성취해야 할 목적으로서의 과제가 있다. 행위자가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이 이야기인데, 이 과정에서 행위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역할이 잇고, 그 수행을 도와주는 역할이 있다. 대충 이런 것들만 열거해도 이제 이야기의 기본적인 항목들이 거의 주어진다.
예를 들어 영원한 잠에 빠져버린 공주를 깨우기 위해서 왕자는 동굴 속에 있는 풀을 구해와야 한다. 그 풀을 구하러 가는 도중에 악마의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난쟁이들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난쟁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준 대가로 왕자는 신비한 힘을 가진 보석을 선물받는다 등등. 이야기는 그것이 구전동화건 영화건 간에 언제나 이런 요소들로 분해될 수 있고, 그런 요소들을 조금씩 다르게 배합함으로써 다양한 이야기들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단지 문학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나 사회과학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적용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이 철학에서의 역사철학, 그리고 더 좁게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이었다. 예를 들어서 인류의 해방이라는 것은 목표에 해당한다. 그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행위한다는 사명을 부여받은 행위자는 프롤레타리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행위를, 즉 인간의 해방을 위한 과정에서 적대적인 역할을 떠맡는 것이 부르주아 계급이다. 이러한 두 계급의 투쟁 과정에는 일정한 조력자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프티부르주아다. 프티부르주아 계급은 정치적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하지만, 혁명적인 상황이 가까워지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협조하는 조력자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레마스의 구조주의적 의미론은 이렇게 해서 이데올로기와 진리의 대립을 해소시켜버리고 실제로 어떤 입장을 취하든 간에 그것들은 결국 모두 이야기, 즉 내러티브이며 일정한 허구적 기능 이외의 것은 없다는 결론쪽으로 진행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적용 가능성이 점차 효력을 잃어가고, 이론적인 점검 작업에서 점차로 그에 대한 회의적 결론이 강해지는 상황에서 그레마스의 의미론은 점차 힘을 얻으면서 확장되었다. 따라서 허위적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그에 대항하여 인류를 해방시키는 참된 인식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설득력을 잃어간 것이다.
‘역사의 발전이 어떤 경로와 단계를 거쳐서 결국 최종 도착점을 향해서 진행되어 가는가’라는 문제에 답하는 역사철학적 사유는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좌파 지식인들의 이론적 근거였던 마르크스주의 역시 점차 기존의 형태 그대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들뢰즈가 내러티브나 스토리에서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지 않는 것은 이러한 상황 인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즉 어떤 스토리나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더라도 결국은 진부함 또는 상투성으로 재차 전락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는 실제로 구조주의 의미론의 영향과 같이 간접적인 것에 그치지는 않는다.
들뢰즈 자신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이러한 비판적인 태도는 다시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고 했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알튀세Althusser는, 마르크스가 그 이전에 자본주의를 연구한 정치경제학자들인 스미스Adam Smith와 리카도David Ricardo와 구별되는 점을,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와 그 이전을 단절시키는 특징을 개념의 창안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가치 또는 잉여가치 같은 용어들은 이미 마르크스 이전에 여러 경제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이전의 경제학 이론과 일정한 연속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연속적인 연결의 맥락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새로운 점이 부각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새로운 점, 그리고 그것이 지식의 역사에 일으킨 혁명적 단절을 찾기 위해서 ‘개념의 창안’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 혁명적 단절 또는 새로움의 출현을 알튀세는 ‘새로운 대륙의 발견’에 비유했다. 이러한 새로운 대륙의 발견이 바로 개념의 창안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사유를 수행한다는 것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일이고, 그것은 기존의 기준에 비추어서 해결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새롭게 규정하는 일에 해당한다. 즉 헤겔이나 고전 경제학이 잉여가치의 문제를 포착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규정할 개념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치’, ‘노동’, ‘잉여가치’. ‘생산’ 등등은 이미 중상주의 정치경제학의 시기부터 사용되었던 표현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포착하는 진정한 개념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그러한 표현들을 새로운 맥락 안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창안했던 것은 마르크스였다. 그래서 알튀세는 경제학의 본지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 그것의 개념을 새로이 구성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노동가치설을 기본으로 가정하면서 아담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는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가치 중에 일부가 잉여가치로서 추출되어 자본의 이윤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잉여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체계적인 이론으로 구성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이여가치의 추출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스미스나 리카도가 분명 보고 있으면서도 인식하지는 못했던 것을 마르크스는 개념을 창안함으로써 그것을 인식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가치를 구별하는 데서 성립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가치설에 따라 그것의 생산, 즉 노동력의 재생산에 사용되는 가치의 합계이다. 따라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가 그것들의 가치에 따라 교환된다면, 잉여가치가 나오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의 노동가치설은 이러한 관점에서 잉여가치의 원천을 문제로서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를 구별함으로써, 즉 후자는 노동력의 가치 자체가 아니라 노동력의 사용인 노동의 가치임을 개념화시킴으로써 착취의 원천을 찾아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노동력을 그 가치에 맞게 구매한 자본가는, 그 노동력이 사용되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력의 가치 이상으로 노동하게 만듦으로써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하튼 알튀세는 마르크스가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적 틀을 창안함으로써 노동가치설을 새로운 형태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본다.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렇게 개념의 창안이라는 생각이 출현했다. 물론 들뢰즈가 알튀세의 생각과 유사한 점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바로 내재성에 바탕을 둔 사유 방식에서도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알튀세와 발리바르Balibar의 견해를 들뢰즈가 이어받은 데서 나타난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은 경향적으로 하락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명한 명제에 관한 것이다.
이 법칙을 요약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점진적인 기계화에 따라 자본의 구성 중에서 생산 설비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는 것이다. 생산된 잉여가치의 화페적인 형태로서의 이윤을 거기에 생산된 자본의 총계로 나눈 것이 이윤율이다. 그리고 자본의 총계는 노동이라는 가변자본과 위에서 예로 든 생산설비 따위의 불변자본을 합한 것이다. 그리고 생산설비 등을 총칭하는 불변자본이 커짐에 따라, 즉 이윤율을 계산하는 데 있어 점차 분모가 커짐에 따라 그 분수의 값은 작아질 수밖에 없다. 분자의 값이 분모의 확대에 다라 증가할 수 없는 것은, 노동가치설에 따라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 즉 가변자본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경향적으로 이윤율은 점차 저하된다. 그런데 이 법칙은 말 그대로 경향적이다. 즉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이윤율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생산설비의 투자를 총해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더 싸게, 즉 더 작은 가치로 생산설비를 만들 수 있다면, 이윤율의 분수 공식에서 분모가 다시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의 이윤율 경향적 저하법칙에서 이윤/가변자본+불변자본의 크기가 저하하는 것은, 그것을 상쇄하는 다른 경향들에 의해 일의적으로 관철되지 않는다. 불변자본의 증가가 분모의 크기를 증대시키지만 그 경향 자체가 분모가 축소되는 가능성도 동시에 만들어낸다. 마르크스는 이를 ‘모순’이라고 표현했다. 그렇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변증법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내재적인 효과들의 문제로 변형시킨다. 불변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을 감소시키는 동일한 원인이 바로 그러한 비율의 저하를 상쇄하고 오히려 비율을 증대시키기 때문에 경향적 저하법칙에 따른 자본주의의 붕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의 운동은 자신의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다.
알튀세는 이 때문에 한계를 향한 무한한 접근을 사유하려고 한다. 만일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체의 운동에 따라 향해 가는 한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문턱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문턱이 있다고 전제하고 사유하는 것은 잘못된 사유 방식이라고 본다. 말했듯이 경향은 언제나 반대경향을 통해 상쇄되기도 하고, 또 그러한 상쇄의 효과를 없애버리면서 다시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에, 문턱에 도달해서 그것을 넘어서면,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산양식 즉 공산주의가 있다는 드의 사유는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두 경향의 상호상쇄 과정을 통해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계속적으로 지연된다. 한계하는 것은 경향 그 자체의 재부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한계가 바로 그 한계를 향하는 경향 안쪽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한계에 도달해서 그것을 넘어서는 일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서 그것이 붕괴되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희망에 그쳐버렸기 때문에 나온 견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력과 그것이 가져온 풍요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자본주의를, 그것 너머의 다른 것으로 초월해가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 안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내재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분석하는 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생각을 보다 근본적인 지점까지 밀고 나간다. 발리바르가 다루었던 ‘자본주의의 이행’이라는 거시적인 역사적 문제에서 마르크스의 가치론 자체에 새로운 구성을 향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한 알튀세의 생각을 이제 보다 익숙해진 자신의 개념들로 풀어서 설명한다. 들뢰즈는 이윤율의 경햐적 저하라는 유명한 명제, 즉 ‘총자본에 대한 앵여가치의 문제’가 단지 자본주의라는 전적인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양식에서 지배하던 것과는 다른, 유동적으로 흐르는 잉여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함께 생각해야만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흐름이며 연속체다. 그 연속체는 내재성의 평면으로서 결코 단락이나 문턱이라는 초월성을 향한 출구로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알튀세와 발리바르의 논의와 마찬가지로 결코 종착점을 갖지 않는 잉여가치의 흐름을 생각한다.
그 이유는, 화폐에 관련된 두 가지 흐름이 서로 비교될 수 없는 공통의 척도를 갖지 않는 계열들이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한편으로 교환 수단 또는 지불 수단으로서의 화폐, 즉 등가 교환의 형태를 취하는 화폐의 츄통과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는 화폐, 다시 말해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화폐의 기능을 전적으로 다른 계열들에 속하는 흐름으로 간주한다.
전자는 화폐와 생산물이 일대일 대응을 상정할 수 있는 코드에 근거한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 즉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는 화폐는 그러한 교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그것은 흐름으로서, 현재에 수행되는 교환이 아니라 장기적 전망과 빗물질적인 신용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교환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적인 무한한 부채의 형태로 흐르는 순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조직적 체계로 이루어진 신용에 따라 움직이는 가치의 흐름과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 지급되는 임금으로서의 가치의 흐름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흐름들 사이에 공통분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것, 두 흐름이 하나로 환원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두 흐름 사이의 불균형과 그 불균형에 따른 결과로서의 문턱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마르크스는 이 두 흐름을 이런 식으로 서로 비껴가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후자의 흐름, 즉 노동력에 대해 지불되는 가치의 흐름을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에 반해 전자의 흐름은 그러한 본질의 현상 형태, 즉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형태로 파악했다.
따라서 후자가 실질적인 것이고 전자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인 산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후자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흐름 사이에는 공통의 척도가 존재한다. 그것은 보닞ㄹ로서의 후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원을 통해서 착취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일정한 비판과 대안을 사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처럼 공통된 척도의 사유와 그것에 따른 자본주의의 극복 또는 초월이라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그런 사유는 아무런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이처럼 두 흐름이 있고 그 사이의 공통된 척도를 부정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상호 소통이 존재한다는 것, 이런 것들을 사유하기 위한 논리가 계열의 논리다. 이런 계열의 논리에 대해서는 뒤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흐름과 흐름은 서로 비껴가고 따라서 그것을 일정한 크기로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한계값이 존재하지 않으며, 두 계열의 어긋남은 어떤 궁극적인 결론도 보여주지 않은 채 진행된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변증법,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알튀세나 발리바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이러한 논리는 영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 전형이 바로 시간 이미지의 규정이다.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 시간 이미지에 대해서 다루어보기로 하자. 우선 자본에 관한 두 흐름의 문제를 시간 이미지와 관련시키는 부분을 알아본다.
영화가 내러티브 중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제 영화는 이미지의 새로운 배치를 시도하고 실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이제 스스로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영화가 상투성의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새롭게 할 이야기를 갖지 못한다면, 영화는 자신을 대상으로 삼을 것이고, 그 자신에 관한 이야기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전적인 영화의 패러다임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영화에 관한 영화, 영화 속의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영화의 생산과 소비를 반성하는 그런 영화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산업예술이다. 즉, 그것은 엄청난 자본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영화에 관한 영화는 어떤 면에서 자본 또는 화폐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들뢰즈는 앞서 말한 화폐의 이중적 계열을 다시 끌어들인다.
만일 벤자민 프링크린Benjamin Franklin이 말한 것처럼 시간이 돈이라면, 그래서 돈이 시간이라면 여기에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들뢰즈는 영화가 자신에 관한 영화, 즉 영화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자신의 존재 조건인 돈, 즉 자본을 다루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그 자본이라는 것은 잉여가치의 누적이자 흐름이다. 그런데 흐름들은 척도를 거부한다. 즉, 흐름들의 공통 척도가 없다면 가치들의 교환에서 등가를 측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신용체제에 바탕을 둔 가치의 흐름과 임금으로 표현되는 가치 사이에 일정한 부정합, 어긋남, 균열이 존재하게 되면 그것은 서로 이질적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이질적인 두 계열들은 분산되고 수렴하면서 서로 뒤얽힐 뿐이다. 그 두 계열을 즉정하거나 종합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별개로 존재하면서도 한데 얽혀 있다. 명확한 비교가 없기 때문에 명확한 구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러한 측면을 현대영화의 이미지에서 유사한 구조를 가진 것으로 찾아낸다.
영화에 관한 영화들에서는 한 장면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영화 속의 영화에 해당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할 때가 많다. 간단히 말해, 대상 영화의 층이나 메타 영화의 층으로 확연히 귀속시킬 수 없는 식별 불가능성이 영화에 관한 영화의 이미지를 물들인다. 들뢰즈는 이러한 계열 또는 층위의 혼란이 현대영화의 시간 이미지라고 말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시간 이미지란 시간의 이미지나 시간을 재현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들뢰즈에 있어 모든 재현은 궁극적으로 공간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시간 이미지는 이러한 공간적 재현이 불가능한, 그리고 그러한 공간적 재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이미지다. 결국 재현의 구조 또는 감각―운동 도식에 포착되지 않는 이미지가 시간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들뢰즈에 있어 시간 이미지란 위와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 결코 시간을 표현하는 이미지 또는 시간에 관한 이미지가 아니다. 시간을 영화의 이미지를 통해서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공간적 규정 또는 운동 규정을 빌어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의 진행을 의식하게 되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이다.
그리고 운동은 대체적으로 공간 상의 변화를 담고 있다. 즉 우리는 영화 이미지에서 공간적인 변화를 지각하게 될 때 시간의 진행,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성의 표현은 들뢰즈가 말함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기산 이미지라고 할 수 없다. 시간 이미지는 앞에서 논의된 이미지 분류에 대조적인 존재를 취하는 방식의 이미지를 말한다.
들뢰즈의 표현에 따르면, 이전의 철학은 언제나 시간 앞에서 일정한 곤란을 느꼈고, 또 그러한 철학이 주장하는 진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의미는, 시간이란 것이 전통적인 철학적 범주로 파악하기에는 독특하고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 이미지는 사유를 곤란하게 만드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논의를 진행시키면서 다시 베르그송의 이미지 존재론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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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비평(1) : 블라디미르 프롭, ꡔ민담 형태론ꡕ
러시아 형식주의 말기에 글을 썼고 후일 프랑스 구조조의의 발달에 영향을 미친 블라디미르 프롭은 바흐친만큼이나 뒤늦게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주로 1914년에서 1930년대까지 글을 썼으나 50년대에 가서야 서구에 알려진다. 그는 주로 1914년에서 1930년대까지 글을 썼으나 50년대에 가서야 서구에 알려진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맑시즘이 압력을 받아 러시아 형식주의가 흩어져갈 무렵 1928년에 쓴 ꡔ민담 형태론ꡕ은 30년이 지나서야 영어로 번역되고 구조주의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레비-스트로스는 1960년 그 책에 대한 공격적인 서평을 썼고 프롭은 이에 대한 방어를 한다. 알렌 던디즈는 프롭을 미국에 소개했고 70년대에 브래몽, 그레마스, 토도로프 등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은 프롭의 이론을 세련시킨다. ꡔ민담 형태론ꡕ은 프롭 자신이 후일 회상하듯 민담의 모든 복잡한 형태를 연구한 게 아니고 동화라는 특정 타입만 연구한 책이었는데 편집자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민담으로 제목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 내용은 동화 형태론인 셈이다.
프롭은 기존의 민담 연구 방식이 비과학적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야기 그 자체가 ‘어떻게 제시되는가’를 탐색하는 형태로의 전환이다. 형태의 구조가 연구되고 나서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연구가 뒤따른다. 예를 들어 그는 각 나라의 민담을 비교할 때 혹은 민담의 유사성을 밝힐 때 그 기준은 내용이 아닌 구조에 의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롭의 연구는 동화에 나타난 반복의 구조를 하나의 도식으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 반복의 구조가 인간 내부에 잠재한 근원적인 소망과 관계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지며 동화의 반복되는 내용을 특정 도식으로 표시하고자 했다. 동화를 보면 인물들은 달라지지만 그들이 하는 행위는 같다. 이 행위를 중심으로 동화를 분석해볼 수 있다. 프롭은 이 행위에 ‘기능(function)'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기능이란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일어나는 주요 행동들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말을 타고 고주의 창문으로 뛰어든다고 해서 말타고 뛰어들기가 기능은 아니다. ‘연이을 구하기 위해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기능이다. 그러니까 기능이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전체 이야기 속에서 차지하는 역할, 그리고 그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와의 관계 속에서 산출된 그릇 같은 것이다. 기능은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구조이다. 이 기능이 이야기의 뼈대이다. 그리고 동화 속에서 기능이 일어나는 순서는 같다. 다시 말하면 순서대로 일어난다. 모든 동화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한 가지 유형에 속한다. 이것이 동화의 형태소이다. 식물학에서 형태소란 구성부분들의 상호연과성과 이것이 전체와 갖는 관계들, 즉 구조이다.
프롭은 100편의 동화를 분석하여 31개의 기능을 밝혀낸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의 도식으로 연결짓는다. 모든 동화는 이 연속된 기능들 가운데 어느 부분이 모여 엮어지며 순서는 차례를 따른다. 어떤 동화가 이 31가지 기능을 모두 갖는다면 그 동화의 형태소는 괄호 속의 기호를 죽 늘어놓은 꼴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위의 것들 중 어떤 부분들이 결합하게 된다. 프롭은 모든 동화가 형태상 유사하다면 하나의 근원에서 유래했다고 가정할 수 있고 이 단일 근원이 지리학적인 문제보다 인간의 심리학적인 문제에 더 기인한다면 각 나라의 동화구조를 통해 인간의 동질성과 민족의 특수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프롭의 형태소가 문학 연구에 이바지한 것은 주제나 내용으로 작품을 가늠하는 대신 기능이라는 어떤 틀을 뽑아내어 관계들 속에서 작품을 보려한 것이었다. 이것이 여러 문장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길을 터주었고 보편 구조로 가는 길목을 연 것이다. 겉보기엔 각기 다른 얘기들인데 기능으로 가려보니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작가의 여러 작품들을 묶어볼 수 있고 한 분야의 것들을 묶을 수도 있고 다른 분야끼리도 묶을 수 있다. 내용보다 표층 구조를 철저히 탐색하여 문학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한 프롭의 이론은 새로운 서사분석의 시발점이었다.
<참고문헌>
블라디미르 프롭, 황인덕 역, ꡔ민담 형태론ꡕ(예림기획, 1998)
권택영, ꡔ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ꡕ (동서문학사, 1991)
http://cafe.daum.net/memorym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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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구조주의 비평(1) : 롤랑 바르트, ꡔ텍스트의 즐거움ꡕ
신화·기호·텍스트·소설적인 것의 ‘현기증 나는 이동 작업’을 통하여, 프랑스와 세계에 가장 활력적인 사유체계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롤랑 바르트는, 그의 사후에도 오늘날까지도 프랑스 문단의 표징으로, 또는 소설 속의 인물로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의 모든 모색과 좌절, 혹은 기쁨은 다만 그 자신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닌 오늘날의 모든 전위적 사유가들에게도 공통된 것으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의 문학 편력에 대한 조망은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처음에는 마르크스와 사르트르를, 다음에는 소쉬르와 옐름슬레우를, 그 다음에는 데리다와 라캉을, 마지막으로는 니체를 자신의 직관이나 기분·충동에 따라 빻아 넣으려 했다는 그의 소박한 견해와는 달리, 칼베의 지적에 따르면 “바르트가 이론가가 아니라면, 타자의 이론을 이용할 줄 아는 에세이스트도 아닌 하나의 시선·목소리·스타일이다”라고 평가된다.
즉 바르트에게는 그만이 가진 문체나 시선이 존재하며, 비록 그의 사유체계가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문체나 시선 속에서 모든 것은 새롭게 주조되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이후 새로운 돌연변이적인 텍스트가 창출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어떤 점에서 기존의 상투적인 것만을 반복할 따름이라면, 예술가의 모든 노력은 무엇보다도 이런 상투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혹은 모든 체계 밖에 위치하려는 모색의 표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듯 그의 후기 작업을 특징짓는 텍스트 혹은 텍스트성은 끝없이 다른 곳을 향하여 이동하는 ‘언어의 불가능한 모험’, ‘언어의 유토피아’, 또는 푸코가 말하는 ‘무한한 지평 위에 놓인 끝없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서 “작품에서 텍스트로”라는 글은 텍스트론의 이론적 바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이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고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의사소통·재현의 산물이라면, 텍스트는 언술행위·상징화·생산성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이런 텍스트론에서의 저자의 위치는 어떤 것일까?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자리를 배제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선지자적인 글이다. 바르트는 우선 저자가 현대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란 중세 이후에 종교개혁의 개인적 신앙, 합리주의·실증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소산물이다.
그러나 말라르메와 더불어 이런 저자의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하며,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현대의 여러 작가와 언어학자들은 저자의 이미지를 탈신성화하는 데 공헌한다.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가 존재할 뿐이다.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이렇게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하고 난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 글쓰기와 글읽기, 창작과 비평, 실천과 이론 등 그 이분법적인 경계를 파기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바르트의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찾아 만나야 할, 구체적이고도 관능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글읽기의 체험을 바르트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이 바로 즐거움과 즐김이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자를 인정하지만, 즐김의 작가와 더불어 ‘감당할 수 없는 텍스트, 불가능한 텍스트’가 시작된다.
즉, 즐거움의 텍스트는 글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주는 텍스트이다. 이 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그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텍스트란 무엇보다도 즐거움의 대상이며,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덜 오염된, 따라서 가장 생명력이 긴 것으로 간주된다. 실상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아남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아닌, 바로 이런 개별적인 육체에서 우러나온 세부적인 것, 삶의 일상적인 양상인 것이다.
<참고문헌>
롤랑 바르트, ꡔ텍스트의 즐거움ꡕ (동문선, 1997)
http://cafe.daum.net/memorym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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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방법(Structuralism)
1. 과제
1) 정의
구조주의(Structuralism)는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와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방법론에서 나온 문학 방법이다. 이 구조주
의 방법은 인간의 언어에 주목한다. 인간은 언어 활동을 통해 의사 소통을 하는 존
재이기 때문에 언어의 중요성은 크다. 인간 문화는 문자와 언어로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이 사용한 문자를 이해하고 문서를 해독하기 위해선 언어와 그 언어 속
에 담겨진 의미를 포착해야 한다.
이 구조주의 방법은 구조주의(Structualism)혹은 기호학(Semiotics, Semiotique)이
라 불린다. 기호학이란 용어는 본문(Text)의 표층에 감추어진 의미를 찾는 구조적
분석(Analyse Structurale)을 의미한다. 구조주의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구조주
의적 주석(Structural exegesis) 방법이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구조주의적 성서해석
은 기존의 역사 비평적 방법이 간과하고 있는 문학적 분야에 관심을 갖는다. 본문
연구, 양식사 연구, 편집사 연구, 전승사 연구들은 본문 그 자체의 내적 구조나 내
재성의 원칙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역사 비평 방법은 본문 그 자체보다는 본
문 형성되게 된 기원과 발전, 최종 형태의 과정에 대한 역사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
래서 역사적 방법은 통시적 연구(diachronic)라 하고 구조주의 방법은 공시적 연구
(synchronic)라 한다.
2) 주석-접근, 방법
전통적인 역사적 주석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 즉, 본문 연구, 언어학적 연
구, 문학비평, 전승사, 양식사 연구, 편집연구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주석을 말한다.
역사적 주석 방법은 기술적 성격을 가진다. 이 방법들은 본문의 '무엇'(what)을 가
능한 객관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본문 비평은 진정한 본문, 원래의 본
문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한다. 언어학적 연구는 본문의 '언어'가 무엇이고, 용어의
의미의 역사적 전개를 밝히려 한다.
문학적 비평은 본문의 문학적 장르가 무엇인가? 이 단계에서 본문의 문법적 양상
과 문체, 문학적 구조를 연구하고, 양식 비평과 전승사 연구 본문에서 사용된 전승
의 기원과 역사는 무엇인가? 기원에서부터 본문에 이르는 전승의 역사적 과정을 연
구한다. 편집 비평은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저자는 누구이고 그의 신학이
무엇이며, 본문을 다듬는데 어떠한 상황이 있었는지 독자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려
한다.
반면에 구조주의적 주석은 해당 본문의 언어적·설화적·신화적 구조를 밝히려한
다. 본문의 의미 포착·창출에 관심을 가진다. 구조주의적 분석가는 저자가 의도하
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본문에 있는 언어를 연구한다. 언어 자체가 의미론적 차원
을 가지고 있어서 언어의 '의미'(meaning)를 찾아낸다. 언어의 구조(대조·차이·대
립의 구조)에 의해 상호 관련된 언어의 요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구조주의적 분석에서는 한 문장을 넘어 담화(discoure)의 차원에서 '구조주의적 의
미'를 찾아내며 본문의 내적·외적 상관 관계를 연구한다. 또한 본문을 신화적 재현
의 체계로 분석할 때, 신화적 구조가 그 본문의 '의미'를 가진다. 역사 주석 방법에
서 역사적 의미의 단일성(저자의 의도는 한가지이다)에 반대하여 구조주의적 방법
은 '구조적 의미'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구조주의적 연구는 '의미'의 다수성을 드러내
려고 한다. 한 본문의 구조는 그 본문의 의미론적 가능성(잠재성)이다. 구조주의적
분석은 의미의 다수성, 즉 의미론적 가능성의 다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각각의 구조
주의적 연구는 특정한 구조주의적 수준에 있는 의미의 다수성을 해명하려고 한다.
구조주의 분석자는 통시적 의미론적 차원(저자가 의도하는 것)을 알고 있고, 공시
적 의미론적 차원도 인정한다. 구조주의 방법은 여러 구조주의 연구 결과들이 결합
되어 나타난다. 바르트의 문학적 구조들, 그레마스의 설화적 구조들, 라깡의 심리학
적 구조들, 골드만의 사회학적 구조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적 구조들과 인
류학적 구조들이 있다. 이 연구들을 종합한 구조주의적 주석은 언어학에 속한 규범
과 근거를 적용하여 공시적 방법이 갖고 있는 의미의 다수성을 밝히면서 통시적 연
구 방법이 주는 역사적 차원의 의미도 보완하여 문화적 상황에서 성서의 해석학으
로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구조주의적 성서 해석은 통전적 성서 해석 연구
방법으로 나가는 통합적 연구(통시·공시) 방법의 디딤돌이라 하겠다.
3) 구조주의적 방법 기초 이론
구조주의에서는 본문(Text)의 저자보다는 본문 그 자체(Text)에 대하여 관심을 갖
는다. 문자화된 언사(言辭) 앞에서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저자와 텍스트, 독자들이
그 3 요소이다. 텍스트를 두고 저자와 독자 사이에 관계를 먼저 질문한다. 저자가
글을 쓰고 그 본문을 독자에게 던지면 독자가 그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로
글은 남는다. 따라서 저자가 쓴 글은 저자가 펜을 놓고 난 다음, 독자의 몫이 된다.
본문은 독자와 계속 남아 의미(가치)전달과 독서 행위를 한다. 그래서 기호학자 그
레마스(A.J.Greimas)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말을 "텍스트 밖에서는 구원
이 없다"는 말로 바꾸어 텍스트의 중대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는 Text의 세계
에 주목해야 한다. 텍스트는 오래된 본문이든 오늘날 문서이든 한 텍스트는 문법의
법칙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읽혀질 수가 있다(可讀性). 다만 문화 시차성(示差性)
으로 인해 역사 비평적 방법에서 '저자의 의도' 를 연구한다. 하지만 구조주의(기호
학)는 문화의 시차성을 넘어 그 본문의 구조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인간에게 선
천적으로 주어진 의미를 파악하려 한다.
독자들은 기호학(구조주의)의 기본 개념들과 분석 원칙들을 파악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가지면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다.
(1) 구조주의(기호학)적 기초 이론
a. 문법: 기본이 되는 원칙은 각개의 언술(言術)은 그 나라 말의 문법을 존중하고
그 법칙들을 준수한다. 언술이란 표현은 한 문장보다는 좀더 긴 하나의 문학적 단
위를 말한다.
b. 표면적 구조(Les structures de surface): 문장, 겉보기 수준에서 주어, 보어, 목적
어 등 단어들을 살필 수 있다.
설화적 구조(Les structures narratives): 텍스트의 통사론, 텍스트를 진전시키는
작용들(하다) 동사, 설화성 분석
언술적 구조(Les structures discursives): 텍스트의 주제적 가치들 분석-텍스트
의미론적·주제적 가치들 사이의 관계
들을 결정하는 규칙들이 있다.
기호 사각형: 각 위치 상 텍스트 작용들과 의미론적 가치들의 관
계들을 요약한다.
가) 텍스트의 발췌
성서를 읽고 행위를 하거나 성서를 분석하기 위해선 본문 선택의 작업이 요구된
다. 대단위 텍스트(macro-texte, 창세기 책 전체 텍스트)나 소단위 텍스트
(micro-texte, 창세기 11:1-9의 바벨탑 이야기)를 구분할 수 있다.
* 이 텍스트를 먼저 분석하기 위해 텍스트 표면의 세 요소를 파악해야 한다. 시간,
공간, 그리고 행위자들의 변화이다.
본문(텍스트) 분석은 크게 설화 분석과 언술 분석으로 나눈다.
나) 설화 분석
어느 한 텍스트 안에서 사람들이 인격(人物)에 대해 말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
는 한 상태, 있다(존재하다)와 가지고 있다(소유하다) 동사로 표현된다.
또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하다' (행위)라는 종류의 동사가 필요하다. 이 행위
를 통해서 하나의 상태는 다른 또 하나의 상태로 변화될 것이다. 이리하여 설화 분
석을 위해 중요한 두 가지 요소: 상태(etat)와 변형(transformation)
*어느 한 상태 안에 있는 인격은 상태 주체(sujet d'etat) 라고 불리고, 또 변형을
실행하는 인격은 작용 주체(sujet operateur)라 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변형에 도달하는가? 여기서 한 텍스트의 설화순차가 이루어진
다.
초장의 단계 변형(Transformation) 종장의 상태(Etat final)
Etat initia 조종(manipulation) 권능(competence) 실행(performance) 비준
(Sanction)
조종의 단계(manipulation)
http://cafe.daum.net/TheologyTh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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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 비평
★구조주의비평의 정의
구조주의는 195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현대 사상 조류 가운데 하나로 철학, 문학, 심리학, 언어학, 인류학, 경제학, 생물학, 수학, 민족학, 정신 분석학 등 해당되는 범위가 다양하다. 구조주의란 광범위한 다른 현상들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학 본문에 적용되는 분석 방법이다. 즉 구조주의는 본문을 언어과학과 소통의 관계에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구약성경의 구조주의 비평은 구약성경의 최종 형태의 본문의 배후에 있는 심층 구조와 본문의 언어들의 상호 관계성을 이원적 대립 관계에서 분석하여 본문의 의미와 중심 사상을 밝히려고 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 비평의 배경
1. 구조주의 비평의 배경은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드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에서 시작된다. 언어는 부분들이 전체와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체계이므로 공시적으로 볼 때만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소쉬르는 통시적인 비교 언어학에 대해서 공시적인 구조 언어학으로 대치시키고 랑그의 구조분석에 전념하였다.
2. 역사비평 방법론의 본문의 저자 문제 등을 연구하는 통시적 방법으로는 특히 신화, 전설, 민담 등 구두로 전해진 본문들의 깊은 의미를 찾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최종형태의 성경 본문 그대로 전반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공시적인 방법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3. 구조주의 비평은 성경 해석에 일반 학문의 원리들을 이끌어왔다.
4. 수사 비평의 본문에 대한 문학적인 분석이 구조주의 연구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5. 구조주의의 원류는 러시아의 형식주의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형식주의는 1920년대에 일반적인 언어학에서 문학 범주의 연구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이 때 문학작품은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었다.
6. 아이히로트는 폰 라트의 역사전승과는 달리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단면을 캐내어 구약 전체의 구조와 연관시켜 개체 단면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구조주의 비평의 전제
1.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의 행위와 사건에서 보이는 현상은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문학 본문과 같이 보이는 현상들은 심층 구조라고 부르는 표면 아래 현상들에 의해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구조주의의 연구 대상은 신비평과 마찬가지로 본문을 통해서 전해지는 역사나 신학이 아닌 본문 자체 안에 심층 구조에 있다.
2. 이런 심층 구조는 본문에서 기호로 표현되어 있다. 모든 기호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모델은 언어이다 따라서 언어학이 구조 이론에서 특별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조주의 비평의 방법
가장 흔한 방법은 야콥슨이나 레비-스트로스가 소쉬르의 구조 언어학에 기초한 문화나 언어의 이원적 대립관계를 파악하는 것이다 야콥슨은 언어와 학습과 발전의 기초로서 이원적 대립관계라는 보편적이고 단순한 체계를 제시하였다.
★구조주의 비평의 예:시편1편
1. 시편1편의 표층구조
-의인의 형상을 묘사한 내용이 악인의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
-집중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시편1편의 시작과 끝에 봉인구가 나타나 있다. 1절의 처음 단어 아쉬레의 알렢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자음이며 6절의 끝 단어인 토베드의 타우는 마지막 자음이다. 따라서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음과 마지막 자음사이에 즉 행복과 멸망 사이에 포괄되어 있다.
2. 시편1편의 설화적 구조
이 시편의 주체는 율법이 아닌 인간이며 율법은 인간의 보조자일 뿐이다. 따라서 이 시편의 중심은 인간이며 율법이 아니다 율법이 인간을 위해서 있으며 인간이 율법을 위해서 있지 않다.
3. 시편1편의 술화적 구조
술화적 구조는 의미론적 분석을 뜻한다. 시편1편은 시편의 맨 앞에 있어서 시편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한다.
★시편1편의 신학
1. 인간은 성공과 안정을 얻기 위해서 율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2. 인간은 성공과 안정을 얻기 위해서 악인들의 조언을 따라서는 안 된다.
3. 성공과 안정을 얻으려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의 도움을 받고 악인들의 조언을 물리쳐야 한다.
★시편1편의 메시지
1. 인간은 성공과 안정을 위해서 다른 사람, 배경, 재물 등 세상에 속한 것들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그 말씀이 인간을 도우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성공적인 삶의 길은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데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자기 꾀에 빠져 사는 사람은 형통하는 것 같으나 결국 실패하여 망하고 만다. 의인들은 악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3. 인간은 세상에서 재물, 장수 권세, 명예 등을 많이 가지고 누리면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참된 성공은 여호와로부터 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원동력이다.
★구조주의 비평의 평가
1. 최종 형태 본문 자체의 언어 구조의 상호 관계성에서 본문의 다양한 의미들을 찾을 수 있는 공시적 방법 가운데 하나로써 가치가 있다.
2. 구조주의 비평은 공시적 관점에서 성경 본문의 구조 연구에서 본문의 눈에 보이는 표층 구조아래에 기호로 표현된 심층 구조를 찾고 그 구조의 관계성을 통해서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므로 본문의 신학의 중심 사상들을 찾는데 도움을 준다.
3. 구조주의 비평은 본문의 언어의 상관관계와 구조 연구를 통한 의미를 찾는 다른 문학비평 방법론들을 연구하는 데 유익한 역할을 한다.
★한계점
1. 구조주의 해석은 심층 구조를 분석하므로 본문에서 다양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비평에는 주관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어서 상식을 넘을 때가 많기 때문에 구조주의에서 찾는 본문의 의미가 저자의 개인적인 의도와 상관없는 객관성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독자의 맥락에서만 본문을 대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2. 바는 구조주의 비평에서 주장하는 이원적 대립 관계가 히브리어 언어에서는 대부분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3. 구조주의 비평도 사회과학 이론들에서처럼, 일반 구조주의자들의 방법론들이 다양하여 성경 본문에 적용시켜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구조를 어느 본문에 적용시키느냐가 커다란 과제이다.
4, 구조주의 비평은 본문의 심층 구조 분석으로 본문의 주제를 파악하는데 초점을 둔다. 이 경우 본문의 부분적인 주제들을 찾는데 소홀해 질수도 있고 본문의 다양한 의미를 제한하거나 놓칠 수도 있다.
http://ot.re.kr/jboard/?p=detail&code=her&id=16&page=1
첫댓글 내용소개) 그레마스(A.J.Greimas)의 행위소 모델의 수용과 해석--->그레마스의 기호학(그레마스 도식) --->구조주의 비평과 민담 형태론 --->구조주의적방법---> 구조주의 비평과 민담 형태론 --->프랑스 문화기호학 정면 비판 --->현대 구조주의 이론들 --->구조분석 방법론(예수와 삭개오)--->구조주의 분석(영화 "오아시스"를 보고) --->기호학파의 최근 연구서--->영화와 개념의 창안 --->구조주의 비평(1) : 블라디미르 프롭, "민담 형태론" --->탈구조주의 비평(1)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구조주의 방법(Structuralism)--->구조주의 비평
그레마스, http://www.poemspace.net/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