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첫 장편소설 [[황산강]]을 주 4회 정도로 연재할까 합니다.
1부 아수라장, 2부 코피, 3부 모순, 4부 내 속에 하나의 우주, 5부 더덕 냄새, 6부 한없이 가벼운 사랑
“일어나라. 가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대신해서 수철이 오빠가 석이 오빠를 일으켜 세웠다.
베랑길 지나 명언마을로 들어섰다. 마을 앞 ‘서룡들’이 다 잠겼다. 우리 집 아래 냉거랑다리까지 벌건 황토물이 넘실거렸다. 냉거랑다리까지 가는 길도 모두 잠겼다.
황산강 1 아수라장(5회)
“그날 썰물 때가 되어 물이 빠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잖아. 너한테 맞는 옷이 없어서. 내 어릴 때 입던 중우적삼 입었지. 넌 대청마루에 앉아서 ‘서룡들’을 덮은 붉은 황토물만 보고 있었어.
네 모습이 정말 예뻤어. 하늘나라 선녀도 그때 너만큼 예쁘지는 않았을 거야. 개구리 사건 같은 것도 네가 좋다는 걸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아.”
“지금은 안 예쁘단 소리네.”
“하하, 말이 그렇게 되나?”
“오빠 얼굴 많이 상했어. 정말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 살 거야?”
“모르겠다. 산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이 있었어. 하지만 난 산에 안 어울려.”
오빠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맞으면 나오면 되잖아. 왜 맞지도 않는 조직에 묶여서 숨어 지내.”
“넌 몰라. 조직에 들면 조직의 생리가 있어.
조직에서 나온다고 세상이, 경찰이 날 가만히 두겠니? 난 결국 조직을 배신할 수밖에 없을 거야. 배신할 때까지 끝없이 고문하겠지.
그걸 아는 조직에서 또, 날 그냥 둘까?”
힘이 빠진 소리였다.
“…….”
“이와모도 구장 사건 때도 난 한발 비켜서 있었어. 손에 피 묻히는 일 꺼려서는 안 된다는 것 알면서도.”
마치 지금 손에 피가 묻어 있어서 끔찍하다는 표정이었다.
“…….”
“세상은 정말 미쳐가고 있어.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말기보다 정말 끔찍하도록 제대로 미쳤어.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 거야. 세상이 한 번 제대로 뒤엎어질 거야. 인간이 사람이 아닌 세상이 되어 미쳐 날뛸 거야.”
석이 오빠는 숨어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며 탈진한 것 같았다.
“…….”
“난 용기가 없어. 피는 싫어. 하지만 세상이 내게 피를 강요하고 있어. 누가, 어느 한 집단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 끔찍한 지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오빠는 점점 소리가 작아지며 고개를 숙이다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넓고 두툼했던 어깨가 많이 얇아져 있었다. 오빠의 얇아진 어깨가 애처로웠다. 나도 몰래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날 베랑길 앞에서 오빠 둘이 날 가운데 두고 껴안아서 추위와 비를 그어주었듯이.
새벽에 눈을 뜨니 오빠는 다 갖춰 입고 어스름하니 밝아지는 창호지 문을 배경으로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을 켜지 못하게 막았다. 아까부터 대문 앞쪽에 누군가 살펴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별채 뒤쪽 골목에도 인기척이 느껴진다고 했다.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날 가로막았다. 안방 장롱 아래 묻어둔 부모님 돈까지 다 해도 큰돈은 되지 않았다.
부엌으로 난 쪽문을 통해서 커다란 사람이 몸을 구겨서 나갔다. 부엌 뒷문 앞에서 한참을 안아주고는 뒤뜰 감나무를 타고 올랐다.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오빠는 옆집으로 소리 없이 넘어갔다.
“왜정 말기에 왜놈들 정말 무지막지했지.
그래도 아무런 모의도 하지 않았어. 행동도 취하지 않았어. 독립운동할 가능성이 있는 무리야. 그래서 재판도 없이 예비 구속해서 무더기로 죽인 경우가 있었나?”
‘다 묻어 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말에 이민환 선생이 몸서리를 쳤다.
“안 그러면? 그 빨갱이 새끼들이 우리 다 죽일 거 아냐. 빨갱이들한테는 그것도 싸. 암, 싸고말고지.
그런데 이 선생이 왜 빨갱이를 싸고돌아? 수상하네!”
배 주임이 눈에 불을 켰다. 그리고 나와 이민환 선생을 그 시퍼런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민환 선생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든지 단박에 허옇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배 주임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교무부 나머지 여섯 명이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민환 선생이 말없이 먼저 일어나 교실로 향했다. 다른 선생들도 모두 일어섰다. 교무실 문을 나서는 이 선생이 잠시 ‘허청’하는 것 같았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책과 출석부를 챙겨 일어섰다. 모두 서둘러 교실로 향했다.
자리에 남은 배 주임의 섬뜩한 눈빛이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맨살에 차가운 독사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내 여기서 잠깐 자고 갈 끼다.”
김현중이 도서관 소파에 누운 채 천정을 보다가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 쉬는 시간에 올게. 그때까지 자라.”
나와서 도서관 문을 잠그는데 알 수 없는 현기증 같은 것이 올라왔다. 문손잡이를 잡고 도서관 강화유리문에 잠시 이마를 기대었다.
교실로 돌아오니 있제 쌤이 새 문제를 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것 겨우 잡아 도서관에 앉혀 두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반장이 죄송할 거야 뭐 있냐.”
“그래, 칼장 누나는 잘못 없다. 현중이 쌔~가 문제지.”
수민이 녀석이 큰 소리로 말하며 나를 보고 웃었다. 있제 쌤이 수민이 녀석을 노려봤다.
쌤이 시켜도 현중이 녀석을 흔들어 깨우지도 못하면서 수민이 녀석 안중에 쌤은 없다.
황수민이 노려보는 있제 쌤을 한 번 흘끗 보고도 헤헤거리며 내게 V자를 그려 보였다.
(황산강 1부 아수라장 끝) 2부 코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