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결심
배 영 숙 57bys@hanmail.net
스물일곱 살 작은아들이 결혼을 하려고 합니다. 세 살 위인 제 형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작은아들은 결혼하겠다는 말을 입 밖에도 못 내는데, 남편이 더 서두릅니다. 남편은 아이들이 20살 넘어서부터 입버릇처럼 “누구라도 좋은 사람만 생기면 결혼하라”고 수시로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이런저런 일로 집안 형편도 안 좋고, 큰아이부터 결혼시키고 나서 작은아이 보내면 좋으련만 남편의 주장이 워낙 완강합니다. 제가 미적거리니 시어미 질투심이냐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본인이 스물여섯 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으니, 후회될 일도 있었을 법한데 말입니다.
집을 자주 비우는 남편과 뚱한 큰아들 사이에서 유난히 작은아들과 정을 많이 나누며 살았는데, 그리고 작은아들은 아직 해야 할 공부도 남았는데, 곁에 두고 이때까지 못 해준 밥 좀 더 먹이다가 장가를 보냈으면 했는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허전한 마음에 뒷산에 올라 혼자서 몇 시간씩 헤매다가 내려옵니다. 어제는 향로봉 쪽으로, 오늘은 족두리봉 쪽으로…. 묵묵하게 병풍을 치고 있는 북한산과 새로 조성된 뉴타운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어 봅니다.
“그래, 잘 가라, 내가 그리워하나봐라.”
사돈댁이 외국에 있어 서로 주고받는 것 없이 결혼식만 간단히 치르기로 했습니다. 사돈 내외분은 형편상 결혼식 일주일 전에나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그때 상견례를 겸하기로 하고, 저희 쪽에서 결혼 준비를 했습니다. 일단 식을 올릴 장소를 정하고, 비어 있는 날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예식절차를 생략한다고 해도 신랑 집 입장에선 신혼집이 제일 큰 문제였습니다. 나는 작은 아들에게 집에 들어와 사는 것이 어떠냐고 넌지시 운을 떼 봤지만 나가 살겠답니다. 그럼 살 집을 구해주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섰습니다. 막상 자식 결혼하는 데 작은 아파트 전세를 하나 장만해줄 형편이 못 되니, 결혼 30년 동안 뭘 했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보험 2개를 해약하고, 시동생에게 얼마를 빌리고, 통장의 잔액을 긁어 집을 보러 다녔으나 그 돈으로는 원룸도 하나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서글픈 마음만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싼 집을 찾아 헤매다가 다행히 홍은동 마을버스 종점에 자리한 적당한 집을 찾아,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모아 계약을 하고 나니 그냥 힘이 쫙 빠졌습니다. 집을 구하려 다니는 내내 작은아들은 미안해하며 월세가 아닌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이제 식장도 정했고, 집도 구했으니 날만 지나면 될 것 같습니다. 간소하게 예식을 치르기로 했지만 “최소한 이것만은, 이것만은…” 하면서 신경이 쓰이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반지는 하나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에 장롱 안에 꽁꽁 숨겨 두었던 한 냥짜리 행운의 열쇠 2개를 들고 종로의 금방에 갔습니다. 몇 번이나 눈 딱 감고 작은 것이라도 다이아반지로 해줄까 하다가 그냥 순금 쌍가락지와 목걸이, 인조 보석으로 세팅한 액세서리 한 세트를 맞추었습니다. 다행히 금 두 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도 돈을 조금 거슬러 주더군요. 그리고 신랑신부 정장 한 벌씩 사고, 한복을 맞추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따로 한복을 장만하지 않기로 했지만 외국서 오래 생활한 사돈께는 한복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일찌감치 바깥사돈의 한복일절을 하기 위해 아는 분께 천연염색을 부탁해두었는데, 상황버섯과 탈색한 쪽빛 염색을 너무 멋있게 해서 보내왔습니다. 저걸로 내 것도 해 입을까하는 욕심이 잠시 생겼지만 나는 저고리 동정 바꾸는 것으로 결혼식에 입을 한복 준비를 모두 끝냈습니다.
함을 싸는 일은 한복집에 맡기면 될 일이지만 돈이 드니까 인터넷 검색을 하여 제가 직접 싸기로 했습니다. 한학하시는 분께 혼서지를 부탁하고, 오방주머니에 청홍 함보자기, 잘 마름질한 무명 한 필…. 싸고 좋은 것을 고르기 위해 인사동으로 광장시장으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았습니다. 며칠 동안 우리 집 거실은 안동서 공수해온 한과와 전과, 사돈 내외분의 한복, 그리고 함속에 넣을 혼서지, 며늘아기의 한복이랑 패물, 오방주머니 등 함을 쌀 준비물로 복잡했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대로 작은아들에게 무명 끈을 잡으라 하고 이리저리 굴렸더니 정말 걸머질 수 있는 단단하고 그럴싸한 함이 되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그걸 보고 저를 극성스럽다 하면서도 신기해했습니다. 사실 나도 엄청 놀라웠습니다. 제가 이런 것을 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그럴듯한 함을 보더니 아들은 신이 났습니다.
“엄마, 친구 네 명이 함지고 가겠대요.”
“아이고, 자취집에 가면 먹을 것도 없을 텐데 친구들이 몰려가면 어떡하니? 혼자 조용히 갔다 와.”
“아, 걱정 마세요. 은혜가 탕수육 시켜 준대요. 탕수육을 먹으면 되지요, 뭐.”
철없는 아들친구들은 새신부가 탕수육 사주기로 했다고 우르르 몰러 간다고 합니다. 허긴 친구가 같은 과 1년 선배누나하고 하는 결혼이니 흥미롭기도 하겠지요. 친구들이 간다고 하니 급히 전도 부치고, 이것저것 함진아비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면서 예비시어미의 마음이 묘해지더군요.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정신없이 장을 보러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동네 슈퍼마켓에서 차를 파킹하며 그냥 잘 서 있는 차를 스르륵 긁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주차를 도와주는 아저씨가 “아줌마 뭐 하시는 거예요!” 하고 소리를 지른 후에야 내가 차를 긁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결혼식 날, 날씨는 작은아들 표정만큼이나 쾌청하였습니다. 비록 스튜디오 촬영사진 하나없이 하는 결혼식이었지만 신부는 빛났고, 내 아들 새신랑은 천하를 얻은 듯 너무 신나보였습니다. 그리고 신랑신부의 친구들이 시끌벅적한 그런 결혼식이었습니다. 30년 전, 저의 부모님이 오랫동안 친구로 있던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할 때, ‘싫다 좋다’ 말 한 마디 못하시고 저를 시집보냈듯, 저도 대학 입학해서부터 사귄 1년 선배와 결혼하겠다는 작은아들에게 가타부타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그렇게 보냈습니다. 그렇게 작은아들은 떠났습니다.
아직 작은아들의 체취가 남아 있는 방을 정리했습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면 하룻밤 묵을 텐데, 아들이 덮던 이불을 세탁하여 신혼부부를 맞을까 하다가 남대문시장으로 이불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청와대를 지나 삼청동 길로 내려가 빨간 신호에 정차하고 있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브레이크를 놓아 그만 앞차를 쿵하고 박아버렸습니다. 그것도 외제차를 말입니다. 보험 수가가 올라가는 소리가 막 들렸습니다. 20년 운전에 사고 한 번 낸 적이 없는 제가 이렇게 작은아들을 결혼시키면서 남의 차를 두 번이나 박은 걸 보면 대범한 척 하면서도 마음이 많이 허하긴 했나봅니다.
전 요즘 요가를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매번 화살기도를 합니다.
“좋은 시어미가 될 거야.”
남 보기에 극성스러운 저에게 고향 친구들조차 시어미가 별나서 저와는 사돈을 안 맺는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허긴 제가 성질이 급하고, 잔소리도 많고…. 그러고 보니 못된 시어미 될 조짐이 많은 저는 계속 길을 걸으면서 주문을 욉니다. “좋은 시어머니, 좋은 시어머니….”
전 정말 좋은 시어미는 못 되어도 쿨한 시어미는 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없어도, 뭘 먹고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되어도 신경을 쓰지 말자 하면서도 밥을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내가 음식을 배달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저희들이 오도록 해야지.’
그러나 그것도 잠깐, 차도 없는 아이들이 집에 들러 음식을 가지고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더군요. 우리 집은 버스에 내려서도 한참을 올라와야 하는 산속에 위치해 있고, 작은아들이 분가한 집 또한 산꼭대기에 있으니 말입니다. 결국 저는 수시로 음식을 나르고 있습니다. 음식을 실컷 나르다가 어느 날 또 굳은 결심을 합니다.
‘뭐 해달라는 소리를 하기 전에는 절대로 내가 먼저 해주지 말자.’
아이들은 미안해서인지, 아님 정말 필요치 않아서인지 절대 먼저 뭐 해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결국 나는 일주일도 못 버티고 된장찌개라도 끓여서 달려갑니다. 저는 쿨한 시어미인 척, 매번 아파트 앞에서 음식만 전달하고 돌아섭니다. 실은 아이들 사는 것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이들 집에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보지를 않았습니다. 제가 결혼한 자식 반찬이나 해서 문 앞까지 나르는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라면만 먹더라도 둘이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 만족할 아이들에게 괜한 참견이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먹는 것으로나마 시어미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두 달 전, 며느리가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어머니, 저, 6월말까지만 회사 다니고 시험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 젊었을 때 하고 싶은 것은 해봐야겠지. 얼마동안 버틸 돈이 있니?”
“한 2년 정도요.”
“열심히 해봐. 2~3년 하다가 안 되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생활비는 도와주지 못하지만 먹는 것은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로 해줄게.”
며느리는 결혼한 지 8개월 만에 4년을 다니던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대학시절 준비하다가 포기한 고시(국립외교원)공부를 계속해 보겠답니다. 며느리가 회사를 그만둔 요즈음 저는 할 일이 더 생겼습니다. 주책없이 이젠 먹을 것을 들고 며늘아기 공부하는 도서관에까지 출두합니다.
오늘도 이 삼복더위에 뭘 먹고 공부하나 걱정스러워 시장에서 미꾸라지를 한 소쿠리를 사다가 추어탕을 끓입니다.
‘에고, 철없는 녀석들, 각자 집 밥 먹으며 따로 공부할 것이지, 결혼은 왜 해가지고….’
설설 끓어대는 추어탕처럼 제 속도 설설 끓어댑니다. 하지만 저는 때를 놓치지 않고 화살기도를 합니다.
“좋은 시어머니, 좋은 시어머니.”
첫댓글 세상일이 왜이리도 힘들까요 우리 서민들의 공통분모가 아닌가싶네요. 읽는동안저의마음또한고민갈등으로 한참을 망설여지는군요. 인생 살이는정답이없는게아닌가요 어떤게 옳는지.. 착한시어머니다가 또 아니고 , 정답은 무엇인가 고민으로가득차 마음의 정리가 안되는그심정보여요. 저도그런때가 있어 몇일을 잠을 설치고 괴로워했답니다. 해결해줄분은 주님도 부처님도 아니었습니다. 저의 마음을정할자는 저자신이었습니다.그걸깨닳은것은 불과얼마 전. 그건 사랑이었습니다. 모두를사랑하는마음.대상은, 사람,사물,모두에게요. 그모두에게사랑하는 마음가질때 미움원망사라졌어요.힘드시겠지만 어느순간착한시어머니가되있을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