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을 보내며
5월 신록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시간에 많은 꽃들이 피고 졌다. 남쪽에서부터 올라온 배꽃이 달빛에 성근 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아카시아 꽃내음은 저기압을 타고 내려온다. 잠시지만 그 내음에 마음을 빼앗겨 본다.
그제는 비가 내렸다. 아카시아 향도 빗길을 따라 사라졌는지 코끝을 자극하지 못한다. 집 앞 교문초등학교 담장에는 키를 재듯 장미 넝쿨 끝자리를 뚫고 봉오리를 맺는다. 성질 급한 줄기의 꽃은 어느새 꽃잎을 질 준비를 한다.
5월을 보내는 마지막 주말. 슬그머니 달력 앞에 서서 날짜 아래 적힌 날들의 의미를 살펴본다. 1일 근로자의 날. 5일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 날. 6일 입하.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성년의 날. 18일 광주 민주화의 날. 19일 발명의 날. 21일 소만. 25일 방재의 날. 26일 물의 날. 31일 단오, 지방선거일, 세계 금연의 날 등등 여느 달보다 기념일이 많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하긴 5월에는 어린이, 어버이, 성년을 위해 특별히 기념하는 날이 있으니 그렇게 부를 만도 하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5월이 가정의 달로 특별히 부르게 된 것은 ‘어버이 날’에서 왔다고 한다. 50년 전인 56년 어머니날로 정한 것을 왜 아버지의 날은 없는가라는 아버지들의 반란(?)이 시작되자 73년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함께 기념하자고 해서 어버이날로 바꿨다는 재미난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성급하게 친 동그라미 속에 11일 결혼기념일, 17일 어머니 생신 우리 가족만의 기념일이 덤으로 적혀있다.
2006년 5월 말. 정해진 순서도 없는데 시간에 따라 변화를 주는 꽃들의 향기에 따라 적힌 기념일들 속에서 여느 해보다 특별했던 우리 가족의 5월을 되돌아본다.
아내와 만난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했던 야속한 시간 속에 서로가 엉클어진 지 20년이라는 날이 11일에 있었다. 서양에서는 이날을 도혼식(陶婚式)이라며, 도자기류의 선물을 아내에게 선물한다고 하지만 올해 역시 특별한 이벤트 없이 그냥 보내려 했다. 하지만 둘째아이가 보낸 결혼기념일 축하 문자 메시지에 따라 마음이 움직여 자형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아내와 세 딸 그리고 어머니와 팡파르 속에 가벼운 식사를 하는 것으로 도혼식을 보냈다.
올 5월이 주는 의미 중 가장 큰 것은 아내와 결혼 서약을 한지 20년이라는 세월 지났다는 것이 첫 번이고, 그렇게 만나 결실을 맺은 큰 딸 아이가 이번 지방선거에 첫 투표권을 얻는 성년의 나이가 되었으니, 그것이 두 번째이다.
이른 87년생이라 늘 자신의 만(서양) 나이가 동무들보다 어려 대학생(주니어)이지만, 성인 공간에서 경험하고자 했던 아르바이트마저도 포기했던 아이가 이제는 귀가가 가끔은 늦어진다. 게다가 늘 건강이 염려되는 어머니의 일흔 두 번째 생신을 가족들과 함께 지냈으니 평소보다 세 가지의 특별함을 지닌 우리 가족만의 2006년 5월이었다.
어느 가족이던 자신들만의 기념일을 적은 달력을 보면서 어찌 5월만 특별히 가정의 달이라고 고집스럽게 부르고 싶지는 않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다달이 적어 놓은 달력의 동그라미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찾는 생일, 기제 등 특별한 날이 매달 있다시피 하니 일년 열 두 달이 가족을 위한 달이 아닌가 한다.
2006년 5월을 보내며 ‘가정의 달’이라고 부르는 단어가 왠지 맘에 들지 않는다. 가정(家庭)은 피붙이의 식구라는 의미보다는 집 울타리 속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한 생각이 드니 더욱 그렇고 우리의 방식보다는 왠지 서양적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가족(家族)은 부부를 중심으로 가정을 이룬 사회구조의 가장 기초적인 집단이라는 것이 동양적인 사고라는 의미에 비중을 두고 싶다. 가정은 가족을 감싸는 울타리 또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이 크고 가정은 인간적인 면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2006년 5월을 보내며, 가정의 달보다는 ‘가족의 달’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억지도 부려본다. 창을 연다. 어제 거리를 감싸던 비바람 소리를 쫓아내고 천마산 꼭대기가 파란 문을 열고 하늘이 싱그럽다. 우윳빛을 내는 구름 속에 모처럼 글씨를 써본다. ‘가족, 家族, family, 식구’라는…….
한철수/시인·좋은아버지가되려는사람들구리모임직전회장
기재일 : 200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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