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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일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
마 28:16~20
(마 28: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제가 갈릴리를 풀어드렸죠? 노아가 벌거벗은 이유가 이것 때문에
벌거벗은 겁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노아 할아버지께서 나이도 많고
몸은 쇠약하고 과음은 하셨고 그래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있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이 풀리겠어요? 성경은 보면
‘그 땅에다가’ 그랬습니다. 그 땅은 어떤 땅입니까? 홍수로 멸망시킨 땅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새 역사의 땅입니다. 거기에다가 포도를
심은 겁니다. 거기서 나온 포도주는 과거 홍수 이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취하던 그 포도주가 아닙니다. 새 역사를
감당해 내야 할 새로운 포도주가 거기에 심겨진 겁니다.
장막은 노아와 하나님만이 있는 은밀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셈이 받은
축복이 뭐냐고 하면, 노아의 장막을 받은 겁니다. 축복은 셈의
장막 안에서만 누리게 되어 있는 겁니다.
육적 인 것을 벗어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육적 인 모든 상황을 벗고
이제 부활하신 몸으로 갈릴리에 오셨다고 하고 그들을 만나주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완전한 상태를 제자들과 갈릴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하면 갈릴리로
가리라 하신 겁니다. 부활과 갈릴리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완전히 벗어 버린 겁니다. ‘예수가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이산이 어떤
산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3735(오로스)라는
단어를 보게 되면 ‘평평한 것 위에 우뚝 솟은’ 것을 말합니다. 높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오로스)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떠나서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오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서 선포 되어지기
시작하느냐고 하면, 산에서 선포가 되어지기 시작합니다. 왜 산으로
가셨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산은 세상과의 분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는 항상 숨기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높고 존귀한 사람들의 배후는 항상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의 빛이 되어지 게 되면 그 빛에 의해서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나가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 앞에서 가리워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놓은 산 (오로스)에 올라가셨더니
변화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 산입니다.
(마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게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그래서 세상에 마지막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재림에 때를 이야기하는 게 어디냐고 하면, 산 위에서
말씀을 하신다는 겁니다. 특별히 마태는 산을 세상과 어떤 분리된
곳으로 보았고 그곳에서는 항상 주님이 말씀을 전하시고 주님의
입이 항상 열리는 곳이었다는 겁니다. 복음이 흘러나오는 곳이고,
그리고 산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고 주님 홀로 계신 곳이란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늘 주님은 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그래서 경배하는 자와 의심하는 자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의 문제가 (호라오)본다고 하는 것에 문제가 걸리는 겁니다.
보고 믿는 신앙의 한계는, 지금 직면한 예수의 부활을 보았을 때
의심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을 드린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자체는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상 이전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믿음대로 나오는 것이지 보여지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할 때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눈으로 보면 믿지, 내가 만져 보고,
내가 확인하고, 그러면 내가 믿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데 사실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면 무엇이 생기냐 하면 보는
것에 대한 한계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불안전 합니다.
그래서
(요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그런데 또 이 말씀이 잘못 왜곡이 되어서
쓰이는 데, 무턱대로 믿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맹신을 강조할 때
이 말씀을 써 먹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보고 믿는 것 보다 낫다고
할 때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를 시켜야 되는데 자기가
설명할 수 없으니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나으니까 확인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무턱대고 믿고 따라오라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으로 손으로 만져보고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는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도마 네가 나를 봤느냐, 분명히 부활한 나를 봤지만 그리고
네 손으로 만져 보고 내 옆구리에다가 네 손을 넣어서 내 상처를 만져
보았지만 그 것은 단지 피상적인 것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는 얘깁니다. 우리는 보았기 때문에
본 것만 믿습니다. 들었기 때문에 들은 것만 믿는단 말입니다. 만져봤기
때문에 내가 확인한 사실만 믿지 그 이상은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본 사람들 가운데서, 만져 본 사람들 가운데서, 확인한
사람들 가운데서 의심이 생기는 겁니다. 왜?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으니까
, 그래서 주님은 보고 믿는 것 보다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훨씬 신앙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왜? 더 많은 것을
수용할 수 있고, 더 많은 믿음을 더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적인 어떤 체험을 했을 때 그 체험에
사로잡혀 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그에게 경험으로 왔을 때
그 경험을 넘어선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귀신을 보고 귀신을
쫓아내고 확인한 사람들은 한계가 거기까지입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며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래서 아버지의 모든 권세가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겁니다. 무엇을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 부활이 아버지
하나님의 권세를 넘겨받는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께서
이 권세를 누구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겁니까?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뒤로 나오는 모든 권세는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시는 모든 권세라고 하는 것은 전파하고 가르치고 제자
삼는 권세지만 하나님의 권세를 내 맘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 한 겁니다.
어느 때까지는 아버지께서 권세를 제한하십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권세가 실질적으로
나의 권세라면 얼마나 좋을까, 돈이 필요하면 물고기를 낚아가지고 그 입에서
돈을 꺼내면 되고, 말 안 듣는 사람은 팍 꼬꾸라지게 만들고, 좋은 사람들에게는
복 받아라 그러면 복을 왕창 받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권세가 그것이었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이
그 권세를 안 주셨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 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시기를 원하는데 그 권세라고
하는 자체가 이 땅 위에서 주님이 살았던 그 삶을 살 때에 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내 권세가 되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이 권세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기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가라는 겁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가는 것은 여행의 시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여행은 첫 째로 가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활에 증인으로서 즉 산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고 그 살아가는 자체가 복음 전파 여행이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산자에 삶을 보여 주는 여행이 되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결국은
우리의 믿음 행보 자체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그 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가라고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제자 삼으라는 겁니다. 제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익숙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익숙 해질려고 하면 그 말씀이 먼저 어디에 있어야 되느냐 하면, 입에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마음에 말씀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말씀이 우리에게 행동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말씀의 체질화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진정한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례를 주라고 하는 겁니다. (밥타조) 여기서 세례라고 하는 것은
날마다 정결을 유지시켜 주라는 겁니다. 날마다 씻으라고 하는 겁니다.
몸을 씻는 게 아니라 의식과 생각을 깨끗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정결하고 거룩한 상태로 유지되어지는 삶이 되었을 때 그것이 제자의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다음 세 번째는 가르치라는 겁니다. 배우고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되어지는 겁니다. 학교 졸업 했으니까 그만 두는 게 아니고 일생을
통해서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배우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는
가르치는 겁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단순히 배우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지나게 되면 여러분들에게서 양식을 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나에게서 말씀 듣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내가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 방법은 그 사람 실정에 맞게 전해주면 되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하는 방법대로 헬라어 히브리어 찾아가면서
하면 다 도망갑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소화된 말씀을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이 말씀을 소화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자기가 철저하게 공부를 많이 하고 여러 각도에서
연구를 많이 하고 준비를 많이 한 사람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기 시작하면 공부하는 방향이 달라지는 겁니다. 저도 여러분들처럼
배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그저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르치려고 보니까 내가 배울 때 보다 더 열심히 해야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더 많은 공부를 해야되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가르치는 자에게 두 가지를 주신다 그랬습니다.
’가르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뿌릴 씨앗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붙여
주신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때 겁을 내고 도망가면
안됩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르칠 사람이 생기면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나와야지 비로소 내가 공부를 하는 겁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지키게 하라는 겁니다. (테레오) 받은 말씀을 지키라는
겁니다. 받은 말씀을 잘 지키고 감시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것들이 외적으로 침투하지 못하 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비하고 보초를 서는 겁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반복하는
겁니다. 어제 갔던 길을 오늘 다시 가는 겁니다. 어제 봤던 그 곳을 오늘
다시 보는 겁니다. 그래야만 권세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는 가서 전파하고 가르치고 제자 삼아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에게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권세를 주신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절대 남용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 모든 인생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산 자의 길이기
때문에 그 길에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이 모든 권세를 사용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 하시느냐,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래서 그렇게 권세를 가지고 유지하고 지키고 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이 권세입니까? 임마누엘이
권세인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권세인 겁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게
오셨을 때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에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겁니다. 언제까지? 여기 ’항상‘이라는 단어가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 인데 그 날들
자테가 무엇을 이룬다는 겁니까? (쉰텔레이아) 완성을 이룬다는 겁니다. 누구와 함께?
나와 함께, 그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이끌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완전한 지체가 되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명령을 지킬 수 있는 그러한 지케가
될 때 까지, 그리고 주님 안에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는 그때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씀인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여기서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어디로 들어가느냐,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그때부터 (아르케)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