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각 스님의 월신보전을
내려 오는 중에~~
지장선사와 미타전 등
각단을 참배하며
구화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구화마을에도 크고 작은 절들이
수없이 많이 있답니다.
(역시 지장왕보살님의가피 )
내려온 던 중...용화삼회를 적은
바위를 봅니다.
용화삼회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한 뒤 56억 7천년만 년 후에
미륵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서
용화수 밑에서 도를 이루고,
세차례 중생 제도를 위하여
설법한다는 설명을 해 드릴려 하니
어찌나
빨리 내려 가시던지요^^
지장선사와 미륵전 등
각단을 둘러보며...
구화산은 보이는 곳마다 사찰입니다.
그 중에서도 불가사의 하고
습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중국에는 김교각스님 이후에
많은 등신불이 구화산 곳곳의
사찰에 모셔져 있습니다.
사실 내려오는 지장선사에도
동애선사의 등신불이 있었습니다.
동애선사는 평생 종만 치다가
1985년에 입적을 하시고
등신불이 되셨는데
저희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비구니스님으로서 최초로
등신불이 되신 자명스님이
모셔져 있는 통혜암은
손의 자세가 자세히 보면
평생을 침을 놓으시며
환자들을 돌보셨기에
입적하신 뒤에도 다른 등신불들과
달리 침을 놓는 자세라고 합니다.
구화산에는 약 99개의
사찰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찰은 노란색
일반 가정집은 하얀색으로~~
구화산 승가복장청이란
불교용품점들이 즐비합니다.
내려오면서 역시 불교용품가게는
향이 제일 많이 팔리는 것 같습니다.
김교각 스님의 유물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화성사는
구화개산사(九華開山寺)
역사가 가장 오래 되었고
김교각스님 수행하셨던
도량이기도 하며
구화산의 총 총림입니다.
화성이라는 말은 법화경(法華經)에
화성유품에 나오는 말입니다.
화성사뿐만 아니라 가는 곳곳마다
김교각스님이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올 때 데리고 왔다는
‘흰 삽살개’의 형상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또한 뽕잎과 볍씨와 차씨도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화성사에는 김교각스님의 유품인
신발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제는 보수공사라는
명분으로 참배초차 막아 버려서
저희도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10년 전)
제가 화성사에서
찍어 두었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40㎝에 이르는 엄청 커 보이는
짚신이 고배경대에서 보았던
발자국과 일치합니다.
실제 기록에 의하면,
7척의 키에 장정 10명을
상대할 만큼
장사였다고 합니다.
화성사 앞에는 그리 크지 않은
연못이 있는데 방생지(放生池)라고
표시가 되어 있고 많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화성사 앞 랑랑탑터
랑랑은 왕비를 말하는데
김교각스님의 모친인
성정왕후께서 스님의 안부가
궁금하여 중국까지 오셨다가
아들이 너무나 고생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몇날 며칠을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더이상 눈물도 나지 않을때쯤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는데
화성사 우물 물로 눈을 씻은 결과
시력을 회복하여 그 우물을
명안천(明眼泉)이라고 하며 지금은
랑랑탑이라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전설이지만 이국 땅 중국
화성사 광장가 앞 자리잡은 우물에
얽힌 김교각스님의 모친 이야기
랑랑탑이 신령스럽기만 합니다.
청말민국초에 랑랑탑이 없어지고
우물이 메워졌다는것으로 보아
랑랑탑과 명안천 우물의 존재는
자식에 대한 어머님의 진실함과
그 아드님 김교각스님을
다시 만나는 듯 싶었습니다.
10년 전 저 역시도 어머님을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 올렸던
화성사 장소이기도 하고요~~
구화산 정상에 있는
취용호텔에서 묵었습니다.
저는 새벽 3시부터 잠을 깨서~~
어찌나 성성하던지요
백세궁은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갑니다.
(탑승 약 5분 소요~ )
특이한 것은 노란색 건물이 아니라
사찰임에도 하얀색으로
백세궁을 지었답니다.
백세궁? 위 설명문에 의하면
나라 만력 연간의 일이다.
만력은 신종 황제(1572~1620)의
연호이므로 지금부터
약 400년전이다.
무하(無瑕)화상이 이곳 구화산에
김교각스님의 업적을 본받아
초가집을 짓고 수행을 하다가
126세에 입적하였다.
3년간 육신이 부패하지 않음에
사람들이 육신에 금을 입히고
암자를 지어
적성암(摘星庵)이라고 하였다.
명나라의 의종 황제 때인
1630년에 황제가 무하화상에게
"응신보살(應身菩薩)"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위선최락(爲善最樂)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같은 해에 절을 중창하고
적성암이란 이름을
만년선사(萬年禪寺)로 바꾸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 청나라 초기부터
사람들이 백세궁이라고 불렀다.
1983년에 불상을 중수하고
무하화상의 육신에 금을 덧 입혔다.
지금도 이곳을 참배하면
100세까지 장수한다고 하여
백세궁~~~이라고 한답니다.
위에 응신보살이라는 액자가 있는데
숭정 3년에 황제가 내린 것~
무하선사는 마을사람들에게 묻기를
지장왕보살(김지장 스님을 지칭)의
육신이 존재 하는가? 라고 하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지장왕보살의 육신을 모시고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위에다
묻었다라고 대답을 하였답니다.
(현재는 구화산육신보전)
무하선사는 이말을 듣고 몇차례
산에 올라가 산머리이 지세를
살펴보고 모든 구화산이
김교각스님의 도량임을
확신을 갖고
항상 계율을 지키면서
청빈한 수행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직접 혀에서 피를 뽑아
손수 쓰신 화엄경81권의
혈경(血經)을 남겼습니다.
(보존 되어 있고 국보로 지정됨)
24세에 오대산에서 출가 하시고
28세까지 구화산에 삼보일배로
김교각스님을 참배하고자 오셨던
무하선사~~
그 수행력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예전 청나라때 구화산에
큰 화재가 발생해서,
스님들이 무하선사(혜옥스님)
육신좌상을 다른 장소로
옮기려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아
사부대중이 좌상앞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으시면 여기서
같이 타죽겠다고 읍소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팔을 앞으로 드셨고
그 즉시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져
사찰의 화재가 진압됬다고 합니다.
백세궁 뒷편에는
오백나한전이 있었답니다.
이곳 나한전은 구화산 전체에서도
유일한 나한전이랍니다.
저희는 나한전을 뒤로하고~
대원사 내 박물관과
99m 지장대불을
만나러 갑니다.
카페 게시글
―····주지 스님방
중국 성지순례 - 3. 구화산(백세궁)
여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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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20
16.06.07 15:39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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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 대단합니다 ㅎ 더불어 10년전에 찍은 귀한 사진도 감상할수 있어서 넘 감사드립니다 _()_
랑랑탑이 기억에 남네요
화성사에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스님
~~~~~_()_
백세궁에 다녀오셔서 백수는 무난히 더사실것 같습니다 ㅋㅋ
감사합니다. 기억이 새록 새록 나셨다니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