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말기 및 대한제국 시대의 주화 | 1. 대동은전 | 대동전은 은으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로서 상평통보와 같은 가운데 구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1882년(고종19년) 7월에 발행되어 3가지 액면으로 대동1전, 대동2전, 대동3전이 있으며, 뒷면에는 주전소인 戶曹에서 제조되었다하여 뒷면 가운데 원안에 戶字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또한 앞면의 글자는 對讀형식을 하고 있으며 압인이 아닌 주물형식으로 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평통보를 제조하는 기술과 비교하여 진일보한 기술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뒷면 중앙에 칠보를 덮어서 새로운 화폐형식을 받아 들였다는데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칠보색상은 흑색, 청색, 녹색을 포함하여 5가지 색을 띠고 있다. 대동은전은 발행당시 주변국 일본의 일원은화, 멕시코의 무역화, 중국의 마제은 등 국가간 무역거래의 원활을 위해 은본위 화폐가 일반적인 분위기에서 조선정부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대동은전을 발행하였다. 대동전은 발행되자마자 은화의 본질적인 가치가 높고 은과 칠보의 아름다움 그 자체 때문에 부유층의 손에 들어가 사장되어 유통이 활발하지 못하였으며, 대동전의 소재인 중국의 마제은의 가격상승으로 결국 발행된지 9개월만인 1883년(고종20년) 6월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비운을 맞게 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수집선호도가 큰 화폐이다. |
| | 2. 당오전 시주화 | 개항을 전후한 1883년경 생산된 상평통보 당오전은 당시의 어려웠던 국내사정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가진 채 태어났다. 외국과의 교섭 및 개화를 위한 관리들의 일본파견, 신식부대 설치 및 운영비 등을 지출하는 것 외에 구식군대의 군졸들은 양곡과 급료를 1년여 동안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를 타개하고자 정부는 김옥균이 당오전 주조를 절대 반대함을 무릅쓰고 뮐렌도르프에게 당오전 지시를 명하여 1883년 전환국을 설치하고 주조하기 시작한다. 이때 발행된 당오전은 주물전과 압인전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전국의 주전소에서 주조된 상평통보는 대부분이 주물전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압인형태의 다양한 종류의 당오전이 있었는데 소전(素錢)가운데 원형이나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것과 구멍이 뚫리지 않고 원형 또는 사각형의 형태로서 구멍이 뚫리지 않고 윤곽만 가지고 있는 등의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평통보가 언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뮐렌도르프에 의해 독일에서 압인기가 수입된 1884년 을유시주화가 제조되기 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
| | 3. 을유년 시주화 | 경성전환국이 설립될 당시의 화폐주조기술은 주물로 상평통보를 제조하는데서 크게 발전되지 못한 채 답보상태였다. 초보적인 기술에 의존하여 제조하던 화폐 기술은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주전설계서”라는 보고서를 고종에게 제출하면서 일대 변화를 맞는다. 보고서는 제출 되었으나 당시 미국 공사나 중국의 위안스카이를 비롯한 개혁자로 알려진 윤치호도 이를 강력 반대하였으나 고종은 주전설계서에 의한 대로 주전기계를 수입하는 결정을 내린다. 고종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883년 경성전환국이 설립되자마자 근대적 화폐제조에 착수하였으나 기술 미흡으로 주화의 표면이 확연하지 못해서 조각담당, 각인담당 및 전환국관리자로서 총3명의 일본인이 초빙되었다. 이렇게 하여 1884년 (고종21년)에 최초로 시주화 2종류가 선보였는데 을유년에 제조되었다하여 을유시주화라 불린다. 한 종류는 1냥 은화로 또 다른 한 종류는 5문 동화로 제조되었다. 근대식 주화를 시험 제조한 이후 2년 뒤인 1886년에 15 종류의 다양한 시주화가 태어난다. |
| | 4. 태극장도안 시주화 | 조선정부는 궁핍한 국가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1883년에 조폐기관인 경성전환국을 설치하였다. 전환국을 설치한 계기는 첫째, 개항과 더불어 무역을 위해 주변외국에서 사용하는 은본위제도의 화폐유통이 되고 있어 구 화폐체제인 상평통보보다 신식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둘째, 화폐를 제조하면서 수익을 창출하여 정부의 세수(稅收)확대를 시도하였다. 셋째, 경성전환국은 1884년(고종21년) 3월 독일인 뮐렌도르프가 전환국의 책임자로 임명되면서 근대식 조폐기기와 더불어 소전(素錢)과 각인(刻印)도 독일에서 수입되어 근대식 화폐를 생산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추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86년 (고종23년)에 주석에 금과 은을 각각 도금한 금화 5종, 은화 5종 및 청동화 5종 총 15종류의 시주화가 탄생되게 되었다. 금도금화는 20환, 10환, 5환, 2환, 1환이 있으며, 은도금화는 1환, 5냥, 2냥, 1냥, 반냥이 있고 청동화는 20문, 10문, 5문, 2문, 1문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금보유량이 적고 제조비용 부족 등의 이유로 1888년(고종25년)주조를 중단하였다. 이후 이 기기는 인천전환국에서 계속 사용하게 된다. |
| 5 최초의 근대식 태극장도안 통용화폐 | 1886년 최초의 근대식 시주화가 제조된 이후 2년뒤 정식법정화폐로서 모습을 갖춘 1냥, 10문, 5문의 3종류 주화가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통용화폐는 제조년도가 1886년 (개국495년)이라는 연호로 도안되어 있으며 도안은 전면 중앙상단에 태극무늬장휘장을 하였으며, 좌우에는 오얏나무 가지 2개를 서로 교차시키고 뒷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도안되어 조선 왕실의 권위와 상징을 부각시켰다. 당시 발행량은 1환주화가 1300여매 그리고 10문 및 5문도 많은 량을 주조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할 수 밖에 없어 결국 대중 유통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
| | 6. 은본위제도에서의 신식화폐 | 1891년 (고종28년) 전환국의 안경수의 건의를 받아들인 고종이 신식화폐조례에 대한 제정을 만들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화폐의 분량이나 성질이 정해진 것이 없어 이를 정한다. ② 화폐의 통용이 전국에 고르게 분포되어야 한다. ③ 화폐의 본위가 확립되지 않아 이를 정한다. 신식화폐장정에 따라 1892년 화폐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최저 1푼을 황동, 5푼을 적동, 2전5푼을 백동, 1냥과 5냥은 은으로 하기로 정하였다. 1냥 이하부터가 보조화폐로 1냥과 5냥은 본위화폐로 명문화하고 발행하였다. 1냥의 경우 국내에서 유통되도록 정한 반면 5냥은 외국과의 무역거래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였는데 당시 일본의 1원 은화와 동일한 가치가 있도록 정한데서 화폐의 주조는 물론 화폐가치 역시 일본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강압은 조선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청나라와 국내 보수파가 합세한 미국, 일본의 반대에 부딪쳐서 유통은 되었지만 신식화폐조례는 빛을 보지 못한 채 공포되지 못했다. |
| | 7. 금본위제도에서의 신식화폐 | 우리나라에서는 1901년 5월 22일 광무5년에 화폐조례가 제정되어 세계적으로 금본위 화폐제도 정책에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891년 은본위 화폐정책을 받아 들인 후 10년만의 변화이었다. 이렇게 하므로서 은본위 화폐제도에서 금본위 화폐제도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역할은 탁지부에 고문으로 와 있던 러시아인 알렉세이프의 조언에 의한 것이라 추정된다. 금화는 20원, 10원, 5원의 3종류이며, 은화는 반원, 20전, 10전이 있고, 5전 백동전과 청동화에는 1전 및 반전이 있다. |
| | 당시의 조례에는 20환, 10환, 5환의 금화 3종류를 본위화폐로 정했으며, 보조화폐로서 반원 은화와 20전 은화, 5전 백동화 및 1전 적동화로 정했다. 하지만 조례에 의한 화폐는 러일전쟁 영향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협정서을 한국과 체결하고 화폐정책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 때 재정고문으로 취임한 메카타는 두돈오푼 백동화의 남발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화폐정책을 정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유로 전환국을 폐쇄시키고 1905년 1월 18일에는 1901년에 제정된 화폐조례를 재정비한 “화폐조례실시에 관한 건”을 공포하고 화폐종류를 보완 및 추가하여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10전 은화와 반전 적동화가 새로 제조되었으며 기존의 주화는 크기가 작아 진 것이 특징이다. 1907년 칙령 제4호로 은과 구리 등으로 제조하는 보조화폐 몇 종류가 크기 및 함유량 등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소재가치가 명목가치 이상으로 상승하여 주변국으로 유출될 경우 용해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이를 방지하고 화폐유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서 였다. 1905년과 1907년에 발행된 주화는 메카타가 한국의 화폐제조권을 사실상 박탈하다시피 한 결과로 전량 일본의 오사카 조폐창에서 제조되어 한국에 유통되었다. |
| | 8. 독수리도안의 화폐 |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은 종전보다 더 강경하게 조선의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강압에 의한 간섭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일본의 입장이 강해지면서 한국을 둘러싼 러시아, 중국 심지어는 프랑스와 독일까지도 일본을 견제하고 일본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일본의 오만불손한 행동은 극에 달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 전국 각 지에서 의병들이 활동하는 등 전국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1896년 러시아와 친밀한 인사들이 러시아와 사전에 약속하고 아관파천을 실행에 옮겼다. 즉, 혼란한 사회와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왕을 보호한다고 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을 이동시킨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조선의 경제, 정치 사회 분야애서 입김을 강화시켰다. 또한 일본인이 주도권을 잡던 인천전환국을 폐쇄하고 용산에 전환국을 설치하여 한국에서의 화폐주도권을 가진 일본의 역할을 무력화 시킨 후 1901년에 반환은화, 백동으로 만들어진 5전 및 동화 1전을 러시아의 국장인 독수리를 소재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러시아의 세력이 약화되자 일본은 용산전환국을 폐쇄시킴과 동시에 독수리가 도안된 화폐를 대부분 회수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용해시켰다. 힘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불과 몇 년 사이에 일본 국왕의 상징인 용과 러시아의 휘장인 독수리 등으로 바뀌는 등 약소국가의 단면을 보여준 화폐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반환, 20환, 10환, 5환 4종류의 화폐가 용산 및 인천 전환국에서 시주화가 발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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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국시대의 화폐 | 1. 戶曹 兌換券 | 1892년 경성전환국에서 새로운 화폐제도를 실시하려 했던 고종은 이 사업이 성과를 크게 올리지 못하자 결국 경성전환국을 폐지하고 그 해 11월에 인천전환국을 설치하였다. 인천전환국 설치와 때를 같이하여 종전까지 사용되었던 화폐를 새로운 화폐로 대신하기 위해 신구화폐의 교환업무를 맡아볼 태환서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태환서의 설치목적은 문란한 화폐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구권화폐를 태환권과 교환하여 구권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난 후 태환권으로 신권화폐를 교환해 주기 위한 수단으로 발행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전국의 개항장이나 주요한 지역에 태환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기관선정 작업에도 착수하였지만 전환국의 이해관계로 일본인 마스다에 의해 추천되어 태환국의 방판의 자리에 임명된 오오미자와와 마스다가 암투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태환권이 발행되었을 경우 사태를 우려해 전환국 설립 때 건축비 등으로 마스다가 대여한 돈으로 14만 9천환을 지불하고 운영권을 일본인에게서 되찾았다. 이러한 이유로 태환권은 발행되지 못했다. 당시 태환서에는 태환업무를 위해 미리 4종류의 태환권인 50냥 20냥, 10냥, 5냥의 지폐를 준비하였지만 미발행에 그친 상징적인 한국 최초의 지폐이었다. |
| | 2. 일본 제일은행권 (시부사와 도안) | 일본은 1897년 10월 1일 금본위제도를 채택하므로서 우리나라도 중국, 러시아 및 일본 등과 무역거래가 한창일 무렵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일본의 제일은행은 금융거래의 원활화 및 무역거래를 활성화 시킨다는 명분아래 대한제국의 사전 양해 없이 私設은행 입장에서 일본의 대장성의 허가만 받은 채 1902년 5월 부산을 시작으로 목포, 인천, 서울에서 발행하였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쌀과 금 등을 수탈하다시피 하여 대일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일개 민간은행이 한국의 화폐를 불법으로 유통시킨데 대해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더욱이 지폐에 도안된 인물이 우리나라 인물이 아닌 일본 제일은행 총재인 시부사와 에이이치이었기 때문에 격분하였던 것이다. 정부에서도 1903년 9월 외무대신 조경식은 각 항구에서 제일은행권 수수금지를 명령하기도 했다. 일본정부는 강력한 항의의 표시로 타까사고라는 군함으로 우리 정부를 위협한 결과 1903년 2월 금지령이 철회되면서 한국에서 합법적인 지폐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
| | 3. 제일은행 소액지폐 (봉황지폐시리즈) | 1903년 2월 일본제일은행권의 통용이 합법화되고 본격적으로 통용을 위한 수순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제일은행규칙”이 개정되었는데 주요골자로는 이미 발행된 1원, 5원, 10원권 외에 50원권, 100원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되었으나 당시 고액권의 필요성이 없어짐에 따라 발행되지 않았다. 또한 제일은행은 1904년(광무8년) 일본에서 1872년에 사용되었던 明治通寶권 지폐시리즈로 사용되었던 봉황을 도안 소재로 한 50전, 20전, 10전 3종류의 소액지폐를 발행하였다. 일본 민간은행 입장에서 대한제국정부의 중앙은행과 같은 권위를 누린다. 이때 대한제국정부의 공인까지 접수한 상태에서 법화의 역할을 하여 우리 민족의 가슴에 멍을 심어준 지폐의 한 획을 긋는다. |
| | 4. 일본제일은행권의 한국소재 도안 | 1909년 (융희3년) 7월에 한국은행 조례가 제정되고 한국은행이 탄생되었지만 화폐에는 여전히 제일은행이라는 명칭으로 유통되었다.특히 제일은행은 한국내 민중들로부터 일본제일은행권에 대한 반감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자 한국과 관련된 도안 소재를 찾아 지폐를 변경 발행하였다. 1908년 8월 1일 1원권에 경기도 수원에 있는 화홍문(華虹門)을 도안소재로 채택하는 것을 시작으로 5원권에 광화문을 10원권에 주합루(宙合樓)를 도안하여 반감을 무마시키려 노력하였다. 겉만 한국색이지 은행이름 등에서는 여전히 제일은행이라는 명칭으로 유통된 지폐이다. | | 5. 한국은행설립과 한국은행권 지폐 | 1909년 (융희3년) 11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되고 한국은행 설립에 때를 맞추어 지폐발행을 시도하였지만 지폐를 미리 준비하지 못한 채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본 내각인쇄국에 의뢰하여 1910년 12월 21일 최초의 한국은행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발행된 한국은행권은 1909년에 발행된 제일은행권의 일부만 수정한 채 발행되었다. 지폐내에서 변경된 중요부분을 요약하면 첫째, 은행명칭, 행장 등의 변화가 있었을 뿐 앞서 발행된 도안을 기본으로 하여 제조되었다. 둘째, 지폐도안은 여전히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한국적 도안소재를 사용하므로서 친근감을 나타내려 하였다. 셋째, 화폐단위 명칭이 한자의 원(圓)이 원(?)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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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행권
| 1. 조선은행 금권지폐시리즈 | 한국은행이 설립되고 3년이란 짧은 기간에 후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발권업무를 계속하였다. 당시의 조선은행은 업무인수인계 과정에서 한국은행과 일본 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도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것으로 간주하여 양 은행으로부터 인계를 받았다. 은행이 설립된 이후 1914년 9월 100원권 지폐 발행을 시작으로 다음해 1원권, 5원권, 10원권이 발행되었다. 화폐발행은 저액권부터 발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선은행은 100원권을 저액권에 우선하여 발행하였다. 이는 1원, 5원, 10원권의 일본제일은행에서 발행되었던 지폐의 상당량이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때 발행된 조선은행권은 화폐단위가 환에서 다시 일본의 화폐단위인 원으로 명칭이 변경됨은 물론 도안소재도 조선시대말기 인물인 김윤식을 채택하였다. 김윤식은 문장가로 정부의 개방정책에 따라 영성사(營繕司)를 이끌기도 하였고 한말에는 애국계몽운동을 하고 1910년 8월 순종에게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상소하기도 한 인물이다. 최초의 조선은행권은 일명 금권이라 불리는데 이는 지폐에 기재된 액면단위는 언제나 은행에서 액면 가치만큼의 금으로 교환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서 명목가치를 실질적 가치로 인정해 준다고 정부가 국민에게 보증하는 것이다. 금으로 언제든지 태환이 가능하다하여 금권이라 불린다. ·이 시기의 지폐인쇄는 조선총독부와 일본내각인쇄국에서 주도하였는데 조선총독부에서 제조된 것은 기호를 감싸는 부호가 로 되어 있고 일본내각인쇄국에서 제조된 것은 로 되어 있어 구별하기 쉽다. |
| | 2. 조선은행 1차 소액어음 (만주로 진출한 조선은행권) | 1917년 12월 1일 조선은행권은 일본의 대륙진출 전략의 일환으로 금융진출을 법화로서 강제적인 통용력을 갖게 되었다. 사실은 1915년 8월 21일 만주에서 보조화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만주에 있어서 소액지급어음발행에 관한 청원서」를 조선총독에게 제출하여 1916년 6월 2일에 허가를 얻음으로서 추진하게 되었다. 청원서 제출을 계기로 1916년 6월 12일 50전, 20전, 10전 3종류의 지급어음을 발행하였다. 이 때 만주에 소재하는 조선은행에서만 지급어음을 발행할 수 있는 조건이 있으며 법의 적용은 조선은행법의 규정을 적용하도록 강제권을 두었다. 3종류의 지급어음 인쇄는 조선총독부에서 하였으며 동일한 도안에 색상과 금액만 다르게 발행되었다. 뒷면에는 어음금액에 상당한 가치를 지급한다는 문구와 조선은행 문구가 영문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후 3종류의 소액어음은 일본으로부터 보조화폐 및 소액권 유입이 계속되자 그 필요성이 감소되어 1918년 5월 이후 발 행한 어음을 회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발행량이 적은 관계로 희소도가 높은 지폐이다. |
| | 3. 조선은행 2차 소액어음 (만주로 진출한 조선은행권) | 1차 소액어음 발행 후 1919년 새로운 양식의 소액어음을 발행하였는데 전면에 「조선은행지불금표」라는 명칭으로 조선은행에서 지불을 약속한다는 의미와 일본어로 兌換문구가 기재되어 있고 뒷면에는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로 태환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어음에 다양한 국가의 언어가 등장한 것은 만주 뿐 만아니라 주변지역이 당시 강대국들의 이해가 얽혀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은행을 통해 제 외국인들에게 일본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2차 소액어음도 1차 소액어음과 동일하게 1928년 일본 대장대신의 명령으로 1928년 3월 15일 이후 발행이 금지되었고 금지된 어음의 가치는 동일한 금액의 보조화폐로 대체 지급되고 20년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
| | 4. 조선은행 3차 소액어음권 | 일본이 중국을 상대로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도발하였는데 이 시기에 일본의 군대에서는 조선은행권이 군용화폐로 통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사변 때도 조선은행권이 군용화폐로 통용되었다. 군용통화로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기 때문에 일본은 무력 침략과 더불어 금융침략을 시도하고자 1916년에 소액어음을 발행한 이래 이 때 발행된 소액어음을 유통 금지시킨 이후에 또다시 소액어음을 재발행하였다. 2차에 발행된 어음과 도안이 흡사하지만 약간의 변경을 하여 10전권과 50전권 어음을 발행하여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는 수단의 한 방법으로 소액어음을 사용하였다. 이 어음을 마지막으로 군용통화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지폐는 이후에 다시 발행은 되지 않았다. | | 5. 조선은행 개권(改券)지폐시리즈 | 1932년부터 1938년에 걸쳐 개권(改券)지폐시리즈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1932년 1월 4일 일본 내각인쇄국에서 제조한 개권 1원, 1932년 6월 1일 개권 10원, 1935년 6월 1일 개권 5원, 1938년 12월 1일 개권 100원이 다양한 액면의 단위로 체제를 갖추며 금융거래의 편리함에 이바지하게 된다. 1원권을 제외한 전권종은 일본의 오동나무를 삽입하였으며 금권지폐시리즈와는 달리 액면만큼의 가치를 지급한다는 영어문구가 사라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전권종이 공통적으로 조선은행 휘장이 사용되었으며 금권과 동일하게 김윤식이 등장하게 된다. 더욱이 1937년대 전쟁이 일촉즉발상태의 분위기로 급반전되고 중국과 일본의 전쟁여파로 지폐용지 및 기타 물자가 부족함은 물론 지폐를 제조하는 절차가 간소화되는 추세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인쇄용지가 저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
| | 6. 조선은행 갑(甲)권 지폐시리즈 | 1944년 2월 1일에는 갑5원권, 갑10원권이 발행되고 같은 해 10월 15일에는 갑 1원권, 11월 1일에는 갑 1000원권이 그리고 갑권의 마지막인 갑 10원권 무번호권이 11월 15일 발행되어서 명실상부하게 갑권 시리즈는 제모습을 갖추었다. 갑권지폐는 앞서 발행된 개권 지폐와 같이 전체적인 도안은 크게 차이가 없이 발행되었지만 개권보다 질이 저하된 지폐를 사용하였다. 개권과의 차이는 뒷면에 凸판 인쇄로 되어 있으며, 개권의 색상이 화려한데 비해 갑권은 색도가 1도씩 줄어들어 전체적인 지폐의 분위기가 어둡다. |
| | 7. 을(乙)권 지폐 시리즈 | 1945년 해방일로부터 1948년 정부수립일인 8월15일까지 사회적 혼란과 경제불안 등으로 과도기와 같은 기간을 거친다. 여기에다 일본인이 고의적으로 화폐를 남발시키고 산업시설 부족 등으로 물가가 급등하고 인플레이션이 심각하였다. 이 무렵 급격히 통화량이 많아짐에 따라 고액권 발행도 증가하게 되어 1945년 9월 1일에는 을권100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을권시리즈는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인쇄국에서 지폐를 제조한 점이 특이하다. 을권 시리즈 지폐는 1원권, 10원권과 100원권이 있는데 두 종류 모두 다른 지폐와 구별하는 방법은 기호가 {1}이나{2}로 되어 있어 식별하기 용이하다, 을권의 경우 그 수량이 극히 적어 수집가에게는 인기가 높은 실정이다. |
| | 8. 병(丙)권 지폐 시리즈 | 을(乙)권시리즈 지폐가 제조됨과 비슷한 시기에 병(丙)권 지폐시리즈가 태어났다. 병권 지폐시리즈도 을권 지폐와 동일하게 해방된 후 1946년 12월 10일 일본 내각인쇄국에서 제조되어 반입된 지폐이다. 이 당시 8.15 해방과 때를 맞추어 한국의 경제는 금융시장과 경제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상황과 같은 금융공황이 초래되어 대출과 예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을 맞아 저액권 지폐뿐만 아니라 고액권 지폐 수요도 증가되어 화폐발행량은 극에 달했을 정도이었다. 이때 화폐 발행량은 1945년 8월 15일을 지수 100으로 하였을 때 병권 100원 발행일인 1946년 10월을 비교하면 2.5배인 지수 245이었다. 이와 같은 경제?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발행된 병권지폐 시리즈는 100원권이 기호 {3}에서{7}이며, 병10원권은 {3}이나{4}까지를 말한다. 병권지폐시리즈는 을권지폐시리즈와 같이 도안이나 색상 및 종이질이 비슷하며 단지 지폐안에 있는 기호의 숫자가 다를 뿐이다. 전면의 배경색이 하늘색이어서 은은한 멋을 자아내면서 수집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 |
| | 9. 정(丁)권 지폐 시리즈 | 정(丁)권 지폐시리즈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부터 정권 지폐 발행일인 1946년 7월 1일에 즘 하여 통화량이 급격히 팽창되었던 시기에 태어났다. 특히 이 기간에는 백원권과 같은 고액권 지폐가 2년 사이에 네 종류가 발행되는 등 을권지폐시리즈와 병권지폐시리즈는 일본내각 인쇄국에서 인쇄가 되었지만 정권지폐 백원및 십원권은 오늘날 한국조폐공사와 국정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되어 유통되는것이 특징이다. 정 100원권은 1945년 7월1일, 정 10원권은 1945년 10월10일에 탄생되었으며 을권, 병권과는 달리 정100원 권은 전체적인 도안의 형상이 그대로 유지하면서 앞뒷면의 색상만 약간 변경된 것이 특징이다. | |
| 10.무(戊)권100원 | 화폐발행양이 점점 증가되면서 마지막 고액권이 발행된 것이 무권 100원 이다. 무권100원은 1947년 6월3일 태어났으며 앞서 태어난 을권, 병권, 정권 100원과의 구별은 상당히 쉽다. 전면의 전체적인 테두리 색상이 엷은 청색을 띠고 있고 중앙에는 연한색의 문양이 도안되어 검은색 계통의 을, 병, 정권 지폐와는 차별화가 된다. 또한 이 시기에 발행된 100원권은 네 종류로서 해방시점에 고액권 100원의 비율이 49%였으나 인플레이션 등으로 고액권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되어 1945년말에는 3개월만에 70.7%였으며 1947년에는 93%까지 점유하게 되어 극심했던 인플레이션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고액권 지폐의 남발은 지폐의 희소도가 낮아져서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그리 높지않다. 무권의 발행량이 많은 또 한가지 이유로서 6.25 동란중 북한군이 화폐제조시설을 접수하여 무권과 후술하는 미발행 a권 천원권 지폐를 남발하였기 때문이다. | |
| 11. 조선은행 미발행 1000원권 |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수도 서울이 함락당하자 한국은행을 접수하고 남한의 경제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 공작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호가 A인 미발행 1000원권을 불법으로 유통시켰다. 무권 지폐까지는 정식으로 발행된 법화를 추가로 무분별하게 남발하였지만 미발행 1000원권은 지폐발행 고시가 없는 상태에서 지폐를 제조하여 발행, 유통시켰기 때문에 불법이다. 과거 발행된 100권의 크기는 모두 동일 하지만 미발행 1000원권은 고액권 100원 지폐에 비해 가로, 세로가 2m씩 작다. | |
| 12. 조선은행 미발행 1000권 | 인플레이션이 극심하던 1940년대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이 패망하고 전쟁의 후유증과 열악한 국내 경제상황이 급격히 불안하자 조선은행 당국은 이에 따른 물가 급등으로 기존에 통용되는 고액권 100원으로는 화폐의 기능을 다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불안한 경제상황과 화폐유통의 적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액권 발행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1000권 고액지폐를 유통시킬 수 있을 만큼 발행하지 못 하자 일본에서 1942년 발행된 갑 1000원권을 수입하여 전면 중앙 상단에 적색 글씨로 “조선은행권” 이라 가쇄하여 유통시키려 하였지만 전쟁의 영향으로 무의에 그쳤다. 일본의 갑권 1000앤은 일본뿐만이 아닌 한국, 대만에서 유통이 시도 되었다. 당연히 일본은 법정 화폐로 유통되었고 대만은 뒷면에 “대만은행권”이라고 가쇄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앞면에 가쇄된 채 발행 되었지만 그 수량은 유통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극소량으로 단지 99메가 발행되었을 뿐이다. 이 지폐는 워낙 희소도가 높아서 시중에 모조품도 간헐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식별하기 쉬운 방법으로서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번호는 293901번부터 293999까지 99매가 전부이다. 이후 제조된 김윤식이 도안된 1000권 지폐도 일본의 갑1000원권 대안으로 발행되었지만 그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묻혀 버린 비운의 지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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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시대
| 1. 대한민국 정부의 조선은행권 |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에 우리나라의 국호는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변경되었다. 일반적으로 국호와 함께 중앙은행 명칭도 변경되는 것이 대부분 국가에서 관례이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당시 재무부에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려는 연구가 있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한 채 조선은행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되기 전까지 화폐는 1949년 9월1일 태어난 독립문이 도안된 10원권과 5원권이 있으며 이 외에 보조 화폐로서 1949년 11월15일 태어나 50전, 10전, 5전 등 세종류의 지폐가 새롭게 등장했을 뿐이다. 이 시기에는 이들 5종류의 화폐이외에도 구조선은행권과 일본정부의 소액보조 화폐등도 1950년 6월 한국은행이 설립되면서도 한국은행 법에 따라 대한민국 법화로서 지위를 누리며 통용되었다. 독립문 10권과 5원권은 기존의 조선은행권과 달리 종이의 지질이 상당히 고급스럽다. |
| | 2. 대한민국 정부의 조선은행권 소액지폐 |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한 2년도 채 안되는 기간 중에 태어난 5종류의 지폐중에서 소액 은행권이 세 종류있다. 이 지폐역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아닌 조선은행 이라고 표기된 채 발행된 비운의 지폐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정부의 중앙은행 법이 정비가 되지 않아 종전과 같이 한국은행이 아닌 조선은행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에서 한국은행으로 명칭변경이 늦어진 것은 중앙은행 설립과 관련하여 당시 재무부에서는 미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에 자문을 구하였고 자문에 응하기 위해 뉴욕연방 준비 은행의 불름필드 박사등 일행이 한국의 금융과 경제 상황을 조사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법에 의한 한국은행이 업무를 개시한 뒤에도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것과 같이 법화로서 효력을 인정한다고 간주되어 유통되었다. 이 지폐는 해방이 되고 다양하고 무분별한 화폐제도를 개선시키기 위해 발행 되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다지 유통되지는 못했다. |
| | 3. 한국은행의 설립과 최초의 한국은행권 탄생 | 조선은행에서 한국은행으로 설립을 변경하여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찾고 통화가치 안정 등 산적한 금융과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무부에서 초빙한 미국의 금융이론 전문가 및 실무자들이 1949년 9월초에 한국을 찾았다. 전문가들이 한국의 금융제도와 경제 상황을 면밀히 조사,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재무부에서는 1950년 2월4일 한국은행법안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한국은행법은 1950년 5월5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법률 제 103조에 의해 재정 공포되었다. 근대적 화폐가 발행된 지 반세기 만의 쾌거였다. 조선은행과 한국은행간의 업무 승계로서 구체제의 화폐를 새롭게 태어난 한국은행에서 동일하게 법화로서 효력이 인정되었지만 1950년 6월12일 불과 13일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대구로 피난 간 한국은행은 1950년 8월17일 최초의 한국은행권으로 1000원권과 100원권 두 종류를 발행하였다. 하지만 인쇄를 담당하는 조선서적 인쇄 주식회사가 전쟁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연합군 사령부의 협조로 급히 일본으로부터 두 종류의 지폐를 제작하여 미군 군용기로 운송하여 발행하였다. 최초의 한국은행권 이지만 일본에서 제조되어 다소 자주성이 희박한 불행을 안고 있다. 1000원권은 기호가 500번 까지는 일본에서 제조되었으며 500번 이후의 기호는 한국에서 인쇄된 것이다. 화폐단위로는 조선은행 시대에 사용된 원단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
| | 4. 한국은행 좌이박지폐 시리즈 |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남한으로 진군하면서 각종 보잘 것 없었던 국가기관 시설 파괴는 물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탈취한 화폐를 남발시켰다. 이런 폐단과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1950년 8월26일 긴급명령 제10호인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의 관한 건”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은행권의 법적인 지위를 없애버려 통용을 금지시켰다. 이것이 최초의 화폐개혁이었다. 일차적으로 worker line을 구축하여 서울, 경기, 강원도를 대상으로 신구 화폐교환이 이루어 졌으며 점차 전국으로 확대 시켰다. 이 시기에 발행된 지폐가 좌이박 1000원 및 500원권 일명 좌이박 지폐 시리즈가 발행 되었는데 이유는 물품거래의 편의를 위해 1000원권 외에 남색개통의 500원권의 추가로 발행되었다. 이때까지도 화폐의 유통량이 98%까지 대량으로 유통되던 조선은행권 100원을 제외한 중,소액권의 지폐는 이때까지도 한국은행권과 함께 사용되었다. | | 5. 제 2차 화폐개혁의 시기의 화폐 (미국에서 제조된 거북선 지폐시리즈) | 한국전쟁이 휴전협정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고 전쟁의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우방국들의 지원에 힘입어 경제 구조가 호전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내 정세는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아지게 하였으며 또한 정부에서는 경제 산업 활동 및 금융제도를 안정을 기반으로 한 시책으로 추진하고 국민들의 높아진 구매력을 다소나마 억제시키기 위하여 1953년 2월에 제2차 긴급통화 조치와 금융조치를 전격 시행 하였다. 이 조치의 중요한 부분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1953년 2월17일부터 원표시의 한국은행권, 전표시의 조선은행권 및 일본정부 발행의 모든 화폐는 유통을 완전히 금지시킨다. 둘째. 화폐표기 단위는 원에서 환으로 변경시킨다. 셋째. 모든 금융거래는 100;1로 절하하여 시행한다. 이때 발행된 지폐는 모두 5종류로 1환, 5환, 10환, 100환, 1000환으로 거북선을 도안으로 전량 미국조폐창에 의뢰하여 제조 되었지만 전면의 화폐단위는 한자로 환 이지만 뒷면은 한글로 원표시로 되어있다. 신뢰성을 중시하는 한 국가의 지폐로서 치명타가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거북선 도안도 전문가의 고증을 거치치 않고 역사적 사실에 근접하지 못한 일반 민화수준의 거북선이다. 이들은 미리 미국에서 인쇄시켜 놓았기 때문에 원 표시와 환 표시의 이중성이 그다지 신뢰성을 주지 못해 보인다. |
| | 6. 신체제 환표시 은행권 | 1953년 제2차 긴급통화조치시 한국은행은 미국에 의뢰하여 제조된 지폐를 국내에서 제조된 지폐로 대체하여 유통시키고자 1953년 3월 7일 신체제 10원과 1953년 12월 18일 신체제 100원권을 한국조폐공사에서 제조토록 하였다. 이때 제조된 두 종류의 은행권은 미국에서 수입한 노란색 인쇄용지를 사용했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황색지 지폐라 불리는데 잠시동안 발행된 후 몇 개월 후 국산 백지를 사용하여 계속 발행되었다. 신체제 10환 황색지와 신체제 100환 황색지는 인쇄용지 품질이 뛰어나고 단기간에 생산되었기 때문에 희소도가 높아 수집인기가 높으며, 신체제 100환의 경우 기호가 {1}부터 {5}까지 인쇄된 것이 황색지로 분류되며 일반적으로 신체제 지폐와 국산백지로 발행된 지폐는 육안으로 쉽게 구별된다. |
| | 7. 환권 체제정비와 우이박 지폐시리즈 | 한국은행에서는 경제활동의 다양화 및 금융과 물품거래의 융통성을 원활히하기 위해 1000환권 고액권과 100환권 지폐 사이의 중간단계인 500환권의 필요성을 느끼고 1956년 3월 26일 지폐 중앙에 이승만박사를 도안한 500환권을 발행하였다.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일명, 중앙이박이라 불린다. 이어서 미국에서 제조된 거북선 100환권을 순수 국내에서 인쇄된 화폐로 유통시키고자 우측에 이승만박사를 도안소재로 한 신1000원권을 발행하는 등 국내??? 지폐제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하므로서 거북선이 도안된 5종류 중 1환권과 5환권을 제외한 지폐가 전부 국산지폐로 대체되었다. 이후 소규모 화폐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1958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물인 독립문도안을 주제로 50환권 지폐가 발행되었다. 독립문이 도안된 50환권지폐는 주로 인물위주의 지폐에 익숙했던 수집가들 사이에 인물이 아닌 독립문이 삽입되었고 유통기간이 짧았던 관계로 인기가 상당히 높다. |
| | 특히 지폐중앙에 이승만대통령이 도안된 500환권은 당시의 정치 및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어 웃지 못할 일화로 유명하다. 이승만대통령이 지폐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폐가 접혀졌을 때 얼굴이 접히고 이러 인해 대통령을 경멸한다하여 지폐제조를 중단시키고 1958년 8월 15일 도안을 우측으로 변경한 신500환권이 발행되었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또한 1953년에 발행된 100환권도 도안의 위치를 약간 변경하여 우측에 이승만대통령의 모습을 도안한 게100환권을 1957년에 발행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시의 3종류의 지폐는 우측에 이승만대통령의 도안이 있다하여 우이박지폐시리즈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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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정치격변기의 한글표시 환권지폐 | 자유당의 이승만 대통령 정권이 자행한 1960년 3.15 부정선거는 4.19혁명이 일어나는 빌미를 주었고 이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은 경제질서 및 물가불안정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는 이러한 혼란한 정세에서 국면전환을 탈피하고 경제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1960년 8월 15일 세종대왕이 도안된 1000환권을 발행하였고 이듬해 4월 19일에는 세종대왕 500환권을 발행하였다. 기존의 지폐가 이승만 대통령이 도안된 지폐일색이었던 것에 비해 모든 국민의 존경을 받던 세종대왕을 지폐도안으로 채택하므로서 국면전환을 시도하였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였기 때문에 지폐의 모든 글자도 한자에서 한글로 변경하여 국민에게 친근감을 심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1962년 5월 16일 발행된 100원권 지폐는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 떨어진 국민의 저축율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어머니와 아들이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도안으로 제조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영부인과 영식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던 지폐이다. 그러나 이 지폐는 제3차 화폐개혁으로 태어난 지 24일만에 유통이 금지되어 한국화폐사상 가장 단명지폐로 기록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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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시대
| 1. 영국에서 제조된 원권지폐 | 정부에서는 국민의 건전한 경제질서를 확립하고 지하에 숨겨진 자금을 양성화하여 경제발전에 이용할 목적으로 제3차 화폐개혁을 1962년 6월 10일 전격 실시하였다. 이 시기의 화폐개혁에서는 화폐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변경되었으며 단지 소액거래의 교환을 위해 50환권 및 10환권 주화만 유통을 허가하였다. 환가비율로 10환대 1원의 비율로 변경되었다. 종전의 환표시 지폐는 유통이 금지되고 지하자금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도움이 되고자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나 목적달성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후대의 평론이다. 화폐개혁을 극비리에 추진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유명한 화폐전문제조회사인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Thomas De La Rue Co)사에 의뢰하여 비밀리에 도입되어 1962년 6월 10일부터 유통시켰다. 1원부터 50원까지는 평판인쇄로 발행되었지만 고액권인 100원과 500원은 요판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리고 500원권은 위조방지를 위해 은선(隱線)이 삽입된 특수용지를 사용하였고 100원권부터 1원권까지 하위지폐는 色絲를 삽입하여 위조에 대비하였다. 이중에서 총석정이 도안된 50원권은 바탕색이 붉은계통의 색상으로 도안소재도 인물이 아닌 자연경관인 총석정을 도안소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액권 지폐보다 가격도 월등할 뿐만 아니라 수집인기가 상당히 높아 지금도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 | 2. 영국제조 지폐에서 국산지폐로 대체 | 한국은행에서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제2차 화폐개혁 때 시도하였던 것과 동일하게 외국에서 제조된 지폐를 국내에서 제조된 지폐로 대체하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첫 작품으로 저액권지폐중 사용빈ㅇ도가 제일 많은 10원권에 첨성대를 도안소재로 채택하여 1962년 9월 2일 발행하였다. 특이한 점은 이 때부터 한국은행 인장이 한글로 바뀌어 명실상부하게 화폐에 사용되는 모든 글자는 한글로 변경되었다. 과거에도 모자상이나 세종대왕 1000환 및 500환권이 한글표시가 되었지만 인장만큼은 한자로 되어 있었다. 이어서 1962년 11월 1일 앞면에 독립문과 뒷면에 경회루를 도안으로 하고 크기는 영국에서 제조된 100원권과 동일한 지폐가 태어났다. 또한 소액물품거래 및 수소점이 발생되는 금전거래의 처리를 돕기 위해 10전과 50전 지폐가 1962년 12월 1일 발행되었지만 그다지 활용되지 못하고 1980년 발행이 중지 되었다. 이렇게 하므로서 영국애ㅔ서 태어난 6개 권종은 2종류 지폐를 국내산으로 대체하고 액면종류도 2종류가 증가하여 8개권종으로 세분화되어 국민의 경제활동 및 거래에 도움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국내의 지폐제조기술은 진일보하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요판인쇄에 의해 순수 국산지폐를 생산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화폐제조기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지폐에 삽입하는 도안의 소재도 다양해 졌다는데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과거에는 환권체제의 지폐에서는 대부분 이승만대통령이 도안되거나 아니면 미국과 영국 등에서 제조된 지폐는 우리의 정서와는 약간 거리감이 있는 분위기 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제조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자주성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
| | 3. 요판인쇄기술의 지폐 | 한국은행은 우리나라 화폐사의 숙원이자 현대사회의 부응에 따라 그 동안 숙원사업이던 요판인쇄기를 도입하였다. 요판인쇄는 특수인쇄방식으로 서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십년전부터 요판인쇄로 지폐를 제조하였던 기술로서 인쇄하고자 하는 선이나 글자부분의 음각부분에 잉크를 채워 넣고 인쇄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인쇄가 끝난 지폐부분이 돌출되어 손으로 만지면 질감이 느껴지는 독특한 인쇄기술이다. 첫 번째 작품으로 기존의 경회루가 도안된 100원권 지폐대신 세종대왕을 도안의 소재로 한 100원권을 1965년 8월 14일에 제조하고 뒷면에는 사적지로 지정된 지금의 한국은행 본관 전경을 평판으로 발행하였다. 이어서 1966년 8월 16일에는 요판인쇄기술을 진일보시켜 앞면과 뒷면을 요판으로 인쇄한 남대문 도안의 500원권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1969년 3월 21일에는 저액권 50원 지폐에 팔각정을 도안하여 발행하였는데 이 때는 고액권이 아닌 관계로 평판으로 인쇄하여 영국에서 제조된 50원권과 대체하기 시작했다. |
| | 4. 고도성장기의 고액화폐 |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본궤도에 접어들어 점차 탄력을 받게 되자 자연히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고액권 발행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편 1970년 100원권 주화 발행으로 소액거래에 대한 화폐의 역할이 세종대왕 100원권 지폐에서 동전으로 대체되는 등 화폐의 개념이 점차 바뀌어 갔다. 한국은행에서는 이러한 사회 경제적 현실에 부응하여 10000원권 지폐를 발행하기 위해 신문에 공고까지 냈으나 10000원권 도안이 석굴암과 불국사를 도안해서 특정종교를 두둔한다는 이유로 종교단체의 저항에 부딪쳐 1963년 6월 12일 세종대왕을 소재로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고액 10000원권이 탄생되었다. 또한 5000원권은 1972년 7월 1일 발행하였으나 도안의 소재인 율곡 이이의 초상에서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의 이목구비와 같다는 파문이 일어 이후부터는 표준영정을 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5000원권이 서양인을 닮은 이유는 인쇄원판을 영국의 토마스 데라루사에 의뢰해서 크게 검증 없이 외국인의 의해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1973년 9월 1일에는 종전의 남대문 500원권이 전체적인 색상이 흑색이어서 복사하기 용이하다는 우려 때문에 다양한 색상으로 교체된 이순신 500원권이 발행되었다. | | 5. 국산용지와 표준영정을 채택한 지폐 | 한국은행에서는 그 동안 도안의 소재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도안에 대한 표준 영정을 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결과 1977년 6월 1일 새로운 5000원권이 탄생되고 1979년 6월 15일에는 새롭게 변경된 10000우너권이 발행되었다. 이 두종류 지폐에 사용된 인쇄용지는 종래까지 영국에서 사용되던 용지대신에 은화가 삽입된 구???산용지로 대체하여 국산용지의 고품질을 증명하였다. 국산용지는 내구성이 월등하고 인쇄방식에 적합하여 점차 국산용지로 대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도안에 사용되는 영정은 정부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제조되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영정에 대한 시비는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
| | 6. 화폐체제를 정비한 지폐 | 한국은행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에 따라 1982년 1월 21일 대대적으로 화폐체제를 정비하였다. 종전까지 사용하던 지폐가 크기가 커서 휴대하기 불편하였으며, 국제적으로도 소형화 추세에 따라 이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변경된 특징은 도안은 지폐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변경없이 인물도안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이외에 인쇄용지의 고품질로 지폐의 사용기간을 늘리고 시각장애인도 지폐의 권종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점자를 삽입하였다. 또한 자판기 및 은행의 ATM기 등에서 쉽게 감별하도록 전자감응요소를 넣는 등 지폐 체제 혁신에 주안점을 두었다. |
| | 7. 위조방지강화와 저작권의 화폐 | 한국은행은 날로 정교해져 가고 첨단장비로 위조 및 변조지폐가 유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한 지폐를 선보였다. 우선 1994년 1월 20일 10000원권을 발행하면서 은화부분을 복사할 경우 팔랑개비형태의 모습이 나오도록 강화하는 한편 부분 은선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폐제조가 하나의 예술성을 가진 작품으로서 이에 대한 저작권을 표시하기 위해 2000년 6월 19일에 10000원권을 그리고 2002년 6월 12일에 5000원권을 발행하므로서 화폐의 도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강화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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