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8세기, 백수들이 펼치는 지성의 향연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은 18세기 지성사의 큰 별이다. 이들의 빛은 아주 밝고 영롱하다. 연암과 다산이 자신들만의 고유하고도 찬연한 궤적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동시대를 비추던 선배, 동료라는 여러 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하나의 빛으로 서로 각축하며 연암과 다산을 앞서 이끌었던 별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들이다. 연암의 선배요 지기였던 농암 김창협(1651~1708)과 담헌 홍대용(1731~1783), 다산의 스승이며 선배였던 성호 이익(1681~1763)과 혜환 이용휴(1708~1782)!
시작은 그랬다. 연암과 다산의 인생궤적,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등을 계보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원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고백하자면, 연암과 다산의 스타일은 각각 어디에서 온 것일까, 라는 매우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한 대장정이었다. 그리하여 한 축으로는 연암의 근거지인 노론학맥을 탐사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다산의 근거지인 남인학맥을 탐사했던 것이다. 김창협의 『농암집』과 『농암잡지』, 홍대용의 『담헌집』, 이익의 『성호문집』과 『성호사설』, 이용휴의 『혜환선생시문집』을 읽어나갔다. 예상한 대로 노론학맥과 남인학맥은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질성이 연암과 다산의 글쓰기 스타일과 사유의 특이성을 구성하는 원천임에 틀림없음을 확인했다.
노론학맥과 남인학맥의 뿌리를 먼저 확인하시라~
그런데 나의 탐지기는 뜻하지 않은 방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름하여 ‘18세기 조선지식인들의 생태학’! 지식인들의 삶의 터전과 그 생리·생태학적 추이 쪽으로 시선을 돌린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계기는, 18세기 지성사 세미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일어난 아주 중대한 발견(?) 때문이었다.
어랏,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백수’였다. 노론학맥과 남인학맥이라는 이질성보다 더 중요한 공통지반. 연암과 다산의 선배 네 명은 다 백수, 고상하게 말해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포의(布衣 베옷, 흰옷으로, 벼슬하지 않는 선비를 뜻함)’의 선비였다는 사실이다. 이 백수라는 조건이 그들 사이의 어떤 차이와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지성사의 르네상스를 열어 제치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인이었구나! 온 몸의 세포들이 반응했다.
이렇게 말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물적 토대가 이념을 바꾼다! 유물론자가 아니라도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건, 우리가 흔히 목도하는 현실이다. 18세기 남인과 노론 계열 지식인들의 경우가 꼭 그렇다. 노론의 농암 김창협이 그랬고, 남인의 성호 이익이 그랬다.
이들은 선비들의 유일한 일자리,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아니 나아갈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맞다. 자발적인 선택이었지만, 결코 자발적일 수만은 없었던 당쟁의 여파 때문이다. 장희빈과 민비의 암투로 유명한 그 숙종의 시대, 논적이었던 노론 대 남인들이 출척을 번갈아 당하면서 이들은 선택해야 했다. 비방과 죽음도 무릅쓰고 포화의 한가운데 설 것인지, 낮은 포복으로 집안과 목숨을 보존할 것인지. 당쟁으로 부형(父兄)과 가까운 친지를 잃는 가운데, 이들이 선택한 길은 포의(백수!)의 선비였다.
포의로 사는 것 혹은 은거는 더러운 세상에 대항하려는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진짜 보신(保身)을 위해 어쩔 수 없지만, 어찌 보면 아주 능동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제물로 희생되기보다는 살아남으려는 ‘양생(養生)’이자 ‘호신(護身)’의 의지! 그 결과 포의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색했으며, 포의로서 세상과 어떻게 만나고 세상에 어떻게 응전해야할지 고민했다.
중요한 점은 이런 물적 조건이 18세기 지성사의 르네상스를 열었다는 것. 이들은 백수로 사는 법을 개척했고 이 속에서 새로운 이념(사유)의 싹을 틔웠다. 한편에서는 남과 다른 문장으로 세상과 만났고, 다른 한편에선 일상의 정치를 사유하고 실천했다. 기실 연암과 다산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8할의 ‘바람’도 백수 생태학의 산물이 아니었을지. 연암의 경계 없는 사유와 글쓰기, 그리고 다산의 방대한 학문 기획과 지식 경영은 이 훌륭한 선배들의 백수 생태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들은 백수였기 때문에 18세기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 백수라는 그들의 생태학 덕분에 어느 시기보다 재미있고 역동적인 사유와 글쓰기의 장이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자, 여기쯤에 이르면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들 하셨으리라. 18세기 백수계의 무림 고수들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본론을 이야기하겠다. 화요일의 연재코너 <18세기 조선지식인 생태학>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백수라는 삶의 조건에서 새로운 삶의 지도를 그려간 18세기 지식인들을 한 명 한 명 탐방할 것이다. 무슨 주의나 무슨 학파로 추상화하지 않고, 18세기 지식인들이 호흡하고 고민했던 구체적 현장과 그들의 삶과 사유의 스타일을 탐사하는 것, 이것이 나의 목표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코너의 주인공 네 명의 프로필을 올리는 것으로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태학>에 관한 시작의 변을 마감하려 한다.
농암 김창협, 1651(효종 2년) ~ 1708(숙종 34년)
첫 주자, 농암 김창협!
18세기 노론 백수 1세대. 일반적으로는 다소 생소한 인물이지만 동생 삼연 김창흡과 더불어 농연으로 병칭되는 노론학맥의 거두이자, 연암학의 메카다. 아는 사람은 아는, 학계에서는 일단 중요하게 언급되는 존재. 아직까지는 뭐 그런가 하실 테지만 아마도 호낙논쟁에서 낙론파(인물성동론)을 이끌던 수장이며, 조선후기 문화계에 새바람을 일으킨 ‘천기론(天機論)’의 대표주자라고 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농암은 17세기 이래 노론의 이념적 지도세력으로, 19세기에는 세도 정치의 대명사로 군림한 안동 김문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서인의 영수 김수항, 당맥과 학맥으로는 서인 송시열을 스승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명문가의 자제! 38살 때 일어난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 작은아버지 김수흥, 스승 송시열이 모두 사사되는 불행을 당한 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포의로 일생을 마쳤다. 제자를 기르고, 산수를 유람하며, 『농암잡지』와 같은 글을 쓰며 평생을 유유자적했다.
성호 이익, 1681(숙종 7년)~1763(영조 39년)
두번째 주자, 성호 이익!
18세기 남인 백수 1세대! 성호는 농암보다는 훨씬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근대가 시작된 이래, 조선의 학자들 중 실학의 대가로서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만큼 많이 거론되고 각광받는 인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성호는 경세치용의 실학자, 중농학파라는 분류 아래, 현실 개혁에 힘쓴 학자로 유명해졌다. 주목해야할 점은 성호는 18세기 남인 학맥의 구심점으로 남인 지식인들의 삶과 사유의 전형을 마련했는 사실. 그리고 다산의 학문과 사유와 글쓰기와 삶의 방식은 성호의 자장 안에서 탄생했다는 사실! 그래서 다산학파가 아니라 성호학파라 부르지 않던가.
성호도 남인과 노론의 대결 국면에서 형 이잠을 잃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 숙종은 민비 복위운동을 벌인 서인 김춘택과 소론 한중혁의 손을 들어주고, 장희빈 사사. 장희빈을 옹위한 남인들은 대대적으로 출척되어, 정계 진출 길이 완전히 끊긴다. 성호의 형 이잠은 1706년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노론계의 반발과 숙종의 분노를 사 국문을 당하던 중 죽음을 맞는다. 남인 집안의 젊은 성호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처사로 살면서 학문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학문과 글쓰기는 오직 경세의 의지로 불타올랐다. 자나 깨나, 농민으로서나 학자로서나 오직 경세! 그는 진정한 정치가였다.
혜환 이용휴, 1708(숙종 44년)~1782(정조 6년)
_그림은 이용휴가 쓴 「자설」(字說)
세번째 주자, 혜환 이용휴!
18세기 남인 백수 2세대! 18세기 백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낯선 인물이다. 혜환은 성호 이익의 조카다. 성호의 넷째 형인 이침(李沉)의 아들로 성호에게 수학했다. 다음 사실을 말해야 혜환에 대한 서먹함이 훨씬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18세기가 낳은 천재, 그 어떤 분야의 책이든 한 번만 보면 줄줄 외는 기억의 달인 이가환이 혜환의 아들이다. 혜환이 세상에 덜 알려진 이유는 아들 이가환이 천주교 신자로 몰려 1801년 신유사옥 때 옥사한 까닭에 문집이 아주 뒤늦게 수습되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아들 가환은 중앙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다 옥사했지만, 혜환은 숙부 성호와 마찬가지로 벼슬길을 일찌감치 단념하고 오로지 글쓰기로 백수 무림계의 초식을 연마했다.
우리만 모르지 혜환은 그 누구와도 다른 창발하고 기궤한 글쓰기로 18세기 당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다. 누구도 모방하지 않는 독창적 글쓰기! 성호학파 가운데 혜환의 포지션은 참으로 특이하다. 성호의 제자들이 경학가로, 경세가로, 예제(禮制) 연구자로 그들만의 색깔을 형성할 때, 혜환은 색다른 문장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글을 써주는 일로 일상의 정치를 실천했다. 그리하여 18세기 고문을 벗어나 소품을 쓰는 작가들, 즉 창신(創新)에 뜻을 둔 작가들의 조타수가 되었다.
담헌 홍대용, 1731(영조 7년)~ 1783(정조 7년)
마지막 주자, 담헌 홍대용!
18세기 노론 백수 2세대! 담헌 또한 노론 명문가의 후예다. 조부 홍용조는 승지, 대사간,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아버지 홍력도 나주목사를 지내는 등 벼슬살이의 부침 없이 순탄한 일생을 보냈다. 그런데도 담헌은 일찌감치 과거 공부에 대한 뜻을 접는다. 백수 1세대인 농암과 다르게 장대한 뜻을 품고 자발적 백수의 길을 걸었다.
담헌은 백수 무림계에서 활약할 초식을 연마하기 위해 노론 산림이자 낙론의 종장이며 상수학을 중시했던 미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문하로 들어간다. 김원행은 몽와 김창집의 손자요, 농암의 질손이다. 담헌은 경제(經濟)와 의리(義理)의 학문을 중시한 까닭에 사장(詞章)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예술적으로 시를 짓고, 문장을 연마하는 일을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 했다. 백수 무림계에서 천문학, 수학, 음악 연주의 신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18세기 문인 선비들 중에 ‘자연철학자’라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