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여호와닛시
(출애굽기 17:14-16)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려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이제 먼저 소개하는 이야기는 어느 독일인이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글인데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표현했다는 문제로 일본 유학생 중 한 명이 일본의 어느 게시판에 올렸답니다. 그 후 그 독일인의 사이트는 해킹당하고 작성자의 개인 정보가 유출당해 일본의 우익들로부터 테러에 가까운 협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국인 유학생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한국어로 그 사이트의 문제가 된 글을 번역해서 올린 것입니다.
1. 우리는 국기에 대한 감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십니까?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地圖를 펴기 바랍니다. 아마 당신이 알고 있을 中國과 日本 사이에 韓半島가 있고 그곳에 韓國이라는 나라가 보일 것입니다. 이야기는 이 조그만 나라의 어느 마라토너가 中心에 있습니다. 이 나라는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武力에 의존하는 나라 사이에서 놀랍게도 2000년간 한번도 自主性을 잃어본 적이 없는 奇跡에 가까운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이 한국인들은 나라 대신에 ‘民族’이라는 표현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나는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의 굉장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1936년 히틀러 통치 시절,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그때 두 일본인이 마라톤 경기에서 1位와 3位를 차지하였습니다. 2位는 獨逸人이었습니다. 헌데, 시상대에 올라간 이 두 日本人 勝利者들의 表情, 이것은 人間이 表現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不可思議한 사진... 무엇이 이 두 勝利者를 이런 슬픈 모습으로 施賞臺에 서게 했는가? ... 과거도, 그리고 현재도 가장 人間的인 儒敎라는 宗敎가 지배하는 이 나라 아니 이 民族은 이웃한 日本人, 죽음을 찬미하고 성에 탐닉하는 일본인에 대해 ‘영리한 원숭이’에 不過하다는 價値觀을 가지고 있으며, 불행히도 이 인간적인 품위를 중시하는 自負心 强한 民族이 이 원숭이들에게 ‘강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侵略을 받아, 植民地로 떨어지고 말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불행한 식민지의 청년들은 깊은 고뇌와 번민에 개인의 이상을 희생하고 말았고, ‘孫기정’과 ‘南승룡’이라고 하는 두 청년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 두 청년들은 달림으로써 아마도 자신들의 울분을 표출해야만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두 청년은 많은 일본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달렸을 것입니다.
달리는 내내 이 두 청년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승리했고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祖國 한국의 太極旗 代身에 핏빛 동그라미의 일장기가 있었고, 스탠드에 역시 이 핏빛 일장기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 두 청년의 표정이란.... 그들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한없이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뉴스를 전한 일본 검열하의 한국 신문 동아일보는 이 사진 속의 일장기를 태극기로 고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유니크한 抵抗의 方法, 과연 높은 정신적인 종교의 민족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신문사를 廢刊시키고 말았습니다. 이 우습고도 단순하면서 무지하기까지 한 彈壓의 方法으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침내 이 민족은 解放되고 强要당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서운 또 한 번의 戰爭을 치른 후, 한강의 奇跡을 통해 스페인보다도 포르투갈보다도 더 强力한 經濟的 富를 이루고 맙니다. 그리고는 1988년 수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이릅니다. 불과 50년! 태극기조차 가슴에 달 수 없었던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開幕式, 聖火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선 작고 여린 소녀 마라토너로부터 성화를 이어받은 사람은 그날 너무나도 슬프고 부끄러워했던 勝利者, ‘孫기정’이었습니다. 노인이 되어버린 이 슬픈 마라토너는 성화를 손에 든 채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애와 같이 훨훨 나는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는가! 어느 演出家가 지시하지도 않았지만 역사란 이처럼 멋지고도 통쾌한 場面을 보여줄 수 있나 봅니다. 이 때 한국인 모두가 이 노인에게, 아니 어쩌면 한국인 개개인이 서로에게 얘기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극적이게도 서울올림픽 도중에 일본 선수단은 슬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곧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는 히로히토 일왕의 소식....
한국인들의 종교인 유교는 인간, 심지어는 죽은 조상에게까지 예를 나타내는 종교입니다.
이 종교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류 역사상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나는 이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기를 바랐습니다. 이처럼 굉장한 이야기가 이대로 보존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韓國人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집념과 끈기, 그리고 暴力과 같은 單純함이 아닌 놀라운 精神力으로 그들이 50년 전 잃어버렸던 金메달을 되찾고 만 것이었습니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黃永祚’라고 하는 ‘孫기정’ 老人과 너무나 흡사한 외모의 젊은 마라토너가 몬주익 언덕에서 日本과 獨逸의 선수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더 이상 슬프지 않은, 祝祭의 월계관을 따내고 만 것입니다.
경기장에 太極旗가 올라가자 이 ‘黃영조’는 기쁨의 눈물과 함께 왼쪽 가슴에 달린 태극기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는 스탠드로 달려가 비극의 마라토너 ‘손기정’에게 자신의 금메달을 선사하곤 깊은 예의로서 존경을 표했습니다... ‘황영조’를 가슴에 품은 ‘孫基禎’(1912-2002)은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는 人間에 대한 信賴에 限없이 자랑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인간이란 이 한국인, 아니 이 한국 민족처럼 폭력과 거짓과 다툼이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써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悲劇的인 눈물로 시작된 歷史일지라도 歡喜와 高貴한 기쁨의 눈물로 마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상 어느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人間과 國家와 民族의 尊嚴을 이 한국인, 아니 韓國 民族이 보여주지 않습니까!! 도서관에 달려가세요!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선 두 한국인의 사진을 찾아보세요... 당신은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감동을 줍니까? 대관절 그 무엇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까? 태극기! 그렇습니다. 그 국기가 왜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까? 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 비밀이 오늘의 본문 속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기(旗)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기가 되었거나 그 기를 볼 때에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2.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국기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1)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때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마라에서 쓴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고, 또 양식이 떨어졌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주시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니까 메추라기를 몰아와 주셔서 배부르게 먹게 해주셨던 일이 있은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가로막고 대적했습니다. 아말렉이 누구입니까?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가 낳은 아들입니다.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되자 팔레스틴 서남쪽 광야지역과 시나이 반도 일원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은 광야일대의 샘터와 오아시스 목초지 등을 장악하고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광야로 들어온 낯선 사람들에게 패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공격해 온 것이었습니다.
여하간 출애급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에 제일 먼저 길을 가로막고 대적한 원수가 이 아말렉이었습니다. 모세가 이들을 맞아 어떻게 싸웠습니까? 모세는 지팡이를 잡고 산 위에 올라가고 여호수아가 적군을 대적하여 싸웠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지팡이를 잡고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적군이 이겼습니다. 모세를 수행하여 함께 올라갔던 두 사람, 곧 아론과 훌이 이것을 보고는 큰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하나씩 붙잡아 내려오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마침내 해가 질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적군 아말렉을 격퇴하고 승리하였습니다.
2) 이 전쟁의 특징은 어느 왕의 뛰어난 작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엄청난 군사력이나 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잡은 손을 들고 있었는가, 손을 내리고 있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려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 곧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라고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깃발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깃발이 되셨습니다. 이 깃발을 앞세우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이 아말렉과 같은 강한 적군과 친히 싸워주시고 이겨주십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을 우리의 깃발로 높이 쳐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대대로 이 강한 원수들과 싸워 주십니다.
3) 애급의 바로와 싸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신다.”는 외침은 힘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악인들과 우상숭배자에게는 경고가 되고, 자유와 생명이 침해받고 있는 약한 자들에게는 희망의 선언이요,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친히 나의 깃발이 되어 주시는가?”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깃발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깃발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영적 전쟁에서 항상 이 깃발을 앞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강한 적군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나아가 싸워야 합니다.
4) 회고해 보면 6.25사변 때에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북한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온갖 최신 무기들로 튼튼히 무장하고 있었고, 중공으로부터 잘 훈련된 군대를 충분히 공급 받아서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북한에 올라가 김일성을 만나 회담하였을 때에 그는 북한에 이미 전쟁 준비가 완료되어 있음을 보고는 완전히 자신을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일성에게 사정하기를 나중에 통일이 되면 자기는 황해도 시골에 들어가 과수원 농사나 하고 살겠으니,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김일성 군대가 최신예 무기로 완전히 남침준비가 다 되어 있는 것을 알았답니다. 사자와 같이 용맹스러운 이승만 대통령이었지만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그래서 미국에게 무기를 달라고 사정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우리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이라도 해 달라고 했으나 그것도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정말 맨주먹 붉은 피로 우리는 원수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연노하신 분이 밤을 새워가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모든 교회들이, 모든 성도들이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깃발이 되어 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모세 때의 승리의 비결은 모세가 지팡이를 잡은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2:8에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으니 손을 들고 있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또한 지팡이를 잡고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모세의 지팡이는 권능의 지팡이, 곧 성령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행 1:8)라고 하셨으니, 먼저 성령의 능력을 받고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지팡이는 모세가 의지하던 하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재능이나 지식이나 지혜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3) 육이오 사변 직후에 甘富悅 선교사님이 쓴 「한인 심중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육이오 때에 우리 성도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반공포로 석방 이야기, 중공군 포로들이 중공으로 가기를 거절하고 대만으로 자유를 찾아 떠난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가 되어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의 기, 곧 그리스도의 깃발을 날리며 전진합니다. 대장 군기가 있는 곳에 대장이 계십니다. 우리 대장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군기(軍旗)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특히 십자가의 군기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미국의 국가를 잘 아시지요? 우리가 보통 The Star-Spangled Banner, 별이 빛나는 깃발의 노래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 가사에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 포탄의 섬광과 작렬하는 폭탄 속에서도 성조기는 휘날리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나는 미국 국가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4절에 “And this be our motto: In God is our tru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애국가는 1절에 “하나님이 보우하사”라고 했고, 미국 국가는 4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라는 말을 높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국기에서도 그렇게 자부심과 승리를 느낀다면, 하나님이 친히 국기가 되어 주실 때에는 얼마나 큰 자부심과 함께 승리의 확신과 기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의 깃발이심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은 확신과 능력으로 충만하였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우리의 국기로 삼고 나갈 때에 아말렉이 무너집니다.
1) 아말렉이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이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선언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시겠다는 말은 아말렉이 금방 멸절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아말렉은 이 세상 끝 날까지 결코 멸절되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있어서 대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힐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에게 대승을 거둔 것으로 만족하고 멸절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주고, 짐승들 중에서도 좋은 것들은 다 남겨 두었습니다(삼상 15:1-9). 사울 왕 같은 사람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말렉의 왕 아각을 차마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아말렉의 영적 의미는 내 마음속에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한 생각과 정욕을 처치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도 이것 때문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는 탄식했습니다.
2) 그러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완승을 거두기는 힘이 드는 것입니까?
① 하나님이 완전히 진멸해 버리라고 명령하신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아말렉이고 둘째는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두 가지에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민수기 33:55에 “그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라고 하였고, 여호수아 23:13에서도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라고 무섭게 경고하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경고하신 그대로 이스라엘은 그 좋은 땅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고 유리하여 이방 땅에서 2000년이 넘도록 방황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어김이 없이 다 이루어집니다.
② 아말렉을 이기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이겨야만 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겼다고 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에 바로 이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하고는 8:1-2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죄와 맞서서 싸울 때에 자기가 싸운 것이 아니라, 자기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싸우시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의 비결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그 풍랑을 피하여 잘 건너가도록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이 없고, 오히려 풍랑은 더욱 거세지지 않았습니까? 할 수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4-26) 하시고는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비결이 무엇입니까? 내가 풍랑과 싸우면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바다와 싸워주시면 주님은 넉넉히 이기시고도 남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나 위기가 오면 주저하지 말고 빨리 주님을 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③ 그 다음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으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하였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8:1-2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는 말씀을 가지고 자기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을 자기에게 비추어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는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믿는다고 말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도 제대로 한 일도 없고, 더구나 성령을 받은 일도 없으면서도 자기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착각합니다.
8.15 해방 때에는 온 국민이 해방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정말로 해방을 맛보게 되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감격과 기쁨이 충만해지지 않습니까? 육신의 해방을 맞았어도 그러한데 하물며 영적인 해방을 맞이하게 되면 어떠하겠습니까? 성령을 받는 일은 이러한 기쁨과 감격이 충만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기쁨이나 감격이 없이 그냥 성전 뜰만 밟고 다니면서도 “자기는 구원을 받았다, 자기는 죄에서 해방을 받았다. 자기는 죄와의 영적 전쟁에서 이겼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럴 수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대부분은 착각일 것입니다. 국제 축구 시합에서 우리나라가 이겼다고만 해도 온 국민이 기쁜데, 바로 내가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겼는데 기쁨이 없겠습니까?
3) 모든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깃발이 되어 주심에 있습니다.
① 여기에 우리의 태극기가 있습니다. 원래는 삼태극이었습니다. 세 가지 색깔이었습니다. 천지인이 하나라는 것이었는데, 기독교에서 해석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물을 가지고 있어도 그 의미를 모르고 가치를 모른다면 그 보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 하셨습니다. 우리는 태극마크에 들어 있는 깊은 의미를 먼저 깨달아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국기는 국가와 함께합니다. 미국의 국기와 국가가 하나가 아닙니까? 우리의 태극기와 애국가도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바로 태극기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또한 영원히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 안에 삼위일체의 진리가 있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③ 아말렉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진짜 전쟁은 남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역시 내 힘으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나와의 내적(內的) 싸움에서 우리는 성령이 계셔야 함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그렇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간절하고 진실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때에 “주 예수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태극기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군기가 있어 야 합니다. 십자가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어야 하겠습니다. (2010년 2월 1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