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오효림 월간중앙 기자
지난 3월8일. 새만금 간척사업이 한창인 해창 개펄에 컨테이너 하나가 들어섰다. 성당, 법당, 교회에 이어 네번째로 들어선 원불교(圓佛敎) 교당으로 쓰일 컨테이너였다. 지난 2월 영광 핵폐기장 건설 반대를 위해 사직공원에서 열린 원불교 비상총회에 참석한 문정현(문규현 신부의 형) 신부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3월28일 원불교 김경일(익산 문화교당·새만금 생명 살리는 원불교 사람들 대표) 교무는 천주교 문규현 신부, 불교 수경 스님, 기독교 이희운 목사와 함께 65일 간의 삼보일배(三步一徘) 고행길에 올랐다.
해창 개펄에서 서울 시청앞 광장까지 삼보일배를 끝낼 때까지 언론에 비친 네 사람의 성직자 가운데 원불교 김교무는 시종 익명의 존재였다. 신문 사진에도 문신부, 수경 스님 두 사람의 모습만 나왔다. 일부 신문은 삼보일배 마지막 날 행사 장면을 담은 사진에서 문신부, 수경 스님, 이목사 세 사람만이 ‘종단(縱斷)완료’ 기도를 올리는 사진을 싣기도 했다. 4대 종단(宗團)이 종교 간의 벽을 허물고 참여했다는 데 의의를 둔 삼보일배 기도 행렬에서 원불교는 이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삼보일배 기도 행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원불교의 저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애초 원불교가 삼보일배 기도 행렬 동참을 결정했을 때 원불교측은 물론 다른 세 종단에서도 원불교가 끝까지 함께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세 종단과 비교해 원불교의 교세가 워낙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출발 전 원불교는 전라북도 구간만 함께하기로 하고 김교무의 삼보일배 기도 행렬 동참을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상황은 역전됐다. 타 종단에서 놀랄 정도로 원불교의 결속력은 놀라웠다. 행렬이 지나가는 곳마다 원불교 교도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것이다. 하루 평균 20∼30명의 교도가 삼보일배 행렬을 따랐으며,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은 수백 명의 교도가 기도 행렬에 동참했다.
지난 5월21일 ‘원불교 참여의 날’에는 무려 500여 명의 원불교 교도가 기도 행렬에 동참해 4대 종단 가운데 가장 많은 신도가 참여했다. 전날인 ‘개신교인 참여의 날’에 모인 기독교인의 수는 100여 명이었고 ‘불교인 참여의 날’에 참석한 불자도 300여 명 수준이었다. ‘천주교인 참여의 날’ 참가자는 원불교와 비슷한 400∼500명 선이었다. 4대 종단의 교세를 감안하면 원불교의 결속력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靜中動
img2R원기 88년을 맞은 원불교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정식 입교인 141만5,210여 명(2003년 5월 현재)에 불과한 작은 교단. 그러나 캄보디아 무료 구제병원 개원, 한국 최초의 대안(代案) 중·고등학교 설립, 평양 빵공장 준공 등 최근 원불교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보(行步)를 보면 그것은 결코 작은 교단의 모습이 아니다.
교세가 크고 그만큼 목소리도 큰 다른 거대종교들과 비교하면 원불교의 조용한 행보는 더욱 커 보인다. 소리 없는 큰 울림이다. 저력 있는 종교요, 이 종교의 저력이다. 그 저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지난해 개국한 원불교의 라디오 전용 원음(圓音)방송. 이 방송국 최고 인기 프로그램은 매일 오후 4시10분부터 50분간 방송되는 ‘둥근 소리 둥근 이야기’다. 원불교 성직자인 교무(敎務)뿐만 아니라 기독교 목사, 천주교 신부, 불교 스님 등 다른 종교인들도 출연하는 종교 연합 프로그램이다. 으레 타 종교인을 출연시키지 않는 일반적인 다른 종교방송의 관행을 깬 파격적인 시도였다.
‘둥근…’이 기획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종교와 신앙이 소중한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와 신앙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원불교의 기본 철학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불교방송·기독교방송·천주교 평화방송에 이어 네번째로 원불교방송을 개국하며 그 이름을 ‘원불교방송’이 아닌 ‘원음방송’이라고 한 것부터 타 종교에 배타적인 종교계의 관행을 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원음방송 뿐만 아니라 원불교는 모든 사업에서 원불교라는 종교를 앞세우지 않는다. 또 모든 사회 환원 및 자선활동도 교화(敎化) 곧 흔히 말하는 ‘전도’ 또는 ‘교세 확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는 “세상에는 부처의 법, 예수의 법 등 많은 법이 있다. 그 법을 다 접해 보고 그 중 제일의 법을 믿으라”고 한 원불교 교조(敎祖)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원불교는 지난 1916년 소태산 대종사에 의해 개교된 민족종교다. 1891년 전남 영광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소태산 대종사는 20여 년의 구도 고행 끝에 26세에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를 연원불(淵源佛)로 한 원불교를 개창(開創)했다.
원불교의 원(圓)은 ‘진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돌고 돌아 시작과 끝이 없는 진리를 형상으로 나타낸 것이 바로 일원상(一圓相)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자비’, 기독교의 가르침이 ‘사랑’이라면 원불교의 가르침은 ‘은혜’다. 사은(四恩), 즉 내가 받은 천지(天地)·부모(父母)·동포(同胞)·법률(法律)의 4가지 은혜를 사회에 돌려갚는 것이 원불교의 핵심 교리다.
또 기독교가 신앙을, 불교가 수행을 중시한다면 원불교는 신앙과 수행의 병진(竝進)을 중시한다. 사은을 수행하는 방법이 사요(四要)다. 자력양성(自力養成)·지자본위(智者本位)·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다. 자력양성은 말 그대로 자신의 힘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지자본위는 지식이 있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건설할 것을 이르는 말이다. 타자녀교육은 내 자녀, 남의 자녀 구분 없이 가르쳐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원불교가 소태산 대종사 이래 특히 교육 사업에 힘쓰는 이유다. 공도자숭배는 자신을 버리고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내 부모처럼 모셔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생활불교, 대중불교의 기치를 내건 소태산 대종사는 교화·교육·자선을 원불교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했다.
“내 신앙이 소중하면 남의 신앙도 소중하다”
img3L원불교는 언뜻 보면 전도 사업을 하는 종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
“모든 종교는 교화가 없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우리도 전도를 합니다. 단지 원불교는 그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서울 화곡동 ‘원불교 외국인센터’에서 만난 최서연 교무는 “원불교는 전도 활동을 안 하는 것 아니냐”는 우문(愚問)에 소태산 대종사가 남긴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안에 금맥이 있으니 바위를 깨고 가져가라고 아무리 말해도 동네 사람들은 안 믿습니다. 그러나 직접 바위를 깨 금을 찾는다면 남들도 믿고 따를 것입니다. 교화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원불교 가르침이 좋다고 떠들어도 남들은 알 수 없죠. 제가 믿음으로써 변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해 보임으로써 남을 감동시키고 원불교를 믿고 따르게 하는 것이 원불교의 교화 방법입니다. 느릴 수밖에 없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원 출신인 최교무는 불교 동아리에서 불전을 따로 공부할 정도로 독실했던 불교 신자였다. 불교를 공부하며 원불교를 접하게 된 최교무는 우연히 강남교당 박청수 교무를 찾아갔다. 그에게서 원불교 교전(기독교로 치면 성경편집자 주)을 받아 읽고 원불교에 심취 개종했다.
“불교를 배반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실제 승려들의 삶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에 원불교의 실천적 가르침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 뿐이죠. 개종을 했다기보다 더 큰 바다로 들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참선 수행이 아닌 실천적 수행에서 깨달음을 얻은 최교무는 자신이 세운 원불교 외국인센터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2000년 최교무가 원불교 출가자 공부를 마치고 받은 첫 임무는 스리랑카 현지 교화 사업이었다. 스리랑카로 떠날 준비를 하던 최교무는 우리나라에 약 5,000명의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스리랑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이들을 만난 최교무는 이들이 한국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들을 돕는 것이 현지에서 교화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재(私財)를 털어 만든 것이 현재의 원불교 외국인센터다.
원불교 외국인센터를 연 최교무는 우선 ‘한글학교’를 개설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 생활을 하며 겪는 어려움 대부분이 한국어를 못해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어를 재미 있게 가르치기 위해 이화여대에서 일부러 정식 한국어 교사 연수 과정을 밟았다. 한글학교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최교무는 다시 사재를 털어 중고 컴퓨터를 구입해 ‘컴퓨터 교실’을 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컴퓨터 교육을 원했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 최교무의 외국인센터를 찾는 외국인 노동자는 10여 명. 최교무가 서툴게나마 스리랑카어를 하는 까닭에 스리랑카 출신 불교 신자들이 많다. 최교무는 이들에게 원불교로의 개종을 권유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족하다는 최교무는 오히려 “현재 믿고 있는 종교를 더 열심히 믿으라”고 그들을 다독인다. 자신의 종교와 믿음이 중요한만큼 타인의 종교와 신앙도 존중해 줘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원불교는 성직자 교육 과정에서부터 다른 종교에 대해 편가르는 마음을 없애는 훈련을 받는다.
이처럼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원불교의 아량 덕분에 최근 원불교는 환경운동 등 비정부기구(NGO) 활동에서 종교와 종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원불교는가 결코 종교계의 리더는 아닙니다. 그러나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모두 원불교와 함께하려고 합니다. 다른 종교와 화합하고 협력할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죠.”
원불교 문화사회부 부장 조원오 교무의 말이다.
“하늘 나라에 가는 도덕은 따로 있지 않다”
“내 법은 물샐 틈 없이 짰다”는 대종사의 말처럼 원불교의 가르침은 매우 세밀하며 또 실질적 도덕 훈련을 강조한다. 가령 원불교 교전은 수행편에서 정기훈련법, 상시훈련법, 염불법, 좌선법, 일기법 등을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원불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보여주는 예가 수행편 6장 일기법이다. 이 일기법에 따르면 원불교 교도들은 재가·출가를 막론하고 매일 마음일기를 쓰도록 하고 있다.
마음일기란 자신의 마음이 은혜·덕·진리·도덕에 따라 움직였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어떠한 행동을 몸으로 실천했을 때 그 직전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세밀한 과정을 여과나 기교 없이 써내려간 일기를 말한다.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는 마음의 움직임을 살펴 궁극적으로 내 마음을 스스로 운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양법이다.
“예를 들어 오기자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나 말고 더 좋은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인터뷰를 수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상념이 마음 속을 오갔겠죠? 이처럼 행동에 옮겨지기 이전의 마음을 법과 도덕에 맞게 운전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대안 중학교인 전북 영산 성지중학교에 마음공부를 도입한 곽진영 도무(道務·원불교 교리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이끄는 원불교 성직자의 하나)의 설명이다. 마음공부는 최근 다른 종교의 신도들이 더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원불교 산하 대안학교에서 정규 수업으로 처음 도입된 마음공부는 현재 원불교 산하 대안학교 말고도 전국 16개 대안학교에서 필수 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다. 마음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 가는 도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도덕입니다.”
서울 종로교당의 이선종 교무는 원불교의 사실적 도덕 훈련을 이렇게 설명한다. ‘남을 기분나쁘게 하고 빌어봤자 소용없다’는 간단한 진리에서 도덕이 시작된다는 얘기다.
‘생활이 곧 불법이고 불법이 곧 생활’(佛法是生活 生活是佛法), 즉 생활 속에서 불법의 실천을 중시 하는 원불교는 기독교나 불교에서와 같은 면벽수도(面壁修道)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일을 통해 선(善)을 실천하라는 교리를 따라 원불교 교무들은 모두 훌륭한 일꾼이라고 한다. 교무 교육 과정에는 호미 들고 나가 밭을 매는 과정도 있다.
“종교는 곧 실천입니다. 소리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사회가 저절로 따라오고 또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화되는 것, 그것을 이끄는 것이 바로 종교 지도자의 역할 아니겠습니까.”
여자로서 한 가정의 어머니가 되는 대신 원불교를 통해 “이 세상의 어머니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는 이교무의 말이다.
이교무는 1956년 원불교에 귀의한 이래 40년간 원불교 사회 활동의 중심에 서 왔다. 지난 2000년에는 원불교 천지보은회를 창립해 환경운동에도 매진하고 있다.
“한 근원, 한 집안, 한 일터, 즉 원불교가 우리 집이고, 모든 원불교도가 우리 가족이며, 원불교의 일이 곧 우리집 일이라는 믿음이 전(全) 교도를 하나의 신앙공동체로 묶고 있습니다. 원불교의 일이 곧 우리집 일이기 때문에 교당에서 무슨 사업을 한다고 하면 교도와 교역자들이 협조를 잘 해 줍니다. 원불교의 이 같은 저력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삼보일배 기도 행렬이었습니다.”
개교(開敎) 이래 전북 익산에 총부를 두고 내실 쌓기에 주력해 왔던 원불교는 지난 2000년 총부 산하 문화사회부를 서울 흑석동으로 이사했다. 교도 수와 교당 수를 늘리는 등 교새 확충에 주력하던 원불교가 비로소 밖으로 눈을 돌린 시점이다.
“사실 그 동안 신도 수 늘리고 교당 수 늘리느라 사회 활동을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지난해까지 원불교 교당이 전국 시·군 단위까지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교세 확충보다 교도 훈련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데 더 노력해야죠.”
조교무는 원불교의 지난날을 이렇게 정리한다.
3大 사업, 교화·교육·자선
img4R현재 원불교는 국내 13개 교구에 506개 교당, 국외 14개국 6개 교구에 46개 교당을 두고 교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현(現) 좌산 종법사(천주교의 교황格-편집자 주)의 각별한 관심 속에 해외 교화를 위한 교서 번역작업이 영어·중국어를 비롯해 체코어·힌두어 등 21개 언어로 진행중이다.
‘집을 짓기보다 사람이 중요하다.’ 이 말은 원불교가 교육 사업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나타낸다. 교화·교육·자선 등 3대 사업 가운데 물론 교화를 가장 앞에 둔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이 두번째라는 말은 아니다. 원불교는 무리한 교세 확장보다 교도 교육을 통해 내실을 기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한 예로 원광대 원불교학과나 영산원불교대 4년 학사 과정 및 원불교 대학원 2년 석사 과정을 마쳐야만 교무가 되는 출가식을 올릴 수 있다.
또 원불교는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인 2대 종법사 정산 종사의 노력으로 일찍부터 많은 교육기관을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대안학교라는 용어조차 없던 우리 나라에 대안학교를 처음 세운 것도 원불교였다.
“개교를 하고 기존 학교에서 퇴학당한 아이들 모이라고 광고했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그래서 각지 교당을 통해 알음알음 소개받은 아이들 30여 명을 데리고 시작했죠.”
영산 성지고등학교가 개교한 1985년부터 줄곧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곽도무의 기억이다. 사범대 출신의 자원봉사자 예닐곱 명을 이끌고 영산성지고등학교를 시작한 곽도무는 커리큘럼과 교과서도 없이 ‘모든 것을 사범대에서 배운 것과 반대로 한다’는 원칙 하나로 학교를 운영했다고 회고한다.
그후 1년이 지나자 학생들이 자신들의 선후배를 데려와 광고 없이도 학생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선생님들이 다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국고 지원금이 전혀 없는 형편이라 교사들 월급을 챙겨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산 성지고등학교가 지급한 교사 초봉 월급이 3만원이었다.
“사람한테는 누구나 불성이 있다는 말이죠. 그 불성을 어떻게 개발할 것이냐가 그때나 지금이나 영산성지고등학교의 교육 이념입니다.”
1995년 대안학교법 및 대통령시행령은 영산 성지고등학교를 모델로 해서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영산 성지고등학교는 교육당국의 눈에는 문제투성이 학교였다. 감사만 나오면 시말서를 써야 했다. 당시 학교의 교육 내용이나 활동이 교육법규와 충돌하지 않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폐교 위기를 넘긴 것도 수차례였다.
“신앙이 없었으면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죠.”
이처럼 대안교육에 앞장서온 원불교는 지난 3월 수도권 최초의 대안중학교인 헌산중을 경기도 용인에 개교했다. 지난해 전남 영광에 문을 연 국내 최초의 대안중학인 영산 성지송학중학교, 고창 지평선중학교에 이어 세번째 대안중학교이고 원불교가 설립한 여섯번째 대안학교다. 국내 총 16개 대안학교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셈이다. 6개의 대안학교 외에 원불교는 원광대학교을 비롯한 3개의 대학과 원광고등학교 등 11개 중·고등학교, 149개 유아교육센터를 운영중이다.
캄보디아에 세워진 무료 병원
지난 3월25일. 강남교당 박교무가 주도해 결성한 원불교청수나눔실천회는 캄보디아 제2의 도시 바탐방에서 캄보디아 국내외 축하객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구제병원’ 개원식을 열었다. 개원식에 앞서 지역주민 500여 명이 모여들었다. 개원식에서 나눠줄 구호품을 받기 위해서였다. 구호품 덕에 홍보가 잘 되어서인지 하루 평균 50명 이상의 환자들이 이 병원을 찾는다. 병원비는 무료다. 원불교는 기존 히말라야 라다크 마을에 이전에도 종합병원을 세웠다. 그러나 이는 유료였다. 무료 구제병원을 설립하기는 캄보디아가 처음이다.
병원 개원식 다음날인 3월26일. 교단측은 또 평양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평양 빵공장’ 준공식을 가졌다. 원불교내 시민운동단체인 여성회·청운회·봉공회 등의 지원으로 설립된 공장이다. 하루 4만여 개의 빵이 평양 시내 및 근교 소학교와 탁아소 아이들에게 공급될 예정이다. 평양 빵공장 외에도 교단측은 지난 1995년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전개한 이래 2002년 4월 현재 총 21억740만원을 지원했다. 이와 함께 노인양로시설·장애인복지시설 및 군부대에 책보내기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국회는 군종장교의 편입 대상을 ‘학사 학위 이상을 가진 목사, 신부 또는 승려’에서 ‘3대 종교의 성직자 외에 이와 동등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확대하는 병역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비록 원불교 교무라는 말을 명문화하지는 못했지만 이 법의 통과로 원불교 교무가 기독교 목사, 천주교 신부, 불교 승려와 함께 군(軍)에서 교화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원불교 측이 군종 교무 파견을 위해 병역법 개정 운동을 시작한 지 27년 만이었다.
“모두가 대장을 하려는 시대에 누군가는 꼬리 노릇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꼬리가 원불교입니다. 하지만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의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와 잎은 튼튼하게 자라게 마련입니다. 나무가 사회라면 종교는 그 사회의 뿌리입니다. 원불교는 이 사회의 뿌리가 되는 종교로 역할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이교무가 남긴 말이다. 배우가 있기 위해서는 무대가 필요한 법이다.
“다른 종단을 위해 기꺼이 무대가 되어 주는 아량을 가진 종단이 바로 원불교입니다.” 이 교무는 거듭 말한다.
기성 3대 종단과 비교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교세를 가지고 당당히 제 4대 종단의 위치에 오른 원불교. 그런 저력을 원불교가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아량과 양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