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방송 뉴스에 가장 많이 출연한 사람은 누구일까. 여야 대표? 아니면, 뉴스 앵커? 혹, 뉴스 화면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동그라미의 존재를 떠올린 독자가 있다면 박수를 보낸다. 그 좁은 공간에서 뉴스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를 수화로 통역해
전하는 ‘그’가 바로 퀴즈의 답이다.
“일반적으로 통역사는 두 영역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정의돼요. 각 나라에 있는 문화원이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
해주고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곳이잖아요. 그것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통역사죠. 수화 통역은 농인(聾人)과 청인(聽人
)을 이어줍니다.”
“스무 살 때 수화를 처음 배운 건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어요”
수화통역사 안석준(50)씨는 31년 째 수화로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1985년 4월 스무 살 때 처음 교회에서 수화를 배웠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젊은 날의 호기심이었죠.” 그리고 한 달 뒤 인천에 위치한 농아원에 가서 매주 1회씩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수화가 단순히 손만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이 저한테 도전거리를 줬어요. 인사도 안 받아주고 시크하더라고요. 게다가 무슨 말인지도 도통 모르겠고. 그래서
‘나는 이 일과 안 맞는구나’하는 생각에 1년만 해보고 그때도 아니면 관두자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1년 쯤 지나니까 아이들이
마음을 열더라고요. 나중에서야 이해가 됐는데, 아이들이 사람들한테 마음을 주면 다시 찾아오지 않고, 또 찾아오다가 안 왔
다가.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거죠.”
그는 1993년 10월 ‘KBS 뉴스’를 통해 방송 수화통역에 처음 도전했다. 1994년부터는 'KBS 사랑의 가족’에 4년 7개월 정도
출연했다. 프리랜서라 SBS 방송에도 나오고 선거 정책연설을 통역하기도 했다. 정당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누구든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2005년 국회방송을 시작한 이후 어느 덧 10년이 지났다. 힘들거나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었을까.
“방송 수화통역은 대부분 외주 프로덕션에서 영상을 따로 제작해요.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죠. 6개월치 월급을 떼이
기도 하고 회사가 갑자기 부도난 적도 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농인과 수화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TV 속 수화를 보면 화면을 꼭 동그랗게 넣죠? 농인과 수화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에요. 수화
는 동작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동그란 화면은 제약이 많아요. 그런데 한 쪽에서 동그라미로 시작하니까 다른 곳에서 네모로
못 만드는 거죠. 선례라는 게 그만큼 무서운 거에요.”
물론 방송사에 문제를 제기한 적도 있다. 하지만 ‘동그라미’에 갇힌 수화가 이로부터 벗어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작년부터 연합뉴스TV와 YTN이 동그란 틀을 깼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화면에 동그라미가 생기는 걸 ‘구멍났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안 좋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보는 사
람을 위한 게 아니라 ‘넣었다’는 데에만 의의를 둔 거죠. 그래서 가급적이면 빼려고 하고 최대한 작게 하려다 보니까 작은 동
그라미로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한 농인은 29인치 대형 TV를 샀다고 하더라고요. 당
시 20인치가 유행하던 때였으니까 엄청 큰 거죠. 그래서 왜 그렇게 큰 걸 샀냐고 물어보니까 수화 화면이 너무 작아서 크게
보려고 샀대요. 그런데 그것도 잘 안보이더래(웃음).”
안석준씨가 오전 생방송 뉴스를 통해 수화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안석준씨가 국회방송 스튜디오에서 수화통역을 하고 있는 모습ⓒ민중의소리
“농인 손에 수갑을 채워버리면, 무엇으로 말을 하란 말입니까”
그는 방송통역에 도전하기 전 병원이나 법원, 경찰서 등을 동행하며 농인들의 일상적인 소통을 도왔다. 새벽 2시, 3시에도
전화가 오면 경찰서로 달려갔다. 1990년대 당시는 수화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부족했던 때라 웃지 못할 소동이 벌어
지곤 했다. 심지어 공범으로 몰린 적도 있다.
“한 번은 연락이 와서 경찰서에 가봤더니 농인에게 수갑을 채워놓고 진술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왜 수갑을 채워놨느냐
고 경찰한테 따졌더니 ‘규정이 그렇다’고만 해요. 그래서 ‘당신 입에 자갈 물려놓고 말하라고 하면 할 수 있냐’고 하니까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꿈쩍도 안 했어요. 오히려 저를 공범 취급하더라니까요. 결국 손 대신 다리를 의자에 묶고 했는데, 농인
의 손을 묶는다는 것부터 이들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잖아요.”
그는 청인들에겐 익숙하지만 농인들에게 낯선 일을 대신 설명해주다가 ‘이상한 놈’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본인의 주민등
록번호나 동료의 이름과 같은 정보를 대답하지 못 하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이런 정보들은 리듬과 음을 실어 수차례 말하고
들으면서 저절로 외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농인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고 그는 해명해 왔다. 외국 배우들의 풀 네임
을 아는 경우가 드문 것과 같은 이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없었다. 어린시절 한 친구를 통해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을 자연스레 갖게 됐다.
“중학교 때 고윤재라는 소아마비 친구가 있었어요. 다른 친구들까지 세 명이 늘 함께 그 친구 집까지 책가방 들어주고 탁구
도 치고 그랬어요. 항상 그렇게 만났기 때문에 그 친구가 다르게 보이질 않았어요. 서로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도 안 했고 그
냥 친구니까 몰려다녔죠. 장애인을 다르게 보는 시각도 없었고. 그게 지금까지 많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장애라는 용어로 부를 이유가 없어요. 이름이 있는데 굳이 ‘눈 나쁜 사람’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지 않나요? 저는 농인이 시
각언어를 쓰는 사람이라고 봐요.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시각적으로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거죠. 특히 북유럽쪽 사람들은
‘시각의식’이 강한 사람들이에요. 듣고 말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믿는다’는 생각이 강하죠. 농인들도 그래요. 결국 농인은 별
난 사람이 아니라 북유럽 사람들처럼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데 능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현재 서울수화전문교육원에서 전문가 과정을 교육하고 있는 그는 수화교육의 필요성과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라디오를 듣고 자란 기성세대와 달리 TV를 보고 자란 요즘의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데에 시각언어, 즉 수화가 많
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 말보다 표정, 제스처, 목소리 등의 전달력이 더 강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수화를 언어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국 사람들이 불쌍해서 영어를 배우는 게 아니잖아요. 마찬
가지로 수화를 그냥 배우자는 거죠. 수화는 본인을 위해서도 배울 만한 가치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몸짓과 표정을 이해하
는 데 이처럼 좋은 언어는 없어요. 사람들의 몸짓이나 동작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압축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수화를 배우면
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많이 넓어진 부분이 있어요.”
국회에서 오래 일했지만, 그는 ‘제도적’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에 앞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책적인 문제로 제대로 논의되려면 청각장애인분들 중에도 국회의원이 나와야 돼요. 그만큼 수화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어렵다는 거죠. 물론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만들면 어설프니까 또 다른 문제가 생겨
요. 그래서 사람들이 수화를 장애인의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고 누구나 배워야 하는 언어로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청각장애인으로 등록은 돼 있지만 수화를 배우지 않는 분들이 많아요. 장애인의 언어라는 인식 때문에 동일시하게 되거든
요. 그런데 수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에 따른 정책들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테니까. 결국 법 보다는 사회적 인
식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 저는 그렇게 멀리 보고 가자는 주의죠.”
수화통역사 안석준씨가 여의도에 위치한 사무실에 붙여 놓은 수화 사진들을 설명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쉼 없이 돌아가는 일상, 그래도 끝없는 수화의 매력
“집에서 7시쯤 나와서 교육준비도 하고 틈나는 대로 뉴스기사들을 봐요. 촬영 전엔 어떤 식으로 설명할지 콘셉트도 잡고, 9
시 50분쯤 첫 뉴스를 찍어요. 끝나면 10시. 돌아와서 그 날 교육준비를 하죠. 하루에 타 방송 뉴스를 5번은 봐요. 늘 이슈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까. 남들은 자기 필요한 것만 보지만 저 같은 경우는 경제, 스포츠, 문화, IT까지 다 봐야 해요. 통역은
단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가 문제인 거니까. 1시 15분쯤 나와서 방송하고 끝나면 2시쯤 되니
까 바로 충정로에 있는 교육원가서 준비하고...”
그의 하루, 하루는 쉼 없이 가득 차 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의 일정이 잠들기 전까지 반복된다. 방송뿐만 아니라 수
화전문가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정진하는 덕분에 그야말로 연예인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다. 무려 31년, 반평생 동안 농인
과 청인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을까.
“사람들 관찰하러 다니면서 쉬어요. 시장에 가면 장사하는 사람들은 팔기 위한 표정이 있고 구매자는 사기 위한 표정이 있어
요. 물건이 얼마에 팔리느냐에 따라 표정이 또 달라져요. 남자한테 파느냐 여자한테 파느냐에 따라서도 표정이 달라요. 가끔
씩 흥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는지 보게 될 때가 있어요. ‘이것 만큼 싼 게 없어요’라고 하지만 그게 아
니라는 표정이 나올 때가 있거든요. 거짓말을 하고 안 하고는 많이 안 보는데 사람들의 그런 기본적인 표정들을 많이 보려고
하죠. 그런데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대놓고 얼굴을 보긴 어려우니까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봐요(웃음).”
문득 그가 인터뷰 때 처음으로 꺼낸 말이 떠올랐다.
“통역사라는 건 언어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매력이 끝이 없어요. 통역에 대한 부분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끝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매력적이죠.”
누군가에게 ‘구멍’일 뿐인 동그란 화면이 다른 누군가에겐 세상을 보는 ‘눈’이 된다. 누군가에겐 ‘침묵’일 뿐이지만 또 다른 누
군가에겐 살아있는 ‘말(語)’ 그 자체다. 사실 TV를 통해 수화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극히 제한적이다. 뉴스말고는 찾아보기 힘
든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도 수화의 보편화를 위한 교육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런 고민들로 24시간, 일
주일, 한 달을 쪼개서 쓰느라 피곤할 법도 하지만 그게 ‘매력’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인터뷰 내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