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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철도노동자
불운한 두위밍
동북의 전황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있었다. 국군의 동북사령관 두위밍은 쓰핑전투 승리 후 남만주 석권을 노렸으나 신카이링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린장을 공격했다가 다시 패퇴하여 타격을 받았다. 그는 신장 제거수술을 받는 등 병마에 시달려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그리고 동북에 중산대학을 열었다가 공금 횡령과 “동북왕이 되려 한다.”는 구설수에 올랐다.
장제스는 국방부장 바이충시를 보내어 사실 확인을 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두위밍의 당숙인 두빈청 (杜斌丞)이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그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흔들렸다. 두빈청은 민주동맹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저명한 교육가였다. 국공 간 연합정부 구성이 완전히 파탄나자 공산당은 난징 등 주요 도시에서 철수했으며 민주동맹이 국민당 특무기관의 표적이 되었다.
두위밍은 이런 공교로운 일들이 참모총장인 천청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장제스의 행동대장 역할을 한 두위밍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항일전에서 그는 누구보다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두위밍은 국군 항일명장 다섯 명 가운데 쉐웨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전공을 기록했다. 장제스의 밀명을 받아 윈난성 군벌인 룽원을 제거했으며 공산당이 기반을 강화하고 있던 동북의 남만주를 평정하였다.
그런데 후쫑난은 옌안을 점령했다는 공로로 최고훈장을 받고 일급 상장(대장)으로 진급하였다.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칼처럼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온 자신은 부패 혐의를 받고 있었다. 바이충시가 조사하러 갔을 때에도 그는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동북의 추운 날씨로 그는 건강을 회복하기는커녕 한쪽 신장을 잃었던 것이다.
공격과 주도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두위밍도 부득이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이제 기동할 수 있는 병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동안 소모한 병력도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령지가 늘어날수록 수비해야 하는 도시가 늘어났다.
1947년 3월, 동북의 국민정부군 병력은 정규군이 36만명, 지방부대가 12만명으로 50만명에 조금 못미쳤다. 동북 민주연군은 어느새 46만명으로 확대되었다. 근거지에서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국군 포로 중에서도 보충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병력이 늘어났다.
민주연군 주력은 쑹화장 너머 북만주에 있었지만 남만주를 비롯하여 서만주, 동만주 등 곳곳에 근거지를 만들어 해방군과 지방부대를 주둔시켰다. 국군으로서는 주둔하고 있는 거점도시들이 반원형으로 포위당하고 있는 형세였다.
도시에 의존하고 있는 국군으로서는 교통선의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무기와 식량, 그리고 군용물자 보급을 수송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주둔한 지역을 근거지로 확보하고 토지개혁 등을 통해 농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동북 민주연군에 비해 불리한 처지였다. 농촌을 근거지로 한 민주연군은 불리하면 후퇴하고 싸우고 싶으면 마음대로 싸움을 걸었다.
두위밍의 휘하에는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했다. 바이충시, 쉐웨, 쑨리런(孫立人)과 같은 맹장들이 함께 있었다면 두위밍도 힘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동북 민주연군은 맹장 중의 맹장인 사령원 린비아오를 비롯하여 샤오징광, 펑전, 가오강, 뤄롱환, 리텐우등 기라성같은 지휘관들이 공을 다투고 있었다.
쑹화쟝의 얼음이 녹고 강물이 풀리자 동북 민주연군은 이른바 ‘하계 공세’를 시작하였다. 공산당 중앙군사위의 목표는 쓰핑이었다. 쓰핑은 남만주의 전략적 요지로 지린성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그리고 내몽골의 삼각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교통의 요지였다.
허베이성은 물론 베이핑과 텐진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불과 일 년 전 쓰핑 방어전에서 패배하여 민주연군은 쑹화장 너머 천리를 후퇴해야 했다. 린비아오는 이 패배로 ‘후퇴장군’이라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었다. 그뿐 아니라 믿었던 부하의 배신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동북민주연군은 물론 린비아오에게 이 전투는 일 년 전 패배를 설욕하는 것이었다. 만주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는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쓰핑으로의 권토중래가 성공하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었다.
린비아오의 쓰라린 기억
쓰핑 패전 뒤 린비아오는 두위밍이 기계화부대로 숨 돌릴 틈 없이 추격해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공산당군은 언제나 매복이나 기습을 장기로 하여 국군 지휘관들이 그렇게 무모하게 추격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민주연군은 쑹화장 너머까지 밀렸으며 후퇴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린비아오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것은 틀림없이 적이 우리 후퇴 계획을 알고 있는 것이다.” 린비아오가 지시하여 조사한즉 민주연군 작전 부과장이던 왕지팡(王繼芳)이 사라지고 없었다. 왕지팡이 두위밍 휘하 지휘관인 랴오야오샹(廖耀湘)에게 투항했던 것이다.
본래 왕은 지린성 이수현(梨樹縣)의 이수진(梨樹鎭)에 주둔할 때 집주인 딸과 좋아하게 되었다. 집주인은 그곳의 지주였는데 딸이 아주 미인인데다 무척 상냥하였다. 왕지팡은 그 처녀와 결혼을 하고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될 일이었다. 지주의 딸이기도 하였고 당시는 전쟁 중이라 장교들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자 왕지팡은 동북 민주연군의 앞날이 캄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랑하는 처녀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왕지팡은 두위밍 휘하 국군에게 투항하기로 결심하였다. 두위밍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왕지팡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며 수뇌부에 상신해 소장 계급을 주었다. 그리고 왕지팡의 결혼식에 직접 참가하여 축하했으며 랴오야오샹 등 국군 고급장교들도 하객으로 참석하였다.
왕지팡은 그 뒤에도 국민당 정부를 위해 계속 일했으나 그 행복이 얼마가지 못하였다. 3년도 지나지 않은 1949년초, 이번에는 해방군이 물밀 듯이 전 중국을 석권하며 밀어붙였다. 왕지팡은 황망히 국민당 군대를 벗어나 변성명하고 충칭에 숨었다. 그러나 공산당 천하가 되자 숨을 곳이 없어져 해방군에 잡혀갔다.
린비아오는 당시 4야전군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왕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린비아오와 휘하 장교들이 모두 격분을 참지 못했다. 당장 왕을 인도하라고 요구하여 넘겨받은 뒤 우한에서 공개적으로 처결(총살)하였다. 왕의 투항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지만 내전을 다룬 드라마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소개하면 뭔가 선악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이었을까? 내전은 공산당이 승리하였으므로 국군쪽 투항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공산당쪽에도 투항자가 이처럼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동북 민주연군이 쓰핑에서 패배하여 후퇴할 때는 이 에피소드를 알지 못하여 뒤늦게 소개한다.
천밍런(陳明仁)
1947년 봄, 동북 민주연군의 남만과 북만 부대는 여전히 국민당군에 의해 분할되어 있었다. 근거지도 나뉘어져 있었다. 동북 민주연군은 이 국면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남북만 부대가 연합하여 병력을 집중하여 대규모 섬멸전을 펼치기로 하였다. 그래서 5월 중순에 하계 공세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 작전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쑹화장의 얼음이 풀려 전세가 불리할 경우 후퇴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주연군은 이미 충분히 힘을 회복하였다. 두위밍과 그가 지휘하는 국군의 지휘관들도 일 년 전의 기세등등한 모습은 이미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사기와 투지 면에서 공산당 쪽이 우위에 있었으며 전반적인 전황도 교착상태이기는 했지만 공산당의 승전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동북 민주연군의 첫 단계 목표는 국군을 창춘, 지린의 거점에서 일소하는 것이었다. 5월 8일, 북만주 민주연군 제1, 2종대와 2개 독립사단은 푸위(扶餘)(1)에서 남쪽으로 쑹화장을 건너 창춘 서북쪽으로 진격했다.
5월 중순에 화이더(怀德), 따헤이린즈(大黑林子), 공주링(公主岭), 창투(昌圖) 등을 공격, 점령하고 국민당군 1개 사단 이상을 섬멸했다. 남만주 민주연군 제3, 4종대는 각각 창춘 남쪽과 안둥(安東)부근으로 진격하여 메이허커우(梅河口), 퉁화(通化), 안둥, 좡허(庄河) 등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동만주 민주연군 제6종대와 3개 독립사단은 지린 동쪽 지역에서 출격하여 라오예링(老爷岭), 하이룽(海龍), 판스(盘石) 등을 점령하였다. 서만주와 기열료(冀熱遼: 허베이, 러허, 랴오둥 관할) 부대들도 분산하여 수비하던 국군을 각각 공격하여 솽산(雙山), 츠펑(赤峰) 등을 점령했다.
이렇게 되자 국군 지휘관들 사이에 동요가 크게 일어났다. 일 년 전 쓰핑을 공격하던 국군의 지휘관 쑨리런은 국방부 참모로 가 있었다. 대신 쑨리런 못지않은 맹장인 천밍런이 쓰핑의 수비책임을 맡고 있었다. 천밍런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항일전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 항일명장이었다. 그는 투지가 불같아서 어떤 불리한 조건이라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천밍런은 1939년 광시좡족 자치주에 있는 쿤룬관 전투에서 일본군 여단장을 사살하고 4,000여명을 섬멸하는 대공을 세웠다. 이때 그는 5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승리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결사대 중 살아남은 20명이 회의 중인 일본군 장교들에게 소총과 수류탄으로 육탄돌격하여 여단장을 사살했던 것이다.
천밍런이 지휘하는 쓰핑 수비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민주연군은 6월 11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쓰핑 비행장과 시 서쪽구역을 점령하였다. 천밍런의 휘하 연대장이자 동생인 천밍신(陳明信)이 포로로 잡히자 천은 더욱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이때 두위밍은 병상에서 쓰핑 지원군 10개 사단을 지휘하여 창춘과 션양에서 출격시켰다.
난징의 장제스도 쓰핑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인 장징궈를 션양에 보내 두위밍을 독려하였다. 장징궈가 천밍런에게 전화를 걸어 격려하자 천은 “소관은 쓰핑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 교장에게 아들과 딸을 부탁해 달라.”는 각오를 보였다. 두위밍이 전화를 걸어 “지금 10개 사단이 구원하러 가고 있다. 며칠만 더 버텨라.”하고 독려하자 “교장의 은혜와 당국에 충성하면 그걸로 족하다. 성을 사수하다가 죽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때 공격군은 이미 쓰핑시의 5분의 3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쓰핑의 수비군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으며 창춘과 션양의 국군 지원군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두위밍은 민주연군의 분할 섬멸을 조심하여 부대를 밀집시켜 서로 엄호하게 하였다. 그러자 지원군 공격을 맡은 민주연군은 국군을 분할하기도, 저지하기도 어려웠다.
마오쩌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쓰핑을 탈환하라고 지시했지만 린비아오는 철수를 결심했다. 그는 진퇴양난의 교착상태에 빠지기 전에 후퇴하는 것이 전과를 보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린비아오는 자신의 결심을 중앙군사위원회에 보고하여 승인을 얻었다. 7월 1일, 린비아오는 쓰핑 공격군을 뒤로 물렸다. 성과 함께 운명을 함께 하려던 천밍런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승전이었다. 이 승리 소식에 장제스는 크게 기뻐했다. 천밍런을 난징으로 불러 최고 훈장인 청천백일장을 주었으며 21병단 사령관으로 승진발령하였다.
쓰핑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하여 동북 민주연군이 패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연군은 국군 8만명 이상을 섬멸했으며 성과 진 42곳을 탈환하였다. 남북만 부대가 연합하여 국군을 주요 철로선 및 거점도시 사이의 좁은 회랑지역으로 압축시켰으며 차단되었던 만주의 해방구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이때부터 국군은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으며 동북 민주연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작전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민주연군은 50일간의 전투를 거쳐 중창루(中長路: 만저우리에서 쑤이분허, 하얼빈에서 뤼순까지의 철로를 통칭하여 중창루라고 한다)와 션지루(沈吉路:션양에서 지린시까지의 철로를 말한다.)구간을 장악하였다.
그후 동북의 상황은 국군에게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두위밍은 병이 깊어져 7월 8일, 끝내 동북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훈장을 받았던 천밍런은 오래지 않아 양곡을 빼돌렸다는 고발을 받아 직을 빼앗겼다가 난징 총통부의 참모로 좌천되었다. 천밍런은 장제스에 대하여 실망한 끝에 대세가 결판난 1949년 8월 후난성에서 부대를 이끌고 공산당에 귀순했다. 그는 나중에 후난성 해방군 부사령원을 지내는 등 군 요직을 역임했다.
검박한 린비아오
린비아오는 웃지도 않고, 농담도 하지 않으며, 말수도 적었다. 여자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머하고는 거리가 멀고 늘 몸이 약하여 병을 달고 살았다. 린비아오는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다. 장성한 린비아오는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동기인 예젠잉의 증언에 따르면 린비아오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사격 등 군사기술은 불합격이고 체육훈련은 린비아오의 두통거리였다. 그런 그가 홍군에서 첫손으로 꼽는 지휘관이 되었으니 학교성적과 지휘능력은 다른 모양이다.
홍군에서 생활하며 린비아오는 대대장, 사단장, 군단장으로 승진했지만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난 적은 없었다. 그러다 항전 시기 핑싱관(平型關) 전투 뒤 옌시산군 병사가 오발한 총에 척추를 부상당했다. 그때부터 린비아오는 일생동안 고통을 겪게 되었다. 소련에서 치료를 받을 때 린비아오는 자신의 병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바람, 물, 햇볕이 모두 두렵다.” 소련 의사가 장기간 그를 치료했지만 완치되지 않자 정신치료를 한 일도 있었다. 동북에 있을 때 린비아오는 컴컴한 방에 앉아 홀로 지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린비아오가 지도를 볼 때마다 동북을 조금씩 먹어 치웠으니 탁월한 지휘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관내에 들어온 뒤 린비아오의 건강은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따라서 린비아오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먹을 것에 대하여도 관심이 없었다. 매 끼니 두 가지 요리에 탕 하나가 전부였다. 대부분은 배추나 솬차이(酸菜: 중국의 백김치), 그리고 볶은 고기였다. 가끔 계란부침을 먹을 때도 있었다. 누런 콩은 늘 먹었다. 볶은 콩이나 데친 콩을 먹고 두부을 먹을 때도 있었다. 어쨌든 누런 콩은 없어서는 안 되었다. 밥 먹을 때도 먹었지만 평소에도 손에 쥐고 늘 먹었다. 손님이 오면 볶은 콩을 한 접시 내놓았다. 모두 자기처럼 볶은 콩을 좋아하는 줄로 아는 것 같았다.
어느 때 요리를 더하면 그는 그러지 말라고 곧 지적했다. 말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신 먹지 않았다. 슈수이허즈(秀水河子: 요녕성의 지역이름이다.) 전투 때 어느 지주가 총사령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식사 대접을 하였다. 먹는 이야기라고는 전혀 하지 않던 린비아오가 웬일인지 “맛있군. 맛있어.”하고 두 번이나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중에 “다시는 먹지 못하겠네.”하는 것이었다. 그 뜻은 다시는 부잣집에서 가서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린비아오와 함께 2년간 밥을 먹었다는 동료는 “그의 식사는 경호대원이 먹는 것만도 못했다.”고 증언하였다. 뤄룽환(羅榮桓: 동북민주연군 부정치위원)과 유야러우(劉亞樓: 동북 민주연군 참모장)는 먹는 게 훨씬 나았다. 민주연군 산하 사단장, 연대장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부분 먹고 마실 줄 알아서 린비아오 눈앞에서 먹고 마셨다. 하지만 당사자는 먹는 것, 입는 것, 무엇을 주고받는 것에 도대체 관심이 없었다. 옷을 지으려고 치수를 잴 때는 마치 나무인형 같았고 옷이 좋은지 어떤지, 몸에 맞는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노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며 취미도 없었다. 솽청(雙城)을 공격한 뒤 두 차례 사냥을 나갔을 때 유야러우는 그가 매우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부축해서 돌아왔다.
하얼빈에 있을 때 무도회에 초청하면 어떤 때는 가고 때로는 가지 않았다. 춤추는 것도 조용했는데 잠깐 하다가 말았다. 하얼빈 주재 소련 영사관에서 무도회가 열렸을 때 소련 여인 하나가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린비아오를 몰랐을 뿐 아니라 막 전장에서 돌아와 몸에서 냄새가 났던 것이다. 총영사가 그 일을 알고 노발대발하여 그 콧대 높은 여성을 한바탕 꾸짖었다. 그 뒤로 무도회에 가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책을 보는데 군사 관련 아니면 철학 서적, 그리고 의학 서적이었다. 모두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이었다. 열심히 읽으며 붉은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의학 서적은 모두 중의학이었는데 배우면 곧 써먹었다. 자신의 약방문을 스스로 썼다. 한번은 비서에게 비상을 사오라고 하여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때 린비아오는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내 병에는 비상을 먹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어느 때는 약을 잘못 먹어 한밤중에 간신히 기어 일어나 두 손으로 벽을 잡고 벌벌 떨며 등을 켠 일도 있었다. 비서가 깨어 그를 부축하자 “괜찮아. 몸이 좀 불편해서 그래.”하고 대꾸했다. 그렇게 그의 생활은 무미건조했다. 사람들은 그가 고행하는 중과 같다고 하였다. 곁에 있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도 관여하지 않았다. 다른 어떤 일도 관여하거나 묻지도 않았다. 누가 군의 기풍을 흐려도, 누가 취하거나 싸워도 그는 듣지도, 보지도 않은 듯이 무관심했다.
쓰핑 방어전 기간에 경호원이 캉(炕: 동북지방에서 난방을 위해 쓰는 일종의 온돌이다.) 위에 앉아 총을 닦고 있었다. 그러다 오발하여 총알이 창을 뚫고 처마 아래로 날아갔다. 사람들 얼굴이 모두 창백해졌는데 정작 집밖 창문 옆에서 천천히 걷고 있던 린비아오는 잠깐 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는 “응?”하고 한마디 하더니 계속 산보를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무심한 태도였다.
첫 번째 혼인
린비아오가 8살 때 부모가 고향의 세 살 많은 소녀와 짝지어 주었다. 린비아오는 후베이성 황강현 출신이었는데 그곳 왕씨집 둘째딸을 민며느리로 들인 것이다. 린비아오가 어린 애였으니 혼인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었다. 혁명에 참가한 뒤 부인은 아주 잊어 버렸다.
1927년 섣닫 그믐날, 린비아오는 북벌군을 따라 우한으로 갔다. 거기서 갑자기 부친의 편지를 받았는데 병이 고황(膏肓: 중병에 걸렸다는 뜻이다)에 들었으니 속히 집에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린비아오는 효자였다. 편지를 받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휴가를 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해 보니 부친이 자신을 속이고 장가를 들게 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린비아오는 부모의 애절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십 몇 년 동안 자신을 기다린 처녀와 혼례를 치렀다. 이 혼인은 린비아오의 말을 빌면 “어떤 행복도 찾아볼 수 없는 혼인”이었다. 린비아오는 밤중에 고향을 떠나 부대로 돌아왔다.
린비아오는 부모와 왕씨에게 편지를 한통씩 썼다. 왕씨에게는 자신을 기다린다고 청춘을 낭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하였다. 린비아오의 부모는 편지를 본 뒤 크게 화를 냈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다. 왕씨는 집에서 며칠간 울기만 하더니 사람들 앞에서 맹세했다. “이번 생에 다시는 시집을 가지 않겠다.” 그후 왕씨는 정말 종신토록 결혼하지 않고 린비아오의 집에서 집안 사람들을 보살폈다.
신중국 성립 후 린비아오는 이미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왕씨는 린비아오의 후광에 자신을 비추려 하지 않았다. 친정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독수공방을 이어갔다. 그녀는 신발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며 쓸쓸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린비아오가 그녀를 아주 잊은 게 아니었다.
1959년 가을, 린비아오는 우한에 열린 중공 중앙의 회의에 참가한 뒤 갑자기 고향집에 들렀다. 그는 인민공사 서기에게 왕씨의 근황을 물은 뒤 그녀가 이미 56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는 집에 그녀 외에 아무도 없고 홀로 신발을 만들어 팔아 산다는 것이었다. 린비아오는 들은 뒤 서기에게 3,000위안을 주며 왕씨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3,000위안이면 농촌에서는 매우 큰돈이었다. 린비아오는 그 돈이 당이 주는 것이니 꼭 받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왕씨는 사정을 듣더니 돈을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버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신발을 만들어 생활했다. 얼마 되지 않아 왕씨는 “영광된 혁명노인카드”를 얻었다. 그녀는 매월 고정적으로 정부에서 주는 생활비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당연히 린비아오가 안배한 것이었다. 1967년 왕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것이 린비아오의 유명무실한 첫 번째 결혼이었다.
두 번째 부인
1936년, 마오쩌둥은 ‘서북항일 홍군대학’을 세우고 28세가 된 린비아오를 교장 겸 정치위원으로 위촉했다. ‘홍군대학’은 ‘항일군정대학’의 전신이다. 옌안이 중공 중앙의 소재지가 된 뒤 수많은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린비아오는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어 그들하고 어울리는 일이 없었다. 무도회 등에는 더욱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처녀들은 ‘상승장군’ 린비아오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당사자는 섬북의 미즈현(米脂縣) 처녀 장메이(張梅)에게 한눈에 반했다. 장메이의 본명은 류신민(劉新民)이었는데 한마디로 ‘닭무리의 꿩’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섬북의 한송이 꽃”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린비아오가 반한 것은 그녀의 예쁜 외모가 아니라 활발하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장메이는 성취욕이 아주 강한데다 린비아오를 우러러봤다. 그래서 그들은 1937년에 결혼했다. 일 년 뒤 장메이는 딸을 하나 낳았다.
1938년 3월 2일, 린비아오는 옌시산군이 수비하는 지역을 지나오다 일본군으로 오인한 수비병이 쏜 총알에 맞았다. 린비아오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외투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부상을 입은 뒤 린비아오는 옌안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으나 잘 낫지 않았다. 1938년 겨울, 당 중앙의 승인을 얻어 린비아오는 장메이와 함께 소련으로 치료하러 갔다. 소련에서 3년 동안 부부는 좋은 대접을 받아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쾌적한 집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린비아오는 성격이 괴팍하고 내향적이며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다. 군사문제를 연구하는 것 말고 어떤 취미도 없었다. 하지만 장메이는 활발하고 움직이는 것, 외출해서 사교 활동 하는 것을 좋아했다. 린비아오는 그녀가 바깥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활동을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성격차로 인한 충돌이 날로 커지다가 감정도 상하게 되었다. 1942년 린비아오는 소련에서 옌안으로 돌아왔다. 장메이는 모스크바에 남았다. 두 사람의 혼인이 깨진 것이다.
쑨웨이스에게 거절당하다
쑨웨이스(孫维世)는 쑨빙원(孫炳文)의 딸이다. 쑨빙원은 초기 공산당 지도자인데 1927년 국민당에 잡혀 죽었다. 쑨빙원이 희생된 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는 쑨웨이스를 자신들의 딸로 삼아 키웠다. 1937년 저우언라이는 사람을 보내어 쑨웨이스를 우한에서 옌안으로 데려왔다. 옌안에서 쑨웨이스는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했다.
그후에는 중앙 당학교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교에서 공부했다. 1938년에 쑨웨이스는 18세의 나이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쑨웨이스는 타고난 미인인데다 총명하고 영리했다. 교양도 풍부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다. 린비아오는 항일군정대학의 교장이었다. 쑨웨이스가 그렇게 출중하다 하여도 린비아오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때는 장메이와 금방 결혼을 한 시절이었고 금슬도 좋았기 때문이다. 본래 린비아오는 여성들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1939년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와 함께 소련으로 오른쪽 팔을 치료하러 갔다. 쑨웨이스도 함께 가서 소련 예술을 공부하였다. 소련에서 쑨웨이스는 모스크바 중산대학, 모스크바 연극학원에서 수학하였다. 수많은 중앙 지도부의 자녀들과 혁명열사의 후대들이 모스크바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린비아오를 찾아 징강산 투쟁이야기, 장정 때 이야기, 핑싱관 전투 등 투쟁했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린비아오는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겸손한 태도는 더욱 여러 청년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린비아오는 부인 장메이와 갈등 때문에 매우 침울해 있었다. 그러다 청년들의 활발한 모습을 보니 적이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쑨웨이스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것 저것 묻고 답하다가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을 원하게 된 것이다. 린비아오는 쑨웨이스에게 구애를 하였는데 뜻밖에 거절을 당하였다. 쑨웨이스는 린비아오를 존경만 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술을 사랑하였고 예술을 첫 번째 목표로 하고 있었다. 린비아오는 매우 불쾌하였지만 참을 수 있었다.
1942년, 린비아오는 귀국 전에 쑨웨이스를 찾았다. 마지막 노력을 하였으나 그는 다시 실패하였다. 린비아오의 구애는 쑨웨이스가 뒷날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는 원인이 되었다. 신중국 성립 후 쑨웨이스는 연극계의 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신중국 첫 번째 여성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폭발한 뒤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질투한 장칭 등에 의해 ‘소련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갖은 모욕을 받던 그는 1968년 10월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겨우 47세의 나이였다.
비행기 사고로 죽은 부부
예췬(葉群)은 키는 크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성격이 활발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베이징에서 중학을 마치고 국민당 방송국에서 방송원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옌안에 왔는데 린비아오를 만났을 때 열 몇 살이나 어렸다. 린비아오에게는 이미 처자와 딸이 있었는데도 예췬은 그에게 반했다. 1943년 린비아오와 예췬은 정식으로 결혼했다.
두 부부는 금슬 좋게 평생을 해로하였다. 린비아오가 점점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예췬은 만족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린비아오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탈출하다 몽골 상공에서 연료부족으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1972년 9월 13일 문화대혁명 끝 무렵의 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린비아오가 쿠데타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탈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궈루구이(郭汝瑰)(2)
중국의 내전 드라마를 보면 저우언라이가 계속 마오쩌둥 등 수뇌부에게 “내선의 보고에 따르면” “내선에서 알려온 정보에 따르면”하고 말하며 국민당 쪽 정보를 언급한다. 그 내선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궈루구이이다. 궈루구이는 중공이 국민정부에 심어둔 첩자 중 가장 거물이다.
그는 1907년 쓰촨성에서 태어났다. 국민당군에서 천청의 파벌인 토목계의 13호걸 중 하나로 꼽힌다. 토목계는 과거 천청이 18군 11사단을 지휘할 때 휘하 장교들로 이루어졌다. 18군의 한자를 파자하면 목(木)자가 되고 11자를 한자로 만들면 토(土)자가 되는 관계로 토목계라 부른다. 궈루구이는 황푸군관학교 5기생이며 쓰촨 군벌 궈루둥(郭汝棟)이 그의 사촌형이다.
그는 1928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나중에 조직과 연락이 끊겨 탈당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중국 육군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중일전쟁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천청의 신임을 샀다. 국공내전 시절 일 년에 세 번 승진하여 국방부 작전청장을 맡았다. 그때 공산당과 다시 연락이 닿아 중공 남방국 책임자인 둥비우(董必武)와 비밀리에 만났다.
그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기밀 군사정보를 중공 중앙에 제공하여 공산당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후 쓰촨성 이빈(宜賓)에서 72군을 이끌고 기의했다. 신중국 건립 후에도 그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투항한 장교의 대접을 받았다. 그 뒤 운동 중에 여러 번 습격을 받고 개혁개방 뒤 새로 입당하였다. 그는 국민당 내부에서 가장 거물 간첩이었다. 만년의 궈루구이는 병단 사령원 대우를 받았으며 199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국민당의 부패를 목격하고 불만을 품다
1945년 2월, 궈루구이는 천청의 추천으로 전국의 각 군사편제와 장비를 관장하는 부서장이 되었다. 국민당 상층에 진입한 궈루구이는 국민당 군정의 요인들을 직접 접촉하게 되었는데 국민당의 적나라한 부패 실상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중 ‘중앙훈련단’에서 장제스의 30차례에 걸친 훈화를 들었으며 장제스와 고관들의 연회를 목격했다.
그는 국민당의 부패와 어두운 면을 목격하고 점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잠편 5사단을 지휘할 때 그는 전에 대일 작전을 실패한 것이 장비의 낙후와 지휘 잘못에서 비롯한 것인 줄 알았다. 그는 부대의 실제 병력은 3,000여명밖에 되지 않는데 7,000명이 넘는 것으로 보고한 것을 알게 되었다. 국민당의 수많은 장교들이 숫자를 부풀려 보고하고 전투에서 사망자와 탈주자를 거짓 보고하여 보급품을 착복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방연구원에서 그는 쑨원의 저작을 읽을 기회를 얻었다. 손중산이 만년에 삼민주의에 대하여 다시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장제스가 손중산의 삼민주의와 유촉을 조금도 따르지 않았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고 전방에서는 피로 목욕을 하며 싸우고 있는데 후방에서는 관직과 부귀를 탐하고 있었다. 국민당 고관들은 이익을 탐해 서로 싸우고 직무를 이용하여 배를 불리고 있었다. 민중들이 끼니를 거를 정도로 생활이 곤란한데도 군정 요원들과 자본가들은 돈을 물쓰듯 하며 향락을 즐기고 있었다.
궈루구이는 항일전쟁 시기 조금도 부패하지 않았으며 월급은 최저생활만 하고 모두 은행에 맡겨 두었다. 셋째 동생의 손을 거쳐 집안에서 쓰게 하였다. 장제스에 대하여 궈루구이는 북벌전쟁 때나 동정 때 이야기를 듣고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항일전쟁에서 여러 차례 전투를 겪고, 또 국공내전에서 전황을 이해하고 나니 정치적 수완은 뛰어나지만 군사능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일전쟁에서 국민당이 주도적으로 공격한 예가 매우 적었다. 장제스는 타협에 의존하거나 전기를 놓쳤으며 전수방어(수비에 전념하는 것)에 의존하였다. 한 점이 돌파당하면 전 전선이 붕괴되었으며 패배가 이어졌다.
국방연구원과 “중앙훈련단”에서 그는 장제스의 훈화를 여러 차례 들었다.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는 모두 “예의와 염치를 가려라.” “고요히 앉아 생각하라.” “성공하려 하지 말고 인을 이루라.”는 케케묵은 소리뿐이었다. 장제스의 군사적 견해에 대하여는 조금도 들은 바가 없고 코웃음 칠 소리뿐이었다.
그가 특히 불만을 품은 일은 장제스가 항일전쟁 중 줄곧 반공을 외치며 공산당 토벌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계속 국공 간 마찰을 만들었다. 1935년 5월, 일본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는데도 장제스는 노골적으로 반공 방침을 밝히고 있었다.
그때 군령부는 매주 전쟁연구회를 열었는데 2차 대전에 대하여 연구하지는 않고 종전 뒤 어떻게 반공을 할 것인지만 연구하고 있었다. 한번은 궈루구이가 참가한 연구회에서 소련이 동북지역에 진입한 뒤 어떻게 팔로군을 저지할 것인지, 신사군이 관외로 나가는 것을 막을 것인지만 검토하였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장제스는 내전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각주]
1. 옛 부여국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2. 궈루구이는 멍량구 전투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글 앞쪽에 배치해야 하나 매 연재가 완결을 짓는 구성문제로 뒤에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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