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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달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씨알
시베리아의 전설적인 항일무장투쟁 영웅 김경천(金擎天) 장군
김경천(金擎天)은 일본에 군사유학을 다녀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관이 되어 독립군 간부 양성에 기여하고 러시아 지역에서 의용군을 조직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조종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을 소탕하는 한편 적위군(赤衛軍)을 도와 백위군(白衛軍)과의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의 시베리아 점령을 저지하는 데 진력했던 군인이었다. 김경천은 1919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 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 일대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 기병과 졸업생도로서 전투시에 주로 백마(白馬)를 타고 기병대를 지휘하여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빈 전쟁영웅으로서 전설적인 인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말기에 카자흐스탄 카라칸다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막내 딸인 김지희씨가 부친의 생애 일부를 증언하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김경천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이 생생하게 전해져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김경천의 러시아 지역에서의 무장 활동에 대해서는 아직 기초적인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김경천은 1920년부터 1922년 사이에 연해주 지역의 쉬마코프가, 올가군, 뽀시에트, 아누치노, 이만, 수청 등지에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에 대한 자료는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 측의 자료 입수를 통하여 김경천의 항일무장투쟁은 물론 러시아 지역 한국인 민족운동의 전체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후손들의 요청에 의하여 러시아의 비밀첩보기관에 있는 김경천 장군 관련 자료들 역시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김경천은 1888년 6월 5일에 함경북도 북청군 신창읍 송평리에서 김정우(金鼎禹)·윤옥련(尹玉蓮) 사이에 5남 1녀 중 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현충(顯忠)이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광서(光瑞)라는 예명을 사용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시절에는 경천(擎天)이라는 예명으로 불리워졌고, 응천(應天)이라는 또 다른 가명을 갖고 있었다. 김경천의 아버지인 김정우는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1894년 11월 경무청(警務廳) 총순서(摠巡舒) 판임관(判任官) 6등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895년 5월 당시 35세 만학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하여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 11월 12일에 같은 기관의 교사로 입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정우와 함께 경응의숙에 입학한 조선인은 총 114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경응의숙에 설치된 특별교육부에서 공부했으며, 보통과에서 어학을 비롯하여 보통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897년 8월에 보통과를 졸업하고, 동경(東京) 신전구(神田區) 순천구합사(順天九合社) 공업예비과에 입학한 후, 9월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동경포병공창 총탄제조소를 견습하고, 1900년 9월에 총탄제조법에 관한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10월에 귀국하여 군부의 기사·군기창기사 등으로 일하였으며, 1904년 9월에는 육군 포병대 참령, 1905년에는 군기창장(軍器廠長)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육군 포병대 부령으로 진급하였던 것이다. 즉 김경천의 부친은 일본에 유학한 인물이며, 군사장비에 대한 전문가로서 대한제국 육군의 최고위층 인사였던 것이다.
김경천은 1909년에 유정화와 결혼했는데, 아내 유정화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의 유지(有志)인 유계준의 딸로서 부유한 집안의 규수였다. 김경천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군인이 되고자 하였으며,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을 존경하여 그와 같은 뛰어난 군인으로 성장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12월 한국인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제23기생으로 입학, 1911년에 졸업하였다. 김경천이 일본 육사에 진학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부친 김정우가 일본에서 유학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대한제국 육군 참령으로 있던 그의 당숙인 김성은(金成殷)의 주선이 도움이 되었다.
김경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일본식 군사전술과 지형학·축성학·육군예식 등을 습득하는 동안 일제의 강압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일본 육사의 한국인 생도인 지청천(池靑天)·조철호(趙哲鎬)·홍사익(洪思翊) 등과 함께 요코하마의 어느 술집에서 모여 임관 후 적절한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맹세하였다. 육사를 졸업한 그는 동경 육군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 12월 일본 육사 제26, 27기생 가운데 홍사익·이응준(李應俊)·김종식(金鍾植) 등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발기가 되어 친목단체인 전의회(全誼會)를 만들었을 때, 그는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비록 이 전의회는 표면상 친목단체이긴 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국제정세와 조선인들의 상황 등에 관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향배에 대하여 논의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1919년 봄에 김경천은 청원휴가를 얻어 귀국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물색하면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팔아 망명 자금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한편 김경천은 자신의 본관을 김해(金海)에서 시흥(始興)으로 변경하여 일본 헌병대의 추적을 피하려고 하였다. 김경천은 동경에서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상덕(金尙德)·김도연(金度演) 등 유학생들이 조직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二八獨立宣言)의 영향을 받아 만주로 망명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 헌병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장안의 유명한 기생인 현계옥(玄桂玉)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여화원(麗華園)이라는 중국 요리집에서 당구를 치거나 술을 마시는 등 나날을 타락하게 보냈다.
이렇게 철저한 계획 아래 주도면밀한 방법으로 일제의 감시를 따돌린 그는 1919년 6월 6일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이들 일본군 한국인 장교의 망명은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현역 군인으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출세와 영달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을 선택한 것이었으며, 이 사건은 3·1민족운동 후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만주로 망명하는 도화선이 되었고, 일제 당국은 이들의 체포에 현상금 5만엔을 내걸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다.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은 안병찬(安秉瓚)·함석은(咸錫殷)·박영우(朴永祐) 등이 안동현(安東縣)에서 결성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이란 단체에 가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아가 지청천과 함께 교관이 되어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전술교육을 담당하였다. 이 학교에는 대한제국 육군 장교 출신인 신팔균(申八均)도 있었는데, 학생들은 김경천·지청천·신팔균을 만주 삼천(三天)으로 불렀다.
김경천은 지청천·신팔균과 더불어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인 자성, 후창, 또는 혜산진 등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자극을 주고자 하였다. 따라서 신팔균은 남만주 한국인사회의 지원을 얻기 위해, 지청천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해, 그리고 김경천은 노령으로 무기 구입 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각각 이동하였다.
김경천은 북간도를 거쳐 노령지역으로 이동, 한국인 민족해방운동의 근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당시 시베리아 지역은 급격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즉 1919년 11월 중순 러시아 혁명세력이 꼴차크 백위파 정권을 붕괴시킨 데 이어 1920년 1월 초에는 으루꾸츠크를 장악하고, 2월 31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세력권에 넣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사회에는 러시아 혁명세력과의 제휴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실제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하거나 한국인들로만 구성된 공산당이 창당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1920년 3월 러시아 혁명군과 한국인 무장 단체가 아무르강 하구 북쪽 니꼴라예프스크(니항)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멸시키고 일본의 민간인까지 몰살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일본군은 이를 계기로 1920년 4월 한국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연해주 지역을 공격하여 그곳의 한국인들을 다수 학살하는 보복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특히 김경천이 머무르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대하여 일본군의 무차별 공격이 감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살되었으며, 가옥이 다수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일단 피신한 김경천은 일본군에 의해 매수된 중국인 마적단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국인들을 약탈하는 모습에 분노하고 의용군을 조직하여 마적단 소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백추(白秋) 김규면(金圭冕) 지사(志士)가 단장으로 있는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민병대를 편성하여 스스로 총대장이 되었고, 정재관(鄭在寬)을 참모장에, 정순철(鄭舜哲)·한창걸(韓昌傑)·장지호(張至鎬)·황군애(黃群涯)·김명철(金鳴哲)·한명극(韓明克) 등을 중대장에 각각 임명하였다. 총병력은 상비대가 1백여명이었고 예비대가 4백여명이었다. 처음에는 민병대의 훈련부족 등 원인으로 패배하였지만 김경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력을 다하여 마적단과의 전투를 전개하였으며, 매번 자신이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마적단의 대열을 교란시켰으므로 민병대는 사기가 오르고 실전경험이 점점 쌓여가면서 효과적으로 마적단을 소탕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김경천은 수청지역에서의 마적단 퇴치 전투로 시베리아 지역에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군정(軍政)을 단행하여 수청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러시아인들도 지배하며 관할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도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김경천이 나누어 준 증명서를 소지해야만 하였다. 그래야만 창해청년단의 수비구역 밖을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 거주 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민정(民政)도 단행하였는데, 총책임은 정재관이 담당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다 러시아로 이동한 인물로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와 권업회(勸業會) 등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었다. 정재관은 김경천을 도와 민정 책임자로서 매년 매호마다 10원씩 걷어들여 군자금으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식 교육을 전폐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둔전제도도 실행하였다.
1921년 봄에는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전투병력이 3백여명에 달하는 통합 빨치산 부대가 편성되자 김경천이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청의 아누치노 구역에 있는 백위군 까벨 부대와 전투를 치르면서 까르뚜크 마을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한편 1920년 초에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접지역인 추풍에서 조직되어 활동하다가 같은 해 가을에 수청지역으로 이동한 혈성단(血誠團)이라는 단체가 김경천을 초빙하였다. 혈성단은 1920년 12월경 단원 수가 약 1백명이었는데, 이 조직의 중심인물인 채영(蔡英)이 조맹선(趙孟善) 휘하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병력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동하면서 군대를 지도할 지휘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혈성단은 수청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려노농군회(高麗勞農軍會)와 연합하여 1921년 4월경에 민간 자치단체로서 연해주한인총회(沿海州韓人摠會)를 구성하고 군사기관으로 수청고려의병대(綬淸高麗義兵隊)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일본 육사 출신으로 군사전문가인 김경천을 추대해 총대장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김경천은 뜨레치푸진에서 사관 속성과를 만들어 군사들을 훈련시켰으며, 대원들의 전투훈련에도 정열을 다하였다. 특히 그는 추위가 너무 심해 훈련이 불가능할 때에도 병사집합실에서 군사학을 가르쳤다. 그러한 과정에 김경천과 혈성단의 지도자인 강국모(姜國摸)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게 됐으며, 그 와중에서 이르쿠츠크에서 파견나온 손풍익이 권총 오발사고로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수청고려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김경천은 적위군으로부터 의복과 장비를 지원받으며 수청지역의 마적단을 토벌하는 작전에 노력하였다. 그런 와중에 1921년 5월 일본군의 지원에 의하여 백위군이 연해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떨치게 되자, 같은 해 8월에 수청고려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적위군과 군사동맹을 추진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적위군과 한국인 독립군에게 공동의 적은 일본군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청고려의병대는 부대장인 이철남을 아누치노로 파견하여 연해주 무력혁명위원회의 윌스키 위원장과 룹쪼프 부위원장을 만나 상호간에 연합작전을 펼쳐 러시아의 광활한 극동지역으로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격퇴하기로 합의하였다.
1921년 8월 수청고려의병대는 러시아 적위군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모두 도비허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김경천은 9월에 유격대장 셉첸꼬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는 한편, 나머지 대원들은 김경천의 지휘하에 아누치노로 이동하였다. 김경천의 부대는 동포들의 요구에 따라 마적단의 침범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청의 뜨레치푸진과 수주허에 주둔하였다.
김경천의 부대는 10월에 적위군(赤衛軍)과 연합하여 수청 신영동에서 백위군(白衛軍)을 습격했으나 일본군이 백위군을 지원하기 위해 후방에서 역습함으로써 패배하고 적군의 추격을 피해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당시 이만에는 이용(李鏞)이 이끄는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이 러시아 적위군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공급받고 백위군 소탕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국의용군에는 창해청년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규면과 일찍이 혈성단에서 활동했던 치영이 있었으므로 김경천 역시 이들과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김경천의 부대는 이만의 서방 약 20리 지점에 근거지를 두고 병사 1천여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각자 소총과 탄약 350발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기국장은 강국모, 중대장은 채영, 소대장에 이학운(李學雲)·박창훈(朴昌訓)·김택진(金澤鎭)·이홍식(李洪植)·신공용(辛恭用)·이창선(李昌善) 등이었고, 외교부장은 한일제(韓一薺), 총무부장 김학준(金學俊), 통신부장 김춘홍(金春洪), 위생국장 이정수(李正洙) 등이었다.
한편 러시아 백위군은 1921년 12월 하보로브스크를 점령하는 등 연해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에 백위군과 적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김경천의 부대는 1922년 정월 하바로브스크에서 적위군과 백위군이 교전하는 틈을 타 이만에 주둔한 백위군의 병영을 격파하였다. 2백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7백여명의 백위군이 지키는 이만을 점령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김경천 부대의 피해는 전사자 12명과 부상자 15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경천은 수적 열세와 배후에 일본군이 있었으므로 이만에서 전략상 퇴각하고 말았다.
이어 김경천 부대는 1922년 3월 러시아 적위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 백위군을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아냈다. 백위군이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 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김경천 부대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 지역으로 돌격하였다. 김경천이 이처럼 승전(勝戰)을 올리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그를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인 빨치산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정치위원으로는 시씨킨, 참모장으로는 스탄꼬브가 임명됐다.
한편 1922년 여름 이후 일본군의 철수가 임박해지자 노령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앞으로의 향후 대책을 위하여 모든 단체를 통합하고 지휘체계를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김경천이 이끄는 수청고려의병대도 8월경에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과 병합해서 대한혁명단(大韓革命團)으로 개칭하고 니코리스크 서방 7리 지점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단원들에게 러시아식 교련을 시켰다. 단원은 약 5백명 정도로 전부 무장을 하였고 마필은 80두였다. 김경천은 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대대장은 최준형(崔峻衡). 중대장은 강필립·김권세(金權世)·서일세(徐一世) 등이었고, 참모장은 고관범(高官範), 참모는 장선우(張善祐)·황창기(黃昌箕) 등이었다. 김경천은 아편추출을 통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으며, 장정의 교육을 위하여 러시아육군사관 5명을 초빙해서 1개월에 50원씩 급여를 주며 교편을 맡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군관학교를 설립해서 3백명의 생도를 수용할 계획을 갖고 추진하였으며, 교장은 대한제국 육군 조장(曹長)을 지낸 임도준(任度準)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생도는 14세부터 18세까지 청년으로서 대한혁명단의 자제로부터 선발하였다. 교육연한은 2년이었다.
한편 1922년 9월경에 김경천은 적위군의 소수 부대와 더불어 니꼴스크, 우수리스크에서 뽀시에트를 거쳐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원정에 참전하여 시우지미 일대에서 백위군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고려의병대는 이 전투에서도 승리하였으나 부상한 백위군 장교의 총격으로 지휘관인 김경천이 낙마하면서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수청계곡의 다우지미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 시기에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대에 있는 단체들은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922년 10월 일본군의 철수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창설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총사령관은 김규식(金圭植)이었다. 서부사령관은 신우여(申禹汝), 남부사령관은 임병극(林炳極), 북부사령관은 이추(李錐) 등이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담당하였다.
1922년 12월에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적위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츠는 한국인 무장 단체들에 대한 전원 무장해제를 명령하였다. 이에 러시아 내전 이후 적위군의 후원을 얻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려 했던 김경천은 실의에 빠졌다. 이러한 때에 상해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을 듣고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는 김경천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1923년 4월경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려고 계획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韓族軍人俱樂部)를 구성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그리고 지부는 니콜스크에 두는 등, 자못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도 러시아 당국의 한국인 이주 정책과 노령 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김경천은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해·김규식 등과 함께 민족당주비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김경천은 그 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 후 국경경비대에서 고급장교로서 복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경천은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한 한국인들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를 앞두고 간첨죄로 체포되어 1936년 9월 29일 원동지방 국경경비대 군법회의에서 소련 형법 제58조 12조에 따라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년 반의 형을 복역한 후 1939년 2월 4일 일단 카르라가에서 석방된 그는 카자흐스탄공화국 카라간다주 텔만스키 구역에 있는 코민테른 집단농장에서 채소 작업원으로 한 달 동안 일하다가 소련 공산당원이 된 한국인들에 의해 다시 체포된 후 동년 12월 17일자로 간첩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교정강제노동수용소 8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 1941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시베리아로 이감되었으며 1942년경에 아르항겔스코에주 금고지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스탈린이 지배하던 시기라 정확한 사망일시나 장소, 사망원인 등은 알 수 없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인 1959년 2월 16일 김경천은 모스크바 군관구 군법회의에서 심리되어져 동년 2월 19일 사후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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