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2일 화요일 묵상
<3: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3: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3: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3: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3: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3: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3: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3: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34>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35>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36>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3:37>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38>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39>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본문 해석)
10월 22일 화요일 예레미야애가 3:19~39
19~21절
19절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고초와 재난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한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구원해달라고 요청한다. 20절 시인은 내 마음이 반드시 기억한다고 고백하는 동시에 낙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서 시인이 기억하는 것은 고난과 재난이다. 21절 이것을 마음에 담아 두었기 때문에 소망이 되었다면서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한다. 이것은 여호와의 성품들이다. 시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며 소망을 품기 시작했다. 고통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은 회고와 기억을 통해 정말에 주저앉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이다.
22~24절
22절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으셔서 우리가 진멸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여호와의 끝없는 사랑과 무궁한 자비가 절망 중에도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이다. 23절 시인은 아침마다 새로우니라고 하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사랑의 증거들과 자비를 날마다 새롭게 경험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과 찬미로 하나님이 성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을 꼭 지키신다는 의미다. 24절 시인은 스스로에게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말하며 그것 때문에 자신이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기업을 빼앗겨도 하나님만은 자신의 기업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시인은 이것을 믿고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25~27절
25절 시인은 여호와를 기다리고 찾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신 분이라고 찬양한다. 여호와를 구하다라는 말은 여호와께 묻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뜻이다. 26절 시인은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림이 좋다고 고백한다. 잠잠히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이 시작될 때까지, 즉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다. 27절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한다. 멍에는 노예나 포로를 상징한다. 멍에를 젊었을 때 메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직 어려움을 견딜 수있는 힘이 있는 젊은 시절에 재앙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28~30절
28절 홀로 앉아 그 멍에를 묵묵히 감당하라고 한다. 이 멍에는 하나님이 그들의 죄 때문에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풀어주실 때까지 감당해야 한다. 여기서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시간이다. 29절 입을 티끌에 둔다는 것은 얼굴을 땅바닥에 붙여야 한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행동이다. 이렇게 최대한 낮추며 침묵하며 견디는 것은 혹시 여호와가 구원해주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절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고 치욕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런 치욕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해야 할 몫이며, 이런 치욕의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여호와의 구원이 오기 때문이다.
31~33절
31절 왜냐하면, 즉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한다. 주님이 영원히 이스라엘을 내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하지 않다. 70년 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32절 하나님이 비록 근심하게 하시지만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많기 때문에, 끝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33절 하나님이 인간을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현재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고난과 슬픔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의 변덕이나 악함 때문이 아니다.
34~36절
34절 34~36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세 가지 악한 행동을 언급한다. 세상의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갇힌 자는 포로로 끌려온 자들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갇힌 자를 말하고, 발로 밟는 것은 학대를 의미한다. 35절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하는 것이다. 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기본적인 제도다. 36절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을 주께서 기쁘게 보시지 않는다. 시인은 특별히 힘 있는 자들에게 약자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37~39절
37절 시인은 다시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난과 비극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38절 화와 복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고백한다. 39절 살아있는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벌을 받는데, 어찌 불평하느냐고 한다. 여기서 비록 현실은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끔찍한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임을 보여준다.